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 미술 학교의 출현



20세기로 전환될 무렵 서양미술 관련 서적이 다수 출판되었으며 유키도 『파리의 미술 학생』(1902)과 『예원잡고藝苑雜稿』(1906)를 출간했는데 그가 동시대 서양미술을 중점적으로 소개했음을 알 수 있다.
서양화 단체 백마회白馬會가 1901년에 간행한 『미술강화美術講話』도 근대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잡지는 오무라 세이간大村西崖, 이와무라 유키, 모리 오가이 등이 중심이 되어 발행한 잡지 『미술평론美術評論』(1897~1900)에 게재된 기사들을 대부분 재수록한 것이었다.
이 잡지에 뒤이어 출판된 『미술신보美術新報』(1902~19)에서는 근대 서양 미술 특히 프랑스 미술에 관한 내용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두드러졌다.
이런 경향은 구로다 세이키가 동경미술학교에 취임하면서부터 더욱 확고해졌다.


1910년대와 1920년대 일본에서는 각급 학교에서 신교육이 실시되었으며,
교육과정과 제도가 새롭게 변하면서 1921년에 설립된 문화학원(1925년에 미술과 신설), 1929년에 설립된 제국 미술 학교(1948년 무사시노 미술 학교로 개칭, 1962년 무사시노 미술 대학으로 승격), 태평양 미술학교 등의 사립 미술 학교가 등장했다.
동경 미술 학교는 1924년부터 조선과 대만 등 외국 학생들에게는 특별 입학을 허락했지만 1932년에 이런 규정을 없앴으므로 그 때부터는 외국 학생은 일본 학생과 똑같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경쟁률이 10:1이나 되었다.
치열한 경쟁률로 동경 미술 학교로의 입학에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된 조선과 대만 유학생들은 문화학원, 제국 미술 학교, 태평양 미술 학교 등 사립 미술 학교들로 흩어져 입학했다.
사립 미술 학교들 중 제국미술학교는 규모가 가장 컸고 조선 유학생이 가장 많았다.


제국 미술 학교

제국 미술 학교는 관립 동경 미술 학교에 대립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로 설립되었으며 그 취지를 창립멤버 중 한 사람 긴바라 세이고가 후에 교장이 된 기타 레이키치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미술 학교로서 현재 유력한 것이 우에노에 있는 것(동경 미술 학교) 하나뿐인데, 수용인원에 한계가 있다. … 제전에 대항하는 원전이 있고, 제전의 양화부에 대립하는 이과전, 춘양전이 있듯이, 우에노의 미술 학교에 필적하는 학교를 만든다면 일본 미술계에 공헌할 수 있지 않겠는가.”

1929년에 설립된 5년제의 제국 미술 학교에는 일본화과, 서양화과, 도안 공예과, 조각과, 사범과, 연구과가 있었고 실습 위주였는데,
서양학과의 경우 1학년에서 석고 데생, 동양 미술사, 심리학,
2학년에서 인체 데생, 서양 미술사, 철학 개론, 용기·원근화법,
3학년에 인체 유화, 서양 회화사, 건축사,
4학년에 인체 유화, 미학개론, 5학년에 인체 유화 및 졸업제작을 했다.


조선, 대만, 만주로부터 이 학교에 유학한 학생의 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소화昭和 12, 13년인 1937~38년 총학생 400여 명 중 80여 명이었다.
해방 전까지 이 학교에 진학하여 학적부에 오른 조선인은 147명이고 이들 중 졸업생은 40명, 제명 65명, 퇴학 23명, 학적부에 없는 경우 19명이며, 이 중에는 창씨개명 후 한국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20명이다.
1933~45년 졸업생 명부에 기록된 38명의 졸업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1936년: 임성은, 1937년: 김원, 구종서, 김학준, 이쾌대, 황헌영, 1938년: 이대림, 황락인, 윤중식, 1939년: 고석, 1940년: 김학수, 김두환, 양학제, 1941년: 김만형, 주경, 김재석, 홍일표, 이성태, 기종하, 1942년: 윤자선, 김종식, 이순동, 김창억, 박상옥, 황염수, 서강헌, 1943년: 이상기, 이수억, 장욱진, 서상윤, 이경훈, 임완규, 송혜수, 박진호, 김종실, 이팔찬, 석수성, 정순모


김형구(1922~)와 홍종명(1922~2004)은 졸업생 명부에는 없지만 재학 당시 1943년과 1944년에 각각 징집되어 후에 징집기간 동안의 년월일수를 인정받았으며 이에 따라 1969년에 졸업 확인서를 받았다.


서양화과는 제국 미술 학교에서 가장 비중이 큰 학과였다. 1933년을 예로 들면 일본화과, 서양화과, 조각과, 도안과, 사범과 등 전체 합격자 130명 가운데 서양화과가 75명이었고 1937년 제적 학생 232명 중 서양화과 학생은 135명이었다. <제국 미술 학교 교육 지침>에 기록된 서양화과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양화과는 실습의 기초를 데생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 학습에는 특히 주의하고 있다.
학생들이 공부하기에는 꼭 흥미로운 과목은 아닌 만큼 이것에는 고심하고 있다.
같은 석고를 일정 기간을 두고 수차례 반복함으로써 퇴고의 퇴고를 다하게 되는 경우, 학습자는 괴롭겠지만 효과 있는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3학년 이상에서는 인체 유화를 연구하는데, 이 기간에도 기본 연구로서의 데생을 게을리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상급 유화의 수련도 단순히 소위 타블로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1학년부터 밟아 올라온 발전단계로서의 소양을 높이고 정련시키는 일에 진지하게 부딪히는 것이다.
학교 수업의 중심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타블로를 만드는 일 등은 평생의 일이다.
기초를 배우는 것은 학교가 아니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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