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양화
영국 화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에게는 밝은 색채와 대기 표현에 대한 관심 외에도 극적인 주제와 움직임에 대한 낭만주의 경향이 있었다.
터너는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했는데, 그의 접근 태도는 레이놀즈처럼 분석이지 않고 직관적이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통찰력으로 그들의 가치와 목표로 한 것들을 습득했다.
그는 전유럽 회화를 통합한 동시에 자신의 시각적·내면적 체험을 통합하여 자신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공간의 대기 표현과 색채의 영롱함으로 완전히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는데 모네가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위대한 독창성은 단순히 인상주의를 예견하여 고무시켰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빛에 의한 현상의 추상적 구성에서 인상파보다 앞서 나갔으며 그가 추상적 힘으로 파악한 요소들을 극적으로 상징화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어떤 낭만주의 화가들보다 앞서 있었다.
그는 영국 최고의 낭만주의자이자 색채화가였다.
1830년대에는 좀더 추상적인 구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러스킨은 1843년에 출간한 『근대 화가론 Modern Painters』에서 터너를 옹호했다.
터너와 더불어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은
초기 몇 년 동안은 생생하지만 풍부한 색채 또는 극적인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강한 인상을 주는 픽처레스크icturesque의 전통과 즐거움을 위해 그린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1727~88)의 기법으로 작업하다가
그 후 풍경을 좀더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시도로 자신의 독창적인 기법을 발전시켰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법에 의해 목초지, 나무, 물에 비치는 빛의 효과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의 움직임을 묘사함으로써 시골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연유한 그 자신의 감동적인 기쁨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컨스터블은 말했다.
“물방앗간에서 아련히 들리는 물소리, 버드나무, 오래된 썩은 널빤지, 흙투성이의 나무기둥, 벽돌로 쌓아 만든 벽, 이런 것들을 나는 좋아한다. 이러한 풍경들이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
눈이 ‘정직하다’는 가르침이 100년 후에는 속임수와 한상으로 간주되어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컨스터블은 게인즈버러와 픽처레스크 화파의 매너리즘 해석을 버림으로써 이 원칙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림에 있어서 자연의 직감적 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빛의 어른거림과 기후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전통적인 마무리 방법을 포기하는 대신 태양을 순수한 흰색과 노란색의 점으로 표현하고 폭풍조차도 재빠른 붓놀림으로 한 번에 그려내었다.
다비드의 제자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1780~1867)는 초상화가로 유명한데,
그의 초상화를 둘로 나누면 하나는 자신이나 친구들의 초상화로 낭만주의적 정신으로 표현된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유복한 사람들의 주문 초상화로 선명하게 그려진 선과 에나멜 같은 광택이 특징이다.
초기 초상화는 정교한 선의 아름다움과 표현력 있는 윤곽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기능을 넘어서 그것 자체로서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앵그르의 생애 전반에서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양식이 되었다.
앵그르는 1834년 말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원장직을 맡아 7년 동안 머물렀다.
1842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 그린 초상화에서는 모델의 화려한 의상이 많이 강조되었다.
이런 작품은 막대한 부에 기초를 두고 안정과 풍요로움을 누리던 19세기 프랑스 사회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한정된 주제에 사로잡혀 우랜 기간에 걸쳐 동일한 주제를 반복했다.
그 자신이 부르주아로서 부르주아적 정신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초상화들은 감상적이고 공허하며 주제를 담은 그림들은 활기가 없다.
그의 작품을 일관하는 것은 여성 나체의 관능적 특성에 대한 강한 감각으로 이 특징은 비평가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그는 선과 뚜렷한 윤곽, 미묘한 농담의 선명한 색채, 주의 깊게 균형 잡힌 구도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당대에 앵그르와 쌍벽을 이룬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Victor-Eugene Delacroix(1798~1863)는 루브르 뮤지엄에서 옛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기초를 닦았는데,
특히 루벤스, 베로네세, 그리고 베네치아파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당대 프랑스 화가 중에서는 다비드 등 신고전주의 화파보다는 제리코Jean Louis Andre Theodore Gericault(1791~1824)와 그로Antoine-Jean Gros(1771~1835)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다.
그의 양식과 기법은 1830년대 말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칠해진 물감 위에 덧칠하는 투명한 물감층의 글레이즈glaze와 색조의 강한 대비 대신유사 색조를 이용한 기법과 분할주의에 의한 색채 효과를 독자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화파의 전통 기법에서 거의 탈피하여 화면에 붓의 거친 흔적을 남기거나 색채를 화면의 구성 요소로 끌어들이는 등 새로운 기법들을 시도했다.
색채를 다루는 그의 새로운 기법은 르누아르와 쇠라 같은 완전히 다른 성향의 화가들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상징적이거나 극적으로 표현된 색채감은 반 고흐에게 영감을 주었다.
들라크루아는 다비드의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낭만주의의 지도자로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천재성은 너무 광범위하여 어느 한 화파의 범주에 한정시킬 수 없다.
회화적 특성을 보면 낭만주의 그 이상에 도달했는데, 장식적인 면에 치중하는 바로크적인 재능을 나타내면서도 그의 회화는 단순함과 장엄함을 높게 평가하는 고전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정통적인 종교화가는 아니었지만 종교화를 많이 그렸으며, 보들레르는 믿음이 부재하는 시대에 종교화를 올바로 이해하는 유일한 화가라고 그에 관해 말했다.
반 고흐는 렘브란트와 들라크루아만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농부 화가’로 알려진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75)는 1849년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테오도르 루소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농부들의 생활만을 그리는 데 전념했으며 그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쿠르베의 사실주의와 달리 밀레의 그림은 대지에 대한 낭만적 심정을 표현하는 강한 감정에 그 특징이 있다.
또한 브뢰헬이나 네덜란드파 화가들과 달리 그는 마을의 축제나 놀이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같은 농촌의 밝은 측면만을 담아내지는 않았다.
그는 땅을 가꾸는 노동과 이러한 노역의 슬프기까지 한 엄숙함의 감동을 담아 그림으로써 농촌생활의 진지하고 애수 어린 측면을 강조했다. 색채 화가로서 밀레는 평범했고, 색조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데다 색채의 질에 대해서도 그다지 민감하지 못했다.
그의 위대함은 데생에 있다. 불필요한 부분은 대담하게 삭제해 버린 그의 데생은 쇠라의 데생과 비교된다.
그의 그림의 조소적인 단순성은 일상적인 것에 기념비적인 무게와 위엄을 부여하고 있다.
밀레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로 요세프 이스라엘스와 막스 리베르만, 카미유 피사로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