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에의 호평에 대한 빈센트 반 고흐의 반응


시인이자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는 1890년 1월 상징주의 예술가들의 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 첫 번재 호에 '소외된 사람, 빈센트 반 고흐'란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으므로 빈센트의 이름은 이제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빈센트가 이 글을 읽고 동생에게 피력한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순진하고 진정한 화가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소개한다.

다음은 오리에의 평이다.

빈센트 작품의 특성은 대체로 넘쳐나는 힘, 넘쳐나는 신경과민, 과도한 표현 등으로 정의된다.
사물에 대한 맹목적 단정, 종종 발견되는 과감하게 단순화한 형태, 태양을 정면으로 대하는 오만함, 스케치와 채색에 나타나는 격정적 열정, 가장 사소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강렬한 형상, 이런 것들은 남성적이며 과감하고 거의 야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매우 섬세하다.
이처럼 자연주의자의 예술 저변에 베어있는 진정 이상적인 경향을 부정해버린다면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작품의 큰 부분은 도저히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경우 농부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처럼 당당하고 수선스러우며 야성적일 정도로 빛나는 이마를 가진 사람들로 묘사할 수 있을까?
빈센트는 늘 그들의 외모, 몸짓, 노동에 매혹되어 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석양 무렵의 불그스레한 하늘 아래서, 때론 활활 타오르는 정오의 황금빛 대지 한가운데 있는 그들의 모습을 쉬지 않고 그리게 한 것이다.
우둔하고 산업지상주의에 젖은 우리의 속성이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고정관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씨 뿌리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섬세하면서도 영광스러운 태양신화와 관련된 이야기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그의 집착을 이해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둥그런 태양, 그가 쉴새없이 반복해서 편집광적으로 그려낸 화려한 해바라기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빈센트는 오리에의 호평을 읽고 소감을 테오에게 적었다.


네가 보내준 오리에가 쓴 평론을 읽고 깜짝 놀랐다.
내 작품이 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글을 통해 앞으로 내가 어떻게 그려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평론은 정정해야 할 결함을 아주 잘 지적했다.
그래서 필자가 나뿐 아니라 모든 인상파 화가들이 올바른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썼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나는 물론이려니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는 공동의 이상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토록 불완전한 내 작품 여기저기에서도 장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격려하는 말이어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며 기회가 되면 사의를 꼭 ㅍㅅ허고 싶구나.
하지만 그 과업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내 등이 넓지 않다는 걸 확실히 밝혀두어야겠다.
그가 내 그림을 중심으로 썼으므로 감언이설을 듣는 것 같더구나.
(1890년 2월 2일 테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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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란다요의 제자가 된 미켈란젤로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르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1475년 3월 6일 월요일 해뜨기 네 시간 전 토스카니 사람들의 마을 카프레세Caprese로 불리운 아레조Arezzo 근처 작은 언덕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레조에서 북쪽으로 48km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아레조의 현재 공식 명칭은 카프레세 미켈란젤로이다.
미켈란젤로를 기리기 위해 마을 명칭 뒤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로도비코Ludovico di Leonardo Buonarroti Simoni는 피렌체의 공무원으로 작은 도시 카프레세의 시장podesta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둘째 아들이었고 첫째 아들 레오나르도는 도미니크회 수사가 되었는데, 가족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것 같다.
세째 아들은 부오나르로토Buonarroto로 불과 두 달 동안이었지만 시의원이 된 적이 있다.

로도비코는 6개월의 시장직을 마친 후 가족을 데리고 피렌체로 돌아와 시가 내려다보이는 산타 크로체 근처 작은 마을 세티냐노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농장을 경영했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태어난 지 한 달 되던 때였다.
부오나르로티 집안은 부유했으므로 피렌체에 저택을 갖고 있었고 시외에도 집이 있어 미켈란젤로는 두 곳에서 성장했다.
어머니 프란체스카Francesca Neri di Miniato del Sera는 그가 6살 때인 1481년에 타계했다.
어머니는 피렌체로 돌아와 타계하기 전까지 아들을 셋 더 낳았다.
아버지는 피렌체로 돌아온 후 아무 일도 안 하다가 미켈란젤로가 10살 때인 1485년에 재혼했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돌깍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가 조각가가 되는 데 반대했다.
그때만 해도 예술가란 직업은 부유층에서 볼 때 미천하게 취급되었으며 아버지는 그가 피렌체의 은행가이면서 상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이 조각에 집념을 갖고 있음을 알고는 피렌체의 유명한 프레스코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해주는 것이 아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미켈란젤로가 13살 때 그로부터 수학하게 했다.
로도비코는 미켈란젤로가 기를란다요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학할 것을 약속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미켈란젤로는 1488년 4월 1일부터 그가 말한 "기본 미술 the prime art"인 조각에 전념할 수 있었다.
기를란다요는 크고 매우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고 미켈란젤로는 그로부터 드로잉과 템페라 그리고 프레스코를 그리는 법을 배웠다.

당시 화가의 문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스승으로부터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받은 작업에 참여하여 부분적 일을 맡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기를란다요의 작업에 부분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두 점을 꼽을 수 있으며 1486~90년에 프레스코화로 제작된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에서 세례자 요한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과 <동정녀의 알현 Presentation of the Virgin>에서의 누드로 앉아 있는 남자와 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으로 추정된다.
기를란다요의 작품에는 과도한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회화적 이야기를 가볍게 여겼는데,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성가대석에 그린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생애의 경우 그림은 이야기적이더라도 성서를 모르는 사람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는 묘사하는 화가였지 이야기꾼은 아니었다.
그는 대상 자체가 관람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바랐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얼굴의 표정으로 그림이 생기 있게 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매우 열렬하게 입체감과 해부, 색채기술, 대기의 원근법 등을 탐구했지만 그는 일반적 수준 그 이상이 못되었다.
그는 회화에서 실험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시대의 평균적 특성을 갖춘 그는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기념비적인 효과를 창출하려고 한 예술가였다.
그는 세부적 관찰이 섬세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점에서 위대했다.
그는 탁월한 도안가이자 위대한 화가였다.

미켈란젤로는 훗날 아는 체 하기를 좋아하는 기를란다요로부터 배운 것이 별로 없었다고 투덜거렸지만 그의 작품 <도니 톤도 Doni Tondo>(1504)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에서 기를란다요의 영향이 두드러져 그가 스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초기 드로잉을 보면 그가 과거 피렌체 대가들 조토Giotto(1266년경~1337)와 마사초Masaccio(1401~28)의 작품을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1490년경 14살 혹은 그 이전에 그린 드로잉 두 남자의 모습은 조토가 1335년경에 그린 <사도 요한의 승천 Ascension of John Evangelist>의 왼쪽 두 사람을 모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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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1449~94)는 발도비네티Alesso Baldovinetti(1426년경~99)와 베로키오로부터 수학한 것 같다.
아버지는 금세공가였고 기를란다요란 이름은 금과 은으로 화관을 만든 데서 유래했다.
기를란다요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금세공을 배웠다.
그는 마사초가 카르미네에서 프레스코화를 그릴 때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았다고 한다.
바사리에 의하면 "기를란다요는 상점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언뜻 보고서도 모두를 아주 닮게 그릴 수 있었다"고 했다.
상 지미냐노에 있는 대성당의 산타 피나 예배당에 성녀 피나의 생애를 그렸을 때 그의 나이 불과 21살 때였다.
그는 1480년 31살 때 피렌체의 오니상티 교회와 수도원 식당에 4점의 프레스코화를 그린 후 대가로 불리었는데 그것들은 <성 제롬 St. Jerome>, <십자가에서 내림 Descent From the Cross>, <마돈나 델라 미세리코르디아 Madonna della Misericordia>, <최후의 만찬>이다.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에게 감동을 주었다.

기를란다요의 양식은 딱딱하며 단조롭고 동시대 화가 보티첼리에 비하면 더욱 더 유행에 뒤졌다.
그렇지만 장인적 기교에 뛰어났으며 사업에 능통해 피렌체에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다.
그의 동생들 베네데토Benedetto(1458~97)와 다비드Davide(1452~1525)가 조수로 그를 도았다.
그는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가서 시스티나 예배당에 <물고기를 잡는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는 그리스도 Christ Calling Peter and Abdrew from Their Nets>를 그렸는데, 배경의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고대의 도시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는 오래된 아크, 목욕탕, 기둥, 수도교aqueduct, 원형경기장 등을 드로잉하는 훈련을 스스로 했으며 언뜻 보고서도 재현해낼 수 있는 탁원한 재능을 가진 그는 자와 콤파스 없이도 대상을 정확한 비례로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에서 알게 된 로마의 메디치 은행 은행장 조반니 토르나부오니는 1485년 기를란다요에게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예배당에 <동정녀와 세례자 성 요한의 생애 Scenes from the Lives of the Virgin and St. John the Baptist> 시리즈를 그리면 1200두카트(3만 달러)를 주겠다며 마음에 들 경우 200두카트를 더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이것을 완성하는 데 5년이 걸렸고 1490년 예배당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토르나부오니는 자신의 마음에 꼭 든다면서 그러나 자신이 경제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있어 200두카트를 더 주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라고 말하자 기를란다요는 후원자가 흡족해 하는 것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면서 흡족해 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장을 모든 예술가들에게 열어놓고 누구든지 와서 일하게 했다.
그는 크고 작은 작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주문을 받아 조수들과 함께 작업했다.
제단화도 많이 그렸으며 그가 그린 초상화도 적지 않다.
그의 아들 리돌포Ridolfo(1483~1561)는 라파엘로의 친구이며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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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에 출여하여 유명작품 도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 알려진 도난 미술품은 14만 5천여 점에 이르고 해마다 1만 점이 도난당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도난당한 작품을 보면 피카소의 작품이 287점으로 가장 많고, 미로의 작품이 243점 샤갈의 작품이 210점이며 이것들의 가격은 27억 파운드에 달하고 알려지지 않은 도난 미술품을 합친다면 훨씬 많을 것입니다.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예술의 귀중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은 있을 수 있습니다. 피카소에게도 그런 욕심이 있었는데, 소개하지요.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지면을 통해 널리 홍보한 사람은 피카소의 친구이자 유명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입니다.
아폴리네르는 가정교사, 은행 서기, 언론인, 사진사의 일을 하다가 시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피카소를 만난 건 1903년이었고 곧 피카소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폴리네르는 1907년 벨기에인 게리 피에르란 사람을 비서로 채용했는데, 피에르는 훔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자였습니다.
하루는 피에르가 루브르 뮤지엄에 가서 돌로 된 작은 조각 두 점을 코트 안에 넣어 훔쳐왔습니다.
피카소의 일대기를 쓴 작가 존 리처드슨에 의하면 피카소는 루브르 뮤지엄에 새로 전시된 기원전 5, 6세기경의 고대 이베리아인의 돌조각에 대단한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피에르가 훔쳐온 이베리안인 조각 두 점을 보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합니다.
피카소는 피에르에게 돈을 주고 두 점을 샀습니다.
피카소가 1907년에 그린 그의 대표작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에 등장하는 두 여인의 얼굴이 이베리아인의 조각과 닮아서 그 얼굴들이 피에르가 훔쳐온 돌조각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습니다.

피에르는 미국으로 가서 4년 동안 지내다가 1911년 봄에 파리로 돌아왔는데 돈 씀씀이가 헤펐으며 경마에 많은 돈을 탕진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폴리네르는 피에르에게 돈을 꾸어줬고 잠자리도 제공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피에르는 아폴리네르에게 진 빚을 갚을 겸 돈이 필요해서 8월에 다시 루브르 뮤지엄으로 가서 이베리안인의 돌조각을 훔쳐왔습니다.
피에르가 아폴리네르의 주문을 받고 훔쳤는지 아니면 피에르가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훔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피에르는 그것을 아폴리네르에게 주었습니다.

그 날 공교롭게도 <모나리자>가 도난당했고 신문이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모나리자>를 훔친 범인은 루브르에 고용된 빈센조 페루지아였습니다.
그는 <모나리자>의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서 그 그림을 벽에서 떼어 계단으로 가져간 후 그곳에서 캔버스를 액자로부터 분리한 후 둘둘 말아 코트 안에 넣고 유유히 루브르를 빠져나왔던 것입니다.
페루지아는 2년 후 <모나리자>를 구입할 사람을 찾다가 50만 리라에 구입하겠다는 플로렌스인의 제의를 받았고 그때 쇠고랑을 찼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나리자>는 조금도 상한 데가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피카소와 연관이 있는 1911년 8월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하면,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사실이 보도된 후 <파리 저널>은 그것을 되돌려주는 사람에게는 신분을 보장해줄 뿐만 아니라 거액을 보상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피에르는 꾀가 나서 아폴리네르의 아파트에 있는 이베리아인 조각을 가져다 <파리 저널>에 건네주고 돈을 받은 후 루브르 뮤지엄의 안전상태가 매우 허술하다고 충고해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는 불안했습니다.
전에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피에르로부터 이베리아인 조각 두 점을 구입한 일이 불안했던 것입니다.
아폴리네르는 과거의 비행이 탄로날 것을 염려하여 피에르에게 160프랑을 주면서 기차를 타고 마르세이유로 도망치라고 했습니다.
그런 후 아폴리네르는 조각 두 점을 가방에 넣고 센 강에 던지려고 밤이 되기만을 기다리다가 그 방법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그것들을 <파리 저널>로 가지고 가서 자신의 신분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경찰에 신고했는지 9월 7일 경찰관이 아폴리네르의 아파트를 뒤졌고 아파트에서 피에르의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경찰관은 아폴리네르를 체포한 후 그가 <모나리자>를 훔친 자와 공모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고 상테 구치소에 수감했습니다.

아폴리네르는 구치소에 엿새 동안 구치소에 감금되었는데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경찰관은 피카소를 의심하고 심문하기 위해 연행했습니다.
심문관은 아폴리네르를 피카소가 있는 방으로 데려온 후 아폴리네르를 아느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겁에 질린 피카소는 창백한 얼굴로 평생 수치스럽게 여길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난 이 자를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훔친 조각품인 줄 알면서도 구입한 피카소는 법에 따라 스페인으로 추방되어야 마땅했는데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폴리네르는 풀려났지만 그때부터 피카소를 비겁한 놈으로 여겼습니다.
두 사람의 미학적 우정은 그대 깨지고 말았습니다.
피카소가 서른 살때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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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오늘 아침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교수신문은 주로 교수들이 구독하는 신문으로 내용 면에서 신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합니다.
매주 월요일에 발간되며 나의 글은 다음 주 월요일 신문에 기재될 것입니다.
미술평론가와 소설가 혹은 시인들이 작가에 관해 글을 쓸 때 어려운 용어를 쓰며 지나치게 과장하려고 하는데, 이 점을 비판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논리적인 문장으로 난해하게 글을 써서 자신들도 모르고 독자들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데, 이 점도 비판하려고 했습니다.
작가 또한 자신의 작품을 심오한 철학적 바탕에서 제작한 것인양 폼을 잡는데, 이 점을 비판하려고 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매우 단호하게 비판하고 싶었지만, 개인적인 공격으로 보여질까봐 그렇게 하지 못했으며, 교수신문 독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의중을 읽는 분들이므로 문체를 부드럽게 다듬었습니다.
이런 점이 골고루 잘 표현되었는지 감상하시기 바람니다.


오수환의 추상 이미지 회화


8월 25일자 동아일보 문화면에서 오수환의 작품전 기사를 보았다.
2004년작 <변화> 한 점과 기자가 쓴 글을 관심 갖고 읽었다.
화가에게 큰 지면을 할애했으므로 회화적으로 무슨 사건이라도 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기자는 “예술가의 길이 초월이나 절대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과 통한다면, 오수환은 이에 걸맞은 작가다”라는 말로 오수환을 소개했는데 ‘초월’과 ‘절대’란 말이 거슬린다.
미술이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예술가와 작품에 관해 글을 쓸 수 있지만 ‘초월’, ‘절대’, ‘구도자’ 등이란 말로 작가를 서술하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함정을 파는 것이다.
이런 개념들을 알만한 사람들이나 오수환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는 으름장으로 들린다.
오수환은 말한다.

“나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이미지’로 표현하려 한다.”

이 말을 기자가 “초월이나 절대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로 해석했구나 하고 생각되었다.
오수환의 말은 단순히 “나는 추상을 그린다”는 뜻이다.
그는 추상의 정의를 말한 것뿐이다.
단순한 의미를 의미심장한 듯한 단어를 구사하여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짐이 된다.


오수환에 적용된 또 다른 문장, “한 획을 긋는 것이 모든 형사의 출발점인 동시에 기운의 척도가 된다”는 말은
중국 화론의 서술이지만,
이를 쉽게 말하면
“이미지는 선을 긋는 것으로 시작되며 선에서 기품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오수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어려운 용어의 사용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소설가 한수산은 오수환에 관해 이렇게 썼다.

“그에게는 서양의 현대라는 것 그 가운데서도 포스트모던에 대한 치열한 의문과 옹호가 녹아 있고, 불교의 ‘불성은 일체 중생’이라는 사상이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진과 선을 종합하는 미가 여백과 곡선의 우아한 세계현실에의 정신적 조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독자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포스트는 ‘이후’란 뜻인데, “서양의 현대(모던)라는 것 그 가운데서도 포스트모던(모던 이후)”이란 의미를 알지 못하며,
“포스트모던에 대한 치열한 의문과 옹호가 녹아 있고”란 의미를 알지 못하고,
나머지의 말의 의미도 오수환의 작품과 관련해서 알 수 없다.
포스트모던에 대한 오수환의 어떤 의문과 옹호가 녹아 있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 밖에도 오수환에 관한 서술에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이 많이 있다.
이런 과장된 의미와 비논리가 만연하는 한 작가와 관람자 사이에 교량이 놓아지지 않는다.
예술가도 작품도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우리는 좀더 쉬운 말을 구사해야 한다.
쉬운 말에는 진실이 있지만 난해한 말은 진실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오수환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글이 난해해진 데는 오수환 자신도 책임이 있다.
그가 자신의 화론 혹은 예술론을 난해하게 설명하면서 명확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주제 ‘변화’에 관해 그는 말한다.

“자연의 색, 자연의 형태를 선택하지 않고 어떻게 자연스럽게 할까. 자연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건 ‘변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선택한 ‘변화’도 바로 자연이라는 테마다. ... 어떤 제한이나 규정으로부터 그것들을 다 풀어버리는, 다 놔버리는 쪽으로, 그렇게 가 볼까 한다.”

그의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사물을 묘사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자연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이 ‘변화’이다. 나는 자연을 상징한다. 자연스럽게 그리려고 한다.”


오수환의 말대로 이번 전시회에 소개된 작품들은 자연에 대한 그의 개인적 추상표현이다.
화가들마다 추상하는 방법이 다른데 그는 자신이 선호하는 선, 얼룩, 큰 반점들로 자연을 다양하게 상징했다.
특히 선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는 말한다.

“공간 속에서 색들이 대조를 이루며 사물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선을 해방시켜놓자. 선의 구조적인 힘을 소생시키자. 선은 더 이상 가시적인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선은 불균형이고 과정이다. 공허, 구성적 공허이다. 가식적이게 해주는 것, 나 자신을 하나의 선으로 만들어, 선이 되게 하는 방식.”

이 말 역시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그가 색의 대비에서 자연의 동력을 보았다면 당연한 느낌으로 선과 색은 회화의 본질이다.
화가에 따라서 색을 강조하거나 선을 강조한다.
색을 회화의 본질로 보는 사람은 색과 색이 만나는 곳에 선이 절로 생긴다고 보지만 선을 회화의 본질로 보는 사람은 형상이 우선이고 색은 선을 사용한 다음에 칠해지는 것으로 본다.
오수환은 선을 불균형, 과정, 공허, 구성적 공허이면서도 가식적이게 해주는 것이라면서 선이 현상이나 상태를 드러내더라도 그 자체는 과정이며 공허한 것이라고 말한다.
선이 자연의 모방이기 때문에 자연만큼 자연스럽지 못하므로 당연한 사고이다.
그래서 그는 선을 사물의 형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기분 내키는 대로 사용하여 추상이미지를 그리지만, 이런 식의 작업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 성과를 거두었고 그가 이런 작업을 한다고 해서 새삼스러운 회화적 사건은 아니다.


일찍이 동양의 서예는 유럽과 미국 화가들에 의해 회화에서의 새로운 추상표현으로 실험되었으며 마크 토비Mark Tobey(1890~1976)의 ‘글쓰기 회화’는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에서도 입지를 마련했다.
토비는 세계와 인류가 하나라고 가르친 바하이Bahai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이를 자신의 회화와 관련지었지만 그의 작품에서 그런 점을 보고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가가 노자 장자를 말할 수 있고,
우주생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가질 수 있으며,
“‘불성은 일체 중생’이라는 사상”을 추상이미지로 표현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그런 점을 관람자가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한 폭의 그림에 너무 많은 사고를 담아 전달하려고 하지만 개인적 추상기호 내지는 추상도상들로 그렇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작가가 그렇다고 주장하니까 그런 시각을 갖고 바라보게 되지만 내가 가나아트센터에서 그의 작품들을 보았을 때 그런 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느낀 점은 소심한 행위의 반복, 전통조형에 대한 집착, 실험, 무절제를 발견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 툼블리Cy Twombly(1929~)의 무위적 요소는 찾을 수 없었다.
오수환은 무위에 관해 강조했고 평론가와 소설가도 그 점을 높이 샀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회화에서 말하는 무위는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은 어린아이의 낙서와 같은 선과 색이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느끼게 해주는 회화적 요소로 한때 유럽의 화가들이 추구했다.
오수환의 작품에는 오래 연마한 세련된 선과 얼룩이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추상 이미지 회화라고 부르고 싶다.
그의 <변화>는 자연에 대한 다양한 상징 이미지들이며 퍽 개인적인 이미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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