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욕망


레오나르도는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만 자신에 과한 기록을 많이 남겼더라도 과거에 관해서는 별로 기술하지 않았다.
그는 30살 가량 되었을 때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적기 시작했다.
그는 노트북을 갖고 다니면서 자신이 바라본 것에 대한 설명, 대상에 대한 절밀한 관찰,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계획 등을 왼손잡이 필기로 적었다.
당시 그는 왼손잡이mancino(오늘날의 영어로 lefty 또는 southpaw에 해당한다)로 알려졌다.
피렌체인 조각가이며 건축가 라파엘로 다 몬텔루포는 자서전에서 미켈란젤로가 타고난 왼손잡이라고 적었지만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쓴 콘디비와 바사리는 이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가 오른손으로도 작업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많은 르네상스 작가들이 레오나르도가 왼손잡이였음을 적은 걸로 봐서 그리고 그가 왼손으로 드로잉했음이 분명하므로 왼손잡이였다는 사실은 당시에 익히 알려졌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가 왼손잡이라고 적은 최초의 기록은 레오나르도의 가까운 친구이자 수학자 그리고 이론가 프라 루카 파치올리에 의해서였다.
파치올리와 레오나르도가 우정을 나눈 시기는 두 사람 모두 1496년부터 1499년까지 밀라노에 체류할 때였지만 두 사람은 그 이전부터 알았던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1499년에 밀라노를 떠날 것을 강요당했으며 두 사람은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개인적인 내용도 기술했는데 지출내역, 편지초안, 어떤 사람의 이름, 공리, 빌려봐야 할 책의 리스트, 잊지말아야 할 것 등이었다.
그는 강에 대한 기하적 설명과 함께 숫치를 적은 종이 아래에 "화요일, 빵, 고기, 포도주, 과일, 미네스트라minestra,샐새러드"라고 적었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적기도 했다.
그는 고백 형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적었는데,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드문 일이었다.
그가 남긴 글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그를 바로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연의 꼬리가 요람에 있던 자신의 입술을 여러 차례 쳤다는 기록 외에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해 적은 기록은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보낸 빈치의 언덕에서 내려다본 장면을 그린 드로잉이 몇 남아 있다.
그가 펜으로 이 드로잉을 그렸을 때는 21살이었다.
이 드로잉은 아카데믹한 요소가 있어 그의 고유한 양식이 생기기 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에게는 특별한 드로잉으로 왼쪽 상단에 "순결한 성 마리아의 축제날 1473년 8월 5일"이란 날자를 명기했다.
레오나르도가 날자를 명기한 것은 집안의 전통적 내력인 것 같다.
아버지가 공증인이었기 때문에 꼼꼼하게 날자를 기록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이 드로잉은 서양미술에서 최초의 풍경화 드로잉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동양에서는 풍경화가 흔히 다루어졌지만 서양에서는 배경으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더러 미술사학자들은 풍경화가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으로 그려졌다고 하지만 특별히 날자를 기록한 것으로 봐서 베로키오의 작업장을 잠시 떠나 고향을 찾았을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견습생들이 잠시 여름 휴가를 얻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이 드로잉 뒤에는 언덕 아래 돌로된 아치가 보이고 하늘에 남자 누드가 그려져 있다.
누드 왼쪽 웃는 얼굴 위에는 "난 안토니오의 집에 묵었는데 만족스럽다"고 적혀 있다.
안토니오는 의붓아버지로 레오나르도가 어머니와 한동안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 드로잉은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그린 것이며 흘려 쓴 글씨에서도 그의 기분이 매우 상쾌했음을 알 수 있다.
안토니오는 할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해서 과연 레오나르도가 누구의 집에 묵었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1473년이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수년이 지났다.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에 나타난 장면은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찾는 곳으로 보이지만 토스카니의 시골은 숲이 많아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으며 사냥을 즐길 수 있어 사냥꾼들에게는 낙원이었다.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에는 바위, 산, 강이 보이는데,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개인적인 이 풍경은 그가 마음 속에 깊이 담아둔 정신의 휴식처였다.
그는 이런 장면을 <바위의 동정녀 Virgin of the Rocks>, <동정녀와 성 앤 Virgin with Saint Anne>, <모나리자 Mona Lisa>의 배경에 사용했다.
이 드로잉을 그릴 시기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격렬한 욕망과 함께 불안한 마음으로 조물주 자연이 창조한 다양하고도 낯선 풍부한 것들을 보려고 위에 매달린 바위를 지나 한참을 걸어서 커다란 동굴 입구에 당도하고 잠시 선 채로 놀라움에 휩싸였는데, 난 그런 것이 존재하리하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중적으로 바라보려고 나는 왼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을 눈 위에 올려 그늘을 만들고 안을 응시하면서 안이 캄캄한 데도 어떤 것이 있는지 보려고 했다. 난 잠시 그러고 있었는데 두 가지 감정이 불현듯 생겼는데 두려움과 욕망이었다. 위협하는 동굴, 캄캄한 데 대한 두려움과 놀라울 만한 것이 안에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은 욕망이었다."

두려움과 욕망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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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감정이 전달되어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잠시 고향을 여행한 후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했음이 틀림 없을 텐데 현존하는 작품이 없다.
레오나르도는 곧 베로키오 작업장의 반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메디치 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직접 볼 수 있었다.
로렌초는 베로키오에게 공작을 위해 로마 스타일의 갑옷과 헬멧을 디자인하라고 했다.
레오나르도가 전사의 옆모습을 그렸는데 아마 그런 갑옷과 헬멧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갑옷은 소용돌이 무늬, 사자의 얼굴과 발톱, 잇빨, 독수리 날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을 것이다.

밀라노 공작이 피렌체를 방문하는 중에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를 포함한 조수들과 함께 종교적 축제 행렬과 함께 교회 상 펠리체에 <수태고지 Annunciation>를,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에 <그리스도의 승천 Ascension of Christ>을, 산토 스피리토에 <사도들에게 성령의 내림 Descent of the Holy Ghost to the Apostles>을 걸었다.
3월 21~22일 그림을 모두 걸었을 때 재앙이 닥쳤는데 불이 나서 교회를 전소하고 말았다.
화재의 원인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세워놓은 많은 횃불들 가운데 하나가 쓰러져 일어난 것 같았다.

레오나르도에 관해 정통한 학자 케네스 클락Kenneth Clark은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의 취미는 "옷을 잘 입고, 말을 길들이며, 류트lute(14~17세기의 기타 비슷한 현악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1472년 견습생활을 마치고 마스터로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는데 20살 때였다.
그 해 그의 이름이 페루지오와 보티첼리 이름과 나란히 성 누가 교회의 지출 명단에 올라 있었다.
성 누가 교회가 레오나르도의 후원자가 된 것은 <동정녀 마리아 Virgin Mary>의 초상을 그린 후부터였다.
레오나르도가 마스터가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수련기간이 끝났다는 것 뿐이지 여전히 베로키오의 조수로 그를 도왔다.
그는 여전히 드로잉하면서 기술에 완벽을 기했는데, 석고로 제작된 "웃음짓는 여인의 머리와 아이들의 얼굴을" 드로잉했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마스터가 된 후 처음 제작한 것을 아버지가 싼값에 팔았다고 적었고 이는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
세르 피에로가 지방에 있을 때 소작인 한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소작인은 자신이 무화과나무로 방패를 만들었다면서 피에르가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에게 장식을 의뢰하면 그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피에로는 그러마하고 그 일을 레오나르도에게 시켰다.
레오나르도는 나무가 거칠게 깍인 것을 보고는 자신이 깍아 매끈하게 한 후 특별한 유약을 발라 광택을 냈다.
그는 방패에 고르곤Gorgon(그리스 신화의 동물로 머리가 뱀이며 보는 사람을 도로 변화시켰다는 세 자매의 괴물)의 머리를 그려 넣었는데 적을 두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는 고르곤을 그리기 위해 크고 작은 도마뱀, 귀뚜라미, 메뚜기, 박쥐, 그리고 그 밖의 낯선 동물들을 드로잉하며 습작했다.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괴물을 만들기 위해 그는 "검은 바위의 갈라진 틈으로부터 나와 턱을 크게 벌리고 불을 토해내고 눈에서는 빛이 나며 코에서 독이 있는 김이 방사되는" 모습을 그렸다.

그는 뱅패의 장식을 완성한 후 아버지를 오게 해서 의견을 들으려고 했다.
피에로는 아들의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만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는 자신이 마귀를 봤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는 "방패는 이래야 합니다. 가져가세요"라고 했다.
바사리는 이 말에 덧붙여서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예술에서 기대하는 점입니다"라고 레오나르도가 말한 것으로 적었다.
피에로는 곧바로 장터에 가서 화살이 방패에 꽂힌 모습으로 장식된 것을 하나 사서 소작인에게 주었고 소작인은 매우 흡족해 했다.
피에로는 아들이 장식한 방패를 몰래 피렌체 상인에세 100두카트를 받고 팔았다.
그 상인은 그것을 미라노 공작에게 300두카트에 팔았다.
이 이야기는 바사리에 의해서만 전해오지만 사실을 그가 기록한 것 같으며 그 방패는 현존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쓴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화가는 환상적인 동물을 실재의 요소들에서 구성해야 한다고 적었다.
용을 그릴 경우 그는 "맹견이나 사냥개의 머리에 고양이의 눈, 소마기porcupine의 귀, 그레이하운드(몸이 길고 날쌘 사냥개)의 주둥이, 사자의 눈섭, 늙은 수탉의 볏, 거북이의 목"으로 할 것을 권했다.
이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베로키오가 의전에 사용하는 헬멧에 장식한 적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를 글로서 분명히 했다.
레오나르도는 미술품이 단지 장식적이서는 안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영향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은 그가 고향의 동굴 앞에서 두려움과 욕망으로 보고 싶어 했던 것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예술이라는 미지의 동굴 속에 이런 것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드로잉을 시에 비유하면서 느낌, 인상,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매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드로잉의 기능을 기교적, 과학적 화제에 시각적으로 시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드로잉을 시인의 언어에 비유하면서 객관적 실재를 가장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적었다.

"드로잉을 하는 사람은 이야기적 회화를 구성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외양을 예리한 선으로 종료시키는 것을 억제해야 하며 대부분의 화가들이 목탄으로 세심하게 묘사하는 데 이런 방법을 억제해야 한다. 세심하게 묘사하는 것이 완벽하게 보일런지는 몰라도 예술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살아 있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사고나 감정을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드로잉을 완성시키고, 아름답게 하며, 모양을 잘 배열하기 위해서 화가는 터무니 없는 모양을 그리기도 하고 높거나 낮게 또는 멀리 있거나 바로 앞에 있는 것인양 그려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보여주는 지식에 대해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다. 자, 시인들이 어떻게 시를 짓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쓴 시인들에게는 몇 구절을 삭제해서 나은 문장으로 새롭게 쓰는 것이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므로 화가는 오브제의 부분을 대충 그려야 하며 인물의 아름다움과 장점에 깊이 생각하기 전 인물의 동작을 적절하게 재현하는 데 숙고해야 하고 이야기적 회화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정신적인 점을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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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학예를 연결시킨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술과 학예를 연결시킨 최초의 인물을 꼽으라면 레오나르도라 할 것이다.
원근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말했다.

"자연계의 원인과 이유를 탐구하다 보면 빛이 주로 관람자를 사로잡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학의 특성 중에서 증명의 확실성이야말로 탐구자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가장 주요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원근법은 인간의 모든 지식 체계와 학설 중에서 으뜸으로 인정되어야 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이 문학보다 손작업이 훨씬 많이 요구되기 때문에 품격이나 권위면에서 시에 비해 뒤떨어진 대접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미술은 정신보다는 육체적 노동이 훨씬 더 요구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회화가 그 어떤 것보다도 손으로 하는 일이라고 해서, 또 상상을 통해 착상된 것을 손이 만든다고 해서 회화를 기계적인 일로 보는데, 작가들 역시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펜을 이용해 손으로 적지 않는가."

레오나르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화가의 창조력이 시인의 것에 비해 못하지 않음을 역설하면서 회화가 어떤 의미에서 시보다 더욱 더 완벽하게 재현해내며 특히 시가 뽐내는 도덕적 목적을 회화가 시만큼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시인이 '내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나 짓겠다'고 말한다면 화가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아펠레스Apelles가 중상Calumny이란 주제의 작품을 그렸듯이 시가 도덕철학에 관련되었다면 회화는 자연철학과 관련이 있다. 시는 정신의 활동을 묘사하며 회화는 정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점을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나타낸다. 시가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사람에게 겁을 준다면 회화도 동일한 이야기를 재현함으로써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가 동작과 얼굴 표정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보여주기 때문에 도덕적 목표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오나르도의 사고와 감정은 그가 말한 대로 그가 묘사한 인물의 제스처, 태도, 행위 등으로 나타났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글을 쓰듯 신속하게 손을 놀렸을 것이다.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1451~1508)의 궁전 소속 시인 베르나르도 벨린치오니Bernardo Bellincioni는 1492년에 사망했는데 그는 레오나르도가 작업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며 또한 드로잉하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그의 『서리 Rime』는 1493년에 출간되었는데 그는 저서에서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을 먼저 칭찬했고 다음에 채색을 칭찬했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사클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는데, 베로키오의 작업장은 마스터 예술가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로 마음만 먹으면 베로키오를 도와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가능하면 자신의 독단적인 사업에 매진했다.
레오나르도는 안토니오(1432년경~98)와 피에로 풀라이우올로Piero Pollaiuolo(1441년경~96년경)의 작업장과도 관련을 맺었다.
그는 형제의 작업장에서 인체의 운동에 따른 근육의 변화와 뒤틀린 인체의 근육을 배웠다.
레오나르도는 피에로의 <벌거벗은 남자들의 전투 The Battle of the Nude Men>를 보고 해부학의 필요성과 근육의 기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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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우첼로


화가, 모자이크스트, 상감세공가marquetry artist, 장식가인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Paolo di Dono, 1396/7~1475)는 초기 르네상스의 주요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첼로는 '새'란 뜻으로 바사리에 의하면 이런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동물을 좋아했고 특히 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412년경 기베르티의 작업장에서였으며 조각가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425년에 베네치아로 이주했고 모자이크 작품을 주로 했지만 현존하는 것은 없다.
그가 피렌체로 돌아온 것은 1432년이었으며 1436년에 첫 현존하는 작품을 피렌체 대성당에 커다란 크기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그의 양식의 특징은 원근법에 의한 균형에 있었으며, 1430년대와 40년대 산타 마리아 노벨라S. Maria Novella 교회에 딸린 그린 수도원Green Cloister에 구약성서의 주제로 두 점의 커다란 프레스코화 시리즈를 그렸고, 1455년경에는 메디치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세 개의 패널에 <상 로마노의 전투 Battle of San Romano> 시리즈를 그렸는데, 내용은 1432년 피렌체가 시에나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이것들은 뿔뿔히 흩어져 현재 하나는 런던의 국립화랑에, 또 하나는 파리의 루브르에, 마지막 것은 피렌체 우피치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의 우첼로의 작품으로는 피렌체 대성당의 시계 장식과 착색유리 창문 디자인이 있고 두 점의 매혹적인 그림은 말년에 그린 것들로 <성 조지와 용 St. George and the Dragon>과 <숲 속의 사냥 The Hunt in the Forest>이다.
우첼로는 말년에 시골에서 지냈는데, 바사리의 기록에 의하면 1469년의 세금보고서에 "늙고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으며 … 일도 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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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물감 이야기


레오나르도는 알레소 발도비네티의 작업장에도 갔다.
그는 발도비네티의 풍경화에 관심이 있었지만 아마 물감 비법에 더욱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발도비네티의 작업장에는 아궁이가 있었고 그는 계란 노른자위와 송진을 섞어 만들어 유역의 효과를 냈는데, 이것을 사용해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되면 유화처럼 신선하고 밝은 느낌을 줄 수 있었다.
회화사에 혁명과도 같은 오일물감이 피렌체에 소개된 것은 폴랑드르 화가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1441년에 사망)에 의해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사리에 의하면 플랑드르 대가들의 그림이 1530년대에 나폴리와 우르비노에 소개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화면이 매끈하고 빛났으며 색상과 투명한 효과는 전통적인 방법의 채색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이런 북유럽 화가들의 비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시실리 사람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가 비법에 대한 실험을 했지만 번번히 실패한 끝에 플랑드르로 가서 반 아이크로부터 방법을 알아냈다고 한다.
안토넬로는 베네치아에 안주한 후 친구들에게 이 비법을 가르쳤으며 도메니코 베네치아노가 이를 배워 피렌체의 작업장에서 소개했다.
베네치아노가 산타 마리아 누오바의 앱스(반원형 부분)들의 삼분의 일에 그림을 그릴 때 나머지 삼분의 이에 발도비네티와 안드레아 델 카스타그노Andrea del Castagno가 그렸다.
발도비네티와 카스타그노는 도메니코로부터 비법을 배우기를 원했지만 가르쳐주지 않자 카스타그노가 도메니코에게 다정한 척 대하면서 매일 밤 그와 함께 어울리면서 루트를 연주하고 예쁜 여자들에게 세레나데를 들려주는 등 노력을 다 하자 도메니코가 오일에 관해 조금씩 알려주기 시작했다.
카스타그노는 비법을 완전히 안 후에는 쇠몽둥이로 도메니코를 살해했다.
그는 살인을 숨겼으므로 아무도 누가 도메니코를 죽였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카스타그노가 죽기 전에 이 사실을 고백했다.
바시리는 카스타그노가 자신이 범인임을 고백한 시기에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을 예수를 배반한 유다모습으로 그렸다고 적었다.
이 이야기는 소설처럼 꾸며진 것이다.
안토넬로가 처음 베네치아로 간 것은 도메니코가 죽은 지 14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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