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교수신문의 청탁을 받고 올린 글입니다.



권순철의 얼굴과 김창렬의 물방울


가나아트와 현대화랑에서 파리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권순철과 김창렬의 개인전이 각각 열렸다.
권순철은 얼굴 화가로 알려졌고 김창렬은 물방울 화가로 알려졌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고국 방문전시회는 바람직하고 두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은 격려하며 힘을 실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근거 없이 칭찬만 하는 것은 작가에게도 관람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칭찬은 전시회 주최측과 평론가들에 의해 쏟아지는데,
무분별한 칭찬은 작가가 감당하기 어렵고 관람자를 기만하는 일이다.


권순철은 무채색에 가까운 채색에 매우 익숙하며 국내 화가들이 사용하지 않는 색을 자유롭게 사용하는데,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보니 색의 폭이 커진 것으로 이해된다.
국내 화가들은 동일한 환경 안에서 작업하다보니 거의 제한된 혹은 유사한 색들을 공유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외국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될 경우 국내 화가의 작품은 멀리서도 거의 가려낼 수 있을 정도이다.
색은 화가의 언어다.
많은 색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화가에게는 풍부한 어휘가 있으므로 다양한 표현을 구사할 수 있다.
채색에서 권순철의 작품이 지닌 장점은 표현의 다양성이다.


그의 작품은 매우 강렬하며 다가가서 볼수록 이미지는 사라지고 색질에 의한 질료적 추상이 나타난다.
이는 회화적으로 흥미로운 사건이다.
그의 구상과 추상의 병용은 마티에르와 이미지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를 그의 추상 이미지에서 발견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무채색에 가까운 잡색의 두터운 질료적 형상을 보면서 기억 속에 내재하는 형상을 끌어내어 우리가 바라보기를 원하는 이미지로 보게된다.
이는 회화적 퍼즐이며 작가와 관람자가 더불어 즐길 수 있어 유쾌하다.
릴리프와 같은 그의 얼굴은 조각가 알베르토 쟈코메티를 상기하게 하는데,
쟈코메티는 특정한 인물의 이미지를 제작한 데 반해 권순철은 일반적 인물의 이미지, 예를 들면 특정한 인물의 수심에 찬 얼굴이 아니라 누구의 얼굴일 수도 있는 수심에 찬 일반적인 얼굴을 제작하는 것이 다르다.


문제는 작가의 말과 평론가의 말이 작품과 거리가 먼 데 있다.

"이 땅의 삶이 고통스럽고 처절한 것이며 절망의 육신들이 삶과 죽음에 관계없이 우리 주위를 떠도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 작가는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한국의 노인네들 얼굴과 표정 속에서 우리 역사의 상흔을 본다. 늙고 주름진 얼굴, 순박한 혹은 근엄한 얼굴, 기나긴 인고의 노동이 새겨진 얼굴, 수심에 지친 표정 등, 그는 이런 얼굴을 수없이, 생생하게 그리고 또 그린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나는 서양화의 대가들이 그린 얼굴의 형상들을 보았다.
그곳에는 모네가 그린 아내 카미유의 임종의 얼굴이 있었고,
반 고흐가 그린 젊은 노동자의 옆모습과 주름이 패인 늙은 여인의 얼굴이 있었고,
화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높은 서양모자를 쓴 여인,
베이컨을 상기시키는 이미지도 있었다.
그는 차용한 대가의 이미지들에 특유의 채색을 가했으며 이런 패러디는 새로운 창작을 위해 용인된다.

그의 작품들에는 한국인의 얼굴도 있지만 거기에서 우리 역사의 상흔은 발견할 수 없다.
민족에게 고통을 준 역사적 상처의 흔적은 질료적 추상으로는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이라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사용해야만 상흔을 표현할 수 있다.
스페인 동란의 상흔을 나타낸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예로 들면 폭탄과 울부짖은 어미를 나타낸 추상화시킨 이미지가 상흔을 나타내는 것이지 구체적 형상을 비껴간 권순철의 질료적 추상으로는 상흔을 표현할 수 없다.
회화적 퍼즐만이 있을 뿐이다.


김창렬에 관해서는 길게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일찍이 1970년대 초에 물방울을 대상과 관념 사이의 매개체로 부각될 수 있도록 그린 것에는 경의를 표한다.
그렇지만 동일한 주제를 평생 그린 화가가 과거에 없었고 더 이상 창작을 할 수 없을 때,
즉 다른 주제를 그릴 수 없을 때 화가들은 붓을 던지고 화가의 생을 마감했다.
김창렬은 물방울을 삼십 년 이상 그리면서 동일한 주제의 그림을 양산하고 있다.
카탈로그에 실린 평론은 그의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동양적 미학의 정수를 서구 회화에 주입하고 있다",
"불교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발견할 수 있음직한 한 방울의 물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태양들이 빛을 발하는 무한한 공간이 담겨 있음"
등을 읽으면서 꿈보다 해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의 평론 때문에 작품 따로 평론 따로 작가도 관람자도 모두 피해를 입는다.


물, 흙(혹은 모래나 먼지), 불, 바람, 즉 水地火風은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기원전 6세기부터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기본 요소로 사고되었다.
서양에서는 탈레스와 밀레토스 학파가 만물의 근원을 각각 水地火風의 하나로 보았고 기원전 5세기 중반 프로타고라스에 와서 네 요소 모두로 보는 합리적인 견해가 생겼다.
동서의 사상적 교류가 없었을 때인데 불교에서 또한 그렇게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네 가지 중 하나를 테마로 삼으면 철학적 평론을 받기 십상이다.
비디오 작가 비욜라를 포함하여 몇몇 작가들이 이런 요소를 테마로 삼아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사용한 요소에 대한 철학적 인식의 바탕에서 작업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을 만했다.
하지만 김창렬의 물방울은 이런 사고의 결과물로 보이지 않는다.
물방울 외에도 물을 주제로 좀더 다양하고 사고적인 작업을 했더라면 물의 철학을 그에게도 적용할 수 있겠지만
물방울만을 그릴 뿐 그 밖의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회화적 불구 내지는 미학적 파산을 의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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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로마 피에타>


1497년 7월 미켈란젤로의 아버지 로도비코가 두 번째로 맞았던 아내가 죽었다.
로도비코는 그녀가 결혼할 때 가져온 혼인지참금을 처가에 되돌려주어야 했으므로 미켈란젤로에게 돈을 요구했다.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돈이라도 보내겠다면서 자신도 경제적으로 궁핍하다고 적었다.
그는 피에로 데 메디치를 위해 조각을 제작하기로 했으므로 대리석을 구입했지만
피에로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리석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조각으로 제작했으며,
5두카트를 주고 대리석을 하나 더 샀지만 작품을 제작하는 데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질이 나빠 돈만 없앤 꼴이 되었고,
해서 다시 대리석을 구입하느라 여유 돈이 없으니 이해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해 갈리와 인연을 맺은 미켈란젤로는 갈리를 통해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추기경 장 빌에르 드 라그롤라로부터 의뢰를 받아 <피에타 Pieta>(1498~1500)를 제작하게 되었다.
추기경은 이 작품을 성 페트로넬라 교회에 장식하려고 주문했다.
추기경과 미켈란젤로 사이의 계약은 1498년 8월 29일에 맺어졌지만
추기경이 말을 한 필 살 돈을 미리 주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토스카니의 카르라라Carrara 채석장에 가서 1497년 11월에 직접 대리석을 가져와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조각가가 채석장에 가서 자신이 사용할 재료를 직접 구입하는 건 보통이었으며
미켈란젤로가 채석장을 찾은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채석장 여러 곳을 두루 둘러보고 최상의 대리석을 구입했다.

이 작품은 나중에 제작한 <피에타>들과 구별하기 위해 <로마 피에타>로 불리운다.
피에타는 '가장 경건한 Most Holy'이란 뜻이다.
마리아가 죽은 아들 그리스도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있는 모습이 보통이다.
피에타는 14세기 독일에서 발전되었고 르네상스에 와서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이미지들 중 하나가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23살 때 제작하기 시작하여 25살 때 완성한 <로마 피에타>는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다.
그리스도이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비탄에 빠진 모습이 매우 우아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신의 어머니는 지상의 어머니처럼 울지 않는다"고 했는데,

조용히 머리를 숙인 모습이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는 동력적인 요소가 없고 오직 내려뜨러진 왼손만이 고통을 전한다.
뵐플린은 이를 16세기의 감정으로 보면서 형식적인 면에서 15세기 피렌체 양식에서 나왔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했다.
그는 마리아의 머리가 다른 어떤 머리와도 같지 않지만 그래도 과거 피렌체인들이 사랑했던 가늘고 섬세한 유형이라고 했는데,
훗날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더욱 더 넓고 강력한 육체의 모습이라서 수긍이 된다.
만약 미켈란젤로가 훗날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가정한다면 두 인물을 훨씬 더 긴밀한 덩어리로 뭉쳐놓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 작품은 현재 성 베드로 성당 아래층에 전시되어 있는데,
방탄유리로 가려져 있고 멀찌감치서 관람하도록 되어 있어 마치 진열장에 전시된 주각 위의 공예품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시된 것으로 그가 의도한 빛에 의한 효과를 즐길 수 없게 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바위에 앉아 있고 그리스도의 왼발이 닿는 아래 나무뿌리가 있는데,
사후의 삶을 상징한다.
앞서 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조각의 받침대는 부속적인 요소가 아니라 조각 자체에 내포되는 의미를 지니는 조각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는 <바쿠스>를 완성시키자마자 이 작품을 제작했으며
두 작품 모두 받침대를 낮게 한 것은 바닥에 낮게 두게 하기 위해서였다.
주각은 현대 미술관에서 생긴 개념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만 해도 조각은 관람자가 손을 대면 닿을 수 있도록 낮게 진열했다.

관람자의 시선은 우선 마리아에게로 향할 것이다.
아름다운 용모의 마리아의 얼굴은 사랑스러우면서도 근심으로 가득찼다.
베일을 쓴 머리는 조금 커 보이고 표정은 침착하면서도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안고 있는 시신이 신의 아들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로서 그녀에게 비탄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관람자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아래로 약간 숙인 채 침묵으로 일관한다.
미켈란젤로는 비탄과 더불어 기품을 유지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는 마리아의 앞이마에 가는 선을 새겨 넣었는데,
이는 자연광이 위에서 아래로 비출 경우 그늘이 지는 경계선이 된다.
그가 경계선을 새겨 넣음으로써 그늘이 선에 닿아 얇은 망사처럼 보이도록 고안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가슴에 대각선의 장식 띠를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으로 적어 넣었다.
바사리에 의하면 어떤 두 사람이 밀라노 조각가 고보Gobbo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하면서도
작품에 서명이 없어 그것이 고보의 작품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미켈란젤로가 그 날 밤 성모의 가슴 장식띠에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이것을 제작했음 MICHELANGELUS BUONARROTUS FIORENTINUS FACIEBAT'이라고 적었다.
고보는 '곱추'란 뜻으로 조각가의 본명은 크리스토페로 솔라리Cristofero Solari(1460년경~1527)로 알려졌다.

미켈란젤로가 장식띠에 피렌체인이라고 적은 것을 놓고 그가 자신의 태생을 적어 넣음으로써
피렌체인이 미술에 있어 밀라노인에 비해 우수함을 나타내려고 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장식때 아래 몸이 유기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봐서 바사리가 전하는 바와는 달리
미켈란젤로가 그 날 밤 돌연히 서명했다기보다는 조각을 제작할 때부터 띠에 서명하려고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작품에 서명한 것은 이것뿐이다.


미켈란젤로는 <로마 피에타>를 제작하면서부터 카톨릭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피치노로부터 사랑과 미의 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정신에 내재하는 이미지 immagini dell intelletto"를 대리석이란 질료로 구체화했다.
자신의 예지를 신뢰한 그는 예지 안에서 미를 질료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정신의 형상을 질료로 구체화하는 것을 예술가의 사명으로 인식하며 미술을 형상과 질료 사이에 교량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보다 더욱 더 고상한 정신의 형상 혹은 선의 원형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가 정신의 형상을 돌덩이에 새겨 넣으면 돌덩이가 생명력을 지녔고 조각의 드러난 형상은 정신 안에 있는 그의 형상에 상응했다.

그에게 조각을 제작하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불멸하는 지고의 선 혹은 미에 대한 사랑으로 질료는 사랑의 대상으로 임시 존재할 뿐이다.
그는 인체의 미적 형체에 전념했는데,
인체는 그에게 우주와 다름없었으며,
아름다운 인체는 신으로 하여금 관조를 용이하게 해주는 작업이었다.

현재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로마 피에타>를 제작하면서
그는 삼십 중반에 가까운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젊은 여인으로 묘사했다.
실재로는 오십을 넘었을 마리아를 젊은이의 모습으로 묘사한 이유는
불멸의 젊음으로 마리아의 온전한 순결을 상징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최소한 천박한 사고라도 환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육체를 문제가 되게 한 것 같았다.”

마리아가 예수보다 젊게 묘사된 것은 단테의 『천국편 Paradiso』에서 성 베르나르의 기도와도 관련이 있다.

베르나르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동정녀 어머니, 당신 아들의 딸이여,
비천하면서도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격찬을 받는 이여,
영원한 의지의 목적을 정하신 분이여,
당신이야말로 인류를 매우 고상하게 만드셨고
조물주로 하여금 피조물들을 멸시하지 않게 하시고
조물주 자신을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이 작품을 의뢰한 추기경 장 빌에르는 작품이 완성되는 것도 보기 전 1499년 8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 왕이 바티칸에 파견한 사람들 가운데 최고 책임자였으므로 시신은 프랑스 왕의 예배당인 성 페트로닐라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이 작품은 완성되자마자 추기경의 묘비 평석 바로 앞 낮은 방형 대좌 위에 세워졌다.
그 후 옛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하며 성 페트로닐라 예배당을 부수게 되자 작품의 위치가 바뀌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서명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한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과 더불어
초기 르네상스를 마감하고 예술적으로 더욱 더 진전된 성기 르네상스를 연 초기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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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악마적 이미지의 영향은 오늘날에도 발견된다 


 

 

선량공 필리프Philip the Handsome(1478~1506)가 1504년 보스에게 <최후의 심판>을 주문했고
필리프의 장모이자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 1세Isabella I(1451~1504)가 보스의 작품을 세 점 소장했으므로
보스의 작품은 네덜란드뿐 아니라 스페인에서도 인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실 사이의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와 스페인 왕실이 통합되자 많은 스페인인들이 플랑드르로 왔으며 상당수가 그의 작품을 수집했다.
나소의 헨드리크 3세Hendrik III의 세 번째 부인 멘시아 데 멘도자Mencia de Mendoza는 남편이 타계한 후 1538년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 보스의 작품 몇 점을 갖고 갔다.
보스의 걸작 <지상 쾌락의 동산>은 헨드리크 후손 빌렘이 소장했다.
이 작품을 포함하여 그의 여러 작품이 알바 공작이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몰수되었으며 결국 펠리페 2세의 손에 들어갔다.

보스의 작품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최초의 풍경화가로 알려진 요아힘 파티니르에게 영향을 주었다.
플랑드르 화가 파티니르는 인물을 동반한 풍경화를 그렸고 1515년에는 안트베르펜 화가들의 길드 일원이 되었다.
그는 1521년 알브레흐트 뒤러Albrecht Durer(1471~1528)를 만났으며
뒤러는 은 메탈 포인트를 사용하여 파티니르의 초상을 그리면서 그를 ‘뛰어난 풍경화가’로 기록했다.
일상적인 인물과 장면 그리고 상징주의에 의한 보스의 교훈적 양식은 플랑드르 화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플랑드르 화가들이 특히 보스의 악마적 이미지에 영향을 받았음은 많은 그들의 드로잉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영향은 오늘날에도 발견된다.

회화양식에 대한 보스의 관심은 또한 궁정과 교회 미술에 우위를 점한 이탈리아 화가들의 영향에 대한 반동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브뢰겔을 포함하여 많은 화가들이 보스의 양식을 받아들였지만
그의 깊은 종교적 교훈과 자성을 촉구하는 요소는 사라지고 단순히 관람자에게 즐거운 경악을 환기시키는 기묘한 형태들을 즐겨 사용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는데,
예를 들면 저주받은 영혼을 고문하고 괴롭히는 중세의 지옥에 대한 보스의 묘사는 후기 화가들에 의해 악마에 의해 흥이 연출되는 디즈니 랜드식 놀이공원이 되었다.
악마들이 목적 없이 등장하고 성인을 유혹하는 매춘부를 지나치게 관능적으로 묘사한 데서
보스의 의도보다는 기법만을 받아들였음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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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모작과 원작


보스의 작품은 16세기에 널리 알려졌으며 인기가 많았던 만큼 많은 모사품들이 생겨났다.
더러는 보스의 작품을 훌륭하게 모방만 한 것이 아니라 보스의 서명까지도 모방해서 적어넣었으므로
이런 작품은 쉽사리 보스의 것으로 잘못 판단하게 만든다.
보스의 원작을 복원했거나, 붓질을 가했거나, 아예 새로운 이미지를 삽입한 경우도 있어 이런 경우 솜씨가 훌륭해서 양식적으로 비교하기가 어렵다.

원작에 대한 제작연대와 원작의 진위를 가려내는 방법으로 과학을 응용할 수 있다.
패널화를 주문받았을 경우 보스는 사용할 나무를 장만한 후 최소한 2년 이상 말려야 하며
나무껍질 바로 아래 연한 목재를 사용할 경우에는 무려 9년이나 말려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완성한 후 물감이 마르는 데도 족히 2년이 걸린다.
따라서 주문을 받은 해에 6년을 더하는 것이 안전하게 제작연대를 추정하는 방법이 된다.
보스 시대보다 훨씬 뒤에 사용된 나무임을 밝혀지면 자연히 보스의 작품이 아님이 자명해진다.
이렇게 해서 모작으로 판명된 네 점은 다음의 것들이다.


<가시 왕관 Crowning with Thorns>, 에스코리알 소재, 1527/33년 이후에 제작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필라델피아 소재, 1557/63년 이후에 제작
<가나의 혼례잔치 Marriage Feast at Cana>, 로테르담 소재, 1555/61년 이후 제작
<그리스도의 탄생 Nativity>, 콜롱 소재, 1562/68년 이후 제작

다음은 보스의 원작들로 인정받는 것들로 현재의 소재지와 제작연대순이다.

<최후의 심판 Last Judgement>, 뮌헨 소재, 1442/48
<지상 쾌락의 동산 Garden of Earthly Delight>, 왼쪽 날개 그림 복제, 에스코리알 소재, 1449/55
<지상 쾌락의 동산 Garden of Earthly Delight>, 프라도 소재, 1460/66
<성 안토니우스 Saint Anthony>, 프라도 소재, 1462/68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재, 1468/74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프랑크푸르트 소재, 1470/76
<세례 요한 Saint John the Baptist>, 마드리드의 라자로 갈디아노Lazaro Galdiano 뮤지엄 소재, 1474/80
<최후의 심판 Last Judgement>, 빈의 아카데미Akademie 소재, 1476/82
<성 히에로니무스 Saint Jerome>, 겐트Ghent 소재, 1476/82
<기증자가 있는 십자가 처형 Crucifixion with Donor>, 브뤼셀 소재, 1477/83
<가시 왕관 Crowning with Thorns>, 런던 소재, 1479/85
<최후의 심판 Last Judgement>, 브루게Bruges 소재, 1480/86
<내세의 환영 Visions of the Hereafter>, 베니스 소재, 1484/90
<바보들의 배 Ship of Fools>, 파리 소재, 1485/91
<은자 성인들의 세쪽 제단화 Hermit Saints Triptych>, 베니스 소재, 1487/93
<여행자 The Wayfarer>, 로테르담 소재, 1487/93
<수전노의 죽음 Death and the Miser>, 워싱턴 소재, 1488/94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 The Stone Operation(the Cure of Folly)>, 프라도 소재, 1488/94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보스턴 소재, 1489/95
<팟모스 섬의 성 요한 Saint John on Patmos>, 베를린 소재, 1489/95
<성 크리스토퍼 Saint Christopher>, 로테르담 소재, 1490/96
<십자가 처형당한 순교자 Crucified Martyr>, 베니스 소재, 1491/97
<십자가를 운반하는 그리스도 Christ Carrying the Cross>, 에스코리알 소재, 1492/98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 필라델피아 소재, 1493/99
<성모자 Virgin and Child>, 개인소장, 1494/1500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Temptation of Saint Anthony>, 리스본 소재, 1495/1501
<마술사 Conjurer>, 생제르맹앙레Saint-Germain-en-Laye 소재, 1496/1502
<건초 수레 The Hay Wain>, 에스코리알 소재, 1498/1504
<욥 이야기 The Story of Job>, 브루게Bruges 소재, 1501/07
<대홍수 The Flood>, 로테르담 소재, 1508/14
<건초 수레 The Hay Wain>, 프라도 소재, 1510/1516


보스의 원작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했지만
연대학dendrochronology은 제한된 의미를 가질 뿐이다.
뮌헨 소재 <최후의 심판>은 1442/48년에 그려진 것으로 가장 먼저 그려진 것으로 소개했지만
양식으로 보면 그렇게 추정할 수 없다.
프라도 소재 <지상 쾌락의 동산>은 1460/66에 제작된 것으로 판정되도라도
그림이 평편하고 원근이 없는 풍경으로 볼 때 오히려 초기 작품으로 꼽아야 한다.

연대순의 배열은 단지 가능한 가장 빠른 제작연대를 알려주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그림이 몇 개의 플랭크plank(보통 두께가 2~6인치에 폭이 9인치 이상),
즉 크기에 따라서 추정되는 제작연대는 달라질 수 있다.
<지상 쾌락의 동산>의 경우 최소한 6개의 플랭크가 사용되었으며 세 가지 다른 나무로 된 플랭크가 사용되었다.
모든 플랭크가 마르는 데 소요되는 기간은 30~40년이 걸린다.
여기에 물감이 마르는 데 소요되는 기간을 합치면 제작연대는 더욱 더 후에 그려진 것이 된다.

필라델피아 소재 <동방박사의 경배>는 1493/99년에 그린 것이고
생제르맹앙레Saint-Germain-en-Laye 소재 <마술사>는 1496/1502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최소한 부분적으로 보스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나무의 수명으로 볼 때 보스의 초기작품이 될 수 없다.
두 작품 모두 그의 작업장에서 그려진 것으로 짐작된다.

프라도 소재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은 1488/94년 그려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배경의 풍경이 현대식이며 테이블의 다리가 르네상스 스타일인 것으로 봐서 실제 제작연대는 이보다 퍽 후일 것으로 짐작된다.

프라도 소재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가지 종말이 있는 식탁보 Tabletop of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 Four Last Things>는 위의 연대순에는 없는 것으로 보스의 가장 초기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왔다.
이 작품의 테두리를 벗겨낼 수 없어 나무의 수명을 연대학적으로 추정할 수 없지만,
많은 학자들은 초기 작품으로 보지 않고 15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원시적인 풍경, 작은 나무, 엄격한 구성이 보스풍의 그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보스는 작품을 제작할 때 자를 사용했으므로 원근의 비례를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했지만
이런 점을 이 작품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나무의 수명으로 봐서 초기 작품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작품은 프라도 소재 <성 안토니우스>(1462/68),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재 <동방박사의 경배>(1468/74),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소재 <이 사람을 보라>(1470/76)이다.
일부 학자들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재 <동방박사의 경배>가 1550년경에 그려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단순하며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 금색 그리고 터널 같은 구성이 초기 작품으로 보여진다.
뉴욕의 <동방박사의 경배>와 프라도 소재 <동방박사의 경배>는 등장한 요소들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작품에 적힌 보스의 서명은 원작을 가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보스의 제자와 추종자들이 보스의 서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15세기 네덜란드 화가들 가운데 보스처럼 수수께끼의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없었다.
종교를 주제로 한 그의 그림은 당시 화가들의 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가 낯선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그렸으므로 관람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비종교적인 그림도 많이 그렸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이런 그림들은 주로 말년 명성이 드높을 때 그린 것들로 부자들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들이다.
그는 1500년경부터 상류층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의 후원자들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증자가 삽입된 그림들로는 빈 소재 <최후의 심판>, 프랑크푸르트 소재 세쪽 제단화 <순교자 십자가 처형, 세례 요한 Crucified Martyr, Saint John the Baptist>, 그리고 프랑크푸트르 소재 <이 사람을 보라>이며 보스 자신이 기증자를 삽입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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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양식을 모방한 브뢰겔


보스가 타계한 1516년 네덜란드 미술에는 변화가 생겼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이 북부 네덜란드에 미쳤으며 그 중심지는 안트베르펜이었다.
이런 과도기를 대표하는 화가는 당시 유행하던 초상화를 그린 얀 모스타르트Jan Mostaert(1475?~1555/6)였다.
그의 작품에는 15세기 양식에 새로운 르네상스의 요소들이 어색하게 동화되어 있다.
이런 과도기에 보스의 그로테스크한 원래 이미지를 십분 살린 사람은 브뢰겔이다.
다만 그의 지옥 풍경은 보스의 것에 비하면 단조롭고 악마가 일상의 실재와 같아서 설득력이 부족할 뿐이다.

브뢰겔은 얀 반 에이크와 루벤스 사이 중간에 위치하며 플랑드르 미술에서 두 거장과 대등한 위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보스의 양식에 일치하는 점이 많으나 세부적으로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보스의 작품에는 인물들의 다양함과 더불어서 상상력이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데 비해 브뢰겔의 작품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더라도 내용면에서는 단조롭다.
하지만 브뢰겔을 평가하는 데 있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끊임없는 유머, 인물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 진부한 아이디어를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시키는 상상력이다.
특히 풍경화와 농민화에 나타난 유머는 늘 관람자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17세기 초 네덜란드 미술사학자로서 브뢰겔에 대한 최초 전기를 쓴 카렐 반 만데르Karel van Mander(1548~1606)는 적었다.

"브뢰겔에게는 진지하게 감상할 만한 작품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조용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사람이라 해도 브뢰겔의 작품을 보면 웃거나 적어도 미소를 띠우지 않을 수 없다."

반 만데르는 농민이 아니고서는 전원생활의 노동과 즐거움을 이그처럼 충실히 묘사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브뢰겔을 농민 출신 화가로 보았다.
그의 기괴한 장면과 익살스러운 표현은 보스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으로 그가 보스의 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이런 예를 <화가와 미술품 감식가 The Painter and the Connoisseur>에서 본다.
브뢰겔의 작품에서 보스의 작품에 나타난 동물 묘사가 그대로 인용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브뢰겔의 <색욕 Luxuria(Lust)>에서 하단 오른편 뒤엎어진 파충류의 동물과
<자만 Superbia(Pride)>에서 상단 왼편 산 위에 물구나무를 선 개구리의 모습은
보스 당시 알라르트 뒤 하멜Alart Du Hameel이 판화로 발간한 보스의 <최후의 심판>에서 하단 왼편의 파충류의 동물과 상단 왼쪽 끝의 개구리를 묘사된 형상들과 똑같아 브뢰겔이 그대로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판화는 16세기 중반에 다시금 발간되었다.

브뢰겔의 작품에서 보스의 영향을 발견하는 건 쉬우며 그래서 루도비코 기차르디니Ludovico Guicciardini는 브뢰겔을 가리켜서 “제2의 보스 second Hieronymus Bosch”라고 했다.
브뢰겔이 이렇게 불리게 된 건 코크가 브뢰겔을 통해 보스풍의 판화를 발간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두려고 한 데 기인했다.
브뢰겔의 우화 드로잉에서는 풍경화에서 보여준 양식이 결여되어 있다.
세부적인 것을 약간 모호하게 묘사하는 방법이 우화 드로잉에서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화 드로잉은 만화처럼 그려야 하고 시사하는 바가 분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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