17세기 서양화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1571~1610)에 의해서 르네상스 이후 서양화는 다시 한 번 혁명을 맞았는데, 그는 이탈리아 전통을 무시하고 철저한 준비의 데생을 하지 않고 실재 모델을 직접 유채를 캔버스에 칠하기 시작했다.
이는 초기의 실험이었고, 그는 공간을 좀더 확 트이게 하면서 광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짙은 색으로 강한 명암 대비를 바탕으로 사실적 인물을 묘사했다.
채색에 뛰어난 그는 성숙기에 접어들어서는 색을 최소화하여 물감을 엷게 칠하면서 감동적인 침묵과 관조로 대작의 종교화를 그렸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1593/4~1665)은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의 창시자로 생애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는데, 인물의 몸짓, 자세, 얼굴 표정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면서 회화에서의 문학적·심리적 묘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그의 감정 표현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의 교칙으로 명문화되었다.
푸생은 각각의 작품에서 정취의 합리적인 통일에 힘을 기울였으며, 그리스·로마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음악의 모드(음계) 이론에 대응하여 회화의 모드(양식) 이론을 전개했다.
이는 후에 미술 아카데미에서 채택되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회화의 주제와 묘사된 감정적 상황은 각기 적합한 방법으로 다뤄져야 하며, 그 방법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원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일관되게 채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고전주의의 중심적 교의를 확립했는데, 회화는 가장 고귀하고 진지한 인간의 상황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성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전형적이며 질서 있는 기법으로 표현해야 만한다.
전형적이며 일반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보다 우선하며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매력을 갖는 것,
예를 들면 선명한 색채 등은 삼가야 한다.
회화는 정신에 호소되어야 하는 것이며 눈에 호소되는 것은 아니다.
17세기 후반 푸생의 이름은 색채의 중요성을 주장한 루벤스에 대해서, 회화에서 소묘의 중요성을 믿었던 푸생 추종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거론되었다.
처음에는 루벤스파가 우세했지만 푸생은 19세기 초까지 고전적 정신을 가진 예술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었다.


회화의 생명력이 소묘라고 본 푸생에 반해 색채를 회화의 생명으로 사용한 플랑드르인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는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화가이다.
로마에 체류할 때 고대를 연구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프레스코화를 비롯하여 티치아노, 틴토레토, 코레조 등의 회화를 모사했으며 그들의 영향이 작품에 나타났다.
소묘에 뛰어난 그는 펜과 유화 스케치는 물론 붓과 초크로 정확하고 완벽한 묘사력으로 큰 화면에서도 막힘없이 그렸다.
그의 천재성은 밝은 색채에서 잘 드러나는데,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영향이지만, 원색과 보색을 병치하는 루벤스의 방법은 19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보다 앞선다.
현란한 색채에서 생겨나는 루벤스 예술의 음악성은 그 스케치로 인해 한층 두드러졌다.
루벤스의 영향을 프랑스 화가들 바토, 프라고나르, 들라크루아가 주로 받았으며 인상주의는 들라크루아를 통해 색을 회화의 생명으로 본 데서 출발했다.


루벤스와 같은 나라 화가 안토니 반 데이크Sir Anthony van Dyck(1599~1641)는 루벤스의 작업장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그의 영향을 일부 받았지만 곧 자신의 세련되고 우안한 양식을 창조했다.
초상화를 주로 그린 그는 다소 거만하고 호리호리한 ‘귀족의 유형’으로 바로크풍 귀족 초상화 연작으로 명성을 얻었다.


한편 스페인에서는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1599~1660)가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부상했다.
그는 자연주의적인 종교화를 발전시켰는데, 여기에서 인물은 이상적인 유형이라기보다는 현실 인간의 초상에 가깝다.
한편 장면 전체에 정신적인 깊이감을 주는 것은 사실적으로 파악되면서 동시에 신비적인 광채를 발견하게 하는 빛이다.
이런 작품들은 베네치아 화파의 난색 계통의 바탕 위에 그려지고 또한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강한 명암에서 카라바조의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유연하고 두터운 붓질은 벨라스케스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그는 모델들에게 좀더 자연스런 자세를 취하게 하고 장식구를 생략하여 인물에게 생명력과 개성을 부여했다.
그는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을 훨씬 뛰어넘어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을 향해 한 걸을 더 나아갔다.
그는 르네상스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루벤스 및 베르니니와는 반대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Frans Hals(1581/5~1666)는 초상화가였으므로 그의 풍속화도 초상화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풍속화 분야에서 독창성을 갖춘 대가라는 명성을 얻은 그의 뛰어난 회화기법에 견줄 만한 화가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이 매우 적은 것은 그가 타계한 후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그의 작품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거의 없어 상당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바조 추종자들과는 달리 할스는 인공적인 빛의 묘사에서 발생하는 극적인 명암법 효과를 탐구했으며, 전통 기법으로 그린 후 점묘로 색 터치를 하는 독자적인 양식을 창조했다.
1630년대에는 한층 간결한 그림을 그리면서 밝은 색채 대신 단색조의 효과를 높였으며 말년의 작품에는 좀더 어두운 색이 사용되었고 붓질이 간결해져 절제감이 느껴진다.


루벤스와 더불어서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는 네덜란드의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69)이다.
약 100점의 자화상으로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는 얼굴 표정이 얼마나 서로 다른 종류의 정서를 나타내는가를 배우기 위해 관상학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그려넣었다.
회화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그는 명암법과 공간 처리에 숙달했으며 내적 감정과 성격을 전달하기 위해 과장된 몸짓과 움직임을 이용했다.
1640년대에 그는 바로크 미술의 격정적이고 과도한 측면을 버리고 색채, 명암법, 대기의 효과로 부드러움과 자비를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했으며, 자연을 마주 대하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노력했다.
아카데믹한 비평가들은 오랫동안 그의 작품이 거칠고 촌스러우며 고상함이 결여되었다고 여기면서도 빛의 처리 방식은 본보기가 된다고 일반적으로 인식했다.


17세기 대가 중에 빠드릴 수 없는 화가는 렘브란트와 같은 나라 사람 얀 베르메르Jan Vermeer(1632~75)이다.
아버지로부터 미술상과 술집을 이어받아 빚에 시달리면서 아내와 자식 11명을 부양하느라 노력했지만 그림을 팔았다는 증거는 없다.
현존하는 작품은 35점으로 1654년 델프트의 화약고 폭발로 인해 많은 초기 작품이 소실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적은 수이다.
그는 구도를 추상적일 정도로 단순하게 하면서 대개 인물(그의 아내가 모델) 한 사람만 있는 단순한 풍속화 또는 거리나 도시의 전경을 그렸다.
1879년 반 고흐는 베르메르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Woman in Blue Reading a Letter>에 대해 열광적인 편지를 썼고 그에 대해 일반적인 관심이 높아진 것은 18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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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신세계 백화점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입니다.


들로네와 쿠프카의 오르피즘


색을 사용하여 색의 면을 만들고 색의 톤으로 공간을 암시하는 양식으로서의 오르피즘Orphism은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와 구 체코슬로바키아 화가 프란티셰크 쿠프카Frantisek Kupka(1871~1957)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오르피즘은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칭으로 시인은 이를 입체주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간주했다.
시인이 오르피즘을 입체주의의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것으로 본 시각은 당연했는데,
당시 입체주의가 매우 성행하고 있었고, 그는 입체주의 외의 회화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며, 들로네가 입체주의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컬러 챠트와 같은 들로네의 작품은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에 의해서 이미 예견되었다.
쇠라와 시냐크의 회화는 붓을 세워 점을 찍듯이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한 색의 분할로서 순색의 색점으로 그리는 것이었으며 작품의 규모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점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쇠라 작품에서 이런 접근 방식은 강렬한 빛의 효과를 주는 동시에 형태를 견고하고 명확하게 한다.
쇠라의 분할주의는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앙리 마티스가 주로 영향을 받았다.
들로네는 쇠라의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색과 색의 대비는 역동성과 공간의 깊이감 외에도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추상화로 나타났으며 신지학 또는 절대 정신에 대한 화가의 사고를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지만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회화에 몇몇 화가들이 전념했다.
특히 쿠프카가 음악과 영적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회화에 심취했으며 그 밖에 바실리 칸딘스키, 피트 몬드리안, 파울 클레 등이 이런 동일한 동기에서 색면 대비의 회화를 추구했다.
쿠프카를 포함하여 이들 네 사람 모두의 공통점은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음악을 모티프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영매의 능력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나타나는 체험을 한 쿠프카는 자연히 종교와도 같은 신지학에 관심을 쏟게 되었으며 이런 신비주의의 경향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다수의 작품으로 나타났다.
신지학은 오늘 날 병적 이성주의로 간주되지만 당시에는 가장 지성적인 신비주의였다.
쿠프카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하고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음악에서 유추한 시각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쿠프카는 야수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지개색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들로네보다 먼저 거의 완전 추상에 도달했지만 들로네는 알려진 예술가였고 쿠프카의 이름은 낯설었기 때문에 파리 사람들은 들로네가 먼저 완전 추상에 도달한 화가라고 생각했다.


피카소에 대해 유난히 경쟁심이 많았던 들로네에게는 쿠프카와 같은 영적 동기는 없었다.
그는 색채를 풍부하게 하고 추상적 형태의 표현적 특성을 강화시킴으로써 입체주의의 엄격한 구성에 시적 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입체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전환시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야 파리 화단에 자신의 입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믿은 들로네는 쿠프카와는 달리 내적 요구로부터 이런 회화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외적 대상을 단순화하고 그 대상을 입체주의의 장점을 살려 다각도에서 바라보듯 다양한 색면들로 묘사하여 리드미컬한 효과가 나도록 했다.
색면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등장하게 되는 키네틱 아트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오르피즘 회화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칼리그람 Calligramme’의 토대가 되었다.
시인은 오르피즘의 원리를 시에 적용하여 시어를 배열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의 원리에 의하면 서로 무관하거나 대비되는 부분들이 임의적이고 부적절하게 병치되었을 때 구성의 각 요소들은 논리적 혹은 관습적 방식보다는 오히려 충돌과 대비를 통해 상호 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르피즘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문학, 음악, 조형 예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개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다양한 인식의 표현,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즉각적인 직관, 혹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연속된 사건들에 대한 순간적이며 집중된 직관을 의미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현재’라는 심리적인 개념을 미술과 문학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로베르 들로네, <커튼 사이의 에펠탑>, 1910
입체주의의 효과가 아니라면 들로네는 980피드나 되는 높은 에펠탑을 캔버스에 모두 그려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각도에서 바라본 장면을 한 캔버스에 묘사함으로써 높은 탑을 부서뜨려 나타낼 수 있었다.
들로네는 에펠탑 맞은편에 위치한 호텔 방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에펠탑을 여러 점 그렸다.

로베르 들로네, <동시 대조: 해와 달>, 1913
그림에는 제작연대가 1912년으로 적혀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그린 것으로 본다.
당시 들로네뿐 아니라 몇몇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제작연대를 앞당겨 적었는데 자신들이 먼저 성취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킨 것들로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추상이다.
그는 자율적인 색채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순수 색면들이 서로 침투하고 회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로베르 들로네, <창문>, 1912~13
들로네는 색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색채의 동시 대조를 통해 색채는 역동성을 찾게 되며 그림에서 색채의 구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이는 현실 표현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로베르 들로네,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 1914
들로네가 이 그림을 그리기 5년 전인 1909년 7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5분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루이 블레리오가 자신의 단발비행기 블레리오 11호를 타고 프랑스 칼레 근처 초원을 이륙하여 도버 해협을 날라 32분 후에 착륙한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타고 하늘을 나른 것이다.
5년 전의 이 사건을 모티프로 29살의 들로네가 가로 세로 각각 2.5미터의 큰 정사각형으로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 역사상 처음 비행한 그를 치하했다.
그는 그림 하단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최초로 하늘에 동시에 떠오른 태양 원반들을 위대한 비행기 제작자 블레리오에게 바침, 1914”

들로네는 선명한 색채로 몇 덩어리의 크고 작은 원반들을 컬러차트처럼 그렸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반들의 얽힘 속에 블레리오 11호의 프로펠러와 바퀴, 그 밖에도 조그맣게 그려진 바삐 일하는 기술자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항공역사를 장식하는 또 다른 영웅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이중 날개의 비행기도 보인다.
이 작품에서 모든 색채가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원반의 수를 대폭 증가함으로써 그는 관란자로 하여금 힘찬 시각적 운동감을 맛보게 해주며 빙빙 도는 듯한 느낌, 흘러가는 느낌, 또한 움직이는 기계에 의해 우주의 개발이 이루어진다는 암시를 준다.
들로네는 태양이 펼치는 불꽃놀이로 하늘을 정복한 블레리오의 위업을 찬양했다.
1909년 10월 14일 블레리오의 단발비행기는 날개를 접어 동체에 붙인 채 공화국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북부역에서부터 공예 학교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블레리오를 열렬한 환호로 환영했다.

프란티셰크 쿠프카, <첫 단계>, 1910~13?
이 작품은 퍽 개인적인 양식으로 그려진 것으로 정신적 상징주의에 속한다.
쿠프카는 회화에는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에 도달하여 선의 리듬과 색채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의 창조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프란티셰크 쿠프카, <대각선의 면>, 1925
이 작품은 쿠프카가 실재 세계를 어떻게 지성적으로 추상화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색과 구조의 조화를 통해서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추상으로 표현했다.
다양한 초록색이 있고, 얼룩의 파란색 가장자리에는 노란색이 있으며, 흰색과 검정색은 매우 강렬한 느낌을 준다.
미묘하고 복잡한 색들의 대비에서 음악적 느낌이 발생하는데 실제로 쿠프카는 음악을 시각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수직으로 뻗은 기다란 것들은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킨다.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그렸을 법하다.



로베르 들로네, <커튼 사이의 에펠탑>, 1910
입체주의의 효과가 아니라면 들로네는 980피드나 되는 높은 에펠탑을 캔버스에 모두 그려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각도에서 바라본 장면을 한 캔버스에 묘사함으로써 높은 탑을 부서뜨려 나타낼 수 있었다.
들로네는 에펠탑 맞은편에 위치한 호텔 방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에펠탑을 여러 점 그렸다.

로베르 들로네, <동시 대조: 해와 달>, 1913
그림에는 제작연대가 1912년으로 적혀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그린 것으로 본다.
당시 들로네뿐 아니라 몇몇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제작연대를 앞당겨 적었는데 자신들이 먼저 성취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킨 것들로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추상이다.
그는 자율적인 색채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순수 색면들이 서로 침투하고 회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로베르 들로네, <창문>, 1912~13
들로네는 색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색채의 동시 대조를 통해 색채는 역동성을 찾게 되며 그림에서 색채의 구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이는 현실 표현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로베르 들로네,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 1914
들로네가 이 그림을 그리기 5년 전인 1909년 7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5분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루이 블레리오가 자신의 단발비행기 블레리오 11호를 타고 프랑스 칼레 근처 초원을 이륙하여 도버 해협을 날라 32분 후에 착륙한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타고 하늘을 나른 것이다.
5년 전의 이 사건을 모티프로 29살의 들로네가 가로 세로 각각 2.5미터의 큰 정사각형으로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 역사상 처음 비행한 그를 치하했다.
그는 그림 하단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최초로 하늘에 동시에 떠오른 태양 원반들을 위대한 비행기 제작자 블레리오에게 바침, 1914”

들로네는 선명한 색채로 몇 덩어리의 크고 작은 원반들을 컬러차트처럼 그렸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반들의 얽힘 속에 블레리오 11호의 프로펠러와 바퀴, 그 밖에도 조그맣게 그려진 바삐 일하는 기술자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항공역사를 장식하는 또 다른 영웅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이중 날개의 비행기도 보인다.
이 작품에서 모든 색채가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원반의 수를 대폭 증가함으로써 그는 관란자로 하여금 힘찬 시각적 운동감을 맛보게 해주며 빙빙 도는 듯한 느낌, 흘러가는 느낌, 또한 움직이는 기계에 의해 우주의 개발이 이루어진다는 암시를 준다.
들로네는 태양이 펼치는 불꽃놀이로 하늘을 정복한 블레리오의 위업을 찬양했다.
1909년 10월 14일 블레리오의 단발비행기는 날개를 접어 동체에 붙인 채 공화국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북부역에서부터 공예 학교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블레리오를 열렬한 환호로 환영했다.

프란티셰크 쿠프카, <첫 단계>, 1910~13?
이 작품은 퍽 개인적인 양식으로 그려진 것으로 정신적 상징주의에 속한다.
쿠프카는 회화에는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에 도달하여 선의 리듬과 색채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의 창조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프란티셰크 쿠프카, <대각선의 면>, 1925
이 작품은 쿠프카가 실재 세계를 어떻게 지성적으로 추상화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색과 구조의 조화를 통해서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추상으로 표현했다.
다양한 초록색이 있고, 얼룩의 파란색 가장자리에는 노란색이 있으며, 흰색과 검정색은 매우 강렬한 느낌을 준다.
미묘하고 복잡한 색들의 대비에서 음악적 느낌이 발생하는데 실제로 쿠프카는 음악을 시각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수직으로 뻗은 기다란 것들은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킨다.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그렸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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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서양화



영국의 화가, 판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1697~1764)는 초상화로 유명한데, 사회적 악습을 풍자하기 위해 무대를 재현한 듯한 일련의 일화적인 그림을 고안하여 유향시켰다.
그는 멜로드라마처럼 장면을 과장하여 악덕을 비난했다.
각 시리즈는 판화로 제작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려졌고 이렇게 제작된 판화는 널리 판매되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해적판이 상당수 제작되자 1735년에는 저작권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호가스는 작품을 통해 설교가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그는 부도덕만큼이나 공론과 가식도 신랄하게 풍자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양식화된 경향에 반대했으며 영국인 고유의 감각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프랑스 로코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호가스는 1753년에 발표한 논문 『미의 분석 The Analysis of Beauty』에서 실제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관점이 미술품 감정가와 애호가의 이론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카데미즘과 18세기 예술가의 심미안을 비판했고 회화적 아름다움을 얻는 구체적인 열쇠로서 ‘뱁처럼 정확한 곡선’을 주장했다.
그의 작업은 삼차원 형태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근대 미학의 경향을 미리 조여주는 것이었다.


호가스와 한 쌍으로 언급되는 화가는 영국 왕립미술원 초대 회장을 지낸 조수아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1723~92)로 당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였고 영국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그랜드 매너Grand Manner에 의한 초상화 전통을 확립했으며, 영국의 18세기 미적 전망을 모든 영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말하고 누구보다도 영국 예술가의 지위를 위엄있는 새로운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랜드 매너는 그가 왕립미술원에서 세번째(1770)와 네번째(1771) 강연에서 주장한 장엄하고 화려한 역사화 양식으로 대양식으로 번역된다.
레이놀즈는 이 강연에서 이탈리아어의 구스토 그란데gusto grande, 프랑스어의 보 이데알beau ideal, 영어의 위대한 양식great style, 천부적인 재능genius, 취향taste이라는 말은 단지 동일한 것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 양식의 탁월함은 로마 미술, 피렌체파, 볼로냐화파에서 볼 수 있다고 했으며, 푸생과 브룅과 같은 프랑스 대가를 이 양식의 대표자로 간주했다.
레이놀즈는 이 양식의 특성이 베네치아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이는 역사화에서도 명백히 구분되는 두 양식, 즉 장엄하고 화려하거나 또는 장식적인 양식 때문이었다.


그의 이론은 미적 판단의 기준으로 느낌, 감정, 정서를 강조하는 초기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성적인 이상에 대한 교리를 나타낸 것이었다.
정통 신고전주의 전통에서 레이놀즈는 심미안을 감수성과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에서 ‘옳고 그름을 판변하는 힘’으로 인식했으며, 올바른 심미안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성과 철학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심미안의 기본 원칙과 기준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그랜드 매너 이론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은 예술의 전체적인 미와 숭고함은 개개의 형태, 지방의 관습, 특이성 또는 다양한 세부묘사 등의 우위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의 한 축은 고전적 신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리적 개선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가는 항상 고상하고 숭고한 주제를 열망해야 하며 너절하고 비열한 것은 피해야 한다.
이런 두 가지 이유에서 그는 네덜란드파를 경시했는데, 그들의 사실주의가 세부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저속하고 진부한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이상에 대한 태도를 선호했다.
전형적인 신고전주의적인 태도에 대하여 레이놀즈는 거장이 확립한 예술 규범에 순종할 것을 강조했다.
이 주장은 윌리엄 블레이크에 의해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영국의 화가, 철학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는 고딕 미술을 가까이 접한 후 선적 구성과 형식이 갖추어진 디자인을 선호하게 되었다.
1778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했지만 당시 교장이던 레이놀즈를 몹시 싫어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캔버스에 그리는 유화를 혐오하여 채색 판화, 삽화, 템페라화 등 다양한 기법을 시도했다.
그는 가시적인 감각 세계는 가공의 피상에 지나지 않고 그 배후에 정신적인 진실이 숨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술가가 정신적 활동에 종사해야 하고 예술가의 본질은 진실을 정확히 그리는 데 있으며 그것은 환상적인 상상력이 되어 나타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 정신적인 활동은 시각적 체험 또는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의 형태를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정신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평범한 시각적 체험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시각적 상징주의를 창조한다는 불가능한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그는 선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딱딱한 느낌의 직선을 특징으로 하는 선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는 영국의 아르 누보의 전조로 간주되었다.


정물화와 풍속화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샤르댕Jean-Baptiste-Simeon Chardin(1699~1779)은 18세기에 유행하던 로코코 양식에 맞서는 사실주의적 경향을 대표한다.
그는 작은 캔버스에 자신이 속한 중산층의 일상생활과 사물을 묘사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네덜란드의 실내화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17세기의 이름없는 네더란드 화가들처럼 그는 반사광선의 처리를 연구했으며, 따뜻하고 밝은색의 바탕칠과 인물의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기술적 방법을 베르메르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물감을 충분히 이용하여 연속해서 칠하고 그 위에 불투명한 색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미묘한 색조를 나타나게 하는 스컴블scumble 효과를 주는 등 매우 깊이 있는 색조를 만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켰다.
또한 정취가 부족한 네덜란드 회화의 사실주의에 표면적 사실주의 또는 세부적인 유사함과는 구별되는 프랑스적 특징인 간결함과 직접성을 더했다.
그의 풍속화는 감수성이나 허식 없이 눈에 비치는 모습대로의 솔직한 시각을 보여준다.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군림한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는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고대 예술에 탐닉했고, 멩스의 미학에 공감했는데,
독일인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Anton Raffael Mengs(1728~79)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과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다비드는 색채보다 선묘를 더 중시하는 당시의 조류와는 타협하지 않았으며 표현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거부했다.
그가 선택한 주제는 자기 희생, 의무에 대한 헌신, 정직, 금욕 등 시민이 지켜야 할 미덕이었다.
이런 미덕은 역사적 사실로서 낭만적으로 해석되어 고대 로마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곧 신고전주의의 지도자가 되었고 비평가, 미술품감정가, 대중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다비드는 왕립 아카데미를 대신하는 새로운 기관을 창설하는 데 적극 참여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사회적·예술적으로 지배적인 지위를 누렸다.
그는 나폴레옹의 공적을 칭송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는 초기에 사용한 차가운 색채와 엄격한 구도를 버리고 낭만주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을 웅장하게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낭만주의에 대해서는 계속 반감을 품고 있었다.


스페인 화가, 동판화가 고야Francisco Jose de Goya(1746~1828)는 초기에 다소 경직된 멩스의 양식을 따랐지만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부터 점차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는 중이염으로 1794년에 청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예술 활동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정서적 변화의 징후는 뚜렷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놀라운 공상과 상상력을 한껏 표현한 드로잉, 에칭, 유화를 제작하면서 해가 갈수록 특정한 풍속적 주제와 공상적인 장면에 더욱 몰두했으며, 기분 나쁜 환성적 요소와 공포, 위협 등 어두운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는 1793~98년에 제작한 에칭과 워시드로잉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판화 애쿼틴트aquatint를 병용한 80점(후에 3점을 추가)을 묶어 1999년에 『로스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라는 동판화집을 발행했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에는 유머러스한 표현에 악몽과 같은 불길한 요소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기법에서는 렘브란트의 영향이 보이지만 작품 주제는 사회적 관습과 교회의 병폐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며, 마녀와 악마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묵음의 무도 같은 요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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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양화



영국 화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에게는 밝은 색채와 대기 표현에 대한 관심 외에도 극적인 주제와 움직임에 대한 낭만주의 경향이 있었다.
터너는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했는데, 그의 접근 태도는 레이놀즈처럼 분석이지 않고 직관적이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통찰력으로 그들의 가치와 목표로 한 것들을 습득했다.
그는 전유럽 회화를 통합한 동시에 자신의 시각적·내면적 체험을 통합하여 자신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공간의 대기 표현과 색채의 영롱함으로 완전히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는데 모네가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위대한 독창성은 단순히 인상주의를 예견하여 고무시켰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빛에 의한 현상의 추상적 구성에서 인상파보다 앞서 나갔으며 그가 추상적 힘으로 파악한 요소들을 극적으로 상징화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어떤 낭만주의 화가들보다 앞서 있었다.
그는 영국 최고의 낭만주의자이자 색채화가였다.
1830년대에는 좀더 추상적인 구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러스킨은 1843년에 출간한 『근대 화가론 Modern Painters』에서 터너를 옹호했다.


터너와 더불어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은
초기 몇 년 동안은 생생하지만 풍부한 색채 또는 극적인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강한 인상을 주는 픽처레스크icturesque의 전통과 즐거움을 위해 그린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1727~88)의 기법으로 작업하다가
그 후 풍경을 좀더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시도로 자신의 독창적인 기법을 발전시켰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법에 의해 목초지, 나무, 물에 비치는 빛의 효과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의 움직임을 묘사함으로써 시골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연유한 그 자신의 감동적인 기쁨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컨스터블은 말했다.

“물방앗간에서 아련히 들리는 물소리, 버드나무, 오래된 썩은 널빤지, 흙투성이의 나무기둥, 벽돌로 쌓아 만든 벽, 이런 것들을 나는 좋아한다. 이러한 풍경들이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

눈이 ‘정직하다’는 가르침이 100년 후에는 속임수와 한상으로 간주되어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컨스터블은 게인즈버러와 픽처레스크 화파의 매너리즘 해석을 버림으로써 이 원칙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림에 있어서 자연의 직감적 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빛의 어른거림과 기후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전통적인 마무리 방법을 포기하는 대신 태양을 순수한 흰색과 노란색의 점으로 표현하고 폭풍조차도 재빠른 붓놀림으로 한 번에 그려내었다.


다비드의 제자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1780~1867)는 초상화가로 유명한데,
그의 초상화를 둘로 나누면 하나는 자신이나 친구들의 초상화로 낭만주의적 정신으로 표현된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유복한 사람들의 주문 초상화로 선명하게 그려진 선과 에나멜 같은 광택이 특징이다.
초기 초상화는 정교한 선의 아름다움과 표현력 있는 윤곽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기능을 넘어서 그것 자체로서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앵그르의 생애 전반에서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양식이 되었다.
앵그르는 1834년 말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원장직을 맡아 7년 동안 머물렀다.


1842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 그린 초상화에서는 모델의 화려한 의상이 많이 강조되었다.
이런 작품은 막대한 부에 기초를 두고 안정과 풍요로움을 누리던 19세기 프랑스 사회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한정된 주제에 사로잡혀 우랜 기간에 걸쳐 동일한 주제를 반복했다.
그 자신이 부르주아로서 부르주아적 정신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초상화들은 감상적이고 공허하며 주제를 담은 그림들은 활기가 없다.
그의 작품을 일관하는 것은 여성 나체의 관능적 특성에 대한 강한 감각으로 이 특징은 비평가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그는 선과 뚜렷한 윤곽, 미묘한 농담의 선명한 색채, 주의 깊게 균형 잡힌 구도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당대에 앵그르와 쌍벽을 이룬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Victor-Eugene Delacroix(1798~1863)는 루브르 뮤지엄에서 옛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기초를 닦았는데,
특히 루벤스, 베로네세, 그리고 베네치아파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당대 프랑스 화가 중에서는 다비드 등 신고전주의 화파보다는 제리코Jean Louis Andre Theodore Gericault(1791~1824)와 그로Antoine-Jean Gros(1771~1835)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다.
그의 양식과 기법은 1830년대 말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칠해진 물감 위에 덧칠하는 투명한 물감층의 글레이즈glaze와 색조의 강한 대비 대신유사 색조를 이용한 기법과 분할주의에 의한 색채 효과를 독자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화파의 전통 기법에서 거의 탈피하여 화면에 붓의 거친 흔적을 남기거나 색채를 화면의 구성 요소로 끌어들이는 등 새로운 기법들을 시도했다.
색채를 다루는 그의 새로운 기법은 르누아르와 쇠라 같은 완전히 다른 성향의 화가들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상징적이거나 극적으로 표현된 색채감은 반 고흐에게 영감을 주었다.


들라크루아는 다비드의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낭만주의의 지도자로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천재성은 너무 광범위하여 어느 한 화파의 범주에 한정시킬 수 없다.
회화적 특성을 보면 낭만주의 그 이상에 도달했는데, 장식적인 면에 치중하는 바로크적인 재능을 나타내면서도 그의 회화는 단순함과 장엄함을 높게 평가하는 고전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정통적인 종교화가는 아니었지만 종교화를 많이 그렸으며, 보들레르는 믿음이 부재하는 시대에 종교화를 올바로 이해하는 유일한 화가라고 그에 관해 말했다.
반 고흐는 렘브란트와 들라크루아만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농부 화가’로 알려진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75)는 1849년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테오도르 루소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농부들의 생활만을 그리는 데 전념했으며 그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쿠르베의 사실주의와 달리 밀레의 그림은 대지에 대한 낭만적 심정을 표현하는 강한 감정에 그 특징이 있다.
또한 브뢰헬이나 네덜란드파 화가들과 달리 그는 마을의 축제나 놀이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같은 농촌의 밝은 측면만을 담아내지는 않았다.
그는 땅을 가꾸는 노동과 이러한 노역의 슬프기까지 한 엄숙함의 감동을 담아 그림으로써 농촌생활의 진지하고 애수 어린 측면을 강조했다. 색채 화가로서 밀레는 평범했고, 색조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데다 색채의 질에 대해서도 그다지 민감하지 못했다.
그의 위대함은 데생에 있다. 불필요한 부분은 대담하게 삭제해 버린 그의 데생은 쇠라의 데생과 비교된다.
그의 그림의 조소적인 단순성은 일상적인 것에 기념비적인 무게와 위엄을 부여하고 있다.
밀레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로 요세프 이스라엘스와 막스 리베르만, 카미유 피사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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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 미술 학교의 출현



20세기로 전환될 무렵 서양미술 관련 서적이 다수 출판되었으며 유키도 『파리의 미술 학생』(1902)과 『예원잡고藝苑雜稿』(1906)를 출간했는데 그가 동시대 서양미술을 중점적으로 소개했음을 알 수 있다.
서양화 단체 백마회白馬會가 1901년에 간행한 『미술강화美術講話』도 근대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잡지는 오무라 세이간大村西崖, 이와무라 유키, 모리 오가이 등이 중심이 되어 발행한 잡지 『미술평론美術評論』(1897~1900)에 게재된 기사들을 대부분 재수록한 것이었다.
이 잡지에 뒤이어 출판된 『미술신보美術新報』(1902~19)에서는 근대 서양 미술 특히 프랑스 미술에 관한 내용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두드러졌다.
이런 경향은 구로다 세이키가 동경미술학교에 취임하면서부터 더욱 확고해졌다.


1910년대와 1920년대 일본에서는 각급 학교에서 신교육이 실시되었으며,
교육과정과 제도가 새롭게 변하면서 1921년에 설립된 문화학원(1925년에 미술과 신설), 1929년에 설립된 제국 미술 학교(1948년 무사시노 미술 학교로 개칭, 1962년 무사시노 미술 대학으로 승격), 태평양 미술학교 등의 사립 미술 학교가 등장했다.
동경 미술 학교는 1924년부터 조선과 대만 등 외국 학생들에게는 특별 입학을 허락했지만 1932년에 이런 규정을 없앴으므로 그 때부터는 외국 학생은 일본 학생과 똑같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경쟁률이 10:1이나 되었다.
치열한 경쟁률로 동경 미술 학교로의 입학에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된 조선과 대만 유학생들은 문화학원, 제국 미술 학교, 태평양 미술 학교 등 사립 미술 학교들로 흩어져 입학했다.
사립 미술 학교들 중 제국미술학교는 규모가 가장 컸고 조선 유학생이 가장 많았다.


제국 미술 학교

제국 미술 학교는 관립 동경 미술 학교에 대립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로 설립되었으며 그 취지를 창립멤버 중 한 사람 긴바라 세이고가 후에 교장이 된 기타 레이키치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미술 학교로서 현재 유력한 것이 우에노에 있는 것(동경 미술 학교) 하나뿐인데, 수용인원에 한계가 있다. … 제전에 대항하는 원전이 있고, 제전의 양화부에 대립하는 이과전, 춘양전이 있듯이, 우에노의 미술 학교에 필적하는 학교를 만든다면 일본 미술계에 공헌할 수 있지 않겠는가.”

1929년에 설립된 5년제의 제국 미술 학교에는 일본화과, 서양화과, 도안 공예과, 조각과, 사범과, 연구과가 있었고 실습 위주였는데,
서양학과의 경우 1학년에서 석고 데생, 동양 미술사, 심리학,
2학년에서 인체 데생, 서양 미술사, 철학 개론, 용기·원근화법,
3학년에 인체 유화, 서양 회화사, 건축사,
4학년에 인체 유화, 미학개론, 5학년에 인체 유화 및 졸업제작을 했다.


조선, 대만, 만주로부터 이 학교에 유학한 학생의 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소화昭和 12, 13년인 1937~38년 총학생 400여 명 중 80여 명이었다.
해방 전까지 이 학교에 진학하여 학적부에 오른 조선인은 147명이고 이들 중 졸업생은 40명, 제명 65명, 퇴학 23명, 학적부에 없는 경우 19명이며, 이 중에는 창씨개명 후 한국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20명이다.
1933~45년 졸업생 명부에 기록된 38명의 졸업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1936년: 임성은, 1937년: 김원, 구종서, 김학준, 이쾌대, 황헌영, 1938년: 이대림, 황락인, 윤중식, 1939년: 고석, 1940년: 김학수, 김두환, 양학제, 1941년: 김만형, 주경, 김재석, 홍일표, 이성태, 기종하, 1942년: 윤자선, 김종식, 이순동, 김창억, 박상옥, 황염수, 서강헌, 1943년: 이상기, 이수억, 장욱진, 서상윤, 이경훈, 임완규, 송혜수, 박진호, 김종실, 이팔찬, 석수성, 정순모


김형구(1922~)와 홍종명(1922~2004)은 졸업생 명부에는 없지만 재학 당시 1943년과 1944년에 각각 징집되어 후에 징집기간 동안의 년월일수를 인정받았으며 이에 따라 1969년에 졸업 확인서를 받았다.


서양화과는 제국 미술 학교에서 가장 비중이 큰 학과였다. 1933년을 예로 들면 일본화과, 서양화과, 조각과, 도안과, 사범과 등 전체 합격자 130명 가운데 서양화과가 75명이었고 1937년 제적 학생 232명 중 서양화과 학생은 135명이었다. <제국 미술 학교 교육 지침>에 기록된 서양화과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양화과는 실습의 기초를 데생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 학습에는 특히 주의하고 있다.
학생들이 공부하기에는 꼭 흥미로운 과목은 아닌 만큼 이것에는 고심하고 있다.
같은 석고를 일정 기간을 두고 수차례 반복함으로써 퇴고의 퇴고를 다하게 되는 경우, 학습자는 괴롭겠지만 효과 있는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3학년 이상에서는 인체 유화를 연구하는데, 이 기간에도 기본 연구로서의 데생을 게을리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상급 유화의 수련도 단순히 소위 타블로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1학년부터 밟아 올라온 발전단계로서의 소양을 높이고 정련시키는 일에 진지하게 부딪히는 것이다.
학교 수업의 중심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타블로를 만드는 일 등은 평생의 일이다.
기초를 배우는 것은 학교가 아니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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