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를란다요의 제자가 된 미켈란젤로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르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1475년 3월 6일 월요일 해뜨기 네 시간 전 토스카니 사람들의 마을 카프레세Caprese로 불리운 아레조Arezzo 근처 작은 언덕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레조에서 북쪽으로 48km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아레조의 현재 공식 명칭은 카프레세 미켈란젤로이다.
미켈란젤로를 기리기 위해 마을 명칭 뒤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로도비코Ludovico di Leonardo Buonarroti Simoni는 피렌체의 공무원으로 작은 도시 카프레세의 시장podesta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둘째 아들이었고 첫째 아들 레오나르도는 도미니크회 수사가 되었는데, 가족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것 같다.
세째 아들은 부오나르로토Buonarroto로 불과 두 달 동안이었지만 시의원이 된 적이 있다.

로도비코는 6개월의 시장직을 마친 후 가족을 데리고 피렌체로 돌아와 시가 내려다보이는 산타 크로체 근처 작은 마을 세티냐노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농장을 경영했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태어난 지 한 달 되던 때였다.
부오나르로티 집안은 부유했으므로 피렌체에 저택을 갖고 있었고 시외에도 집이 있어 미켈란젤로는 두 곳에서 성장했다.
어머니 프란체스카Francesca Neri di Miniato del Sera는 그가 6살 때인 1481년에 타계했다.
어머니는 피렌체로 돌아와 타계하기 전까지 아들을 셋 더 낳았다.
아버지는 피렌체로 돌아온 후 아무 일도 안 하다가 미켈란젤로가 10살 때인 1485년에 재혼했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돌깍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가 조각가가 되는 데 반대했다.
그때만 해도 예술가란 직업은 부유층에서 볼 때 미천하게 취급되었으며 아버지는 그가 피렌체의 은행가이면서 상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이 조각에 집념을 갖고 있음을 알고는 피렌체의 유명한 프레스코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해주는 것이 아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미켈란젤로가 13살 때 그로부터 수학하게 했다.
로도비코는 미켈란젤로가 기를란다요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학할 것을 약속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미켈란젤로는 1488년 4월 1일부터 그가 말한 "기본 미술 the prime art"인 조각에 전념할 수 있었다.
기를란다요는 크고 매우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고 미켈란젤로는 그로부터 드로잉과 템페라 그리고 프레스코를 그리는 법을 배웠다.

당시 화가의 문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스승으로부터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받은 작업에 참여하여 부분적 일을 맡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기를란다요의 작업에 부분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두 점을 꼽을 수 있으며 1486~90년에 프레스코화로 제작된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에서 세례자 요한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과 <동정녀의 알현 Presentation of the Virgin>에서의 누드로 앉아 있는 남자와 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으로 추정된다.
기를란다요의 작품에는 과도한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회화적 이야기를 가볍게 여겼는데,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성가대석에 그린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생애의 경우 그림은 이야기적이더라도 성서를 모르는 사람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는 묘사하는 화가였지 이야기꾼은 아니었다.
그는 대상 자체가 관람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바랐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얼굴의 표정으로 그림이 생기 있게 했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매우 열렬하게 입체감과 해부, 색채기술, 대기의 원근법 등을 탐구했지만 그는 일반적 수준 그 이상이 못되었다.
그는 회화에서 실험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시대의 평균적 특성을 갖춘 그는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기념비적인 효과를 창출하려고 한 예술가였다.
그는 세부적 관찰이 섬세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점에서 위대했다.
그는 탁월한 도안가이자 위대한 화가였다.

미켈란젤로는 훗날 아는 체 하기를 좋아하는 기를란다요로부터 배운 것이 별로 없었다고 투덜거렸지만 그의 작품 <도니 톤도 Doni Tondo>(1504)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에서 기를란다요의 영향이 두드러져 그가 스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초기 드로잉을 보면 그가 과거 피렌체 대가들 조토Giotto(1266년경~1337)와 마사초Masaccio(1401~28)의 작품을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1490년경 14살 혹은 그 이전에 그린 드로잉 두 남자의 모습은 조토가 1335년경에 그린 <사도 요한의 승천 Ascension of John Evangelist>의 왼쪽 두 사람을 모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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