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서양화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1571~1610)에 의해서 르네상스 이후 서양화는 다시 한 번 혁명을 맞았는데, 그는 이탈리아 전통을 무시하고 철저한 준비의 데생을 하지 않고 실재 모델을 직접 유채를 캔버스에 칠하기 시작했다.
이는 초기의 실험이었고, 그는 공간을 좀더 확 트이게 하면서 광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짙은 색으로 강한 명암 대비를 바탕으로 사실적 인물을 묘사했다.
채색에 뛰어난 그는 성숙기에 접어들어서는 색을 최소화하여 물감을 엷게 칠하면서 감동적인 침묵과 관조로 대작의 종교화를 그렸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1593/4~1665)은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의 창시자로 생애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는데, 인물의 몸짓, 자세, 얼굴 표정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면서 회화에서의 문학적·심리적 묘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그의 감정 표현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의 교칙으로 명문화되었다.
푸생은 각각의 작품에서 정취의 합리적인 통일에 힘을 기울였으며, 그리스·로마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음악의 모드(음계) 이론에 대응하여 회화의 모드(양식) 이론을 전개했다.
이는 후에 미술 아카데미에서 채택되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회화의 주제와 묘사된 감정적 상황은 각기 적합한 방법으로 다뤄져야 하며, 그 방법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원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일관되게 채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고전주의의 중심적 교의를 확립했는데, 회화는 가장 고귀하고 진지한 인간의 상황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성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전형적이며 질서 있는 기법으로 표현해야 만한다.
전형적이며 일반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보다 우선하며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매력을 갖는 것,
예를 들면 선명한 색채 등은 삼가야 한다.
회화는 정신에 호소되어야 하는 것이며 눈에 호소되는 것은 아니다.
17세기 후반 푸생의 이름은 색채의 중요성을 주장한 루벤스에 대해서, 회화에서 소묘의 중요성을 믿었던 푸생 추종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거론되었다.
처음에는 루벤스파가 우세했지만 푸생은 19세기 초까지 고전적 정신을 가진 예술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었다.
회화의 생명력이 소묘라고 본 푸생에 반해 색채를 회화의 생명으로 사용한 플랑드르인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는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화가이다.
로마에 체류할 때 고대를 연구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프레스코화를 비롯하여 티치아노, 틴토레토, 코레조 등의 회화를 모사했으며 그들의 영향이 작품에 나타났다.
소묘에 뛰어난 그는 펜과 유화 스케치는 물론 붓과 초크로 정확하고 완벽한 묘사력으로 큰 화면에서도 막힘없이 그렸다.
그의 천재성은 밝은 색채에서 잘 드러나는데,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영향이지만, 원색과 보색을 병치하는 루벤스의 방법은 19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보다 앞선다.
현란한 색채에서 생겨나는 루벤스 예술의 음악성은 그 스케치로 인해 한층 두드러졌다.
루벤스의 영향을 프랑스 화가들 바토, 프라고나르, 들라크루아가 주로 받았으며 인상주의는 들라크루아를 통해 색을 회화의 생명으로 본 데서 출발했다.
루벤스와 같은 나라 화가 안토니 반 데이크Sir Anthony van Dyck(1599~1641)는 루벤스의 작업장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그의 영향을 일부 받았지만 곧 자신의 세련되고 우안한 양식을 창조했다.
초상화를 주로 그린 그는 다소 거만하고 호리호리한 ‘귀족의 유형’으로 바로크풍 귀족 초상화 연작으로 명성을 얻었다.
한편 스페인에서는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1599~1660)가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부상했다.
그는 자연주의적인 종교화를 발전시켰는데, 여기에서 인물은 이상적인 유형이라기보다는 현실 인간의 초상에 가깝다.
한편 장면 전체에 정신적인 깊이감을 주는 것은 사실적으로 파악되면서 동시에 신비적인 광채를 발견하게 하는 빛이다.
이런 작품들은 베네치아 화파의 난색 계통의 바탕 위에 그려지고 또한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강한 명암에서 카라바조의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유연하고 두터운 붓질은 벨라스케스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그는 모델들에게 좀더 자연스런 자세를 취하게 하고 장식구를 생략하여 인물에게 생명력과 개성을 부여했다.
그는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을 훨씬 뛰어넘어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을 향해 한 걸을 더 나아갔다.
그는 르네상스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루벤스 및 베르니니와는 반대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Frans Hals(1581/5~1666)는 초상화가였으므로 그의 풍속화도 초상화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풍속화 분야에서 독창성을 갖춘 대가라는 명성을 얻은 그의 뛰어난 회화기법에 견줄 만한 화가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이 매우 적은 것은 그가 타계한 후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그의 작품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거의 없어 상당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바조 추종자들과는 달리 할스는 인공적인 빛의 묘사에서 발생하는 극적인 명암법 효과를 탐구했으며, 전통 기법으로 그린 후 점묘로 색 터치를 하는 독자적인 양식을 창조했다.
1630년대에는 한층 간결한 그림을 그리면서 밝은 색채 대신 단색조의 효과를 높였으며 말년의 작품에는 좀더 어두운 색이 사용되었고 붓질이 간결해져 절제감이 느껴진다.
루벤스와 더불어서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는 네덜란드의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69)이다.
약 100점의 자화상으로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는 얼굴 표정이 얼마나 서로 다른 종류의 정서를 나타내는가를 배우기 위해 관상학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그려넣었다.
회화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그는 명암법과 공간 처리에 숙달했으며 내적 감정과 성격을 전달하기 위해 과장된 몸짓과 움직임을 이용했다.
1640년대에 그는 바로크 미술의 격정적이고 과도한 측면을 버리고 색채, 명암법, 대기의 효과로 부드러움과 자비를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했으며, 자연을 마주 대하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노력했다.
아카데믹한 비평가들은 오랫동안 그의 작품이 거칠고 촌스러우며 고상함이 결여되었다고 여기면서도 빛의 처리 방식은 본보기가 된다고 일반적으로 인식했다.
17세기 대가 중에 빠드릴 수 없는 화가는 렘브란트와 같은 나라 사람 얀 베르메르Jan Vermeer(1632~75)이다.
아버지로부터 미술상과 술집을 이어받아 빚에 시달리면서 아내와 자식 11명을 부양하느라 노력했지만 그림을 팔았다는 증거는 없다.
현존하는 작품은 35점으로 1654년 델프트의 화약고 폭발로 인해 많은 초기 작품이 소실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적은 수이다.
그는 구도를 추상적일 정도로 단순하게 하면서 대개 인물(그의 아내가 모델) 한 사람만 있는 단순한 풍속화 또는 거리나 도시의 전경을 그렸다.
1879년 반 고흐는 베르메르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Woman in Blue Reading a Letter>에 대해 열광적인 편지를 썼고 그에 대해 일반적인 관심이 높아진 것은 18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