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떠오르는 성가신 기억


얼마 전
신촌에서 hair salon의 간판이 '헤어 해여'라고 적힌 것을 보고 무슨 간판이 저런가 하고 생각했다.
그 간판을 보니
지난 봄 미국에 갔을 때 뉴저지 주에서 교포가 운영하는 hair salon이 '머르장 머리'라고 쓴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재치 있게 단 간판이겠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불현듯 기억하게 만든 것을 생각하니 광고의 효과는 크다.

둘 다 성가신 기억인데,
그야말로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성가신 기억이 종종 떠오른다.

몇 년 전 친구 부부가 오랜만에 뉴욕으로부터 서울에 와서 내 집에서 보름을 묵었다.
두 사람의 중매를 내가 섰기 때문에 그 부부는 내가 뉴욕에 갈 때마다 극진하게 대접해준다.
그 부부와 함께 설악산에 가서 묵었다.
그곳 온천에 친구와 함께 갔다.
그가 먼저 탕에서 나왔고 조금 있다 내가 나왔다.
그 친구 어느 정도 몸 치장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서서 귀를 후비고 있었다.
옆으로 가서 해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보니 그 친구 웃기지도 않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사용하고 버린 Q-tip을 통에서 집어들고 자신의 귀를 청소하고는 새 Q-tip 통에 그것을 넣는 짓을 수차례 하고 있는 것이다.

"야, 여기서 꺼내 쓰고 저기에 넣어야지 반대로 하면 어떡하냐?"

그 친구는 어느 것이 새통이고 어느 것이 흔통일 줄 몰랐던 것이다.

그 기억은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약간의 구역질이 나는데
놀랍게도
이 기억은
지울래야 지워지지 않고 종종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왜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기억에 남았다가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불현듯 떠올라 나를 괴롭히는 걸까!

이와는 반대로
기억하려고 애를 써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한 번은 밖에 외출했다가 집에 전화를 걸 일이 생겼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침 친구가 옆에 있어서 그 친구에게 물었다.
그 친구는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는 데도
얼마 후 늦게 귀가한 적이 있었다.
초인종을 여러 차례 그것도 거의 십 분 동안 눌렀는 데도
아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때는 이층집에 살 때였는데 이층 안방에서 문을 닫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핸드폰을 가지고 외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중전화를 이용해서 전화로 아내를 깨워야겠는데
공중전화를 찾는 일도 그렇지만,
집전화번호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순간 난감했다.

졸지에 Homeless가 되다니!!

생각을 일으키니 전화번호를 알 길이 생겼다.
자동차 운전석 앞 유리 아래 핸드폰 번호를 적어놓은 것이 생각난 것이다.
차를 빼달라는 사람을 위해 적어놓은 번호이다.
주차한 차로 가서 어둠 속에 번호를 입에 담고 공중전화 있는 곳으로 가는 약 5분 거리에까지 입으로 중얼거리며 가서는 여러 차례의 벨 소리 끝에 아내와 극적인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문 열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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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양,

오랜만이에요.

인생 여정에 이정표를 스스로 만들어나가기도 하지만,
주어지는 이정표가 자신이 원해야 했던 이정표일 때도 있어요.
인생은 그야말로 물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게 되는데
늘 내면의 투쟁으로 얼룩지는 것 같아요.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 적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서 크게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여사제가 "네가 가장 현명하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스승을 찾아 이리저리 다녔답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요.

이 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선 스스로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지각생이라서 델포이 신전에 적힌 말이 무척 실감이 납니다.
그리스 신전에 적힌 이 말은
아마도 공자님이 말씀하신
나이 오십에 이르는 지천명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사십의 불혹을 넘어서야 이르게 되는 경지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스스로를 아는 것과 지천명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지요.
이십대에도 삼십대에도 가능합니다.
다만 이런 경우 소수에게만 가능할 것 같군요.
여하튼
스스로의 재능 혹은 능력 혹은 잠재력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타고난 재능이 스스로에게 있는가 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단 말이지요.
숨겨진 재능 혹은 발굴되지 않은 재능을 덮어두고 남이 원하는 혹은 사회가 원하는 일에 뛰어들 경우
소위 말하는 적성에 맞지 않아 고생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각생이 되더라도 스스로에게 용납되는 길을 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인생에 노력과 잔신감보다 더 가치 있는 건 없다고 봅니다.
모쪼록 진진양의 재능 혹은 잠재력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노력과 자신감으로 정진하세요.

두 번째 스스로보다 현명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지각하는 일인데,
이건 아무래도 인생의 경륜을 쌓은 후에야 깨닫게 되는 신의 마지막 선물일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소크라테스님도 나이가 들어서 철이 났답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지요.

이걸 일찍 깨닫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답은 Yes and No입니다.
아무리 일러도 지천명의 나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여하튼
신이 주는 이 마지막 선물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델포이 신전의 여사제가 소크라테스에게 혹은 우리에게 주는 신탁의 교훈은 매우 값집니다.
아마 불교에서 말하는 유아독존과 같은 의미일 것 같습니다.


진진양이 미술사를 열심히 공부하겠다니 여간 반갑지 않습니다.
나의 경험으로
미술사는 평생 공부해야 하는 분야로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재미날 뿐만 아니라
창작의 세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안과 꿈을 심어주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창작의 세계에는 늘 내가 설 곳이 있어 나의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혹자는 미쳐야 학문을 할 수 있다고 하던데,
예술은 학문이 아니지만 미술사는 학문입니다.
모쪼록 미친 상태에서 미술사에 정진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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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집안의 화가 보스


보스 조상의 성은 반 아켄Van Aken으로 독일 아헨Aachen(엑스라샤펠레Aix-la-Chapelle) 출신이며
아켄이란 성은 아헨에서 유래했다.
보스의 할아버지 얀 반 아켄Jan van Aken(1454년에 사망)도 화가였으며,
증조할아버지 토마스 반 아켄Thomas van Aken도 화가였다.
얀 반 아켄의 슬하에 다섯 아들이 있었고 이들 중 네 명이 화가였으며
보스의 아버지 안토니우스 반 아켄Anthonius van Aken(1420년경 ~78년)도 화가였다.

안토니우스는 1426년에 스헤르토겐보스로 이주했으며
1462년 2월 시장 동쪽 지역에 벽돌로 지은 저택을 구입하고 이사했으므로
보스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며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와 함께 살았다.
현존하는 세금보고서에 안토니우스의 이름이 적혀 있어 그가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부유층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1463 년 6월 대화재가 발생하여 수백 가구가 전소되었고 시청 건물 일부도 불에 탔다.
안토니우스의 집과 작업장 일부도 불에 탔으므로 그는 새로 지었다.
이 집은 연립주택들 가운데 하나로 각 집의 폭은 4미터가 조금 넘었으며,
부유한 기능공들이 이런 집에서 살았고,
그들은 작업장을 집 내부에 각각 갖고 있었다.

보스의 형 구센Goossen(1444년경~98)도 화가였고
그의 두 아들 요하네스Johannes(1470~1537)와 안토니우스Anthonis 'die Maelder'(1478년경~1516)는 화가이면서 조각가들이었다.
이들 모두 같은 작업장에서 작업했으며,
자신의 작업장을 따로 갖고 있지 않은 보스는 그들의 작업장에서 함께 작업했다.
따라서 보스가 자신의 양식을 발견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양식을 발견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이는 보스의 고유한 양식을 밝혀내는 데 어려움이 된다.

보스의 생애와 화가로서의 활약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일기나 편지 등 자전적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스헤르토겐보스의 시문서와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회계장부가 현존하여 다소나마 자료로 소중하게 사용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에 관해 자세히 기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출생일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후대 모작으로 알려진 초상화에서 나이 든 모습을 보는데,
초상화가 1516년 그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그려졌다고 가정할 경우 그가 태어난 해는 1450년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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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미술의 영향


보스가 스헤르토겐보스 밖으로 나간 적이 있다는 기록은 없지만
초기 작품을 보면 위레트흐트에서 지낸 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후에 나타난 성숙한 양식에서 보여지는 플랑드르 미술의 영향으로 미루어 볼 때
네덜란드 남쪽을 여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는 중에 <성 율리아노의 십자가 처형 Crucifixion of St. Julia>을 그렸다는 주장이 있지만
휴고 반 데르 고스Hugo van der Goes(1440년경~82, 1467~82년에 주로 활동)의 포르티나리 세쪽 제단화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이탈리아 상인이나 외교관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이 형제회 기록에 남아 있는 건
1516년에 사망했다는 사실과 그해 8월 9일 형제회 친구들이 성 요한 교회에서 그를 추도하는 장례미사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보스에 관한 내용은 시문서와 형제회 기록이 거의 전부지만
17세기의 몇몇 자료를 통해 그의 작품 몇 점이 성 요한 교회에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지창조>가 제단 위에 있었고 <동방박사의 경배>는 성모 마리아 제단에 장식되었다.
1504년 부르고뉴의 미남 공작 필리프는 예로니무스 반 아켄Jeronimus van Aeken으로 불리운 보스에게 제단화를 주문했는데,
<최후의 심판>으로 양날개 패널에 <천국>과 <지옥>이 묘사된 세쪽짜리 커다란 그림이다.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빈 소재 세쪽 제단화를 필리프가 주문한 작품의 축소판 복제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원작은 1629년 프레데리크 헨리Frederick Henry 왕자의 네덜란드 군대가 스페인으로부터 스헤르토겐보스를 탈환했을 때 분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톨릭의 번영시대가 칼뱅주의자들의 금욕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 뮤지엄 그리고 개인이 소장한 상당수의 보스 작품은 원작을 복제 또는 모방한 것들이다.
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30여 점에 불과하고 그림과 소품 드로잉들이다.
원작을 보려면 마드리드의 프라도 뮤지엄에 가야 한다.
보스와 그의 작업장에서 제작한 주요 제단화 세 점과 소품 몇 점이 그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 중 초기에 제작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작품에 제작연대를 기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상이 심하고 후세 사람들이 덧칠을 했으므로
작품에 나타난 양식과 기교의 미묘한 차이를 들어 연대순을 확정짓는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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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 뮤지엄


프라도 뮤지엄Museo del Prado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다.
루브르 뮤지엄의 전신인 나폴레옹 뮤지엄의 설립과 내셔날리즘의 대두에 자극을 받아 19세기 전반 유럽 각지에서 생겨난 뮤지엄들 가운데 하나이다.
프라도 거리에 있던 자연사박물관의 건물을 새롭게 치장하여 1819년에 '왕립 회화 조각 뮤지엄'으로 설립했다.
스페인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건물로 현재도 뮤지엄의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후 왕실의 각 시설에 분산 소장되어 있던 미술품이 점차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수집도 충실히 이루어졌다.
1868년 혁명에 의해 명칭도 국립 회화 조각 뮤지엄으로 변경되었다.
1872년에는 1830년대의 자유주의 개혁 때 교회와 수도원으로부터 몰수한 미술품들을 모아놓은 마드리드의 트리니다드 뮤지엄을 흡수 합병했다.
1912년에는 정식 명칭을 프라도 뮤지엄으로 정해졌고
20세기에 들어와 부속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소장품의 수도 더욱 늘었다.
소장품 대부분은 유화로 약 3만 점에 달한다.
역대 스페인 국왕의 수집품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취향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육적 목적에 따라 계통적으로 작품을 수집한 뮤지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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