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은 과학


레오나르도는 "마사초 이전까지만 해도 화가들이 자연보다는 대가를 모델로 영감을 받아 작업함으로써 무모한 데 온힘을 쏟았다"고 했다.
그는 또 "화가가 다른 사람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게 되면 평범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스승의 작품을 모방하는 대신 자연의 연구를 내세워 이론적으로 처음 정리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이는 사실 오래 전에 이루어진 사고로 전통에 대한 자연주의와 합리주의의 승리를 강도 높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자연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해서 성립된 그의 예술론은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게 해준다.
미술이 수공업적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선행되어야 했던 것은 낡은 교육 체제의 변혁과 길드에 의한 교육 독점의 지양이었다.
길드의 교육에서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로부터 배운 건 바로 과학이었다.
과학적으로 관망하고 과학적으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다.
초기 콰트로첸토(15세기)에서도 이미 도제들에게 손으로 하는 일과 병행해서 기하학, 원근법, 해부학의 가장 초보적인 지식이 교수되었고 실재 모델을 정확하게 스케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과학적 예술관은 알베르티로부터 비롯했다.
그는 처음으로 수학이 예술과 학문의 공통적인 근본이라고 주장했는데, 비례의 학설과 원근법의 이론이 모두 수학에 속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알베르티의 논술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각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선배 화가의 주장을 더욱 더 강조하고 확대했을 뿐이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이 명장이고 군인을 훈련시킨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훈련에만 집착하고 과학이 없으면 조종장치나 나침판 없이 항해하는 파이로트와 같아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결코 알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는 자연으로부터 드로잉하는 걸 배우며 근사치는 용납되지 않았다.
제자들은 특정한 모델 앞에서 작업하면서 플래스터로 뜰 때 손, 발, 다리, 몸통을 모델과 똑같이 떠야 했다.
레오나르도가 드로잉한 우미한 주름 몇 점을 보면 실재 앞에서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바사리는 『예술가 열전』에 적었다.

"레오나르도의 직업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그는 종종 실재로부터 습작을 했으며 어떤 때는 클레이로 제작된 모델에 축축한 천을 걸쳐놓고 매우 질이 좋은 캔버스에 정성을 다해 그리면서 리넨을 그대로 그렸다. 그는 붓 끝으로 검정색과 흰색의 놀라운 효과를 창출했다. 우리는 그의 드로잉 앨범에서 이러한 증거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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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지노


페루지노Pietro Perugino(Pietro Vannucci, 1445/50~1523)는 주로 페루지아Perugia에서 활약했고 그래서 페루지노란 별명이 붙었다.
초기 활동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발견한 것 같다.
바사리는 그가 레오나르도와 함께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피렌체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로부터 수학하기도 했다.
그는 1472년 화가로서 피렌체의 성 누가 공제 조합에 들어갔는데 레오나르도도 이때 조합에 들어갔다.
그는 1475년에 페루지아로 돌아갔다.
1481년 그는 이미 유명해졌으며 새로 건립한 시스티나 예배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으며 그 외에도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젤리도 함께 그곳에서 작업했다.
바사리는 그때 페루지노가 예술가들의 우두머리였다고 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보티첼리가 우두머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주요 작품은 <성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쇄를 주는 그리스도 Christ Delivering the Keys to St. Peter>이다.
작품을 의뢰하는 사람이 많아져 그는 이탈리아 중부지방을 여행했으며 1490년대에는 피렌체와 페루지아에 작업장을 갖고 있었다.
페루지노는 프레스코화에만 정통한 것이 아니라 초상화가로도 유명했으며 오늘날에는 그의 제단화의 빼어남도 인정받고 있다.
1505년 경쟁이 심한 피렌체에서 그의 작품은 유행이 지난 것으로 취급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남은 여생을 페루지아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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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건축가, 조각가, 화가, 그리고 작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72)는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이다.
그는 1404년 제노바에서 망명중인 피렌체 상인의 사생아로 태어나 파두아와 볼로냐에서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에 정통하여 스무 살 때 라틴어로 희극을 쓸 정도였다.
그가 피렌체로 간 것은 스무네 살 때였으며 당시 유명한 예술가들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베르티, 루카 델라 로비아, 마사초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승마에 뛰어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철학자, 수학자, 공학가이기도 했다.
그는 1432년부터 1464년까지 교황청에서 서기관직을 맡았다.
당시 교황청의 정책은 점차 중앙 이탈리아로 집중되는 추세였으며 주로 상인계급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들의 사고방식 또한 인문주의적 성격이 짙어 알베르티는 그곳에서 고향 피렌체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철학, 과학, 고전, 예술 등의 각 분여를 골고루 탐구하면서 윤리학, 사랑, 종교, 사회학, 법학, 수학, 그리고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에 관한 논문과 소책자를 펴냈다.
그는 시를 썼으며 고전에 능통했다.

그는 1436년에 첫 이론서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회화론 Della Pittura di Leon Battista Alberti Libri tre』을 출간했다.
그는 라틴어로 쓴 후 브루넬레스키를 위해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이후 그는 다양한 주제로 논문을 썼으며 건축과 조각에 관해서도 썼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건축론 De Re Aedificatoria』을 집필하는 데 전력을 다 했는데, 10권에 달하는 이 전집은 그가 사망한 후 1485년에 출간되었고 건축에 관한 최초의 이론서였다.
그는 1450년경에 쓰기 시작하여 1472년 타계할 때까지 계속해서 추가하고 수정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펴낸 책이다.
건축은 인간의 실제 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의 이론에서 전반적인 그의 사회사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건축을 하나의 완전한 시민 활동의 장으로 본 그는 건축이 유용적인 면과 장식적인 면에서 도시에 영광을 가져준다고 주장했다.
그의 『조각론 De Statua』은 1464년 바로 직전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련의 저술을 통해 미술을 신학적 진실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중세의 관념에서 벗어나 미술에 대한 이성적 기반을 강조했으며 예술가가 과학, 즉 역사, 시, 수학을 기반으로 작업해야 함을 역설했다.

알베르티의 인생관에서 특징이 되는 점은 기독교의 가르침보다는 고대 철학에 입각한 합리주의이다.
그는 기독교 신학에 끊임없이 경의를 표했지만 그의 기독교관은 전형적으로 인문주의적 색채를 띤 종교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생애 대부분 피렌체와 로마에서 보냈고 이 두 곳에서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만투아와 리미니Rimini에서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는 교황 니콜라스 5세와 우르비노의 공작 페데리코 다 문테펠트로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가 디자인한 건물들 가운데는 만투아의 성 안드레아와 성 세바스티아노 교회가 있으며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와 루첼라이 궁전의 외관을 그가 장식했다.
그는 화가와 조각가로서도 활약했지만 현존하는 그림과 조각품은 없다.
아마 회화와 조각에서는 아마추어 정도였던 것 같았다.
자화상을 기념 명판으로 제작한 것이 두 점 현존하며 1450년경에 제작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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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를 체험하는 영혼


신을 향한 영혼의 상승은 두 가지의 도움으로 달성되는데 지성과 의지이다.
신에 대한 지식은 신에 대한 에로스를 수반하고 궁극적인 비전은 즐거움의 행위를 수반한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신학, 영혼들의 불멸성에 관하여』 대부분을 영혼의 불멸에 관해 논했는데, 영혼의 불멸에 대한 옹호의 논증을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많은 카톨릭 신학자들의 사상에서 빌려 왔다.

그의 논증은 당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한 인문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노력의 일환으로 간주해야 한다.
영혼의 불멸에 대한 사상은 당대 예술가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쳐 육체의 아름다운 표현을 통해 불멸하는 신의 광휘를 갈구하게 했다.
특히 르네상스 전성기의 미켈란젤로에게 이는 예술적 신념이 되었으며 그로 하여금 그같은 정신을 작품에 구현하게 했다.
신의 광휘란 윤회를 통해 만물이 신과 결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피치노는 자연을 미 혹은 선의 작품으로 보고 선과 자연이 일치하는 데 사람의 영혼이 매개적 존재로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는 르네상스를 특징짓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의 철학적 표명이기도 하다.
영혼이 매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플라톤이 전한 소크라테스의 말로 하면 육체는 땅에서 왔지만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영혼이 신성을 지녔으므로 불멸성을 마땅히 지니게 되며 인간의 존엄성 또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치노는 자연을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로 보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영혼Spiritus mundanus의 매개를 통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질료는 형상을 결여할 뿐만 아니라 생명도 없는 비존재에 불과하다.
질료가 형태와 운동 그리고 존재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은 형상을 입을 때인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영혼이다.
영혼은 영원을 좇으면서 동시에 일시적인 질료를 정신화하고 고양시킨다.
이는 불과 물 사이를 매개하면서 불을 열에너지로 변화시키고 물을 수분으로 증발시키는 공기에 비길 만하다.
피치노는 영혼의 불멸을 사람의 인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로 보았고, 플라톤의 에로스 개념을 카톨릭의 자비나 사랑charitas과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하여 심리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가 융합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플라톤적 사랑amor Platonicus이라는 말을 만들어 플라톤이 묘사한 정신적인 사랑 혹은 그 자신이 말하는 신적인 사랑을 의미했다.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예지와 감각의 중간에 해당하며 예지와 감각의 결합이 이데아를 추구하여 불멸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에로스는 예지와 감각의 결합으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전제가 되는 가운데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다.
신적인 사랑이 선 혹은 미로 하여금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게 했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자신과 일체가 될 수 있는 의지가 생기게 했으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이 자연을 통해 다시 자신에게도 돌아오게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런 사랑은 육체의 미를 통해 신적 미로 상승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일종의 욕구다.
사랑은 미를 소유하려는 인식적 덕에 의한 욕구, 혹은 선이 창조해 퍼뜨린 미를 향한 욕구desiderio di bellezza, 혹은 소유하려는 욕구이며, 사랑을 통해 선은 자신이 창조한 자연을 자연에 내재한 미를 통해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는 것이 피치노의 논증으로 선은 정신, 영혼, 자연, 질료의 중심이며 그 모든 것에 미가 두루 퍼져 있다.

정신에는 이데아가 있고, 영혼에는 이성이 있으며, 자연에는 영혼이 생성될 수 있는 씨앗Semina이 있고, 질료에는 형상Form이 있으며, 미의 원리가 되는 선은 모든 미적 사물들의 원인이 된다.
사람은 자연에서 선의 특색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게 되고, 자연의 힘 즉 자연에 내재한 미에서 선의 위력을 어림할 수 있으며, 이런 자연의 유용성에서 선을 볼 수 있다.
자연미는 선의 광휘로서 변화의 현상을 나타내지만 그 자체는 불변한다.
자연미는 형이상학적 실재의 미가 지닌 형상의 반영으로 완전한 미는 아니다.
피치노의 사랑과 미에 대한 사고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정신에 내재한 추상적 형상을 질료로 구현하게 했다.
예술가들은 그렇게 하는 데서 형상의 구체성이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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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교수신문의 청탁을 받고 쓴 것입니다.


김경인의 <소낭구 이야기> 시리즈가 기대된다


김경인(1941~)은 노력하는 화가이고 스스로 “화단 뒷켠에서 아웃사이더”로 자처한다.
그래서 1994년 제6회 이중섭미술상을 받을 때는 영광과 더불어 “생소함”을 느꼈다.
197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1974년 제3그룹전에 출품하고 회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에 걸친 회화여정을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시기는 1974~91년으로 17년의 창작을 민중미술에 헌납한 때이다.
1974년 33세 때 그린 <문맹자 34-1>는 앞으로 서정적 표현주의를 추구하게 될 바로미터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국민 모두에게 문맹자가 될 것을 강요한 군사독재에 대한 항거를 방 안에 갇힌 사람들을 실루엣으로 묘사하고 신문지 얼굴에 눈가리개를 한 형상으로 표현했는데 강렬한 회화적 이미지이다.
이 시기 작품을 서정적 표현주의라고 칭하는 이유는 다분히 격앙된 감정을 과장하는 방법으로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창작의 주요 원동력은 분노였다. 일차적인 동기는 1972년 10월에 선포된 유신에 대한 분노로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신념이었다.
“한국 현대미술사는 집단적 이기주의이고 다분히 사이비적인 판짜기에 편중”되어 있다는 데 대한 분노가 이차적 동기가 되었다.
그의 첫 시기는 “정직하게 현실과 나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의 서정적 표현주의는 한국이 처한 정치적, 예술적 억압에 대한 반발로 출발했다.

문제는 창작을 분노에 의존한 것으로 어두운 좌절의 수렁에 스스로를 17년이나 방치한 것이다.
비탄, 절망, 죽음 등의 문제에 젊음을 송두리째 바친 것은 화가에게 불행이었다.
그가 새로운 회화 세계를 찾는 데 힘겨웠고 적응하는 데 또 다시 수년을 허비한 것만 봐도 17년은 너무 오랜 세월이었다.
분노의 감정을 오래 품은 것은 자신을 수렁에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1978년작 <소멸>은 뛰어난 작품이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구성, 흰색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영혼은 이 시기 최고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그러나 1980년대 작품들을 보면 혼란에 빠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에는 온갖 서양 양식이 다 등장한다.
도록을 통해 꼽을 수 있는 서양 양식의 차용만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이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서양화를 연구한 화가도 드물다고 생각된다.
아쉬운 점은 양식의 차용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다.
“서양 미술 이론을 이대로 답습하는 것은 그들이 씹던 껌이나 받아 씹는 것이 아닐까” 하고 고백하는 그는 매우 겸손하고 솔직하며 자성의 미덕을 갖춘 화가이다.

둘째 시기는 1991~95년으로 소나무에 집착한 때이다.
서양 양식을 답습하기를 중단하고 새로운 회화를 찾기 위해 방황하던 그는 강원도 정선 몰운대에 솟아 있는 벼락 맞은 소나무를 보고 창작의욕이 생겼다.
“뒤틀린 줄기와 파이고 갈라진 껍질, 끈질긴 뿌리에 우리의 미적 원류가 흐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분노의 시기에서 한국 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시기로의 이행이다.
“방방곡곡 소나무를 찾아다니며 국토를 세 바퀴는 돌았지요”라고 하는 그에게 ‘소나무 화가’란 명칭이 붙여졌다.
이 시기의 작품을 보면 그가 자연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소나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소나무의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연의 소나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춤을 추는 동적 소나무, 그가 바라보고픈 소나무이다.
감정을 과장해서 표현하는 방법을 17년 동안이나 사용하다보니 습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도 자유롭지 못하고 소나무도 자유롭지 못하다.

셋째 시기는 1995~2004년으로 소나무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그도 자유를 누리는 때이다.
1995년 아크릴로 그린 <신목의 세월>을 2004년에 유채로 개수보완한 것을 보면 자연을 좀더 존중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미 그린 것을 정정하느라 채색에 한계가 있어 어느 정도 자연으로 되돌리고 싶어 했는지는 측정되지 않지만 그런 의도는 충분히 감지된다.
아쉬운 점은 방황이 아직 종료되지 않은 것으로 이번 전시 작품에서도 주제와 양식의 다양성이 나타나 회화에 대한 그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자신감의 상실로 보인다.

그도 자유롭고 소나무도 자유로워졌음을 <돌산 앞 소낭구>(2001)에서 본다.
그리고 <소낭구 이야기0301>(2003)와 <소낭구 이야기0302>(2003)는 매우 훌륭하며 앞으로 전개될 김경인의 신화 이야기의 서문이라는 느낌이다.
이 작품들을 시작으로 정진한다면 커다란 회화적 수확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소낭구 이야기> 시리즈가 사뭇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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