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신화를 창조한 이중섭


이중섭은 15살 때 오산학교에서 임용련으로부터 회화를 배웠고 졸업 후 1936년 동경의 문화학원에 진학해 서양화를 배웠다. 1940년 10월 서울 세종로 부민회관에서 제5회 자유텐 경성전이 열렸고 이는 일본 미술단체가 조선에 연 유일한 전시회였다. 이때 그가 출품한 원작은 현존하지 않고 단색 도판만 남아 있어 채색을 알 수 없지만 형상과 구성을 보면 매우 대담하며 가까이서 본 소의 모습이 있다. 이후 소는 창작의 주제와 혼이 되었고 그 자신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앞서 5개월 전 동경에 열린 제4회 자유텐 전시회에 출품한 <망월>은 독특한 그의 창작세계를 탐문할 수 있는 첫 관문이 되는 작품이다. 뒤로 물을 배경으로 화면 중앙에 두 마리 새와 염소가 있고 하단에 여자의 누드가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비스듬히 가로로 누워 있다. 날개를 편 새의 몸집이 염소만 해서 신화적 느낌을 주며 유채의 붓질이 데생을 하듯 거친 자국을 남겨 원시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1940년 24살의 그는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였는데, 특기할 점은 원작은 현존하지 않으나 <소의 여인>과 <서 있는 소>의 단색 도판과 신문 도판 그리고 이듬해 발표한 소를 주제로 한 <소묘>를 보면 그의 현대판 신화 한가운데 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우반어>(1940) 또한 소를 주제로 한 현대판 신화의 장면이다. 물에서 물고기와 노는 거대한 소의 뿔에 사람이 작은 모양으로 매달려 있는데, 소의 하반신은 물고기 꼬리이다. 이 그림은 엽서에 그려져 사랑하는 여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내졌으며 이후 4년에 걸쳐 그는 100여 점의 엽서그림을 사연과 함께 보냈다. 마사코는 문화학원 2년 후배로 손과 발이 큰 편이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보낸 엽서그림들은 애정을 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졌으므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하겠지만 인간이 야수와 물고기 그리고 소와 어울려 노는 장면들에서 그의 상상력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주고 신화가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사코에 대한 열애가 신화의 내용을 풍부하게 창작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주지할 점은 동시대 우리나라 근대 화가들과 달리 그의 작품에는 서양 양식이 고스란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양 화가들의 영향에 관해 언급할 점이 다소 있지만 다양한 영향을 자신의 회화적 언어로 바꾸었으므로 구태어 지적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는 1945년 5월 마사코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내와 세 살, 두 살난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부산을 경유해 제주도로 갔다. <서귀포의 환상>(1951)은 1.3평의 골방에서 네 식구가 살며 바다에 나가 게와 해초를 뜯어와 연명할 때 그린 것이다. 나무에 유채로 그린 과일이 풍성한 남해 해변가의 장면이 그야말로 환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새의 등을 타고 비행하며 노는 아이와 과일을 운반하는 아이들의 들것에 올라탄 새 등이 현대판 신화의 세계로 보인다. 이 시기의 스케치를 보면 아이들이 자기들만한 커다란 물고기를 낚아올리고 배를 타고 물로 나간 아이들이 손으로 커다란 물고기를 물에서 건져올리는 등 1951년의 실재 서귀포 장면과는 동떨어진 상상의 세계가 묘사되어 있다.
온 가족이 영양실조 상태가 되었고 마사코는 결핵으로 각혈하기에 이르렀다. 마사코는 두 아들과 함께 일본인 수용소의 보호를 받다가 1952년 여름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 친정으로 갔다. 이후 이중섭 작품에는 아들 또래의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1953년에 그린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봄의 어린이>, <다섯 아이와 끈> 그리고 알루미늄 은박지를 긁고 유채로 메운 드로잉들에는 벌거숭이 아이들의 놀이가 있다. 아이들은 이중섭의 신화에서 자신만한 큰 물고기와 놀고 자신의 머리보다 큰 나비를 잡으러 뛰어간다. 참담한 현실에서 이런 신화를 창작한 걸 보면 그에게 회화는 거의 종교처럼 거룩한 장르였던 것 같다. 누운 채 담뱃대를 들고 있는 <판잣집 화실> 안은 전체가 밝고 투명한 색이며 지붕은 엷은 초록색이라서 비록 몸은 가난에 시달렸지만 정신은 매우 풍요로웠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때는 회화세계에서 울부짖음과 몸부림으로 괴로워했는데,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떠받으려는 소>, <흰 소> 등은 소의 모습을 한 그의 자화상이다.
헤어진 가족과 현실에서는 일체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늘 회화 속에서 가족을 만났다. <길 떠나는 가족>(1954)에는 소달구지에 가족을 태우고 앞에서 소를 끄는 이중섭의 모습이 있다. 그는 자신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소 등을 꽃으로 장식해 가족과의 일체를 기쁨으로 표현했다. <가족>, <닭과 가족>, <가족과 어머니>, <사랑>, <노란 달과 가족> 등은 회화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가족의 행복한 삶으로 거룩한 성화와도 같다. 그는 그림을 아주 작게 그렸지만 정신세계는 당대 화가들 누구보다도 컸으며 미학적 스케일은 매우 넓고 심오했다.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건 이중섭만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나라 화단의 큰 손실이었다.
그는 1955년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는데, 당시에는 감금과 전기쇼크 요법을 사용했으므로 오히려 가혹한 행위를 받았다. 병명이 정신분열인지 간질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몸에 황달이 왔고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청량리 뇌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 몹시 허약해진 상태로 1956년 7월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한 지 두 달도 못되 그는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화장되었고 뼈 일부는 망우리 공원묘지에 묻히고 나머지는 일본에 살던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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