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합작 


 

길드의 명단에 레오나르도의 이름이 올라있을 때인 1472년 그는 베로키오의 작업을 도왔다.
베로키오는 포르타 알라 크로체 근처 도시 성곽 밖에 있는 수도원 상 살비에 커다란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을 그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부분적으로 그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베로키오는 그리스도를 허리에 두르는 간단한 옷을 입고 요단 강가에 맨발로 서서 양손을 모아 가슴에 올리고 아래를 응시하는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동 그릇에 강물을 담아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붓는 세례식을 거행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스도의 머리 위로는 비둘기로 형상화한 성령이 임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리스도를 패널 중앙에 구성한 베로키오는 회화적 구성을 위해 그리스도 왼쪽 강둑에 천사 두 명을 그려 넣기로 하고 그리스도 바로 옆에 있는 천사는 자신이 그리고 왼쪽의 천사는 레오나르도로 하여금 그리게 했다.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의 배경도 그렸다.

이 작품은 베로키오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조화와 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는 두 수도자의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장려하게 표현했다.
그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방법을 응용해 강물에 잠긴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 다리를 그리면서 투명한 강물을 잘 묘사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투명한 물을 묘사하는 데 자신이 없어 마른 땅에서 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그리기 보통이었지만 베로키오는 자신감을 갖고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스승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를 그렸을 때 베로키오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자기는 더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뵐플린이 지적했듯이 레오나르도와 베로키오 사이에는 내적 연결성이 존재했다.
바사리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이 매우 가까웠으며 베로키오가 창안해낸 것들을 레오나르도가 아주 많이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레오나르도의 초기 그림들을 보면 놀랍기만 한데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에 그려진 레오나르도의 천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나온 음성처럼 관람자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레오나르도의 천사 그림은 "종교적 그리고 전체적 구성에서 볼 때 베로키오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 회화적으로는 훨씬 뛰어났다"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천사의 매우 어려운 제스처를 묘사했는데, 천사가 관람자쪽으로 등을 삼분의 이쯤 돌린 채 옆얼굴을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이런 각도로 그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딱딱하고 오래된 양식의 그림에 레오나르도의 천사가 삽입되어 작품이 한결 부드럽고 정취가 있으며 부피와 공간이 생겼다.

기교에 있어서도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에 비해 우수함이 증명되었는데 X-레이를 투시한 결과 베로키오의 채색은 릴리프처럼 두터운 데다 붓자국이 생겼지만 레오나르도는 흰색을 섞지 않고 물감을 오일에 섞어 투명하게 칠했기 때문에 붓자국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레오나르도는 템페라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늘 밑칠을 투명하게 했으므로 X-레이를 투시할 경우 나무 패널이 보인다고 한다.
그는 가장 엷고 밝은색으로 코팅을 한 후 점점 어둡게 해서 인체의 윤곽을 나타내는 기교를 사용했다.
그래서 빛이 착색유리에 비쳐 투명하듯 그의 그림에 빛을 비추게 되면 투명함을 보게 된다.
레오나르도가 마지막 그림 <세례 요한 John the Baptist>에 사용한 유상액emulsion은 너무 엷어서 X-레이를 통해 보게 되면 한결 같이 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에 관한 논문』에 "대상을 릴리프로 표현하기를 바라는 화가들은 표면에 색의 농담을 반쯤 칠한 후 가장 어두운 그늘을 칠하고 다음에 주된 빛을 칠해야 한다"고 적었다.
이 말은 그의 회화방법을 잘 말해준다.
그는 명암과 관해 언급하면서 릴리프가 회화의 가장 주된 요소라고 했다.
그의 말은 이차원의 평면에 삼차원의 오브제를 재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릴리프의 본질과 기능 그리고 다양한 기교적 표현에 관해 언급했는데, 릴리프를 회화의 혼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회화는 일종의 정밀한 자연과학이며 또한 모든 학문 위에 군림하는데 그 이유는 학문이 "모방되어질 수 있는 것", 즉 비인격적인 것인 데 반해 예술은 개인 및 개인의 타고난 재능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화가에게는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시인의 천재성에 필적할 만한 재능까지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원전 6~5세기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의 말로 전해온 "회화는 말 없는 시이고 말하는 회화"라는 격언을 인용하면서 예술간의 서열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레오나르도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회화의 결점이라면 동일한 의미에서 시 역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점이 있다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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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가 작업하지 않을 때 친구 예술가들과 잘 어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보티첼리에 관해 몇 차례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보티첼리의 작품에 관해 별로 신통치 않은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보티첼리가 원근법을 중시하지 않는다면서 "산드로, 당신은 어째서 (중앙에 있는) 두 번째 대상이 세 번째의 것보다 작게 보이는지 말하지 않는 거요"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는 보티첼리가 풍경을 단지 배경으로만 사용하면서 앞에 있는 주제와는 무관하게 한다고 비평했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Primavera>에서 님프들의 발이 땅에 닿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비너스의 탄생 Birth of Venus>에서 나무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은 레오나르도의 지적을 당할 만했다.
레오나르도는 페루지노에 관해서는 아무런 비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화가가 보편성을 추구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많은 화가들이 단지 측정하고 비례만을 공부하고 이런 것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데, 한 가지 분야에서 성공적이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아주 잘못되었다면 이는 매우 무가치한 일이다. 어떤 인물은 키가 작고 뚱뚱할 것이며, 어떤 인물은 키가 크고 여위웠을 것이며, 어떤 인물은 평균치의 키와 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다양한 인물들에 관심이 없는 화가는 항상 똑같이 보이는 인물을 그려내게 된다. 이런 화가들은 각각의 인물을 자매들처럼 그릴 것이며 이런 행위는 몹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레오나르도가 이 글을 쓸 때 페로지노를 겨냥하고 쓴 것인지 아니면 대다수 화가들을 의식하고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Giovanni Santi(1494년에 사망, 우르비노에서 주로 활동한 화가)가 쓴 시에는 레오나르도와 페루지노의 이름이 거명되는데, 산티는 "동갑내기 두 청년 모두 열정으로 불을 뿜는다"고 적었다.
페루지노는 레오나르도보다 최소한 서너 살이 많았고 두 사람의 개성은 달랐으며 야망 또한 같지 않았다.
페루지노는 말년에 빈곤 속에 살면서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빨리 성공하고 싶어 많은 그림을 상업적 공식에 맞춰 그렸기 때문에 인정을 받지 못해서였다.
미켈란젤로는 그를 가리켜 공공연하게 바보goffo라고 했다.
어쩜 레오나르도도 페루지노를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베로키오는 재능이 많은 예술가였지만 훌륭한 조각가를 배출하지 못했고 회화에서는 레오나르도, 페루지노, 로렌초 디 크레디를 배출했다.
레오나르도는 7살 연하의 크레디의 작품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마 관심 밖이었던 것 같다.
뵐플린은 크레디를 가리켜서 말했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다른 태양의 빛을 받아들이는 별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학생이 주어진 과제를 부지런히 수행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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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과 고통


저명한 라틴어학자 추기경 벰보Bembo는 1497년경에 라틴어로 '사랑하다'와 '괴롭다' 혹은 '쓰라리다'는 말은 같은 단어 아마레amare에서 왔다면서 사랑함으로서 괴롭고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견해를 두 남자가 같은 몸에서 솟아오른 모습으로 우화적 드로잉으로 표현했다.
한 사람은 늙은이로 한 손에는 불꽃을 다른 손에는 참나무가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잘생긴 젊은이는 한 손에 갈대를 들고 다른 손에는 금전을 들고 있는데 금전이 땅에 떨어지고 있다.
두 사람은 고통과 쾌락을 상징한다.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에 관해 적었다.

"쾌락과 고통은 쌍둥이처럼 한 데 연결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둘은 상반하기 때문에 서로의 등을 돌리고 있다.
만약 네가 쾌락을 선택한다면 고난과 후회밖에 안겨주지 않는 사람이 배후에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쾌락과 고통이란 그러한 것들이며 … 그것들은 서로가 상반하는 것처럼 등을 맞대고 있지만, 노고와 고통이 쾌락의 기초가 되며 허영과 외설적인 쾌락은 고통의 기초가 되므로 기초가 하나이며 같아 동일한 몸에서 솟아오른다."

그의 드로잉에서 쾌락은 오른손에 독이 든 상처를 입히는 연악하고 하찮은 갈대를 들고 있다.
토스카니에서는 갈대를 침대 아래에 까는데 사람들은 침대에서 허황된 꿈을 꾸고 사람들 인생의 많은 부분이 침대와 관련이 있다.
유용한 시간이 아침에 그곳에서 낭비되며 정신이 신선하고 바짝 차리게 되고 몸이 새로운 일을 맡게 될 때 그러하다.
그곳에서 또한 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좇아 환영적인 쾌락을 마음으로 맛보게 되거나 몸은 종종 명을 재촉하는 쾌락을 포기한다.
그래서 갈대는 이런 것들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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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말 이후 -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동시대 미학 1
아서 단토 지음, 이성훈 외 옮김 / 미술문화 / 200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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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고 끝에 <예술의 종말 이후>가 출간되었습니다.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예술의 종말 이후 After The End of Art>가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나와 경성대 철학 교수 이성훈의 공역으로 출간된 책입니다.
이 책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여러분이 읽기를 권합니다.

단토는 포스트모던이란 말을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포스트모던이 모던을 계승하고 초월한다고 하지만 모던이 현재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계승과 초월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던은 성급하게 사용된 용어로 양식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니지만 그러한 정의에 해당되지 않는 현재의 작품도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단토는 Contemporary(동시대)라는 말을 사용할 것을 주문합니다.
동시대란 예술의 종말 이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재 미국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미술 이론가들의 글에 단토가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예술 종말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매우 난해해서 국내 모 출판사가 단토의 저서 한 권을 오래 전에 계약해놓고도 여태까지 출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학 학회에서 단토에 관해 논문을 발표한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나도 가서 직접 들어봤지만 저서를 제대로 읽고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단토에 관해 쓴 것만 읽고 마치 단토를 이해하는양 발표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매우 난해한 책인데 최대한으로 이해 가능하게 번역하는라 3년은 족히 걸렸습니다.
내가 초역을 하고 이성훈 교수가 2차역을 하여 완성했습니다.
단토가 한국 독자를 위해 서문을 써 보내주셔서 고맙게 생각하며 실었는데 그분은 우리나라 도자기에도 관심이 많아 익히 잘 알고 계십니다.
책 뒤에 이 교수와 나의 역자 해설이 있습니다.
읽기 전에 참고가 될 것입니다.

단토는 1964년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기점으로 예술이 종말을 고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서양의 미술 개념인 예술은 모방이란 사고가 <브릴로 상자>에서는 발견할 수 없고,
미술품은 만들기라고 오랫동안 생각되어 왔는데, 뒤샹의 레미 메이드에서 보듯 그리고 <브릴로 상자>에서 보듯 작가가 만들지 않아도 미술품이 될 수 있으며 평범하지 짝이 없는 비누를 담은 브릴로 상자도 작가가 변용시킬 의도만 있으면 미술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과거 미술의 개념 또는 미술사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논지입니다.

과거에는 미술품이 되기 위한 조건이 미리 정해져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러한 조건이 따로 없고 화랑에 쓰레기를 거져다 놓든, 고장난 자전거를 가져다 놓든, 다리가 하나 없는 책상을 가져다 놓든 미술품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작가가 창작의 자유를 한껏 누린 때가 과거에는 없었도 현재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를 동시대의 특징으로 꼽은 것입니다.

문제는 평범한 물질도 미술품이 될 수 있다면 미술의 개념이 혼란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
동시대 작품은 자기-지시성, 즉 스스로 미술품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의미를 지녀야 합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이 점을 밝히지 못하면 비평가가 또는 철학자가 설명을 통해 그 의미를 관람자에게 전달할 때 비로소 미술품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비평가의 역할, 철학자의 역할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한 몫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단토의 논리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담겨 있고 이 책을 읽고나면 창작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혹시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저에게 질문하시면 되겠습니다.
번역자로서 after service를 할 의무가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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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기대에서 특강한 내용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내용 일부를 올립니다.)


모던, 포스트모던, 그리고 동시대

1. 포스트모더니즘은 양식인가 시기인가?

‘포스트모더니즘 회화’,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라고 할 때는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할 때는 시기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이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문제와 사용의 유무에 관해 많은 의견 대립이 있다.

2.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계승이며 초월인가?

영국계 미국인 건축사가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1939~)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What is Post-Modernism?』(1986)에서 “근본적으로 어떤 전통과 그 바로 이전 전통간의 절충주의적 혼합 즉,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라고 했다.
이 명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After(post) Modernism이란 어의로 인해 그럴싸해 보이지만 모더니즘의 개념이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터에 모더니즘의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진전 혹은 초월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3. 모더니즘은 양식인가 자의식인가?

헝거리 태생으로 영국에 귀화한 미술사가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1892~1978)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는데, 그는 미술에서의 모던 기질이 16세기 초에 생긴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저서 『매너리즘: 르네상스의 위기와 현대 미술의 기원 Mannerism: The Crisis of the Renaissance and the Origin of Modern Art』(전2권 1965)에서 현대 미술을 자의식의 문제로 규정했다.

우리는 미술에서 누가 최초의 모더니스트 미술가이냐고 물을 수 있다.
시인이자 비평가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67)는 삶의 경험 자체가 변화하기 때문에 예술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친구 화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가 이를 받아들였다.
마네가 파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으므로 그러한 회화의 주제 변화와 인상주의의 양식의 출현에서 모더니즘의 기원을 찾는다면 마네는 최초의 모더니스트이며 그 시기는 1860년대가 된다.
모더니즘이 자의식의 문제인지 양식의 문제인지 이에 대한 의견 대립이 있고 그 시기의 차이도 커서 모더니즘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젱크스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4.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94)는 모더니즘을 순수하게 시각적 경험과 관련된 지속적이며 자기 비평적 전통으로 인식했다.
그는 마네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보았고 사실상 파리와 뉴욕을 제외한 곳에서 제작된 미술품을 무시했다.
그는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 Modernist Painting>(1960)에서 평편한 표면으로서의 회화의 물리적 성질을 인식한 마네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모더니스트 회화’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린버그는 과거 화가들이 회화 매체를 구성하는 평면적 한계를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한 데 반해 모더니스트 회화에서는 이같은 한계를 긍정적인 요소로 인식했으며 마네는 표면 아래의 평면을 솔직하게 선언했기 때문에 최초의 모더니스트라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관람자들은 옛 거장의 작품을 접할 때 작품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기 이전에 작품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려는 경향을 띠는 데 반해 모더니스트 회화는 우선 하나의 그림으로 본다.
물론 이것은 옛 거장의 그림과 모더니스트 회화에 상관 없이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그것만이 유일하고 필요한 방법이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서 거둔 모더니즘의 성공은 자기 비평의 성공이다.

이를 두고 많은 미술사가들은 가장 훌륭한 모더니즘의 비평적 입장을 전형화한 말이라고 동조한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모더니즘은 결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모더니즘 미술은 어떠한 단절이나 충돌 없이 과거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그린버그는 키네틱 아트Kinetic art와 팝 아트Pop art처럼 자신의 비평적 틀에 적당하지 않은 현대 작품은 ‘진기한 미술 novelty art’로 제쳐두었다.

5. 지성인을 위한 예술에서 대중을 위한 예술로의 전이

바실리 칸딘스키는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Uber das Geistige in der Kunst』(1912)에서 미술가들은 좀더 위대한 정신성을 향해 인류를 고양시키는 삼각형의 정점에 있다고 적었다.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중 문화와는 거리가 먼 필연적 엘리트주의로 보았다.
가장 진보적 사상을 가진 엘리트 미술가들에 의해 대중 미술보다 한층 격이 높은 미술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시각으로 이는 곧 모더니즘이 소수 지성인들의 미술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예술이 소수 지성인을 위한 지적 진지함에 머물자 절충적 방법으로 좀더 대중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1960년대부터 시작된 광범위한 문화 형상을 가리켜 모스트모던이란 말이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지성인을 위한 예술에서 대중을 위한 예술로의 전이를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의 전이로 보는 시각이다.
팝 아트는 고급 미술과 대중 문화간의 구분을 흐리게 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그린버그는 팝 아트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미술사가 곰브리치와 그 밖의 그린버그 추종자들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팝 아트를 퇴행적 미술 운동으로 보고 이를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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