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회화세계는 스케일이 매우 작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서 자신의 품에 안을 수 있는 크기의 그림은 그릴 수 있어도 그 이상 큰 화면을 지배할 힘이 그에게는 없다. 그는 1974년에 말했다. “회화에 있어서의 회화성은 30호 이내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러냐하면 규모가 커지면 그림이 싱거워지고 화면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화면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회화는 그에게 은밀한 속삭임이며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라서 개인적 체험이 모티프가 된다. 바깥 세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자신이 선택한 주변에만 집착하다보니 서정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작품 대부분 사람이 누워 있거나 가만히 앉아 있는 무사안일한 분위기이다. 문인화에서 볼 수 있는 규범적 도덕성이라든가 자연에 대한 경외심 같은 고상한 미학은 부재하며 자신이 처한 환경을 안일하게 회화적으로 구성한 장욱진의 동심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대할 때는 특별히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장욱진처럼 그냥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예술이란 “시대조류와 유행과 그 밖의 어떠한 외적 영향에 비례하거나 또는 논할 수 없으며 다만 그 보는 것을 포용하며 모든 것들의 자체를 이루는 핵심과 근원을 뚫고 파헤쳐서 그 위에 다시 창조된 예술이어야 한다”면서 그럴 경우 “영과의 대화체이기도 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고상한 미학처럼 들리지만 논란의 여지를 제공한다. 우선 그의 양식은 서구적이고, 시대조류와 유행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모든 것들의 자체를 이루는 핵심과 근원을 뚫고 파헤쳐서 그 위에 다시 창조된”이란 말의 뜻이 모호하고 그의 작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린이처럼 순진한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태도는 일찍이 클레를 비롯하여 일련의 화가들에 의해 추구되었고 2차세계대전 후에는 뒤비페에 의해 유럽뿐 아니라 서구 전반에 유행된 양식이다. 장욱진은 이런 서양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영과의 대화체이기도 한 것”이라고 했지만 회화적으로 사물의 핵심과 근원을 파헤친 흔적이 보이지 않아 이 말이 시사하는 바가 없는데, 모든 예술이 대화, 즉 커뮤니케이션을 바탕으로 행위되며 연극에서의 독백과 회화에서의 자위행위적 모티프조차 대화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장욱진은 솔직하면 오만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화가였으며 솔직함만으로도 충분히 회화의 장점이 된다고 보았다. 많은 작품에서 순진함이 발견되어 그의 의도가 충분히 나타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회화적 여유가 없어 화면을 가득채워야 안심하는 화가였으며, 지나치게 조형에만 집착한 나머지 장식적·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요소가 두드러지는 반면 사변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거의 없다. 환경적·정신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안주하며 만족해 한 그의 작품에는 산, 들, 새, 까치, 달, 사람, 나무, 소, 가족, 집이나 정자가 있기 보통인데, 그에게 편안을 제공해주는 구성 요소들이며 여기에 유머를 삽입했다. 회화는 그에게 흥을 돋구고 즐거움을 나누는 까치가 전해주는 소식과도 같았다.
그가 서양 회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1960년대 중반으로 사십 후반에 이르러서야 회화적 여유가 생겼다. <나무있는 풍경>(1965)은 그의 고유한 언어가 구사되기 시작한 첫 작품으로 애드벌룬처럼 생긴 나무는 이후 전형적 형상으로 자주 나타난다. 채색에 있어서도 차분해졌으며 노련해졌는데, 그의 말대로 화면을 지배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때문이다. <진진묘>(1970)는 아내가 불경공부를 하는 모습을 모티프로 덕소에서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그린 초상화로 알려졌는데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와 같은 걸출한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불심에 빠진 여인을 무아지경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배경의 타원형을 불교 도상과 관련지으면서 무엇보다도 차분하며 단조로운 대비적·입체적 채색을 통해 여백의 미를 이중적으로 나타냈다.
이후에도 장식적 요소가 여전히 그의 화면에 채워졌고 따라서 반복적 조형에 치우쳤는데, <까치집>(1977)은 드물게 훌륭한 작품이다. 유채를 엷게 사용하며 캔버스의 거친 질감을 드러나게 해서 회화적 이차원의 평면이 삼차원이 되게 했다. 새벽녘의 청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 신선한 기운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까치는 어렸을 적부터 호기심의 대상이 된 장욱진의 새이다. 까치는 그리움을 상징하는 요소로 종종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어느날 새벽 문 밖 나무에 매달린 까치집을 보고 영감이 생겨 그린 것인데, 나무 뒷편 인간의 보금자리는 새의 보금자리와 위 아래로 대칭을 이루며 회화에서만 가능한 이상의 풍경이 되었다. 이후 그는 유채를 수채처럼 투명하게 사용하면서 캔버스의 바탕을 더욱 더 시각적 세계의 근간이 되게 했다.
구성을 복잡하게 하는 데는 변함 없었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회화적 문제를 동양화의 먹이 주는 농담과 여백으로 풀어보려고 1970년대 후반부터 한지에 묵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채를 오래 다룬 습관 탓인지 먹의 효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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