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키오의 제자가 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가 언제 빈치를 떠나 피렌체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레오나르도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작성한 세금보고서를 통해서인데 그 보고서들이 사실이라면 그가 피렌체로 간 건 1470년이 될 것이다.
1469년 할머니 몬나 루치아가 작성한 세금보고서에는 레오나르도가 할머니와 함께 빈치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고 이듬해 세르 피에로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피렌체에서 그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몬나 루치아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레오나르도 외에 삼촌 프란체스코 부부와 세르 피에로그리고 피에로의 두 번째 아내 프란체스카 데 세르 줄리아노의 이름도 적혀 있다.
세금보고서는 호주가 작성하는 것으로 몇 년 전 할아버지가 타계한 후 할머니가 호주로서 작성했는데, 함께 살고 있지 않는 가족도 명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피에르는 아내 프란체스카와 함께 피렌체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몬나 루치아는 1469년 혹은 1470년에 세상을 떠났고 레오나르도를 돌보아줄 사람은 이제 아버지뿐이었다.
장남인 피에로는 호주로서 법적으로 자신이 거주하는 곳과 가족의 명단을 세금보고서에 기록해야 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가 피렌체로 간 것은 열일곱 살 때이거나 18살 때였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메디치 궁전 앞을 걸으면서 똑바로 뻗은 길 양편에 집들이 일렬로 줄을 선 것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이다.
14세기 초만 해도 피렌체에는 약 150개의 타워가 높이 솟아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 많은 타워의 높이가 낮아졌지만 높은 타워들도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빈치와 비교해서 피렌체가 매우 큰 도시임을 알았을 것이다.
빈치는 작은 성채가 있는 언덕 주변에 약 50개의 낮은 빌딩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한 피렌체는 문명의 절정에 이른 곳 같았다.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고대 아테네와도 같이 아름답게 치장하고 싶어 했다.
아르노 강둑에는 네 개의 다리가 있었고 건물들을 건립하는 곳에서는 나무에 못질하는 소리와 돌을 깍는 소리가 들렸다.
피렌체에는 푸줏간의 수보다는 목공소와 대리석을 다루는 곳이 더 많았다.
대성당은 아직 완공이 안 되어 마무리작업이 한창이었고 대부분의 새 건물들은 개인 소유의 것들이었다.
사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대저택을 지으면서 자신들의 저택을 궁전이라고 불렀다.
역사학자 베네데토 데이는 서른 개의 궁전만도 1450년과 1478년 사이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옛날의 좁은 길은 확장해서 넓어졌으며 오래된 건물들은 철거되고 그곳에 상점, 사무실, 마굿간, 정원 등이 만들어졌다.
새 건물들은 엄격하고 단순한 기하의 규칙을 따라 지어진 것들이다.
비아 델라 프레스탄자Via della Prestanza(오늘날 비아 데이 곤디Via dei Gondi)에 있던 세르 피에로의 집은 낡았고 곤디Gondi가가 그 지역을 구입할 때 사들여 부순 후 그곳에 가족 이름을 딴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을 디자인한 사람은 줄리아노 다 상갈로였고 레오나르도는 훗날 그와 교분이 두터웠다.
레오나르도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Andrea di Cioni, 1435년경~88)의 작업장bottega에 갔을 때 재능을 칭찬받았다.
당시 도제로 예술가의 작업장에 들어가는 나이는 보통 열두 살이나 열세 살이었다.
그렇다면 레오나르도가 1465년이나 1466년부터 도제로서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그에 관해서 알려진 바가 없고 그가 피렌체로 왔다는 사실뿐이다.
그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갔을 때는 읽고 쓰기를 할 줄 알았고 아마 문법과 셈본을 배웠을 것이다.
동네 교회의 신부가 동네 아이들에게 문법과 셈본그리고 주판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이 상례였다.
레오나르도는 이때까지만 해도 왼손잡이로 이런 버릇이 아직 고쳐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라틴어를 몰랐고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마흔 살이 넘어서였다.
그는 이탈리아어는 빈치의 억양이 사투리를 구사했는데 이 시기에 그가 쓴 노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의 스펠링은 불규칙했다.
그가 성경말고 그 밖의 책을 읽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읽지 못했을 것이다.
빈치에 비종교적인 책이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인쇄술이 그때 막 발명되어 아직까지는 이탈리아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을 때라서 책값은 비쌌다.
고전을 읽지 못한 것은 훗날 레오나르도에게 열등감을 심어주었다.
레오나르도가 미술품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공공건물과 교회가 아니더라도 피렌체의 많은 건물 외관이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사당에서 프라 필리포 리피와 안토니오 베네지아노가 그린 마돈나, 이노켄티우스 병원 벽을 장식한 루카 델라 로비아의 맑은 파란색 안의 도자기 메달, 그리고 상 미첼레교회, 세례당, 종탑에서 기베르티, 도나텔로, 미켈로조의 조각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피렌체로 오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서 엠폴리와 피스토이아에 갔을 때 대성당에서 프라 필리포 리피가 그린 근래의 제단화와 마솔리노가 그린 프레스코를 봤을 것이다.
아르노 강 주변에 있는 엠폴리는 예술이 번성하던 도시였다.
레오나르도가 아버지를 따라서 피사에 갔다면 유명한 탑이 있는 캄포를 봤을 것이며 또한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교회에서 스물일곱 살에 요절한 마사초Massacci(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1401~28)의 중요한 그림도 봤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후날 마시치오를 가리켜서 미술사에 가장 중요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마사초가 패널에 그림 그림들은 일부 피사의 국립뮤지엄에 소장되어 있고 일부는 런던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지만 나머지 것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바사리는 마사초의 그림에 관해 언급하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직접 보고 그린 말들은 아주 훌륭해서 사람들은 그것들보다 나은 그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도 말을 여러 점 그렸는데 마사초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