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로마 피에타>
1497년 7월 미켈란젤로의 아버지 로도비코가 두 번째로 맞았던 아내가 죽었다.
로도비코는 그녀가 결혼할 때 가져온 혼인지참금을 처가에 되돌려주어야 했으므로 미켈란젤로에게 돈을 요구했다.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돈이라도 보내겠다면서 자신도 경제적으로 궁핍하다고 적었다.
그는 피에로 데 메디치를 위해 조각을 제작하기로 했으므로 대리석을 구입했지만
피에로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리석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조각으로 제작했으며,
5두카트를 주고 대리석을 하나 더 샀지만 작품을 제작하는 데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질이 나빠 돈만 없앤 꼴이 되었고,
해서 다시 대리석을 구입하느라 여유 돈이 없으니 이해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해 갈리와 인연을 맺은 미켈란젤로는 갈리를 통해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추기경 장 빌에르 드 라그롤라로부터 의뢰를 받아 <피에타 Pieta>(1498~1500)를 제작하게 되었다.
추기경은 이 작품을 성 페트로넬라 교회에 장식하려고 주문했다.
추기경과 미켈란젤로 사이의 계약은 1498년 8월 29일에 맺어졌지만
추기경이 말을 한 필 살 돈을 미리 주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토스카니의 카르라라Carrara 채석장에 가서 1497년 11월에 직접 대리석을 가져와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조각가가 채석장에 가서 자신이 사용할 재료를 직접 구입하는 건 보통이었으며
미켈란젤로가 채석장을 찾은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채석장 여러 곳을 두루 둘러보고 최상의 대리석을 구입했다.
이 작품은 나중에 제작한 <피에타>들과 구별하기 위해 <로마 피에타>로 불리운다.
피에타는 '가장 경건한 Most Holy'이란 뜻이다.
마리아가 죽은 아들 그리스도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있는 모습이 보통이다.
피에타는 14세기 독일에서 발전되었고 르네상스에 와서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이미지들 중 하나가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23살 때 제작하기 시작하여 25살 때 완성한 <로마 피에타>는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다.
그리스도이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비탄에 빠진 모습이 매우 우아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신의 어머니는 지상의 어머니처럼 울지 않는다"고 했는데,
조용히 머리를 숙인 모습이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는 동력적인 요소가 없고 오직 내려뜨러진 왼손만이 고통을 전한다.
뵐플린은 이를 16세기의 감정으로 보면서 형식적인 면에서 15세기 피렌체 양식에서 나왔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했다.
그는 마리아의 머리가 다른 어떤 머리와도 같지 않지만 그래도 과거 피렌체인들이 사랑했던 가늘고 섬세한 유형이라고 했는데,
훗날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더욱 더 넓고 강력한 육체의 모습이라서 수긍이 된다.
만약 미켈란젤로가 훗날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가정한다면 두 인물을 훨씬 더 긴밀한 덩어리로 뭉쳐놓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 작품은 현재 성 베드로 성당 아래층에 전시되어 있는데,
방탄유리로 가려져 있고 멀찌감치서 관람하도록 되어 있어 마치 진열장에 전시된 주각 위의 공예품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시된 것으로 그가 의도한 빛에 의한 효과를 즐길 수 없게 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바위에 앉아 있고 그리스도의 왼발이 닿는 아래 나무뿌리가 있는데,
사후의 삶을 상징한다.
앞서 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조각의 받침대는 부속적인 요소가 아니라 조각 자체에 내포되는 의미를 지니는 조각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는 <바쿠스>를 완성시키자마자 이 작품을 제작했으며
두 작품 모두 받침대를 낮게 한 것은 바닥에 낮게 두게 하기 위해서였다.
주각은 현대 미술관에서 생긴 개념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만 해도 조각은 관람자가 손을 대면 닿을 수 있도록 낮게 진열했다.
관람자의 시선은 우선 마리아에게로 향할 것이다.
아름다운 용모의 마리아의 얼굴은 사랑스러우면서도 근심으로 가득찼다.
베일을 쓴 머리는 조금 커 보이고 표정은 침착하면서도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안고 있는 시신이 신의 아들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로서 그녀에게 비탄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관람자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아래로 약간 숙인 채 침묵으로 일관한다.
미켈란젤로는 비탄과 더불어 기품을 유지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는 마리아의 앞이마에 가는 선을 새겨 넣었는데,
이는 자연광이 위에서 아래로 비출 경우 그늘이 지는 경계선이 된다.
그가 경계선을 새겨 넣음으로써 그늘이 선에 닿아 얇은 망사처럼 보이도록 고안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가슴에 대각선의 장식 띠를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으로 적어 넣었다.
바사리에 의하면 어떤 두 사람이 밀라노 조각가 고보Gobbo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하면서도
작품에 서명이 없어 그것이 고보의 작품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미켈란젤로가 그 날 밤 성모의 가슴 장식띠에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이것을 제작했음 MICHELANGELUS BUONARROTUS FIORENTINUS FACIEBAT'이라고 적었다.
고보는 '곱추'란 뜻으로 조각가의 본명은 크리스토페로 솔라리Cristofero Solari(1460년경~1527)로 알려졌다.
미켈란젤로가 장식띠에 피렌체인이라고 적은 것을 놓고 그가 자신의 태생을 적어 넣음으로써
피렌체인이 미술에 있어 밀라노인에 비해 우수함을 나타내려고 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장식때 아래 몸이 유기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봐서 바사리가 전하는 바와는 달리
미켈란젤로가 그 날 밤 돌연히 서명했다기보다는 조각을 제작할 때부터 띠에 서명하려고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작품에 서명한 것은 이것뿐이다.
미켈란젤로는 <로마 피에타>를 제작하면서부터 카톨릭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피치노로부터 사랑과 미의 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정신에 내재하는 이미지 immagini dell intelletto"를 대리석이란 질료로 구체화했다.
자신의 예지를 신뢰한 그는 예지 안에서 미를 질료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정신의 형상을 질료로 구체화하는 것을 예술가의 사명으로 인식하며 미술을 형상과 질료 사이에 교량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보다 더욱 더 고상한 정신의 형상 혹은 선의 원형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가 정신의 형상을 돌덩이에 새겨 넣으면 돌덩이가 생명력을 지녔고 조각의 드러난 형상은 정신 안에 있는 그의 형상에 상응했다.
그에게 조각을 제작하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불멸하는 지고의 선 혹은 미에 대한 사랑으로 질료는 사랑의 대상으로 임시 존재할 뿐이다.
그는 인체의 미적 형체에 전념했는데,
인체는 그에게 우주와 다름없었으며,
아름다운 인체는 신으로 하여금 관조를 용이하게 해주는 작업이었다.
현재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로마 피에타>를 제작하면서
그는 삼십 중반에 가까운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젊은 여인으로 묘사했다.
실재로는 오십을 넘었을 마리아를 젊은이의 모습으로 묘사한 이유는
불멸의 젊음으로 마리아의 온전한 순결을 상징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최소한 천박한 사고라도 환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육체를 문제가 되게 한 것 같았다.”
마리아가 예수보다 젊게 묘사된 것은 단테의 『천국편 Paradiso』에서 성 베르나르의 기도와도 관련이 있다.
베르나르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동정녀 어머니, 당신 아들의 딸이여,
비천하면서도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격찬을 받는 이여,
영원한 의지의 목적을 정하신 분이여,
당신이야말로 인류를 매우 고상하게 만드셨고
조물주로 하여금 피조물들을 멸시하지 않게 하시고
조물주 자신을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이 작품을 의뢰한 추기경 장 빌에르는 작품이 완성되는 것도 보기 전 1499년 8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 왕이 바티칸에 파견한 사람들 가운데 최고 책임자였으므로 시신은 프랑스 왕의 예배당인 성 페트로닐라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이 작품은 완성되자마자 추기경의 묘비 평석 바로 앞 낮은 방형 대좌 위에 세워졌다.
그 후 옛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하며 성 페트로닐라 예배당을 부수게 되자 작품의 위치가 바뀌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서명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한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과 더불어
초기 르네상스를 마감하고 예술적으로 더욱 더 진전된 성기 르네상스를 연 초기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