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의 규칙적이고 엄격한 구성


앵포르멜Informel은 말 그대로 비형식적이란 뜻이다. 무의식적 혹은 즉흥적으로 작업을 하다보니 형식을 갖출 여유가 없는 걸 의미하기도 하고 달리 말하면 형식에 매이지 않으려고 자신의 행위를 자유스럽게 하는 작업이다. 1940년대와 50년대 이런 창작이 유럽에서 성행하자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가 앵포르멜이란 말로 분류했다. 2차세계대전의 발발은 예술가로 하여금 기존의 가치 혹은 형식에 반발하게 만들었고 그런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과거와의 단절이었으므로 창작의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뉴욕에서는 추상표현주의가 성행했는데 유사한 미학으로 따로 주제가 되는 오브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전체를 하나의 구성으로 삼는 비형식적 방법이었다. 1912년 조르주 브라크에 의해 콜라주 기법이 등장한 이래 유럽 예술가들에게는 콜라주가 보편적 방법이 되었으며 앵포르멜 회화에 콜라주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모두 무의식적 혹은 즉흥적 작업이라서 예술가 자신의 감정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 바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앵포르멜을 '서정적 추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예술가들이 이런 류의 작품을 오래 추구하지 못한 이유는 충동적인 감정도 다양함에 한계가 있고 결국 반복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다시금 형식에 치우치게 되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은 화가가 평생 추구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양식이다.

박서보는 1956년 6월 스물다섯 살 때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국전과 결별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기존의 가치 혹은 형식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은 앵포르멜을 추구한 예술가들의 기본 자세였다. 초기 앵포르멜 작품 <작품 No.18-59>(1959)는 캔버스에 시멘트와 마를 부착하여 오일물감을 칠한 것으로 실험적인 작품이다. 실험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재료를 그렇게 사용한 것일 뿐 재료의 특성이 제대로 나타나지도 못했고 감정이입이 될 만한 서정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화면을 위아래로 이등분하여 지나치게 안정을 찾았는데 이런 안정은 이후의 작품에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 그가 퍽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순화시키려고 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유럽 예술가들은 이성의 붕괴와 미학의 한계를 실감하고 비형식을 돌팔구로 제시한 데 반해 그는 새로운 추상의 양식으로 받아들인 점이다. 그러나 유럽 예술가들과 공유한 시대적 요구가 그에게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훗날 술회했다.

"대량학살, 집단폭력으로부터의 희생, 정신적 핍박, 부조리, 불안과 고독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속에서 자폭하듯 그렇게 결행한 실천의 산물이 57년에 제작된 앵포르멜이라고 불리는 나의 그림이다."

감정을 억제하고 순화하려는 박서보의 기질에 앵포르멜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1967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해서 삼십여 년 지속적으로 추구한 묘법 시리즈를 보면 이전 작품들은 실험적이었고 걸출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박서보의 고유한 회화는 묘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캔버스에 연필로 수없이 많은 사선을 긋는 묘법에 깔린 미학을 그는 정연한 논리로 말했다.

"나는 연필을 그리는 도구로서 쓰는 게 아니라 행위의 도구로서 연필을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위해서이다.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탈이미지'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목적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행위 자체에서 살고자 해야 한다. 이미지나 형상, 어떤 환상을 쫓지 않는다는 그런 탈이미지의 무목적적성은 ... 순수무위행위라고 해도, 무위순수행위라 해도 좋다."

그는 자신의 묘법 시리즈를 순수무위행위라고 했지만 1973년 이전 작품들을 보면 형식에 매였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는 화면을 바둑판처럼 분할하거나 이등분 또는 사등분했으며 전체를 하나의 화면으로 사용할 때도 형식을 갖추었다. 화면 전체를 사선 또는 격자무늬로 채울 때도 매우 치밀하게 인위적으로 구성했음을 본다. 그는 연필과 흰색을 자신을 허무는 도구 또는 극기의 도구로 삼았다고 했는데 이미지를 배척하면서 반복적 행위를 통해 행위 자체를 매체 그리고 내용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미학을 마크 토비Mark Tobey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1934~5년 중국과 일본을 여행한 토비는 동양의 서예를 응용하여 소위 말하는 '흰색 쓰기 white writing'를 반복적으로 했다. 토비는 회화가 행위보다는 명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데 비해 박서보는 회화를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과정으로 이해했다. 두 사람 모두 동양적인 내적 세계에 근거해 작업했는데, 상이한 점은 토비는 자유를 누리며 작업한 데 반해 박서보는 엄격한 고행의 방법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그의 묘법 작품들은 매우 규칙적이고 엄격한 구성을 띤다. 순수무위행위라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인위적이며 의도적이다. 규칙적이고 엄격한 구성이 1995년 이후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룬 것을 보면 그는 완벽주의자였음이 틀림 없다.

재료에도 관심이 많아 그는 마와 면에 그렸으며 80년대 들어서는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안료가 한지에 흡수되는 것을 그는 서양 종이와 달리 "행위의 신체성을 ... 밖으로 내뱉지 않고 빨아들이듯 합일"하는 것으로 보았다. 모노크롬 물감을 촉촉히 젖어들게 하는 데 한지가 적당했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한지에 제작한 작품들은 매우 뛰어났다. 단색의 선택과 채색도 뛰어나지만 반복하더라도 똑같을 수 없는 행위를 엄격한 기하적 구성에 적용시키는 데서 인쇄한 선물포장지와는 달리 인위적이고 시간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반복적 행위와 한지의 특성이 그가 말한 절묘한 '신체적 궤적'을 낳았다. 신체적 궤적은 반복으로 인해 잔잔한 율동을 화면에 일게 하는데 이런 율동을 동양인은 자연의 절경으로 받아들인다. 잔잔한 수면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다만 1995년 이후 그가 자를 사용하여 선을 경직되게 사용하기 시작하고 인위적으로 반복을 동일하게 했으므로 원래 추구하려던 미학이 퇴조를 이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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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보통이었다


르네상스 이전 예술가들은 대부분 하찮은 신분이었으며 그들의 기술은 좀 나은 숙련공 정도로 인정받았을 뿐이다.
출신성분이나 교육수준에서 길드의 소시민적 구성원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농부, 이발사, 푸줏간집 자제들이 화가가 되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다.
예술가 지망생들의 교육은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가 아니라 작업장에서, 이론적 수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질적 훈련을 통해서 이뤄졌다.
그들은 읽기, 쓰기, 셈본 등 기본 지식을 습득한 한 어린 나이에 장인의 문하에 들어가 여러 해 그 밑에서 기술을 습득했다.
르네상스 초기 중요한 예술가들의 작업장은 대체적으로 수공업적 조직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예술가마다 나름대로 독자적 교수법을 도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술가 지망생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예술가의 작업장으로 편입되었고 유명한 예술가의 작업장에 지망생들이 몰리는 현상이 생겼다.
지망생들은 자신들의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고 예술가들은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려고 했을 뿐 훌륭한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르네상스 초기 예술가들의 작업장은 여전히 석공조합이나 길드의 작업장이 지닌 공동체 의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15세기 말까지 미술품을 제작하는 과정은 집단적이었는데, 특히 커다란 조각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수와 노동자들을 고용해야 했으므로 공장과도 같은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기베르티가 피렌체 세례당 문을 제작할 때 스무여 명의 조수가 기용된 데서도 이런 점을 알 수 있다.
기를란다요가 커다란 벽화를 그릴 때도 많은 화가와 조수들이 그를 도왔다.
처음부터 완성시킬 때까지 혼자서 작업하면서 제자와 조수들의 노동과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미켈란젤로에 의해서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는 최초의 현대적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의 작업장은 규모에 따라 큰 사업이었다.
혼자 독자적으로 작업장을 운영할 수 없는 예술가들은 공동으로 운영하기도 했는데, 도나텔로와 미켈로조, 바르톨로메오와 알베르티넬리, 사르토와 프란치아비지오 등은 공동으로 운영했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미술품 제작을 사업으로 삼고 작업장을 운영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밀라노의 에반젤리스타 다 프레디스는 예술가들을 고용해 자신이 주문받은 작품을 제작하게 했으며 레오나르도도 그로부터 일감을 받아 제작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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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의 음양 조형주의


김흥수는 1936년 함흥고보 학생으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국전의 전신)에 유화 <밤의 정물>을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데뷔했는데 17살 때였다. 이 작품은 큰 그릇에 닭이 있는 정물로 17살의 소녀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붓질이 매우 자신만만하게 역동적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1943년에 그린 <정물>과 이듬해 그린 <밤의 실내정물>보다 이 작품이 더욱 재기발랄하며 추상적 요소가 짙다는 것이다. 그는 1938년 일본으로 가서 2년 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고 1944년 졸업한 후 귀국했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그는 다시 유학을 준비했다. 훗날 그는 이 시기에 관해 술회했다.

"사생적인 수법에만 의존해 왔던 나 자신이 갑자기 창작적인 수법으로 180도의 전환을 한다는 것은 당시의 나에게는 암중모색하는 이외의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파리로 떠나야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이다."

그가 1955년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에 입학했을 때 한국인으로는 첫 파리의 유학생이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난 것으로 파리에 도착하고 얼마 후 말했다. "이때까지는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던 그러한 오묘한 세계가 스스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큰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주었다." 그가 파리에서 그린 <세 얼굴>(1956)과 <나부>(1958)를 보면 이전 한국에서 그린 사생적인 작품들과는 사뭇 달라졌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조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재 상황에서의 모델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회화적 상황에 적응하는 모델에 대한 묘사로서 이제 그에게는 실재 모델이 눈앞에서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를 쓰듯 그는 자신의 감정과 상상에 의존해서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고 1960년작 <고민>의 경우 인물의 형상만 조형적으로 취했음을 본다. 그가 풀어야 할 숙제는 구상과 추상의 관계로서 구상적인 요소를 얼마나 제한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런 창작과정을 1958, 1966, 1967년 제작한 동일한 제목의 <나부>를 통해서 볼 수 있는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는 조형성에 기반을 두고 작업하면서 구상적 요소를 거의 배제했다. 구상적 요소를 회화적 형상으로만 사용했으며 모자이크처럼 색면을 작게 해서 흐트러뜨리거나 모으는 방법으로 고유한 조형을 형성해나갔다.

1961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그는 6년 후 다시 이 땅을 떠나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국으로 떠난던 해 1967년 그는 <전설>을 제작했는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화면을 아홉 개로 나눠 한 화면에 아홉 점의 작은 그림들을 삽입해 전체를 복잡한 회화세계로 만들었다. 색면을 작게 사용하다가 화면을 분할하는 방법으로 조형의 폭을 늘인 것이다. 조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그는 미국에서 조형의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 <념>(1977)은 <전설> 이후 10년만에 확립시킨 걸출한 조형작품이 되었다. 구상과 추상의 문제를 그는 화면을 이등분하는 것으로 공평한 방법으로 양분하면서 이를 하나의 주제가 되게 연결한 것이다. 왼쪽에는 둥근 여성용 분첩처럼 생긴 갖가지 색상들을 가로 8개 세로 7개 모두 56개 병렬하고 그 아래 동일한 색상의 좀더 작은 둥근 원형들을 가로 18개 세로 8개 모두 144개를 병렬했다. 오른쪽에는 노란색 바탕에 부처의 이미지를 그려넣었다.

그는 자신의 성과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구상과 추상의 두 이질성을 하나의 작품으로 조화시킨 조형주의 작품. ... 선적인 무아의 경지가 동양 예술의 바탕이라면, 고도로 세련된 감각의 순화가 유럽 예술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미술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계산된 합리주의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의 이질문화 속에서 나는 나의 길을 형성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조형주의 작품이란 두 개의 다른 주제를 각각 다른 화면에 그려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놓고 눈에 보이는 구상세계(양)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세계(음)를 두 개 이상의 화면에다 그려 작품으로 조화시키는 작화방법이다."

<념>은 그가 여태까지 노력해 온 구상과 추상의 조형적 정점을 이룬 작품이 되었다. 그가 58세에 이른 회화의 고지였다. 이후 그이 창작은 <념>의 원리로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더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의 '구상과 추상의 조형원리'를 적용하면 되었다. 소위 말하는 '음양 조형주의'를 창작의 근거로 삼았다. 문제는 그의 음양 조형주의는 개인적인 양식이라서 보편성을 띨 수 없다는 것이다. 역시 추상은 추상이고 구상은 구상이다. 추상과 구상의 병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한계선 상에서 이 둘의 조화를 시도했다는 것 자체로만도 회화의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한 것이다.
그는 12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1979년 귀국했다. 그는 말했다.

"그동안 나는 우리 화단이 나에게 기대했던 그러한 일들을 얼마나 이루어 놓았던 것일까? 12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다. 우리 화단이 내가 파리시대에 얻기 시작했던 그러한 작가로서의 화려한 명성을 미국에서의 나에게 기대했다면 그것은 너무도 나의 의도와는 다른 기대인 것이다. ... 그러나 나는 나의 10여 년의 미국 생활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비록 나는 미국에서 황금이나 명성을 갖고 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영혼의 구체적인 작품들을 갖고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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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과 부를 누리게 된 예술가들


작품을 주문한 사람과 예술가의 관계가 때로는 시간제 보수를 지급받는 임금제 노사관계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
1485년에 체결된 한 계약서를 보면 기를란다요는 작품에 사용되는 물감 비용까지 명시했다.
1487년에 리피가 체결한 한 계약서에는 재료비를 자신이 부담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계약을 1498년 미켈란젤로도 맺었는데, 15세기 말에나 와서야 예술가들은 시간제 임금제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다.
이것 역시 미켈란젤로를 통해 뚜렷이 부각된다.
콰트로첸토(15세기)에서는 계약을 체결할 때 발주자가 예술가에게 계약의 완수를 보증하는 보증인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미켈란젤로에 이르러서는 이런 보증은 형식이 되었다.
예술가의 의무도 엄격하게 세밀히 쓰지 않게 되었다.
1524년의 계약서를 보면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는 성인의 이미지만 아니라는 조건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기로 했으며, 동일한 수집가는 1531년 미켈란젤로와 계약을 맺으면서 그림이든 조각이든 한 점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그들이 받은 보수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콰트로첸토 후반 피렌체 사람들은 벽화에 많은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조반니 토르나부오니는 1485년 기를란다요와 계약을 맺으면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가족예배당벽화를 위해 1,100굴덴을 지불하기로 했다.
리피는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벽화를 그려주는 댓가로 2천 금 두카트를 받았는데, 이는 2천 굴덴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천장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은 무려 3천 두카트였다.
콰트로첸토 말기에 이르면 예술가들이 돈을 모으게 되는데, 리피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으며, 페루지노는 집을 몇 채 갖고 있었고, 베네데토 다 마야노는 대저택을 소유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모로의 궁정화가로 총애를 받으며 2천 두카트의 여봉을 받았고, 그후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모델로 삼았던 냉혹하고 유능한 참주 체자레 보르지아의 수석 전쟁기술자로 대접을 받았으며, 프랑스에서는 왕의 총애하는 화가이자 측근으로 매년 3만5천 프랑을 받았다.
친퀘첸토(16세기)의 두 거장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는 거액의 수입을 올려 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을 뿐 수입은 많았으며 상 피에트로 성당을 장식한 댓가를 받기를 거절했을 때는 이미 큰 재산을 모은 후였다.
예술가들의 수입이 증가한 것은 물가가 오른 데도 그 영향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콰트로첸토 말부터 친퀘첸토 초까지 로마 교황청이 미술시장의 전면에 나서 피렌체의 미술 수요와 경합을 벌였기 때문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때 거주지를 아예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겼다.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친퀘첸토 초부터였다.
이때부터 유명한 예술가들은 후원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귀족계급과 같은 위치를 마련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라파엘로는 대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다.
그는 로마에 궁전을 갖고 있었으며, 군주와 추기경들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교제했고, 당시 유명한 귀족이며 미술애호가 아고스티노 치지의 친구였으며, 그의 아내는 비비에나 추기경의 질녀였다.
티치아노는 라파엘로보다 더욱 더 출세한 화가였다.
황제 카알 5세는 그를 라테라노 궁정의 공작에 임명하고 자기 궁전에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세습귀족의 권한과 같은 일련의 특권을 부여했다.
왕후와 귀족들은 다투어 그로부터 초상화를 얻고자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티치아노가 그림을 그려줄 때마다 값비싼 선물을 주었고 그의 딸 라비니아가 결혼할 때는 막대한 지참금까지 주었다. 앙리 3세는 노령에 접어든 이 거장을 몸소 방문했으며 티치아노가 1576년 페스트에 걸려 죽었을 때 페스트로 죽은 사람은 절대로 성당에 매장해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엄격한 관례를 깨고 최대한의 예를 갖춰 프라리 성당에 시신을 안장했다.
미켈란젤로는 과거에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적 명성에 도달했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위대성은 너무나 자명해서 공적 명예나 칭호, 표창 따위는 아예 사절했다.
그는 군주와 교황들과의 교제를 하찮게 여겼는데, 자신이 그들의 반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태도였다.
그는 공작도, 추밀원의 고문관도, 교황청의 감독관도 아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신과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의 젊은이들을 제자로 두기를 선호했으며 그림은 "손으로 colla mano"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col cervello" 그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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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이 출현했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매너리즘Mannerism이다.
매너리즘은 예술과 자연의 일치라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미술사에 있어서 최초로 예술과 관련된 인식론적 문제였으며 자연주의, 즉 '소박한 독단주의'에 반하는 것이었다.
매너리즘이라고 하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할 때의 뜻으로 개념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순수미술 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을 말한다.
고전기 이후의 미술을 몰락현상으로 보고 매너리즘에 의한 미술품 제작을 거장의 양식을 노예적으로 모방하는 기계적인 작업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런 사고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의 저서 안니발레 카라치의 전기에서였다.
바사리가 사용한 '마니에라 maniera'란 말은 예술적 특성, 즉 역사적, 개인적 혹은 기술적으로 규정된 표현방식으로 넓은 의미로 '양식 style(stil)'이었다.
그가 '그란 마니에라 gran' maniera'라고 했을 때는 위대한 혹은 장대한 양식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당시 통용되던 마니에라가 없다는 말은 양식이 결여되었음을 유감스럽게 표현한 말이 된다.
마니에라란 개념을 가시적이며 진부하고 일련의 공식에 도입시킬 수 있는 성격의 양식이라는 관념과 처음 결부시킨 사람은 이탈리아 화가이며 미술학자 그리고 골동품 연구가 카를로 말라시아와 17세기 고전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매너리즘을 고전주의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으로 보았다.

성기 르네상스의 기간이 짧았던 것은 매너리즘의 성행 때문이었다.
성기 르네상스는 언덕에 오르자마자 하강해야 했는데,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의 작품에서도 고전주의를 와해시키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에서는 안정과 지속의 양식이었던 고전주의가 왜 르네상스에서는 단순한 '과도기적 단계'로 나타났는가?
이에 대해 하우저는 말한다.

"그 이유는 아마 친퀜첸토의 고전주의에서 예술적 표현을 얻었던 균형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견고한 현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이상이자 허구였고 르네상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본질적으로 동적인 시대, 어떠한 해결책에도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한 근대의 자본주의적 정신과 변증법적인 복잡한 근대의 자연과학적 세계상을 정리, 극복하려는 르네상스의 노력은 후대의 노력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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