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의 규칙적이고 엄격한 구성
앵포르멜Informel은 말 그대로 비형식적이란 뜻이다. 무의식적 혹은 즉흥적으로 작업을 하다보니 형식을 갖출 여유가 없는 걸 의미하기도 하고 달리 말하면 형식에 매이지 않으려고 자신의 행위를 자유스럽게 하는 작업이다. 1940년대와 50년대 이런 창작이 유럽에서 성행하자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e가 앵포르멜이란 말로 분류했다. 2차세계대전의 발발은 예술가로 하여금 기존의 가치 혹은 형식에 반발하게 만들었고 그런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과거와의 단절이었으므로 창작의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뉴욕에서는 추상표현주의가 성행했는데 유사한 미학으로 따로 주제가 되는 오브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전체를 하나의 구성으로 삼는 비형식적 방법이었다. 1912년 조르주 브라크에 의해 콜라주 기법이 등장한 이래 유럽 예술가들에게는 콜라주가 보편적 방법이 되었으며 앵포르멜 회화에 콜라주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모두 무의식적 혹은 즉흥적 작업이라서 예술가 자신의 감정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 바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앵포르멜을 '서정적 추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예술가들이 이런 류의 작품을 오래 추구하지 못한 이유는 충동적인 감정도 다양함에 한계가 있고 결국 반복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다시금 형식에 치우치게 되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은 화가가 평생 추구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양식이다.
박서보는 1956년 6월 스물다섯 살 때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국전과 결별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기존의 가치 혹은 형식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은 앵포르멜을 추구한 예술가들의 기본 자세였다. 초기 앵포르멜 작품 <작품 No.18-59>(1959)는 캔버스에 시멘트와 마를 부착하여 오일물감을 칠한 것으로 실험적인 작품이다. 실험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재료를 그렇게 사용한 것일 뿐 재료의 특성이 제대로 나타나지도 못했고 감정이입이 될 만한 서정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화면을 위아래로 이등분하여 지나치게 안정을 찾았는데 이런 안정은 이후의 작품에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 그가 퍽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순화시키려고 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유럽 예술가들은 이성의 붕괴와 미학의 한계를 실감하고 비형식을 돌팔구로 제시한 데 반해 그는 새로운 추상의 양식으로 받아들인 점이다. 그러나 유럽 예술가들과 공유한 시대적 요구가 그에게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훗날 술회했다.
"대량학살, 집단폭력으로부터의 희생, 정신적 핍박, 부조리, 불안과 고독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속에서 자폭하듯 그렇게 결행한 실천의 산물이 57년에 제작된 앵포르멜이라고 불리는 나의 그림이다."
감정을 억제하고 순화하려는 박서보의 기질에 앵포르멜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1967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해서 삼십여 년 지속적으로 추구한 묘법 시리즈를 보면 이전 작품들은 실험적이었고 걸출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박서보의 고유한 회화는 묘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캔버스에 연필로 수없이 많은 사선을 긋는 묘법에 깔린 미학을 그는 정연한 논리로 말했다.
"나는 연필을 그리는 도구로서 쓰는 게 아니라 행위의 도구로서 연필을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위해서이다.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탈이미지'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목적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행위 자체에서 살고자 해야 한다. 이미지나 형상, 어떤 환상을 쫓지 않는다는 그런 탈이미지의 무목적적성은 ... 순수무위행위라고 해도, 무위순수행위라 해도 좋다."
그는 자신의 묘법 시리즈를 순수무위행위라고 했지만 1973년 이전 작품들을 보면 형식에 매였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는 화면을 바둑판처럼 분할하거나 이등분 또는 사등분했으며 전체를 하나의 화면으로 사용할 때도 형식을 갖추었다. 화면 전체를 사선 또는 격자무늬로 채울 때도 매우 치밀하게 인위적으로 구성했음을 본다. 그는 연필과 흰색을 자신을 허무는 도구 또는 극기의 도구로 삼았다고 했는데 이미지를 배척하면서 반복적 행위를 통해 행위 자체를 매체 그리고 내용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미학을 마크 토비Mark Tobey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1934~5년 중국과 일본을 여행한 토비는 동양의 서예를 응용하여 소위 말하는 '흰색 쓰기 white writing'를 반복적으로 했다. 토비는 회화가 행위보다는 명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데 비해 박서보는 회화를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과정으로 이해했다. 두 사람 모두 동양적인 내적 세계에 근거해 작업했는데, 상이한 점은 토비는 자유를 누리며 작업한 데 반해 박서보는 엄격한 고행의 방법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그의 묘법 작품들은 매우 규칙적이고 엄격한 구성을 띤다. 순수무위행위라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인위적이며 의도적이다. 규칙적이고 엄격한 구성이 1995년 이후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룬 것을 보면 그는 완벽주의자였음이 틀림 없다.
재료에도 관심이 많아 그는 마와 면에 그렸으며 80년대 들어서는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안료가 한지에 흡수되는 것을 그는 서양 종이와 달리 "행위의 신체성을 ... 밖으로 내뱉지 않고 빨아들이듯 합일"하는 것으로 보았다. 모노크롬 물감을 촉촉히 젖어들게 하는 데 한지가 적당했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한지에 제작한 작품들은 매우 뛰어났다. 단색의 선택과 채색도 뛰어나지만 반복하더라도 똑같을 수 없는 행위를 엄격한 기하적 구성에 적용시키는 데서 인쇄한 선물포장지와는 달리 인위적이고 시간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반복적 행위와 한지의 특성이 그가 말한 절묘한 '신체적 궤적'을 낳았다. 신체적 궤적은 반복으로 인해 잔잔한 율동을 화면에 일게 하는데 이런 율동을 동양인은 자연의 절경으로 받아들인다. 잔잔한 수면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다만 1995년 이후 그가 자를 사용하여 선을 경직되게 사용하기 시작하고 인위적으로 반복을 동일하게 했으므로 원래 추구하려던 미학이 퇴조를 이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