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친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예수 제자들의 얼굴을 밀라노 거리에서 행인들을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얼굴은 모르타로Mprtaro의 추기경 측근자인 공작 조반니를 모델로 했고 손은 파르마Parma의 알레산드로Alessandro의 것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사리와 마찬가지로 지랄디Giraldi에 의하면 1497년경 레오나르도는 11명의 제자와 유다의 몸을 그렸지만 유다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랄디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완성시키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자 수도원측은 작품에 대해 충분한 지불을 하고 있던 루도비코에게 불평했고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를 불러 늦어지는 데 대해 의아함을 표현했다.
기록에 의하면 루도비코는 레오나르에게 속히 완성시킬 것을 종용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이유로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레오나르도가 여전히 완성시키지 않자 수도원측은 루도비코에게 그가 유다의 머리만 남겨놓은 채 일 년이 넘도록 완성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단 한 번 와서 그림을 쳐다보고 갔다고 불평했다.

루도비코는 다시 레오나르도를 불러 심기가 불편함을 전했다.
그러자 레오나르도는 수도원 신부들은 예술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을 뿐 아니라 화가는 곡괭이질하는 노동자처럼 작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수개월 동안 수도원 식당에 들르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매일 최소한 두 시간씩은 <최후의 만찬>을 재확인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루도비코는 식당에는 가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하자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전하, 유다의 머리만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소문난 악한입니다. 따라서 그의 사악함에 짜 맞춘 상판대기여야 합니다. 이것을 찾느라 저는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전하도 아시는 대로 흉포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보르게토Borghetto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제가 생각하는 그런 악한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상판대기를 찾기만 하면 그 날로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연구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면 전하에게 저를 모함해서 지껄인 자가 바로 유다에 합당 터인 즉 그 자의 얼굴을 대신 그려놓겠습니다.”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의 응답에 흡족해 하면서 레오나르도의 편에 섰다.
레오나르도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발견했고 작품을 완성시켰다.
<최후의 만찬>은 혹평을 받았다.
바사리의 시대에 사람들은 "현혹하는 착색"에 지나지 않는 작품이라고 냉대했다.
1624년 카르투지오 수도회Carthusian(1086년 성 브루노St. Bruno가 프랑스 샤르트리우스Chartreuse에 개설했다) 수사 사네스Sanese는 "볼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 시기에 수도원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벽을 자르고 만들어졌으므로 그리스도의 다리와 테이블 커버 일부가 잘렸다.

그리고 1500년과 1800년 두 차례의 홍수로 인해 심히 파손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괴테의 말로는 물이 식당에 흘러들어와 약 60cm까지 찼다고 한다.
18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서 작품 전체를 복원시키려는 열정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복원자들 특히 벨로티Belloti의 경우 오히려 작품을 망쳐놓았다.
복원자들은 망가진 부분들을 모두 떼어내고 자신들이 착색했다.

1796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인들은 사용하지 않던 식당을 말들을 위한 마초를 저장하는 곳으로 사용했으며 공화국 기병들은 벽돌을 제자들의 얼굴에 던지면서 재미 있어 해 했다.
<최후의 만찬>은 1820년과 1908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2차세계대전 말에는 폭탄이 식당 지붕에 떨어졌다.
다행히도 레오나르도의 작품은 모래주머니들로 가려져 있었으므로 파손되지 않았다.
1946년과 1953년 사이에 본래의 상태로 복원하려는 시도가 한 차례 있었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붉은색 겉옷이 최종적으로 복원되었다.
그후 좀더 과학적으로 복원되었다.

루도비코는 1497년 6월 서둘러 이 작품과 그 밖의 작품을 보러 왔다.
그 이유를 바사리와 지랄디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그해 초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미루어 자신과 아내의 무덤을 이 수도원에 마련하기 위해 서둘렀던 것 같다.
비트리스는 1497년 1월 2일 임신한 지 수개월 된 몸이었는데, 파티가 가서 몸에 고통을 느낄 때까지 춤을 추었고 그 날 밤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그녀는 22살이었다.
그녀는 어린애 같은 행동을 했는데, 몸매를 날씬하게 보이려고 몸에 꼭 끼는 드레스를 입었다.
루도비코는 이런 그녀 성격에 질색을 하고 마음을 애인 루크레지아 크리벨리에게 주었지만 비트리스는 루도비코의 모든 공식석상에 나타나 공작부인 행세를 했다.
아내가 사망하자 루도비코는 그녀를 숭배할 정도로 애정을 나타냈다.
그는 만투아의 후작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아내를 잃고 절망에 빠졌다고 적었다.
루도비토는 아마 레오나르도에게 비트리스의 장례식에 관해 자문을 구했을 것이다.
밀라노에 파견되었던 외교사절의 말로는 비트리스를 위한 장례식에 아주 많은 왁스 초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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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는 뛰어난 공학가였다.
바사리는 적었다.
"매일 그는 모델을 만들었으며 산을 관통시켜 터널을 만드는 디자인을 했다. 그는 지레, 기증기, 크랭크를 이용하여 무거운 것들을 들어올리는 디자인을 했고 항구를 청소하는 방법과 깊은 곳으로부터 물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고안했다."
레오나르도는 나사를 자르는 기계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롤러-베어링 브레이크를 발명했으며, 처음으로 연발총을 발명했고, 톱니바퀴가 부착된 기어로 끌어올리는 절구를 발명했으며, 여러 개의 벨트를 사용하는 방법과 세 가지 속력을 내는 변속기어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나사를 조일 수 있는 조절 가능한 렌치를 발명했다.
그 외에도 그가 고안한 기계가 아주 많다.
그는 물속을 탐험하는 계획도 세웠는데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증기기관차에 관해서도 연구했으며 낙하산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적었다.
그의 생애의 절반을 인간이 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연구했다.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그도 새를 여러 면에서 인간보다 우수한 종으로 생각했다.
그는 새 날개와 꼬리의 기능에 관해 구체적으로 연구하면서 그와 같은 기능에 의해 상승하고 하강하며 방향을 전환하는 비행기구를 고안했다.

레오나르도는 과연 비행하는 실험을 했을까?
새해 첫날 그는 "내일 아침 1496년 1월 2일 나는 끈을 만들어 시도할 것이다"라고 적은 것으로 봐서 실험한 것 같다.
물리학자 제롬 카르단의 아버지 파지오 카르다노는 아들에게 레오나르도가 비행을 시도했다고 말해주었다.
레오나르도의 협력자 안토니오가 1510년 다리를 부러뜨리는 부상을 입었는데, 더러 사람들은 그가 레오나르도의 기구를 타고 비행하다 다친 것이라고 말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고 기하적 형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이럴 시기에 그는 <최후의 만찬>을 드로잉하며 작업에 들어갔다.
<최후의 만찬>은 그러므로 기하에 대한 그의 관점을 파악하면서 감상해야 한다.
과학과 수학적 상식이 없이 그의 작품을 대한다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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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미켈란젤로


회화와 조각 그리고 드로잉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할 만한 미켈란젤로는 뒤늦게 시인으로도 알려졌다.
예술 전반에 걸친 그의 사고는 여러 가지 출처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쓴 편지 495편이 1623년에 발견되었고 대부분 가족이나 후원자에게 보낸 개인적인 내용이거나 작업에 관한 것들로 예술론을 알아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만, 그가 쓴 시들은 예술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거의 없더라도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것들이므로 미에 대한 사고를 추론하게 해준다.

미켈란젤로 자신이 직접 쓴 글 외에도 세 명의 당대인이 그에 관해 써놓은 자료가 남아 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프란시스코 데 홀란다(1517~84)라는 포르투칼 화가로서 1538년 로마로 와서 미켈란젤로 주변에서 한동안 지낸 인물이다.
그는 1548년에 <고대 회화에 관한 대화편>을 썼는데 이것이 출간된 것은 1890~6년이며 영어로 번역된 것은 1928년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미켈란젤로라는 대가와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을 은근히 나타내어 자기 자신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저서는 자만심의 결과물이지만 미켈란젤로의 생애 중 전기작가들이 소흘히 다룬 시기에 관련된 것이므로 소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당대에 출간된 두 번째 저술로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기록한 미켈란젤로의 전기이다.
이것은 1550년에 첫 풀간되었으며, 1568년 개정판에서는 거의 다시 썼다 싶을 정도로 수정 증보되었다.
이 책은 자료 제공면에서는 기대에 훨씬 못미치지만 미켈란젤로의 제작방법을 기술해놓고 있으며 아울러 그의 견해를 약간이나마 수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아스카니오 콘디비가 쓴 <미켈란젤로의 전기>는 1553년에 출간되었으며 셋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다룬 이 책은 바사리가 잘못해놓은 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씌여진 듯하다.
콘디비는 다소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한 말과 사고를 기록하는 데 있어 바사리나 홀란다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울브리안 마르세즈에서 태어난 그는 1540년대 말부터 미켈란젤로의 조수로 활동했다.
콘디비가 미켈란젤로의 전기를 출간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78살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조상, 출생, 그리고 어린 시절에 관한 콘디비의 전기는 당시의 기록과 늙은 미켈란젤로의 어렴풋한 기억에 근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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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미를 숭배한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장수했기 때문에 그의 사고는 끊임 없이 발전하고 변했으므로 이를 체계적으로 한 줄기로 명료하게 정리하기는 가능하지 않다.
그가 로마에서 제작한 초기 작품들은 성기 르네상스가 한창 꽃핀 상태의 양식을 보여주지만 1564년 사망하기 전에는 매너리즘 양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과 이론을 정확하게 구획지어 나누기란 가능하지 않다.

1530년경까지의 첫 번째 시기에 나타난 미켈란젤로의 예술관은 성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그리고 초기에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은 이런 그의 예술관을 잘 말해주는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미켈란젤로 역시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피렌체 회화의 과학적 전통을 고수했지만 신플라톤주의에 접하면서부터 그 영향권 하에서 성장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레오나르도가 추구한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바로 미 자체였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묘사된 인물상들의 웅대함은 자연 현상의 단순한 모방 그 이상인데, 인체에 대한 이상화하는 작업은 자연 현상을 면밀히 연구한 끝에 얻어진 지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인체미에 대한 숭배의 요소가 깊게 자리잡고 있다.

로마의 성기 르네상스는 사상면에서는 기독교와 이교라는 상반된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융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시스티나 천장 프레스코화는 도상학적 면에서 보면 가장 박식한 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인물상들의 외양은 이교 신들의 모습을 띠고 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에게는 기독교와 이교 둘 다 소중했다.
그는 처음부터 말년의 신앙생활을 물들인 열정적인 자기 포기의 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1452~98, 순교한 종교개혁가)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아주 신실한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물질계의 미에 대한 그의 믿음은 대단했는데, 초기에 사랑을 주제로 쓴 시에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신미와 가시적 미를 향한 진한 열정이 종종 육체적인 정열과 어우러진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그의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바사리와 콘디비 두 사람 모두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데 만족해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인체를 해부해가면서 매우 열심히 해부학을 공부했음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연의 정확한 모방을 믿지 않았다.
바사리에 의하면 그는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의 연필소묘를 한 번 했을 뿐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한 살아 있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홀란다는 미켈란젤로가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플랑드르 회화를 경멸한 것으로 보았다. 콘디비는 제우시스가 그린 크로톤의 <비너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미켈란젤로의 방법을 서술했다.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아름다운 사물을 좋아한다.
...
회화세계에서 자취를 남긴 모든 예술가들이 그렇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벌꿀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 자연 안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골라내 작품에 나타나도록 한다.
저 나이든 스승은 비너스를 그리는 데 있어 한 처녀만을 보고 그리는 데 만족해 하지 않고 많은 처녀들을 보고 다각도로 연구하여 각자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특징들을 골라내 자신의 비너스로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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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키오의 제자가 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가 언제 빈치를 떠나 피렌체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레오나르도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작성한 세금보고서를 통해서인데 그 보고서들이 사실이라면 그가 피렌체로 간 건 1470년이 될 것이다.

1469년 할머니 몬나 루치아가 작성한 세금보고서에는 레오나르도가 할머니와 함께 빈치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고 이듬해 세르 피에로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피렌체에서 그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몬나 루치아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레오나르도 외에 삼촌 프란체스코 부부와 세르 피에로그리고 피에로의 두 번째 아내 프란체스카 데 세르 줄리아노의 이름도 적혀 있다.

세금보고서는 호주가 작성하는 것으로 몇 년 전 할아버지가 타계한 후 할머니가 호주로서 작성했는데, 함께 살고 있지 않는 가족도 명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피에르는 아내 프란체스카와 함께 피렌체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몬나 루치아는 1469년 혹은 1470년에 세상을 떠났고 레오나르도를 돌보아줄 사람은 이제 아버지뿐이었다.
장남인 피에로는 호주로서 법적으로 자신이 거주하는 곳과 가족의 명단을 세금보고서에 기록해야 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가 피렌체로 간 것은 열일곱 살 때이거나 18살 때였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메디치 궁전 앞을 걸으면서 똑바로 뻗은 길 양편에 집들이 일렬로 줄을 선 것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이다.
14세기 초만 해도 피렌체에는 약 150개의 타워가 높이 솟아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 많은 타워의 높이가 낮아졌지만 높은 타워들도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빈치와 비교해서 피렌체가 매우 큰 도시임을 알았을 것이다.
빈치는 작은 성채가 있는 언덕 주변에 약 50개의 낮은 빌딩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한 피렌체는 문명의 절정에 이른 곳 같았다.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고대 아테네와도 같이 아름답게 치장하고 싶어 했다.

아르노 강둑에는 네 개의 다리가 있었고 건물들을 건립하는 곳에서는 나무에 못질하는 소리와 돌을 깍는 소리가 들렸다.
피렌체에는 푸줏간의 수보다는 목공소와 대리석을 다루는 곳이 더 많았다.
대성당은 아직 완공이 안 되어 마무리작업이 한창이었고 대부분의 새 건물들은 개인 소유의 것들이었다.
사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대저택을 지으면서 자신들의 저택을 궁전이라고 불렀다.

역사학자 베네데토 데이는 서른 개의 궁전만도 1450년과 1478년 사이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옛날의 좁은 길은 확장해서 넓어졌으며 오래된 건물들은 철거되고 그곳에 상점, 사무실, 마굿간, 정원 등이 만들어졌다.
새 건물들은 엄격하고 단순한 기하의 규칙을 따라 지어진 것들이다.
비아 델라 프레스탄자Via della Prestanza(오늘날 비아 데이 곤디Via dei Gondi)에 있던 세르 피에로의 집은 낡았고 곤디Gondi가가 그 지역을 구입할 때 사들여 부순 후 그곳에 가족 이름을 딴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을 디자인한 사람은 줄리아노 다 상갈로였고 레오나르도는 훗날 그와 교분이 두터웠다.


레오나르도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Andrea di Cioni, 1435년경~88)의 작업장bottega에 갔을 때 재능을 칭찬받았다.
당시 도제로 예술가의 작업장에 들어가는 나이는 보통 열두 살이나 열세 살이었다.
그렇다면 레오나르도가 1465년이나 1466년부터 도제로서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그에 관해서 알려진 바가 없고 그가 피렌체로 왔다는 사실뿐이다.
그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갔을 때는 읽고 쓰기를 할 줄 알았고 아마 문법과 셈본을 배웠을 것이다.
동네 교회의 신부가 동네 아이들에게 문법과 셈본그리고 주판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이 상례였다.
레오나르도는 이때까지만 해도 왼손잡이로 이런 버릇이 아직 고쳐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라틴어를 몰랐고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마흔 살이 넘어서였다.
그는 이탈리아어는 빈치의 억양이 사투리를 구사했는데 이 시기에 그가 쓴 노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의 스펠링은 불규칙했다.
그가 성경말고 그 밖의 책을 읽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읽지 못했을 것이다.
빈치에 비종교적인 책이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인쇄술이 그때 막 발명되어 아직까지는 이탈리아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을 때라서 책값은 비쌌다.
고전을 읽지 못한 것은 훗날 레오나르도에게 열등감을 심어주었다.

레오나르도가 미술품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공공건물과 교회가 아니더라도 피렌체의 많은 건물 외관이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사당에서 프라 필리포 리피와 안토니오 베네지아노가 그린 마돈나, 이노켄티우스 병원 벽을 장식한 루카 델라 로비아의 맑은 파란색 안의 도자기 메달, 그리고 상 미첼레교회, 세례당, 종탑에서 기베르티, 도나텔로, 미켈로조의 조각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피렌체로 오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서 엠폴리와 피스토이아에 갔을 때 대성당에서 프라 필리포 리피가 그린 근래의 제단화와 마솔리노가 그린 프레스코를 봤을 것이다.
아르노 강 주변에 있는 엠폴리는 예술이 번성하던 도시였다.
레오나르도가 아버지를 따라서 피사에 갔다면 유명한 탑이 있는 캄포를 봤을 것이며 또한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교회에서 스물일곱 살에 요절한 마사초Massacci(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1401~28)의 중요한 그림도 봤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후날 마시치오를 가리켜서 미술사에 가장 중요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마사초가 패널에 그림 그림들은 일부 피사의 국립뮤지엄에 소장되어 있고 일부는 런던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지만 나머지 것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바사리는 마사초의 그림에 관해 언급하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직접 보고 그린 말들은 아주 훌륭해서 사람들은 그것들보다 나은 그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도 말을 여러 점 그렸는데 마사초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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