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의 양식을 모방한 브뢰겔
보스가 타계한 1516년 네덜란드 미술에는 변화가 생겼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이 북부 네덜란드에 미쳤으며 그 중심지는 안트베르펜이었다.
이런 과도기를 대표하는 화가는 당시 유행하던 초상화를 그린 얀 모스타르트Jan Mostaert(1475?~1555/6)였다.
그의 작품에는 15세기 양식에 새로운 르네상스의 요소들이 어색하게 동화되어 있다.
이런 과도기에 보스의 그로테스크한 원래 이미지를 십분 살린 사람은 브뢰겔이다.
다만 그의 지옥 풍경은 보스의 것에 비하면 단조롭고 악마가 일상의 실재와 같아서 설득력이 부족할 뿐이다.
브뢰겔은 얀 반 에이크와 루벤스 사이 중간에 위치하며 플랑드르 미술에서 두 거장과 대등한 위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보스의 양식에 일치하는 점이 많으나 세부적으로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보스의 작품에는 인물들의 다양함과 더불어서 상상력이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데 비해 브뢰겔의 작품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더라도 내용면에서는 단조롭다.
하지만 브뢰겔을 평가하는 데 있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끊임없는 유머, 인물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 진부한 아이디어를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시키는 상상력이다.
특히 풍경화와 농민화에 나타난 유머는 늘 관람자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17세기 초 네덜란드 미술사학자로서 브뢰겔에 대한 최초 전기를 쓴 카렐 반 만데르Karel van Mander(1548~1606)는 적었다.
"브뢰겔에게는 진지하게 감상할 만한 작품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조용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사람이라 해도 브뢰겔의 작품을 보면 웃거나 적어도 미소를 띠우지 않을 수 없다."
반 만데르는 농민이 아니고서는 전원생활의 노동과 즐거움을 이그처럼 충실히 묘사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브뢰겔을 농민 출신 화가로 보았다.
그의 기괴한 장면과 익살스러운 표현은 보스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으로 그가 보스의 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이런 예를 <화가와 미술품 감식가 The Painter and the Connoisseur>에서 본다.
브뢰겔의 작품에서 보스의 작품에 나타난 동물 묘사가 그대로 인용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브뢰겔의 <색욕 Luxuria(Lust)>에서 하단 오른편 뒤엎어진 파충류의 동물과
<자만 Superbia(Pride)>에서 상단 왼편 산 위에 물구나무를 선 개구리의 모습은
보스 당시 알라르트 뒤 하멜Alart Du Hameel이 판화로 발간한 보스의 <최후의 심판>에서 하단 왼편의 파충류의 동물과 상단 왼쪽 끝의 개구리를 묘사된 형상들과 똑같아 브뢰겔이 그대로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판화는 16세기 중반에 다시금 발간되었다.
브뢰겔의 작품에서 보스의 영향을 발견하는 건 쉬우며 그래서 루도비코 기차르디니Ludovico Guicciardini는 브뢰겔을 가리켜서 “제2의 보스 second Hieronymus Bosch”라고 했다.
브뢰겔이 이렇게 불리게 된 건 코크가 브뢰겔을 통해 보스풍의 판화를 발간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두려고 한 데 기인했다.
브뢰겔의 우화 드로잉에서는 풍경화에서 보여준 양식이 결여되어 있다.
세부적인 것을 약간 모호하게 묘사하는 방법이 우화 드로잉에서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화 드로잉은 만화처럼 그려야 하고 시사하는 바가 분명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