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의 음양 조형주의


김흥수는 1936년 함흥고보 학생으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국전의 전신)에 유화 <밤의 정물>을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데뷔했는데 17살 때였다. 이 작품은 큰 그릇에 닭이 있는 정물로 17살의 소녀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붓질이 매우 자신만만하게 역동적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1943년에 그린 <정물>과 이듬해 그린 <밤의 실내정물>보다 이 작품이 더욱 재기발랄하며 추상적 요소가 짙다는 것이다. 그는 1938년 일본으로 가서 2년 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고 1944년 졸업한 후 귀국했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그는 다시 유학을 준비했다. 훗날 그는 이 시기에 관해 술회했다.

"사생적인 수법에만 의존해 왔던 나 자신이 갑자기 창작적인 수법으로 180도의 전환을 한다는 것은 당시의 나에게는 암중모색하는 이외의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파리로 떠나야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이다."

그가 1955년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에 입학했을 때 한국인으로는 첫 파리의 유학생이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난 것으로 파리에 도착하고 얼마 후 말했다. "이때까지는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던 그러한 오묘한 세계가 스스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큰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주었다." 그가 파리에서 그린 <세 얼굴>(1956)과 <나부>(1958)를 보면 이전 한국에서 그린 사생적인 작품들과는 사뭇 달라졌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조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재 상황에서의 모델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회화적 상황에 적응하는 모델에 대한 묘사로서 이제 그에게는 실재 모델이 눈앞에서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를 쓰듯 그는 자신의 감정과 상상에 의존해서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고 1960년작 <고민>의 경우 인물의 형상만 조형적으로 취했음을 본다. 그가 풀어야 할 숙제는 구상과 추상의 관계로서 구상적인 요소를 얼마나 제한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런 창작과정을 1958, 1966, 1967년 제작한 동일한 제목의 <나부>를 통해서 볼 수 있는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는 조형성에 기반을 두고 작업하면서 구상적 요소를 거의 배제했다. 구상적 요소를 회화적 형상으로만 사용했으며 모자이크처럼 색면을 작게 해서 흐트러뜨리거나 모으는 방법으로 고유한 조형을 형성해나갔다.

1961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그는 6년 후 다시 이 땅을 떠나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국으로 떠난던 해 1967년 그는 <전설>을 제작했는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화면을 아홉 개로 나눠 한 화면에 아홉 점의 작은 그림들을 삽입해 전체를 복잡한 회화세계로 만들었다. 색면을 작게 사용하다가 화면을 분할하는 방법으로 조형의 폭을 늘인 것이다. 조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그는 미국에서 조형의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 <념>(1977)은 <전설> 이후 10년만에 확립시킨 걸출한 조형작품이 되었다. 구상과 추상의 문제를 그는 화면을 이등분하는 것으로 공평한 방법으로 양분하면서 이를 하나의 주제가 되게 연결한 것이다. 왼쪽에는 둥근 여성용 분첩처럼 생긴 갖가지 색상들을 가로 8개 세로 7개 모두 56개 병렬하고 그 아래 동일한 색상의 좀더 작은 둥근 원형들을 가로 18개 세로 8개 모두 144개를 병렬했다. 오른쪽에는 노란색 바탕에 부처의 이미지를 그려넣었다.

그는 자신의 성과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구상과 추상의 두 이질성을 하나의 작품으로 조화시킨 조형주의 작품. ... 선적인 무아의 경지가 동양 예술의 바탕이라면, 고도로 세련된 감각의 순화가 유럽 예술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미술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계산된 합리주의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의 이질문화 속에서 나는 나의 길을 형성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조형주의 작품이란 두 개의 다른 주제를 각각 다른 화면에 그려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놓고 눈에 보이는 구상세계(양)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세계(음)를 두 개 이상의 화면에다 그려 작품으로 조화시키는 작화방법이다."

<념>은 그가 여태까지 노력해 온 구상과 추상의 조형적 정점을 이룬 작품이 되었다. 그가 58세에 이른 회화의 고지였다. 이후 그이 창작은 <념>의 원리로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더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의 '구상과 추상의 조형원리'를 적용하면 되었다. 소위 말하는 '음양 조형주의'를 창작의 근거로 삼았다. 문제는 그의 음양 조형주의는 개인적인 양식이라서 보편성을 띨 수 없다는 것이다. 역시 추상은 추상이고 구상은 구상이다. 추상과 구상의 병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한계선 상에서 이 둘의 조화를 시도했다는 것 자체로만도 회화의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한 것이다.
그는 12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1979년 귀국했다. 그는 말했다.

"그동안 나는 우리 화단이 나에게 기대했던 그러한 일들을 얼마나 이루어 놓았던 것일까? 12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다. 우리 화단이 내가 파리시대에 얻기 시작했던 그러한 작가로서의 화려한 명성을 미국에서의 나에게 기대했다면 그것은 너무도 나의 의도와는 다른 기대인 것이다. ... 그러나 나는 나의 10여 년의 미국 생활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비록 나는 미국에서 황금이나 명성을 갖고 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영혼의 구체적인 작품들을 갖고 온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