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교수신문에서 청탁을 받아 쓴 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미술비평이 거의 부재합니다.
그저 찬양일색입니다.
칭찬을 하더라도 왜 칭찬을 해야하는지 분명히 밝히면서 칭찬해야 하는데 그냥 칭찬만 합니다.
특히 유명한 예술가는 무조건 칭찬의 대상입니다.
이는 비평의 부재입니다.
얼마 전 <이우환의 정체된 허무주의 예술>을 써서 교수신문에 기고했더니 많은 분이 좋은 글을 읽었다고 인사를 해주었습니다.
나의 비평은 찬양일색인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에게 언제든지 논쟁을 걸어와도 좋습니다.
난 공평한 태도로 비평을 할 것이며 앞으로 장욱진, 김환기, 이응로, 박수근 등 이유도 없이 칭찬에 칭찬을 무더기로 받고 있는 분들을 한 사람씩 비평하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비평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두려고 합니다.)
추상풍경화가, 유영국의 조형성
추상은 20세기 미술의 성과이다. 추상이 태동하게 된 주요 동기는 세 가지였고 이후 전개된 대부분의 추상 작품은 세 유형으로 분류 가능하다.
1. 서양미술사에서 최초로 추상화가 출현한 해는 1910년으로 칸딘스키가 유추할 만한 오브제의 형상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오브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선과 색으로 긴급하게 표현한 것이다. 느낌이란 순간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라서 오래 생각하면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신속히 붓을 놀리게 된다. 이런 류의 작품을 감상할 때는 일견의 인상에 의존하게 되는데, 느낌으로 감상하는 것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2차세계대전 후 뉴욕에서 출현한 추상표현주의와 1990년대 성행한 신표현주의 추상 모두 이런 유형에 속하며 느낌 외에 잠재적 의식도 분출된 것이 특기할 만하다. 다만 예술가들의 느낌과 사고가 복잡해졌고 개성적이어서 일견에 감지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들의 창작 동기를 알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2. 다음의 유형은 색채를 도면화시킨 것이다. 쿠프카의 <색면>(1910)을 예로 들면 구상적 주제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는 1과 마찬가지지만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분광된 색채를 배열한 것이 다르다. 빛의 역할을 강조한 데서 생겨난 추상이다. 들로네의 <동시에 열린 창문들>(1912)은 덧창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효과를 색채로 표현한 것으로 오직 색채의 대비로만 그린 것이며 색채가 곧 주제이다.
3. 마지막 유형은 오브제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요약, 응축하며, 개별적 요소를 무시하고 보편성을 따르는 조형적 추상이다. 오브제의 무수한 선을 수직과 수평으로 요약하고, 구체적 형태를 무시하며, 지엽적 색을 배제하고 직선과 일차색을 사용한다.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절대주의가 이런 유형의 규범이 되었다. 이는 자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말레비치의 말을 따르면 “이성, 감각, 논리, 철학, 심리학 등 인과법칙, 기술적 변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는 조형주의와 구성주의의 근간이 되었으며 굳이 말하자면 아르프와 미로 등 유기체 형상을 이용한 추상도 이 범주에 속한다.
유영국의 조형적 추상은 세 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는 1996년에 말했다. “데생도 기본형태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중요하지만 미술의 기본은 모든 형태가 구조체라는 점에서 다양하고 수많은 면을 그 구성과정에서 탐구하는 것이다. 특히 대상의 배치와 그 위치로 다양한 면과 선을 보게 된다. 모든 대상은 선과 면과 색이며 회화미술도 역시 이에 부합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단순화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이것은 집약한다는 뜻이 되며, 따라서 결국에는 기하학적인 형이 요구되는 것이다.”
1938년 동경문화학원 유화과를 졸업한 이후 유영국은 대부분 작업에 <작품>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무제’란 뜻이다. 1943년 귀국하기 전까지 일본에서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기하에 근거한 실험적인 것들로 서양 예술가들 몇몇 사람의 영향이 농후하며 주로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추상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였다. <도시>(1955)를 예로 들면 도시의 모습을 조형적으로 표현했는데 지역의 특성적 형태의 선을 따고 선과 선 사이에 생겨난 면에 채색하면서 그가 말하는 “균형, 하모니, 리듬”이 나타나게 했다. 균형, 하모니, 리듬이란 곧 조형이다. 균형과 하모니는 선과 색에 의한 화면의 분할이고 리듬은 유사한 선과 색의 반복으로 역시 조형의 일종이다. <도시>는 유영국이 미화시킨 도시 혹은 조형의 도시로서 그가 원하는 추상의 도시인 셈이다. 이런 유형의 추상풍경화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모든 추상은 자연과 예술가 주변의 대상에서 비롯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예술가 내면에 치중된 추상이라 할지라도 잠재의식에 남아 있는 이미지들은 자연과 예술가 주변의 대상에서 기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영국의 작품에는 산, 계곡, 들, 나무, 길, 새, 바다, 물고기, 해, 하늘, 도시, 건물, 거리, 지붕, 집, 언덕 등 유추할 만한 형상들이 있다. 그는 오브제를 단순화하고, 요약, 응축하며 조형적으로 추상화하는 작업에 정진해왔다. 내가 그를 추상풍경화가라 부르는 이유는 풍경을 추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유영국의 조형성은 무엇일까? 그는 1964년에 말했다. “회화란 모름지기 자기를 내세워야 한다. 나의 이미지의 출처는 자연과 생활주변이다.” ‘자기를 내세워야 한다’는 말은 조형성을 강조한 말이다. 조형에는 보편적 규칙이 있다. 예를 들면 수직선은 설레임을 주고 평행선은 안정감을 준다. 밝고 명랑한 색은 쾌활하고 시적 느낌을 주며 어둡고 무거운 색은 침울하며 사변적 느낌을 준다. 이런 규칙을 알면 그의 작품이 풍경화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보편적 규칙이 있다고는 하지만 조형에도 주관적 느낌과 사고를 표현할 여지는 있다. 특기할 만한 유영국의 조형성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나며 나이가 들어서인지 형상이 부드러워지고 공간이 넉넉해 여유가 있다. 그러나 조형적 추상은 규칙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긴장을 요하는 작업이며 자칫 반복되기 쉬워 시각적 디자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유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1996년에 말했다. “60세까지는 기초를 좀 해보고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보자는 생각으로 그림을 했었다. 현재 나에게는 노인으로서의 노년의 흥분이 좀더 필요하다. 요즘 내가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긴장의 끈을 바싹 나의 내면에 동여매고 작업에 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