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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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이책


작품을 즐기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일단 그림을 보고 그 그림에서 오는 분위기, 그림 속 담긴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방법이 있겠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작품을 그린 이의 삶을 이해하면서 그림을 보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순간적으로 작품과 맞닥뜨렸을 때를 패스트푸드라 한다면, 작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할 때 느껴지는 감동은 슬로푸드가 아닐까 싶다.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눈에서부터 중추에까지 감동을 전달해주는 그 맛에 우리는 화가의 일대기를 알고 싶고, 그들의 전기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한 화가를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이 책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김광우 지음)은 무척 생소한 서술방식을 가졌다. 일반적으로라면 ‘한 화가가 태어나 이러이러한 작품을 만들었고, 어디에서 죽었다’로 끝나는 것이 정석일 텐데, 이 책은 정석에서 살짝 빗겨나 화가 다비드와 황제 나폴레옹을 묶어 서술했다. 창작은 예술가의 재능뿐 아니라 그가 처한 시대적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예술가의 일대기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을 커플로 묶어낸 것이다. 또한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이라 불린 천재화가 다비드와 그의 조력자이자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나폴레옹을 완벽한 영웅으로 비약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프랑스 역사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살아간 그들의 삶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굳건한 의지나 신념은 제껴둔 채 좌파와 우파를 오고가며 부를 축적하는 데 눈을 번뜩였던 다비드, 최고의 화가 다비드에게 그림을 요청했으나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다른 화가에게로 주문을 돌린 나폴레옹. 이런 모습들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이러한 서술방식과 함께 340점이 넘는 컬러 명화들이 수록된 이 책은 2003년 9월 출간 당시 일간지는 물론, 잡지사, 서점 등에서 떠들썩하게 소개 되었지만 독자들의 호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점점 축소되는 우리 나라 출판계 사정을 볼 때, 그리고 쉽고 편안한 글과 인기있는 소재에만 집중되는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수도 있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다비드 대신 인기 있는 다른 화가들을 제시했더라면 이 책이 제시하는, 시대와 예술가를 함께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맛있는 음식의 요리법이나 장수하는 건강비법을 나누는 것도 즐거운 일이거늘,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시각을 나눈다면 얼마나 즐겁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은 너무도 아깝다.

만만찮은 두께(527쪽)와 생소한 주제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르지만, 화가를 이해한다는 입장에서 슬로푸드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한번 잡아본다면 즐겁게 읽어나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도록에서는 볼 수 없는 화가의 작품들을 생생한 에피소드들과 함께 살펴볼 수 있으며, 그 두 사람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실을 벗어나지 않은 예술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화가 다비드와 황제 나폴레옹, ‘그들은 과연 천재인가 기회주의자인가, 아니면 시대의 영웅인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신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해답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이 책은 그동안 목소리 큰 서술자의 시선에 휘말리거나 화려한 수식어에 젖어 있던 독자에게 두 인물에 대해 평가하고 비평할 수 있는 자율적 독서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슬로푸드로 되찾는 건강처럼 독서의 눈과 미술을 이해하는 폭을 이 책을 통해 찾아갔으면 한다.

 

김한영/미술문화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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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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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책 연작 김광우씨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최근 가장 왕성하게 미술관련 책을 쓰고 있는 미술 저술가를 꼽자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김광우(54)씨다. “어느날 갑자기 등장했다”는 표현에 들어맞게 김씨는 지난 97년 미국에서 귀국한 뒤 <폴록과 친구들>을 시작으로 최신작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펴냄·2만8000원)까지 6권의 미술책을 줄줄이 내놓으며 주목을 끌고 있다.

"고전으로 거슬러 간 이유? 저작권 때문이죠"
더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이력이다. 김씨의 이력을 보면 사람의 운명이 참으로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스스로도 예상 못했던 변신에 김씨 본인도 아직은 ‘미술평론가’라든지 또는 ‘미술사가’라는 호칭에 어색해하는 모습이다.
대학 재학중 이민을 떠난 김씨는 뉴욕에서 20년 넘게 스포츠용품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뉴욕으로 유학온 한국 미술가들과 친해졌고, 이를 계기로 그의 인생은 갑자기 급선회를 하게 됐다. 미술이란 새로운 세계를 접한 뒤 그는 ‘일요화가’가 됐다. 92년, 그는 한 전람회에서 자기 그림을 보던 미국인이 귀에 거슬리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이건 잭슨 폴록 그림인가봐.” 기분이 나빠져 집에 돌아온 뒤 김씨는 도대체 폴록이 누구인지 찾아봤다. 그것이 거짓말 같은 변신의 시작이었다.
60년대 이후 현대미술계 최고의 스타였던 폴록도 몰랐던 그는 무엇엔가 홀린 듯 미술 공부에 빠져들었다. 미친듯이 책을 사고, 자료를 모으고, 그림을 보러다녔다. 공부는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이어졌다. 첫번째 책 <폴록과 친구들>이 바로 그 소산이다. 미술은 또한 아내와 그를 맺어주기도 했다. 폴록 원고를 들고 귀국해 출판사를 알아보다가 만난 출판사 미술문화의 지미정 대표와 결혼해 영구 귀국했다. 이후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가 책으로 펴내는 공동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김씨의 책은 일단 독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폴록과 친구들>,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 등 현대 미술가 책은 물론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등 이전 책 모두가 2000부 넘게 팔렸다. 고정독자가 한정된 미술책 시장 여건과, 그의 책이 한결같이 500쪽이 넘는 분량에다 비교적 고가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선전이다. 미술 자체보다는 작가에 대한 일화나 다분히 감상적인 작품 소감이 주를 이루는 미술책들 사이에서 이름만으로 알려졌던 주요 거장들을 철저하게 해부하는 ‘정통주의적’ 미술책을 펴낸다는 점도 돋보인다. 이번에 다룬 다비드 역시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도 불구하고 다비드만을 따로 다루는 책은 김씨의 것이 처음이다.
김씨 책의 특징은 한 명의 작가가 아닌 짝을 이루는 2명 또는 3명을 함께 다룬다는 점이다. “어느 작가에 대해, 특히 그 작가의 창의성을 이해하려면 한 명만을 따로 다루는 것보다는 오히려 가장 잘 대비되거나 영향관계에 있었던 다른 작가들과 함께 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또한 한 작가의 일대기는 다분히 후대에 만들어지는 영웅주의로만 흐르기 쉬워 진정한 이해를 방해할 수도 있구요.” <다비드의…>에서도 나폴레옹은 비록 작가는 아니었지만 미술과 정치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비드의 짝패로 설정해 비슷한 중요도로 다뤘다.
현대작가로 시작한 그의 글쓰기는 다음 책 <레오나르도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으로 이어지면서 연대순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갈 예정이다. 그런데 이처럼 고전 작가로 올라가는 데에는 미술출판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주는 웃지못할 이유가 있다. 사후 5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경우 저작권 때문에 작품 도판 한 쪽을 쓰는 데 많게는 수십만원까지 내야해 수지를 맞추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책을 봐야 하는 아내를 설득하는 중”이라고 김씨는 웃었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사진 김종수 기자 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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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고의적 예술 격하와 그에 따른 혼돈



플라톤은 회화와 생물을 본질미가 아닌 비교적 아름다운 것들로 취급했고, 비극과 희극은 순수하지 않은 것들로 취급했다.
회화와 문학에 대한 그의 배척은 미를 지나치게 ‘형상’으로 파악하려는 사변적 정립에도 원인이 있지만 정치적으로 불순한 동기가 작용한 때문이다.
단토는 저서 『예술의 철학적 특권박탈 The Philosophical Disenfranchisement of Art』(1986)에서 플라톤의 불순한 동기를 예술의 철학적 특권 박탈이었다는 말로 신랄하게 비판한다.14)
플라톤의 『국가 The Republic』 10권에 나타난 예술가의 모습을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BC 450년경-385)의 희극 『구름 The Clouds』(BC 423)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를 빗대어 시대에 뒤진 자로 오명을 씌운 그 철학자의 모습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아서 단토는 주장한다.15)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에서 플라톤이 숭배해마지 않는 소크라테스를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현실과 무관한 이상주의자로 조소했다.
『구름』이 철학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자 소크라테스는 제자이면서 서사시인 이온에게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성보다 낮은 수준에서 관객을 궁지에 빠뜨리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암울하고 혼돈된 기백에 의존한 것이라고 이온에게 설명했다.
단토는 이를 가리켜 “오직 자체의 자아-평가에서 예술을 다루는 것”으로 비판한다.16)

단토는 『구름』과 『국가』를 예술과 철학 사이 전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본다.
이온이 플라톤에 의해 『국가』의 심리상태의 확인, 즉 예술이 교활한 표리부동 안에서 예술에 반해 사용되고 있음을 극적으로 조작하기 위해 묘사된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도덕적으로 결함 있는 예술가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자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단토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해 철학과 예술 사이의 전쟁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플라톤의 철학이 모방의 모방이 된 이래, 이후 철학이 플라톤적 유언에 자리매김되는 부록에 있었던 이래, 철학 자체가 곧 예술의 특권 박탈이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다.
헤겔리안으로서 그는 헤겔이 바로 예술을 철학에서 구분하여 미학을 예술철학으로 탈바꿈하게 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술이 빠져나간 철학의 꼴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 그에게 생긴 다음의 의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예술의 특권을 박탈하면서 형성된 철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가깝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술이 자유롭게 되자 예술을 압제해 온 철학 또한 자연히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공격을 니체는 ‘미적 소크라티즘 aesthetic socratism’이라 했는데 이는 소크라테스가 이성적이지 않은 아름다운 것들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로 이성을 미로 예증한 때문이다.
니체는 이를 불합리 안에서 지독한 미를 발견하는 비극의 사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안했다.
단토는 이를 그같은 것에 이르도록 소크라테스가 우리를 확신시키는 희극의 사망을 나타낸다고 했다.

단토는 예술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관념은 역사적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플라톤에 의한 철학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플라톤은 예술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행위로 보고 이에 대응할 만한 모방론을 만들어 유포시켰기 때문에, 서양의 미술사를 단토는 “예술을 고립시키려 한 플라톤의 예술론에 의한 미술의 억압사”로 본다.
그는 칸트가 예술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무관심성 Interesselosigkeit’이란 말로 특징지운 것을, 미술품은 자연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말과 관련지워서 두 사람 모두에게 비판을 가한다.

단토는 말한다.17)

플라톤이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오직 그리고 궁극적으로 순수한 형상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철학자이어야만 현상의 세계에서 시종일관 어떤 관심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보통 남자와 여자를 동요하게 만드는 것들 - 돈, 권력, 섹스, 사랑 - 에도 흥미를 쏟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무관심한 결정들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단순히 금으로 나타난 것을 소유함에 있어 어느 누가 의기양양하게 느낄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이래 영리하게도 더 할 나위 없이 예술품들을 관심의 범위 밖에 자리매김한다.
사람됨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인 이래 플라톤의 시스템에서 실재가 주된 명백한 품등 밖에 자리매김되는 것과 매우 흡사하게 인간 품등 밖에 자리매김되므로 - 그래서 그들이 반대 방향들로부터 그 논점에 접근하더라도 둘 모두에 있는 그 밀접한 관계는 예술이 인간적인 것으로 우리가 규정하는 관심들로부터, 그리고 그것에 알맞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에 대한 존중함과 더불어 자리매김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휴가라는 것이다.

단토는 이런 관점이 칸트가 예술에 관해 ‘무목적적 목적성’이란 말을 언급함으로 인해 강화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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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해 탄생한 입체주의는 일반적으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6~07)과 브라크의 <누드>(1907~08)에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대략 1912년 가을까지 분석적 입체주의, 그 후를 종합적 입체주의로 구분한다. 입체주의란 명칭은 <질 블라스 Gil Blas>의 평론가로서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명칭과 관련이 있는 루이 보셀의 글에서 유래했다. 보셀은 1909년 5월 25일 칸바일러 화랑에서 1908년 11월 14일에 개최된 브라크의 전시회를 평가하면서 ‘입체 cubes’와 ‘이상한 입방체 bizarreries cubiques’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주택 도색업자 아버지 밑에서 도제로 일한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는 1900년 파리로 가서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아카데미 옹베르에서 공부했다. 그는 같은 르아브르 출신인 오통 프리에스와 어울리면서 1906년에는 르시오타와 레스타크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야수주의 양식으로 그렸으며 다른 야수주의 화가들과 함께 살롱 도톤과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했다. 그러나 브라크는 기질적으로 야수주의의 주관적이고 충동적인 성향과 맞지 않았으며 1907년 살롱 도톤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에서 큰 충격을 받고 분석적 입체주의를 예고하는 좀더 논리적인 기하적 분석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07년 화상 칸바일러의 소개로 피카소를 만났고 함께 작업하면서 입체주의 양식을 창조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두 사람의 작품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했다. 1908년 가을 다니엘-앙리 칸바일러는 1907년 이후의 브라크의 작품들로 전시회를 기획했는데, 이 작품들은 두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롱 도톤 주최측으로부터 거부당했던 것이었다. 야수주의란 명칭을 만들어낸 루이 보셀은 이 그림들이 ‘입체들’을 그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혹평했다. 이렇게 해서 입체주의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처음에 입체주의는 사실주의 기법의 하나였다. 입체주의자들은 고갱, 반 고흐와 나비 그룹으로부터 야수주의에 이르는 당대의 표현주의적 경향에 반기를 들고 감각적이거나 장식적인 표현 기법을 엄격하게 배격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새로운 표현 기법의 개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강한 인간적 호소력이나 정서적인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모티프 대신에 중립적인 모티프를 선호했다. 또한 정서적 느낌이 내포된 색채의 사용을 배제하기 위해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단색조의 회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1900년대까지 여전히 유행하던 인상주의의 광학적 사실주의Optical Realism에도 반기를 들었다. 인상주의자들의 목적은 변화하는 빛에 따라 사물의 채색된 표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반면 분석적 입체주의는 세잔의 ‘지각적 사실주의 Perceptual Realism’를 계승한 것이다. 분석적 입체주의자들은 사물의 불변적 구조가 견고한 리얼리티처럼 인지되도록 묘사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표현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런 기법 중 많은 부분은 이미 세잔이 좀더 조심스러운 형태로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 기법은 현재에는 친숙하지만 당시에는 낯설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그림의 표면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시선이 화면 속으로 후퇴하는 거리감을 줄였다. 파편화된 평면들을 나란히, 또는 중첩되게 그림으로서 얕은 회화 공간을 표현했다. 기타, 바이올린, 머리, 인물 등의 대상은 양감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평면으로 분해되고 단편화된 다음 회화 공간을 표현하는 면들의 체계 속으로 도입되었다. 때때로 여러 가지 시점에서 본 대상의 단편들이 하나의 그림 속에 합쳐지기도 하고, 세잔의 경우처럼 공간 표현에 이동하는 원근법이 도입되기도 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고안하여 레제가 완성한 엄격하고 매우 논리적인 이 기법은 입체주의 화파를 이루는 예술가들에 의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서 전통 회화의 현대적 변용으로 전락했다.
1911년과 1912년 브라크는 세레와 소르그에서 피카소와 함께 작업했고, 이때 종합적 입체주의를 예고하는 콜라주를 처음 시도했다. 그는 화면에 실제 사물과 인쇄물의 글자를 도입함으로써 실제와 화면 속의 환영적 이미지를 통합하고 또 서로 대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브라크는 피카소와 나란히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구사하며 함께 활동했다. 종합적 입체주의로 알려진 제2기 입체주의는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파피에 콜레는 브라크와 피카소, 후안 그리스가 함께 발전시킨 새로운 기법으로 신문, 벽지, 유포, 성냥갑, 공연 프로그램 인쇄물 등을 캔버스에 붙이고, 소묘(브라크) 또는 소묘와 유화(피카소와 그리스)를 결합시킨 방법이었다. 캔버스에 부착된 재료는 두 가지 역할을 했다. 이는 회화 표면의 일부인 동시에 그림 이미지의 가상적 공간 속에서 재현의 기능을 했다. 그런데 파피에 콜레와 소묘 혹은 유화를 결합시킨 효과를 회화로 흉내낸 그림이 등장하면서 화면은 더욱 모호해졌다. 한층 밝고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피카소와 그리스는 물감에 모래나 다른 재료를 섞어 함께 사용했다. 초기의 분석적 입체주의가 주로 표현 기법의 측면에서 발달했다면 종합적 입체주의에서는 단편화된 형상의 추상으로부터 안정되고 통일된 회화 구성을 구축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그리스, 피카소, 브라크는 각각 독자적인 방식으로 종합적 입체주의를 전개시켰다. 브라크는 1918년부터 감각적이고 촉감적인 성질, 색채와 표면의 표현적 가치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드리드 태생의 후안 그리스Juan Gris(호세 비토리아노 곤잘레스Jose Vittoriano Gonzalez, 1887~1927)가 파리로 온 것은 1906년이었고, 라비낭 가 13번지 피카소의 집이 있는 건물에 살면서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을 만났다. 1910년에 정식으로 회화를 시작한 그는 1912년에는 브라크와 피카소가 먼저 시작한 파피에 콜레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종합적 입체주의를 나름대로 소화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갔는데 이는 동일한 양식으로 제작된 브라크와 피카소의 작품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스는 4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입체주의 화파에 관한 언급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1910년 로베르 들로네, 앙리 르 포코니에, 알베르 글레즈, 페르낭 레제와 장 메챙제가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 함께 작품을 전시했을 때였다. 파리 태생의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는 장식적인 상업 회화 공부를 한 뒤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순수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으로부터 파생된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그는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들로네는 입체주의자들과 교류했으며 1911년과 1912년에 열린 살롱 데 쟁데팡당에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1912~13년 들로네는 <원반>과 <우주의 원형> 연작을 발표했는데, 이는 <동시적 창>에서 시작한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 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켰지만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 추상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은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고 명명한 ‘색채 입체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으며, 쿠프카의 작품과 더불어 유럽 미술 최초의 진정한 색채 추상화였다.
추상 색채 형태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 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 미술의 발전, 특히 1930년대 막스 빌이 주창한 구체 미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키네틱 아트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1901년 파리로 이주하여 1906년부터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한 앙리 르 포코니에Henri Le Fauconnier(1881~1946)는 세잔의 영향을 받은 양식으로 그렸고, 1910년경부터 입체주의 화가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1912년부터 아카데미 드 라 팔레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그 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입체주의를 버리고 다양한 표현주의를 받아들였다. 르 포코니에의 작품에는 입체주의에서 파생된 구조적인 특징들이 남아 있었으나 그는 이것을 표현적인 목적에 맞게 변형시켜 사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네덜란드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후에 전 유럽에 떨치게 될 명성의 기반을 닦았으며 매너리즘적인 입체주의를 네덜란드에 확산시킨 것은 물론 네덜란드 특유의 표현주의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파리 태생의 알베르 글레즈Albert Gleizes(1881~1953)는 공업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00년경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입체주의 화파의 일원이 되어 1910~11년 다른 입체주의자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했다. 1912년 섹시옹 도르의 창립 구성원이었고 메챙제와 함께 <입체주의에 관하여 Du Cubisme>라는 중요한 책을 집필했다. 글레즈는 유럽과 미국에 입체주의를 널리 알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는 입체주의 양식에 실제적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노르망디의 아르장탕 태생의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1881~1955)는 1897~99년 캉에서 건축가의 도제로 일한 뒤 1900~02년 파리의 한 건축 사무소에서 제도가로 일했으며 1903~04년에는 사진을 수정하는 일을 했다. 1903년 파리 에콜 데 보자르의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장식미술 학교와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했다. 1909년경부터 입체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1911년부터 퓌토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퓌토 그룹은 1911~13년 파리 근교의 퓌토에 있는 자크 비용의 작업실에서 비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졌던 예술가 그룹으로 주로 입체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마르셀 뒤샹과 레몽 뒤샹-비용, 글레즈, 메챙제, 그리스, 아르치펜코와 체코 화가 프란티세크 쿠프카 등이 참여했다.
레제의 입체주의 시기의 작품은 튜브 모양과 곡선으로 그려진 추상화로 피카소와 브라크가 선호한 직선 형태와는 대조된다. 1911년경 입체주의 화가 중 최초로 비구상적인 추상 미술을 실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르 코르뷔지에, 오장팡과 교류했다. 레제는 기계 부품을 즐겨 그렸으며, 정밀하고 매끈한 기계를 그린 그의 회화는 정적인 특성을 띤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에는 캔버스 전체에 한 개의 사물만을 묘사하곤 했는데, 때로는 거대한 크기로 확대해 그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그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앙리 포시용, 앙드레 모루아, 다리위스 미요와 함께 예일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캘리포니아의 밀스 칼리지에서도 가르쳤다. 이 시기에는 주로 곡예사와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구성 작품에 몰두했다. 1945년 프랑스로 돌아온 뒤부터 그의 작품에는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더욱 두드러지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색조의 변화가 없는 평면적 색채와 두터운 검은 윤곽선, 그리고 원통형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형태 사이의 대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정적이고 장대한 양식은 계속 유지되었다.
레제는 입체주의 시기에는 자율적 활동으로서의 미술 개념을 신봉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갑자기 눈이 부시기도 하고 새롭기도 한 현실로 떠밀려 들어갔다.” 그때부터 현대 사회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미술을 창조하려는 포부를 품었다. 그는 명확히 묘사된 일상 사물 속의 시적 가치와 현대 기계류와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된 물건들이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프롤레타리아적인 모티프를 선호하여 이를 기계문명과 관련된 모티프를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고 정밀하게 묘사했다. 레제의 사상은 1923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한 ‘기계 미학: 공장에서 제조된 물건, 장인, 예술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그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광범위했으며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낭트 태생의 장 메챙제Jean Metzinger(1883~1957)는 1903년 파리로 가서 신인상주의와 야수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입체주의 화파의 일원이 되어 1910년과 1911년 입체주의자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섹시옹 도르 그룹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1913년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슈투름 전시회에 참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메챙제의 양식은 더욱 사실적으로 변했고 입체주의 이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입체주의 화가들이 1910년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 시인이자 입체주의의 대변인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작품이 피카소의 작품을 무미건조하고 생명력 없이 모방한 것이라고 묘사했다. 이들 입체주의 화가들은 1910년에서 191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하나의 단체를 이루어 1911년 봄 살롱 데 쟁데팡당이 열렸을 때 별도의 전시장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같은 해 이 그룹에 뒤샹 삼형제, 피카비아, 아르치펜코, 마레, 레트, 레제와 마리 로랑생 등이 가세했다. 로랑생의 작품은 입체주의적이지 않았지만 당시 그녀는 입체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1912년에는 그리스, 쉬르바주, 마르쿠시, 에르뱅, 몬드리안, 리베라와 쿠프카 등이 합류했다. 이들 중 몇몇 화가들의 양식은 매우 미미하게 입체주의적이었고 대부분의 화가들이 수년 내에 입체주의 노선을 포기했다. 평론가들 중에서는 아폴리네르, 앙드레 살몽, 로제 알라르, 모리스 레날 등이 이 운동을 지지했다. 아폴리네르는 1913년에 <입체주의 화가들, 미학적 명상 Les Peintres cubistes Meditations esthetiques>을 출간했다.
모스크바 태생의 레오폴 쉬르바주Leopold Survage(1879~1968)는 모스크바 미술 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다가 1908년 파리로 가서 마티스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그러나 곧 입체주의에 매료되었으며 입체주의 화가들과 함께 1911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글레즈, 아르치펜코와 함께 섹시옹 도르Section d'Or에 가담했다. 프랑스어로 ‘황금 분할’을 의미하는 섹시옹 도르 그룹의 예술가들은 1912년 라 보에티에 화랑에서 ‘섹시옹 도르’란 명칭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같은 명칭의 잡지도 발행했다. 쉬르바주는 대규모 장식에 재주가 있어 디아길레프로부터 발레 <마르바>를 위한 무대장치를 의뢰받기도 했다. 그는 입체주의에 집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체주의의 원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입체주의 화가들이 즐겨 그린 정물화보다 도시 풍경을 더 좋아했으며, 정통적인 입체주의와는 거리가 먼 신비한 요소를 암시하는 흥미로운 공간감을 나타내곤 했다.
폴란드계 프랑스 화가 마르쿠시Marcoussis(1883~1941)는 크라쿠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뒤 1903년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했다. 그는 몇 년 동안 만화가로 일하다가 1910년에 브라크를 만났고 그 후 피카소, 아폴리네르와 알게 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다른 입체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12년 섹시옹 도르 그룹과 함께 전시회를 가졌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에 다시 그들과 함께 전시했다. 마르쿠시는 비주류 입체주의 화가 중 가장 지각력이 뛰어난 화가였고, 입체주의 기법으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으며, 명백하고 단순한 구성을 시적 사실주의, 자연에 대한 감성과 결합시켰다. 마르쿠시는 1913년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다시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실험했으나 보다 대표적인 작품은 자연을 연상시키는 회화들이다.
1906년 살롱 데 쟁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한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1882~1960)은 1909년에 바토-라부아르에 작업실을 마련했고,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표현적인 풍경과 입체주의 구조를 결합했다. 에르뱅의 작품은 서서히 추상화되어 1917년경 완전히 추상에 이르렀다. 에르뱅은 오랫동안 기하 추상에 몰두한 몇 안 되는 프랑스 화가 중 하나로서 많은 젊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과나후아토 태생으로 멕시코 벽화주 화파의 선구자인 디에고 마리아 리베라Diego Maria Rivera(1886~1957)는 10살 때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세기 절충주의의 아카데믹한 화가 산티아고 레불과 멕시코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의 한 사람인 호세 마리아 벨라스코 밑에서 공부했다. 1908~09년 치차로와 함께 스페인에서 공부했고, 1911~21년 파리에서 살면서 모딜리아니의 친구가 되었으며, 입체주의자들의 모임에도 자주 참여했다. 리베라는 입체주의 미학을 완전히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1913~17년 입체주의 방식으로 작업하면서 아카데미즘의 유물로부터 벗어났다. 또한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식적 구축의 특징에도 정통했다.
입체주의는 1911년경부터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관련된 많은 운동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출판물에 실린 도판과 세베리니가 쓴 글을 통해 입체주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은 1911년 2월 보초니, 루솔로와 카라의 파리 방문을 계기로 입체주의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미래주의자들은 입체주의 화가들이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입체주의 회화에서 역동성과 움직임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지만 미래주의는 입체주의가 고안한 표현 기법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관련된 모든 사조들 가운데 가장 입체주의에 가깝다. 사실 재능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단일한 하나의 양식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러시아에서 입체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다이아몬드 잭’ 전시회에 출품되었으며 러시아 미술품 콜렉터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추킨Sergei Ivanovich Shchukin(1854~1937)은 피카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시추킨은 특히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컬텍션으로 유명하다. 말레비치는 1913년 그의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에 대해 입체-미래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미래주의와 입체주의의 영향은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에 의해 시작된 광선주의 운동을 자극했다. 독일에서는 야수주의뿐만 아니라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작품도 표현주의란 명칭으로 뒤셀도르프, 쾰른, 베를린과 뮌헨에서 전시되었다. 입체주의의 영향은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 특히 프란츠 마르크의 양식 발전에도 기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입체주의와 독일 표현주의를 새로운 국가적 양식으로 통합하려고 한 아방가르드 화파가 부상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는 거의 모든 독일 예술가들의 표현주의에 대한 열정은 입체주의가 가진 반표현주의적인 엄격성으로 인해 무위로 끝났다. 당시 영국에서는 입체주의가 거의 발전하지 못했지만 몇몇 입체주의 작품은 로저 프라이가 기획한 제2회 후기 인상주의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입체주의는 보티시즘 양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보티시즘은 격렬하고 격정적인 ‘반란자 rebel’ 그룹이 주창한 사조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에서 최초로 추상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기를 열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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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과 미 속에서 하나의 실재가 아니라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과 미 속에서 하나의 실재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 즉 예술 창조의 능력에 주목했다.31)
이는 대단히 중요한 관점으로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은 스승을 통해 예술을 그 총체성에서 볼 줄 알게 되었고, 트로이와 바빌론, 페르세폴리스를 예술적이고 상징적인 연관 속에서 이해하며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의 수립과도 연결시켜 역사의식을 한층 높였다.

『시학 Poietica』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념의 모방은 사물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태 및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으며, 스스로를 보편적·전형적·필연적인 사물들의 특징으로 제한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방은 우선 인간행위의 모방으로 충실한 복사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의미했지만 점차 자연의 모방으로 그 개념이 확대되었다.
시를 선천적 본능과 후천적 모방을 통해 생겨나는 것으로 보았으며,32) 사고thought를 ‘알기 theoria’, ‘하기 praxis’·‘만들기 poiesis’ 세 종류로 구분했다.33)
시를 좀더 구체적으로 정의하면서 ‘만들기’의 한 종류를 모방으로 보고 사물들 혹은 사건들을 재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모방론을 이원화하여 시각예술을 색과 드로잉으로 시각적 외양을 모방하는 예술로 분류했으며, 시를 시구, 노래, 댄스를 통해 인간 행위를 모방하는 것으로 분류했다.34)
시를 언어와 멜로디 그리고 리듬을 매개체로 하는 것으로, 시각예술을 색과 드로잉을 매개체로 하는 것으로 상이한 점을 지적했을 뿐 모방이란 점에서는 둘을 동일하게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예술의 기능적인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비극을 찬양하는 중 비극의 기능으로 ‘적합한 즐거움 oikeia hedone’을 꼽았다.
이는 시각예술에도 해당하는 기능이다. 모방을 자연적 현상으로 보았고, 모방을 인식하는 것이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로 사람이 즐거움을 아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인 것으로 꼽았다.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회의적 태도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본 미적 즐거움을 철학자의 것과 동일한 류의 인식적인 요소에 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시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일반적으로 미에 대한 즐거움으로 시각예술에도 적용된다.
적합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아름다운kalliste 것 혹은 부분들이 순열적으로 배열된 탁월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인의 예술에 대한 이해였음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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