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 손장섭 - 우리시대의 예술가 2, 손장섭 회화 1960-2003
손장섭 외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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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부터 금호미술관에서 열리는 손장섭 개인전과 더불어서 신간 '자연과 삶 손장섭'이 그날 소개됩니다.
다음은 손장섭 화가의 부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손장섭은 작년에 이중섭 상을 수상하신 분으로 그림을 그린 지 43년이나 되는 분입니다.
11월 5일 오후 5시 금호미술관에 오시면 작품과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도 참석해야겠지요.
제목은 '자연의 기운에 흥을 돋구는 화가, 손장섭'

자연은 숨을 쉰다.
고래로 현인들은 자연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왔다.
자연의 숨결에 자신의 호흡을 맞추면 평온해지는데 절로 생기는 자연과의 이런 일체감은 인위적 자만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자연은 보호되어야 하고 우리 모두의 영원한 고향인 것이다.
우리는 산과 들, 바다로 가야 한다.
가다가 이름 모를 들꽃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하늘을 우러러 아주 먼 곳을 응시해야 한다.
바다로 가서 지면 아래 펼쳐진 창공을 바라보면서 수면 위에 넘실대는 태양을 가슴에 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자연에 귀를 기울이고 자연의 숨결을 느껴야 한다.

이번에 소개되는 손장섭의 신작 풍경화 한 점 한 점에서는 자연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가 자연의 기운에 흥을 돋구었기 때문이다.
산의 자태에 위엄이 있고 들은 자연의 피부처럼 느껴지며 이름 모를 들꽃이 그의 장단에 맞춰 자연의 비밀을 속삭이는 것 같다.
신비로운 시각에 일어나 그는 수면 위에 넘실대는 태양을 가슴에 품었다.
자연에 더 가까이 귀를 기울이려고 험준한 길을 오르다가 떨어져 자연에 두려움이 생겼는데 이 또한 자연에 대한 마땅한 인간의 태도이다.
결국 그는 정상에 다달아 자연의 호흡을 우뚝우뚝 솟은 비봉과 오봉의 붓자락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거친 호흡은 수채물감을 물에 타지 않은 채 칼로 각지고 거친 채색이 되게 표현했다.
들에서의 들릴 듯 말 듯 여린 소리는 짧은 여운같은 색으로, 바람에 실려오는 떨림은 붓을 길게 끌어 채색했다.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에는 신명이 나서 거친 붓자국으로 신기를 표현했는데 하늘을 진한 파란색으로 쓱쓱 문지르다 만 것과 적송에 느닷없이 흰색을 칠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손장섭이 자주 오르는 산은 북한산이다.
산이 우리 가까이서 병풍을 친 나라는 드물다.
아니 산을 이렇게 가까이 하는 민족도 드물다.
외국을 두루 다녀본 사람이라면 북한산이 얼마나 고마운 산인지 알 것이다.
자연을 바로 이웃에 두고 사는 나라가 지구상에 그리 많지 않다.
전철종점에서 버스종점에서 곧바로 산으로 갈 수 있는 나라는 드물다.
산에 오르는 멋을 아는 화가가 손장섭이다.
신작들 가운데 북한산을 주제로 한 것이 가장 많다.
빼어난 비봉과 오봉의 모습을 우리 눈 가까이 옮겨 놓았다.
북한산의 기운이 비봉으로 오봉으로 고저장단을 이루는 것을 화면의 오선지에 멜로디로 흥을 돋군 것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병등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땅히 자연의 병풍이 되어 경관으로 굽이굽이 펼쳐져야 할 금병산이 파괴에 의해 일그러진 것을 보고 그는 병풍의 병산이 아니라 병이 든 병산이라고 한탄하며 화면으로 남겨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모진 행위에 반성을 촉구한다.
이밖에도 자연을 파괴한 장면을 기록처럼 남긴 작품이 있는데 육십을 넘은 나이지만 아직 불의와 부조리에 반발하는 젊은 혈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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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교수신문에서 청탁을 받아 쓴 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미술비평이 거의 부재합니다.
그저 찬양일색입니다.
칭찬을 하더라도 왜 칭찬을 해야하는지 분명히 밝히면서 칭찬해야 하는데 그냥 칭찬만 합니다.
특히 유명한 예술가는 무조건 칭찬의 대상입니다.
이는 비평의 부재입니다.
얼마 전 <이우환의 정체된 허무주의 예술>을 써서 교수신문에 기고했더니 많은 분이 좋은 글을 읽었다고 인사를 해주었습니다.
나의 비평은 찬양일색인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에게 언제든지 논쟁을 걸어와도 좋습니다.
난 공평한 태도로 비평을 할 것이며 앞으로 장욱진, 김환기, 이응로, 박수근 등 이유도 없이 칭찬에 칭찬을 무더기로 받고 있는 분들을 한 사람씩 비평하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비평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두려고 합니다.)



추상풍경화가, 유영국의 조형성

추상은 20세기 미술의 성과이다. 추상이 태동하게 된 주요 동기는 세 가지였고 이후 전개된 대부분의 추상 작품은 세 유형으로 분류 가능하다.
1. 서양미술사에서 최초로 추상화가 출현한 해는 1910년으로 칸딘스키가 유추할 만한 오브제의 형상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오브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선과 색으로 긴급하게 표현한 것이다. 느낌이란 순간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라서 오래 생각하면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신속히 붓을 놀리게 된다. 이런 류의 작품을 감상할 때는 일견의 인상에 의존하게 되는데, 느낌으로 감상하는 것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2차세계대전 후 뉴욕에서 출현한 추상표현주의와 1990년대 성행한 신표현주의 추상 모두 이런 유형에 속하며 느낌 외에 잠재적 의식도 분출된 것이 특기할 만하다. 다만 예술가들의 느낌과 사고가 복잡해졌고 개성적이어서 일견에 감지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들의 창작 동기를 알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2. 다음의 유형은 색채를 도면화시킨 것이다. 쿠프카의 <색면>(1910)을 예로 들면 구상적 주제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는 1과 마찬가지지만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분광된 색채를 배열한 것이 다르다. 빛의 역할을 강조한 데서 생겨난 추상이다. 들로네의 <동시에 열린 창문들>(1912)은 덧창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효과를 색채로 표현한 것으로 오직 색채의 대비로만 그린 것이며 색채가 곧 주제이다.
3. 마지막 유형은 오브제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요약, 응축하며, 개별적 요소를 무시하고 보편성을 따르는 조형적 추상이다. 오브제의 무수한 선을 수직과 수평으로 요약하고, 구체적 형태를 무시하며, 지엽적 색을 배제하고 직선과 일차색을 사용한다.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절대주의가 이런 유형의 규범이 되었다. 이는 자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말레비치의 말을 따르면 “이성, 감각, 논리, 철학, 심리학 등 인과법칙, 기술적 변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는 조형주의와 구성주의의 근간이 되었으며 굳이 말하자면 아르프와 미로 등 유기체 형상을 이용한 추상도 이 범주에 속한다.

유영국의 조형적 추상은 세 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는 1996년에 말했다. “데생도 기본형태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중요하지만 미술의 기본은 모든 형태가 구조체라는 점에서 다양하고 수많은 면을 그 구성과정에서 탐구하는 것이다. 특히 대상의 배치와 그 위치로 다양한 면과 선을 보게 된다. 모든 대상은 선과 면과 색이며 회화미술도 역시 이에 부합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단순화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이것은 집약한다는 뜻이 되며, 따라서 결국에는 기하학적인 형이 요구되는 것이다.”
1938년 동경문화학원 유화과를 졸업한 이후 유영국은 대부분 작업에 <작품>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무제’란 뜻이다. 1943년 귀국하기 전까지 일본에서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기하에 근거한 실험적인 것들로 서양 예술가들 몇몇 사람의 영향이 농후하며 주로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추상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였다. <도시>(1955)를 예로 들면 도시의 모습을 조형적으로 표현했는데 지역의 특성적 형태의 선을 따고 선과 선 사이에 생겨난 면에 채색하면서 그가 말하는 “균형, 하모니, 리듬”이 나타나게 했다. 균형, 하모니, 리듬이란 곧 조형이다. 균형과 하모니는 선과 색에 의한 화면의 분할이고 리듬은 유사한 선과 색의 반복으로 역시 조형의 일종이다. <도시>는 유영국이 미화시킨 도시 혹은 조형의 도시로서 그가 원하는 추상의 도시인 셈이다. 이런 유형의 추상풍경화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모든 추상은 자연과 예술가 주변의 대상에서 비롯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예술가 내면에 치중된 추상이라 할지라도 잠재의식에 남아 있는 이미지들은 자연과 예술가 주변의 대상에서 기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영국의 작품에는 산, 계곡, 들, 나무, 길, 새, 바다, 물고기, 해, 하늘, 도시, 건물, 거리, 지붕, 집, 언덕 등 유추할 만한 형상들이 있다. 그는 오브제를 단순화하고, 요약, 응축하며 조형적으로 추상화하는 작업에 정진해왔다. 내가 그를 추상풍경화가라 부르는 이유는 풍경을 추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유영국의 조형성은 무엇일까? 그는 1964년에 말했다. “회화란 모름지기 자기를 내세워야 한다. 나의 이미지의 출처는 자연과 생활주변이다.” ‘자기를 내세워야 한다’는 말은 조형성을 강조한 말이다. 조형에는 보편적 규칙이 있다. 예를 들면 수직선은 설레임을 주고 평행선은 안정감을 준다. 밝고 명랑한 색은 쾌활하고 시적 느낌을 주며 어둡고 무거운 색은 침울하며 사변적 느낌을 준다. 이런 규칙을 알면 그의 작품이 풍경화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보편적 규칙이 있다고는 하지만 조형에도 주관적 느낌과 사고를 표현할 여지는 있다. 특기할 만한 유영국의 조형성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나며 나이가 들어서인지 형상이 부드러워지고 공간이 넉넉해 여유가 있다. 그러나 조형적 추상은 규칙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긴장을 요하는 작업이며 자칫 반복되기 쉬워 시각적 디자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유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1996년에 말했다. “60세까지는 기초를 좀 해보고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보자는 생각으로 그림을 했었다. 현재 나에게는 노인으로서의 노년의 흥분이 좀더 필요하다. 요즘 내가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긴장의 끈을 바싹 나의 내면에 동여매고 작업에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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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의 회화세계는 스케일이 매우 작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서 자신의 품에 안을 수 있는 크기의 그림은 그릴 수 있어도 그 이상 큰 화면을 지배할 힘이 그에게는 없다. 그는 1974년에 말했다. “회화에 있어서의 회화성은 30호 이내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러냐하면 규모가 커지면 그림이 싱거워지고 화면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화면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회화는 그에게 은밀한 속삭임이며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라서 개인적 체험이 모티프가 된다. 바깥 세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자신이 선택한 주변에만 집착하다보니 서정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작품 대부분 사람이 누워 있거나 가만히 앉아 있는 무사안일한 분위기이다. 문인화에서 볼 수 있는 규범적 도덕성이라든가 자연에 대한 경외심 같은 고상한 미학은 부재하며 자신이 처한 환경을 안일하게 회화적으로 구성한 장욱진의 동심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대할 때는 특별히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장욱진처럼 그냥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예술이란 “시대조류와 유행과 그 밖의 어떠한 외적 영향에 비례하거나 또는 논할 수 없으며 다만 그 보는 것을 포용하며 모든 것들의 자체를 이루는 핵심과 근원을 뚫고 파헤쳐서 그 위에 다시 창조된 예술이어야 한다”면서 그럴 경우 “영과의 대화체이기도 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고상한 미학처럼 들리지만 논란의 여지를 제공한다. 우선 그의 양식은 서구적이고, 시대조류와 유행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모든 것들의 자체를 이루는 핵심과 근원을 뚫고 파헤쳐서 그 위에 다시 창조된”이란 말의 뜻이 모호하고 그의 작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린이처럼 순진한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태도는 일찍이 클레를 비롯하여 일련의 화가들에 의해 추구되었고 2차세계대전 후에는 뒤비페에 의해 유럽뿐 아니라 서구 전반에 유행된 양식이다. 장욱진은 이런 서양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영과의 대화체이기도 한 것”이라고 했지만 회화적으로 사물의 핵심과 근원을 파헤친 흔적이 보이지 않아 이 말이 시사하는 바가 없는데, 모든 예술이 대화, 즉 커뮤니케이션을 바탕으로 행위되며 연극에서의 독백과 회화에서의 자위행위적 모티프조차 대화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장욱진은 솔직하면 오만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화가였으며 솔직함만으로도 충분히 회화의 장점이 된다고 보았다. 많은 작품에서 순진함이 발견되어 그의 의도가 충분히 나타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회화적 여유가 없어 화면을 가득채워야 안심하는 화가였으며, 지나치게 조형에만 집착한 나머지 장식적·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요소가 두드러지는 반면 사변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거의 없다. 환경적·정신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안주하며 만족해 한 그의 작품에는 산, 들, 새, 까치, 달, 사람, 나무, 소, 가족, 집이나 정자가 있기 보통인데, 그에게 편안을 제공해주는 구성 요소들이며 여기에 유머를 삽입했다. 회화는 그에게 흥을 돋구고 즐거움을 나누는 까치가 전해주는 소식과도 같았다.
그가 서양 회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1960년대 중반으로 사십 후반에 이르러서야 회화적 여유가 생겼다. <나무있는 풍경>(1965)은 그의 고유한 언어가 구사되기 시작한 첫 작품으로 애드벌룬처럼 생긴 나무는 이후 전형적 형상으로 자주 나타난다. 채색에 있어서도 차분해졌으며 노련해졌는데, 그의 말대로 화면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때문이다. <진진묘>(1970)는 아내가 불경공부를 하는 모습을 모티프로 덕소에서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그린 초상화로 알려졌는데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와 같은 걸출한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불심에 빠진 여인을 무아지경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배경의 타원형을 불교 도상과 관련지으면서 무엇보다도 차분하며 단조로운 대비적·입체적 채색을 통해 여백의 미를 이중적으로 나타냈다.
이후에도 장식적 요소가 여전히 그의 화면에 채워졌고 따라서 반복적 조형에 치우쳤는데, <까치집>(1977)은 드물게 훌륭한 작품이다. 유채를 엷게 사용하며 캔버스의 거친 질감을 드러나게 해서 회화적 이차원의 평면이 삼차원이 되게 했다. 새벽녘의 청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 신선한 기운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까치는 어렸을 적부터 호기심의 대상이 된 장욱진의 새이다. 까치는 그리움을 상징하는 요소로 종종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어느날 새벽 문 밖 나무에 매달린 까치집을 보고 영감이 생겨 그린 것인데, 나무 뒷편 인간의 보금자리는 새의 보금자리와 위 아래로 대칭을 이루며 회화에서만 가능한 이상의 풍경이 되었다. 이후 그는 유채를 수채처럼 투명하게 사용하면서 캔버스의 바탕을 더욱 더 시각적 세계의 근간이 되게 했다.
구성을 복잡하게 하는 데는 변함 없었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회화적 문제를 동양화의 먹이 주는 농담과 여백으로 풀어보려고 1970년대 후반부터 한지에 묵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채를 오래 다룬 습관 탓인지 먹의 효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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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슴이 덫에 걸리는 것이 부주의 탓만 아니듯
열심히 살아도 가슴에 꽂힌 비수로 몸서리쳐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슴이 고성을 지르듯
곡성을 내며 눈물을 쏟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린 철새가 어미를 따라 이동하다 지쳐 떨어지듯
어미는 긴 여정에서 어린 것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행복하다
새가 고성을 지르듯
곡성을 내며 눈물을 쏟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뇌하며 체념하더라도
절망하며 포기하더라도
그럴 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행복하다
소리지르며 분을 토해내듯
곡성을 내며 눈물을 쏟는 사람은 행복하다

도저히 희망을 잉태할 수 없게 되면
의지와 노력으로 이룰 수 없게 되면
눈물조차 흘릴 수 없다
소리지르며 분을 토하고 싶어도
곡성을 내며 눈물을 쏟고 싶어도
하늘만 바라볼 뿐 무념해진다

체념하고 포기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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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신화를 창조한 이중섭


이중섭은 15살 때 오산학교에서 임용련으로부터 회화를 배웠고 졸업 후 1936년 동경의 문화학원에 진학해 서양화를 배웠다. 1940년 10월 서울 세종로 부민회관에서 제5회 자유텐 경성전이 열렸고 이는 일본 미술단체가 조선에 연 유일한 전시회였다. 이때 그가 출품한 원작은 현존하지 않고 단색 도판만 남아 있어 채색을 알 수 없지만 형상과 구성을 보면 매우 대담하며 가까이서 본 소의 모습이 있다. 이후 소는 창작의 주제와 혼이 되었고 그 자신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앞서 5개월 전 동경에 열린 제4회 자유텐 전시회에 출품한 <망월>은 독특한 그의 창작세계를 탐문할 수 있는 첫 관문이 되는 작품이다. 뒤로 물을 배경으로 화면 중앙에 두 마리 새와 염소가 있고 하단에 여자의 누드가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비스듬히 가로로 누워 있다. 날개를 편 새의 몸집이 염소만 해서 신화적 느낌을 주며 유채의 붓질이 데생을 하듯 거친 자국을 남겨 원시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1940년 24살의 그는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였는데, 특기할 점은 원작은 현존하지 않으나 <소의 여인>과 <서 있는 소>의 단색 도판과 신문 도판 그리고 이듬해 발표한 소를 주제로 한 <소묘>를 보면 그의 현대판 신화 한가운데 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우반어>(1940) 또한 소를 주제로 한 현대판 신화의 장면이다. 물에서 물고기와 노는 거대한 소의 뿔에 사람이 작은 모양으로 매달려 있는데, 소의 하반신은 물고기 꼬리이다. 이 그림은 엽서에 그려져 사랑하는 여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내졌으며 이후 4년에 걸쳐 그는 100여 점의 엽서그림을 사연과 함께 보냈다. 마사코는 문화학원 2년 후배로 손과 발이 큰 편이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보낸 엽서그림들은 애정을 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졌으므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하겠지만 인간이 야수와 물고기 그리고 소와 어울려 노는 장면들에서 그의 상상력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주고 신화가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사코에 대한 열애가 신화의 내용을 풍부하게 창작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주지할 점은 동시대 우리나라 근대 화가들과 달리 그의 작품에는 서양 양식이 고스란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양 화가들의 영향에 관해 언급할 점이 다소 있지만 다양한 영향을 자신의 회화적 언어로 바꾸었으므로 구태어 지적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는 1945년 5월 마사코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내와 세 살, 두 살난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부산을 경유해 제주도로 갔다. <서귀포의 환상>(1951)은 1.3평의 골방에서 네 식구가 살며 바다에 나가 게와 해초를 뜯어와 연명할 때 그린 것이다. 나무에 유채로 그린 과일이 풍성한 남해 해변가의 장면이 그야말로 환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새의 등을 타고 비행하며 노는 아이와 과일을 운반하는 아이들의 들것에 올라탄 새 등이 현대판 신화의 세계로 보인다. 이 시기의 스케치를 보면 아이들이 자기들만한 커다란 물고기를 낚아올리고 배를 타고 물로 나간 아이들이 손으로 커다란 물고기를 물에서 건져올리는 등 1951년의 실재 서귀포 장면과는 동떨어진 상상의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
온 가족이 영양실조 상태가 되었고 마사코는 결핵으로 각혈하기에 이르렀다. 마사코는 두 아들과 함께 일본인 수용소의 보호를 받다가 1952년 여름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 친정으로 갔다. 이후 이중섭 작품에는 아들 또래의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1953년에 그린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봄의 어린이>, <다섯 아이와 끈> 그리고 알루미늄 은박지를 긁고 유채로 메운 드로잉들에는 벌거숭이 아이들의 놀이가 있다. 아이들은 이중섭의 신화에서 자신만한 큰 물고기와 놀고 자신의 머리보다 큰 나비를 잡으러 뛰어간다. 참담한 현실에서 이런 신화를 창작한 걸 보면 그에게 회화는 거의 종교처럼 거룩한 장르였던 것 같다. 누운 채 담뱃대를 들고 있는 <판잣집 화실> 안은 전체가 밝고 투명한 색이며 지붕은 엷은 초록색이라서 비록 몸은 가난에 시달렸지만 정신은 매우 풍요로웠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때는 회화세계에서 울부짖음과 몸부림으로 괴로워했는데,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떠받으려는 소>, <흰 소> 등은 소의 모습을 한 그의 자화상이다.
헤어진 가족과 현실에서는 일체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늘 회화 속에서 가족을 만났다. <길 떠나는 가족>(1954)에는 소달구지에 가족을 태우고 앞에서 소를 끄는 이중섭의 모습이 있다. 그는 자신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소 등을 꽃으로 장식해 가족과의 일체를 기쁨으로 표현했다. <가족>, <닭과 가족>, <가족과 어머니>, <사랑>, <노란 달과 가족> 등은 회화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가족의 행복한 삶으로 거룩한 성화와도 같다. 그는 그림을 아주 작게 그렸지만 정신세계는 당대 화가들 누구보다도 컸으며 미학적 스케일은 매우 넓고 심오했다.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건 이중섭만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나라 화단의 큰 손실이었다.
그는 1955년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는데, 당시에는 감금과 전기쇼크 요법을 사용했으므로 오히려 가혹한 행위를 받았다. 병명이 정신분열인지 간질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몸에 황달이 왔고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청량리 뇌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 몹시 허약해진 상태로 1956년 7월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한 지 두 달도 못되 그는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화장되었고 뼈 일부는 망우리 공원묘지에 묻히고 나머지는 일본에 살던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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