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관조론에 따른 추론들



관조론에 따른 추론들로 고립이론, 심적 거리이론, 무관심성 이론, 형태심리학이 있다.28)
고립이론은 대상의 고립과 주관의 분리가 미적 경험의 본질은 아니더라도 우선 조건이 됨을 뜻하는 것으로 심리학자 뮌스터베르크는 『미술교육의 원리 Principles of Art Education』(1905)에서 대상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주관을 완전히 몰두하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한 생각만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만R. Hamann(1879-1961)은 『미학 Asthetik』(1911)에서 대상의 고립을 이론의 초석으로 삼았다.
고립이론을 비판한 랭필드H. S. Langfield(1879-?)는 『미적 태도 The Aesthetic Attitude』(1920)에서 고립은 미적 경험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여러 조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심리학자 벌로프E. Bullough(1880-1934)가 1912년 「영국심리학지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에 ‘예술과 미학적 원리에 있어서 하나의 요소로서의 심적 거리 Psychical Distance as a Factor in Art and an Aesthetic Principle’란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에서 미적 경험이 심적 거리를 요구한다고 주장한 데서 심적 거리이론이 관조론의 추론으로 제안되었다.
이 이론은 관조가 한 대상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하며, 의식은 대상에 대한 생각과 스스로에 대한 생각으로 나뉠 수 없다고 보고 관조가 자신의 의식을 상실할 것을 요구함을 지적한다.

미적 경험과 무관심성의 태도 사이의 연관성을 확립한 칸트에 의해 전개된 무관심성이론은 미적 경험이 우리가 실제적으로 관심을 갖는 모든 문제, 즉 당장 중요성이 있는 실리적·개인적 문제를 잠시 동안 의식으로부터 제거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무관심성을 미적 경험을 결정짓는 여러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했다.
무관심성이론은 미적 경험의 실제적 유용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마음에 실용적인 편의가 있을 때 경험이 더 이상 미적으로 되지 않는다고 본다.

양차대전 사이에 널리 알려진 형태Gestalt 심리학은 지각에 있어 전체는 부분보다 일차적이라는 견해를 지도 원리로 삼았다.
관람자가 사물의 부분들은 기억하지 못하나 윤곽이나 전체 체계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형태심리학은 처음에는 미적 경험을 고려하지 않았지만 결국 적용시켰는데 회화에서는 1957년 아른하임R. Arnheim(b. 1904)이 건축에서는 1962년 조라브스키J. Zorawski가 적용했다.29)
두 사람은 그림이나 건축물의 관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미적 경험의 전체적 본질에 관해 설명했는데 미적 경험이 대상 전체가 마음, 감각, 기억 등에 의해 용이하게 파악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제와 유사하게 나타났다.
그림과 건축은 지각하기 쉬운 강한 형식을 갖출 때 관람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이미 예술가, 음악가, 시인들이 작품을 구상할 때 적용한 것으로 두 사람에 의해 이론으로 정립된 것이다.
형태심리학은 미적 경험에 관한 완전한 이론이라기보다 관조론의 의미를 좀더 설명한 추가 이론의 성격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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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미술 1 


추상 미술abstract art은 형태와 색채가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묘사하려는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고유의 표현적 목적을 갖는 미술을 말한다. 따라서 많은 장식 미술을 추상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미술이라는 서구의 전통적인 미술 개념을 탈피한 20세기의 회화와 조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1930년대와 그 이후 많은 문학 작품과 미술 비평을 발표했으며 일반 대중에게 아방가르드 미술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허버트 리드Sir Herbert Read(1893~1968)는 이에 대해 <아트 나우 Art Now>(개정판 1948)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관례적으로 어떤 미술작품이 외적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예술가의 지각에서 출발했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대상에 기반하지 않는 독자적이고 일관적인 미학적 총체를 만들어 나가는 모든 미술작품을 우리는 추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의 추상 미술은 1910~20년에 탄생하여 10여 년 동안 그 특수한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현재는 20세기 미술의 가장 특징적인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추상 미술은 수많은 운동과 사조로 발전했지만 두세 개의 기본적인 경향들로 추려낼 수 있다. 미국 미술사학자이면서 미술 행정가 앨프리드 H. 바Alfred H. Barr(1902~81)는 <입체주의와 추상 미술 Cubism and Abstract Art>(1936)에서 “지나친 단순화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추상 미술을 두 개의 주요 경향으로 양분했다. 우선 말레비치로 대표되는 첫 번째 경향은 “지적이고, 구조적이며, 건축학적이고, 기하적이며, 직선적이고, 고전적인 엄격함을 지닌, 논리와 계산에 기반한” 것이다.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두 번째 경향은 “지적이기보다 직관적이며 감상적이고, 기하적이기보다 유기체적이며 생물 형태적인 형태를 취하고, 직선적이기보다 곡선적이며, 구조적이기보다 장식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고전적이기보다 낭만적이다.”




러시아 화가 카시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Karimir Severinovich Malevich(1878~1935)는 키예프에서 미술 수업을 받고 1905년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러시아 인상주의’라 불린 양식에 있어서 원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복제품과 시추킨, 모로조프 컬렉션을 통해 보나르, 뷔야르, 세잔, 레제를 비롯한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와 야수주의 작품을 접했다. 1908년경 나탈리아 세르게예브나 곤차로바Natalia Sergeevna Goncharova(1881~1962), 미하일 페도로비치 라리오노프Mikhail Fedorovich Larionov(1882~1964)와 교류하면서 말레비치의 양식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1898년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배운 곤차로바는 러시아 농촌 미술과 중세 성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 시기 그녀의 회화 작품에서 세련된 원시주의가 나타난 것도 이런 관심의 영향이었다. 1908년 군대에 징집될 때까지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 학교에서 공부한 라리오노프는 많은 작품을 제작한 다작의 화가였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후기 인상주의를 러시아풍으로 해석한 작품을 그린 그는 친구이자 동료이며 후에 아내가 된 곤차로바와 함께 러시아 민속 미술에 바탕을 둔 일종의 세련된 원시주의를 발전시켰는데, 그의 양식이 곤차로바보다 훨씬 공격적이었다. 1914년 곤차로바와 함께 파리의 폴 기욤 화랑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갔으나 1915년 곤차로바와 함께 다시 파리로 와서 정착했다. 이후 그는 사실상 이젤화를 그만두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장식에 열중했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작품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되면서 시골 농부들을 모티프로 그리기 시작했고 이전의 세련된 기교 대신 의도적으로 원시주의 양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입체주의 기법에 깊이 몰두했는데, 농부들을 그린 많은 작품에서 인물들은 레제를 연상시키는 원통 같은 형태로 형식화되어 나타나고, 형상과 배경은 깊이감이 거의 없이 대조를 이루는 평면적인 색채의 색면들로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표현되었다. 이런 경향을 추구하면서 그림에서 모티프의 중요성은 감소된 반면, 평면과 양감의 구성은 더욱 중요해지는 동시에 체계적으로 되었으며, 어느 정도 미래주의적 요소를 지닌 독자적인 분석적 입체주의에 도달한 말레비치는 이 양식을 입체-미래주의라고 명명했다. 입체-미래주의의 뒤를 이어 1913년과 1914년에는 또 다른 급격한 양식의 변화를 이루었다. 즉 피카소와 브라크의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따라 사실적인 세부 묘사와 콜라주를 통해 그림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후 말레비치는 비구상 회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1915년 12월 절대주의 회화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었다. 절대주의가 분석적 입체주의나 종합적 입체주의로부터 직접 발전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입체주의는 세잔의 권고에 따라 자연의 현상을 기하적이거나 그와 유사한 형태로 분해한 것인데 반해, 절대주의는 구성주의의 한 형태로서, 보이는 현실과 전혀 연관이 없는 기하적 추상 형태로 그림을 구성해나갔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저서 <비대상 세계 The Non-bjective World>에 수록된 논문 ‘절대주의 Suprematism’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절대주의자는 ‘가면을 쓰지 않은’ 진정한 미술에 도달하기 위해, 또 이런 우월한 관점에서 순수한 예술적 감각을 통해 삶을 조망하기 위해, 주변 환경의 사실적인 재현을 의도적으로 포기했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를 사회적, 정치적, 혹은 그 밖의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미적 정서’라 불리는 감정의 순수한 표현이라고 묘사했다. 절대주의 회화를 구성한 기본 요소들은 직사각형, 원, 삼각형, 십자가형이다. 말레비치는 ‘가장 순수한’ 형태는 정사각형이라고 믿었다. ‘순수한 감성’을 표현한 회화는 1917~18년의 그 유명한 <흰색 위의 흰색> 연작으로 절정에 도달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절대주의 구성: 흰색 위의 흰색>이다. 앨프레드 바는 <입체주의와 추상 미술>에서, 20세기 미술사에서 말레비치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추상 미술의 역사에서 말레비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선구자, 이론가이며 예술가로서, 러시아의 많은 추종자들뿐 아니라 리시츠키와 모홀리-나기를 통해, 중부 유럽의 추상 미술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시작되어 서쪽을 휩쓸고,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네덜란드 데 스테일의 영향력과 결합하여 독일과 나머지 유럽 대부분의 건축, 가구, 인쇄, 상업 미술에 변혁을 가져온 추상 미술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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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함이란 쇼펜하우어에게 단순히



보상케는 쇼펜하우어가 미를 양면적으로 보았다면서 의지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과 그러므로 해서 전체 기구로부터, 즉 우리의 가장 큰 부도덕과 불운, 살려는 의지 - 설명, 원인, 수단과 결말, 목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24-1)
다른 한편 미는 우리의 정신에 개념, 즉 어떤 등급에서 의지의 구체화로 채운다.
모든 것이 어느 수준에서 의지의 구체화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어느 수준에서 독특하며 어느 수준에서 아름답다.

추함이란 쇼펜하우어에게 단순히 불완전한 명시defective manifestation이거나 의지의 부분적 구체화이므로 단순히 비교적 개념이다.
그는 숭고를 미와 동일하게 취급했다. 다만 다른 점으로 심사숙고한 대상들과 개인의 의지 사이에 적대하는 관계를 가정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노력에 의해 정복되는 적개심이 이 특별한 노력에 의해 그 적대하는 대상 안에서 개념의 순수한 묵상을 성취하는 가운데 주제의 정신적 고양spiritual exaltation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으로 보았다.24-2)

그는 사람들이 관람자의 입장을 취할 때 사물에 대해 통상적이고 실질적인 태도를 떠날 때, 사물의 근원과 목적에 대해 더 이상 사고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것에만 집중할 때, 미적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미적 경험을 의지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대상을 보는 일에 마음의 힘을 집중시키고 스스로 그 대상 속에 잠겨서 자신의 의식을 자신이 보는 것, 즉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채운다는 것으로 자신의 개성을 망각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를 억제하게 된다.
주관의 대상이 반영이 되는 것이며 의식 속에는 보는 이와 보여지는 것 사이의 구분이 없어진다.
이런 마음의 상태, 대상에 대한 이런 수동적 순종을 쇼펜하우어는 관조, 미감적 쾌aesthetiches Wohlgefallen,25) 미감적 태도aesthetiches Betrachtungsweise26)로 명명했다.

그의 이론에서 플라톤의 광기 개념을 본다.
자연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개념은 피타고라스가 주목한 미적 태도로서의 ‘관람자’의 태도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사고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해 왔지만 그가 공식화했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이론처럼 보인다.
타타르키비츠는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이론을 조립해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세움으로써 그 이론을 오히려 방해했다고 비판했다.27)
쇼펜하우어가 관조를 끝없는 의지의 위안으로 해석함으로써 관조론을 형이상학 속에 빠뜨린 것으로 보았다.

관조의 본질은 지각이지만 주어진 순간에 중요하거나 꼭 필요한 특징들을 눈과 귀로 파악하는 평범한 종류와는 다른 특별한 종류의 지각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대상 속에 “깊이 빠져들고” 대상으로 “스스로를 채우며 대상을 반영시키는” 충만되고 수동적이며 집중된 지각으로 보았다.
주관으로부터 쾌를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대상에 순응하고 대상의 미를 흡수함으로써 대상으로부터 쾌를 끌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미적 경험이란 관람자의 특별한 경험을 말하며, 집중의 경험이고 미에 대한 수동적 순응의 경험이다.
고대로부터 이런 사상은 만연되었는데 그가 고전적인 형식으로 정립시키고 명칭을 부여했다.
다만 명칭이 종교적 관조의 성격도 띠고 있으므로 미적 관조만을 가리키기에는 부적당하다.

쇼펜하우어의 관조론은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에게 영향을 주었고, 니체로 하여금 『비극의 탄생 The Birth of Tragedy』(1871)을 통해 미적 경험의 이원적 개념을 창출하게 했는데 그것이 균형과 조화를 상징하는 ‘아폴론적인 것 Apollinian’과 비균형적이며 환희를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 Dionysi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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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운동은 20세기 미술운동 중 가장 고도로 조직화되고 엄격하게 통제된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의 도덕적, 실천적 지도자는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 시인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이었다. 오른의 탱세브레 태생 브르통은 정신 장애를 공부하기 위해 낭트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경험한 정신이상자에 대한 연구가 훗날 비이성적 행위에 대한 관심의 근원이 되었다. 상상력과 감정적인 힘은 늘 과학과 이성주의의 실추를 상쇄해 왔다고 믿었으므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며 목격한 고통과 괴로움에 큰 충격을 받고 글을 쓰게 되었다. 군복무 후 파리에 정착하고 재능 있는 새로운 미술가들과 특히 다다운동을 지원하고 장려하던 비평지 <문학>의 편집인이 되었다. 당시 브르통은 마르셀 뒤샹을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생각했다. 그는 1924년 친구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헌정한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계기로 초현실주의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선언문은 주로 초현실주의 문학과 관련 있었지만, 회화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1925년 파리의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첫 초현실주의 전시회 ‘초현실주의 회화전’의 기획을 도왔다.




‘초현실적 surrealiste’이라는 용어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1917년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규정되었다.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순수한 심리적 자동주의로서, 이를 통해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사고의 진정한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이성의 통제가 없는 곳에서, 그리고 모든 미학적 혹은 도덕적 선입견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백과서전: 철학 용어. 초현실주의는 이제까지 소흘히 해왔던 연상작용과 관련된 최상의 실재를 믿으며, 꿈의 편재성과 무관심한 사고 작용을 믿는다. 이는 모든 다른 정신적인 메커니즘을 없애고, 대신에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 그 자체를 해결방법으로 제시하려 한다.”




초현실주의는 문학, 미술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며 철학적 견해의 표현으로 진전되었다. 초현실주의의 본질은 논리적인 사고에 의해 이해 가능한 사건들의 질서 잡힌 시스템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우연’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은 무의식에 대한 비논리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이런 통찰은 특정한 비논리적인 자동주의 방법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동주의는 브르통에 의해서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1920년 친구 필립 수포와 함께 자유 연상의 방법을 이용하여 창작한 글을 실은 <자장 Les Champs magnetiques>을 출간했으며, 이것은 자동주의 방법의 첫 예가 되었다. 회화가 초현실주의에서 타당한 위치를 가지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자 브르통은 말했다.




“시각은 가장 강력한 감각이므로, 시각적인 이미지를 명확하게 하는 능력은 초현실주의가 회화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총체적으로 초현실주의 회화 또한 다른 초현실주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의 의식 속에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회화를 혁명을 수행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브르통은 회화 자체의 미학적 목적보다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시만큼이나 회화를 늘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몇몇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성공으로 인해 대중이 초현실주의가 우선적으로 양식상의 문제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자 몹시 당황해 했다. 브르통은 달리를 교의상의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초현실주의 운동으로부터 추방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유럽이 전통적인 도덕에서만 파산한 것이 아니라 예술,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정치에서까지도 파산에 도달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광적이었고, 어린아이들처럼 무책임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찾았다. 그들의 첫 전시회가 1925년 피에르 화랑에서 열렸는데, 전시회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아르프, 데 키리코, 에른스트, 클레, 만 레이, 마송, 미로, 피카소, 그리고 피에르 로이였다.(폴록 34, 48) 이브 탕기가 이들 그룹에 가세한 것은 전시회가 끝난 후였으며, 르네 마그리트가 그해 늦게 브르통의 그룹에 가세했고, 24살의 달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28년이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위한 첫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작성했는데, 전시회에 대한 소감을 “통탄할 만한 임기응변”이라면서 초현실주의의 목적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고 탄식했다.(뒤샹 171, 191, 198, 257, 274)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행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자동주의와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은 꿈에 관한 프로이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는데 프로이트는 “단지 수집만 한 꿈들은 아무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으며, 그런 것을 묘사한 그림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는지 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경고했다.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이 배제된 정신분석적인 작품들이 대부분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점이었으므로 그들의 작품에는 일정한 경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막스 에른스트의 <오이디푸스 왕>은 프로이트가 쓴 오이디푸스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정신분석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칼 마르크스의 정신에서의 혁명도 지지했다.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은 그는 근본적인 인생의 변화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정의를 찾는 데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사고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공산주의에 협력하자고 권유했는데, 그는 자신의 모순된 언행을 독선으로 정당화하려고 꾀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가들과 전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한 아라공 같은 예술가들 모두 브르통의 오만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브르통은 자신에게 반역하는 예술가들을 그룹에서 추방하면서 1929년에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선언문에서 “진실과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겠다고 장담했다. 이쯤 되면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정치운동을 미술로 이루려는 것 그 이상이 아니었다.




초현실주의는 다행스럽게도 정치에 무관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다. 그들은 에른스트, 마송, 탕기, 마그리트, 미로, 그리고 달리였다. 특히 달리의 활약이 현저하게 눈에 띄였다. 달리는 그림으로만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과 기괴한 행위, 옷차림, 코믹한 콧수염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파리에서 탄생한 초현실주의는 빠르게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38년 파리 전시회에는 14개국이 참가했다. 세계 각지에서 개최된 국제전들은 초현실주의의 국제적인 확장을 말해준다. 미국의 초현실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 의해서 발생했다.(뒤샹 272, 278) 그들은 페기 구겐하임의 금세기 화랑과 줄리언 레비 화랑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그들 중에는 탕기, 에른스트, 마타, 샤갈, 브르통, 마송, 첼리체프, 쿠르트 젤리히만 등이 있었다. 그들이 접촉한 미국 예술가들 대부분은 이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얼마간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때때로 중앙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대륙 정복 이전의 미국 인디언 미술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런 화가들 중에 아슐리 고르키, 한스 호프만, 애돌프 고틀리브, 윌리엄 배지오티스 등이 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변형한 것은 자동주의의 원리, 즉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계획되지 않고 즉흥적인 구성이었다. 로버트 머더웰은 추상표현주의 흐름 가운데 서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즉흥적인 구성의 원리를 가장 완전하게 확대시킨 작품에 ‘추상적 초현실주의’라는 명칭을 붙였다.




영국에서는 1936년 런던에서 ‘국제 초현실주의전’이 개최되어 1930년대의 정체기에 충격적인 돌팔구를 제공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독일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시각예술 모두에서 중요한 운동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조직된 운동이 해체되고, 그 추진력이 고갈되었을지라도 초현실주의의 정신과 방법은 계속 발전하여 많은 나라들의 개개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브르통이 진정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꼽은 예술가는 오직 피카소와 뒤샹 두 사람뿐이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회화>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가 계속해서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피카소이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브르통을 중심으로 모이는 예술가들과 교류하지 않았는데 그는 브르통의 독선적인 행동을 못마땅해 했다. 뒤샹도 에른스트, 탕기, 달리, 그리고 그 밖의 예술가들과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눴지만 브르통의 그룹에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뒤샹이 일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회화를 받아들인 것은 그들이 새로운 기교를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회화가 사람의 망막에서만 아니라 마음에도 들어와 박혔기 때문이었다. 잠재의식에 관한 그들의 탐험은 뒤샹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회화가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딜러의 입장에서 뒤샹은 초현실주의를 인정했다.




카반느가 훗날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초현실주의 회화에 대한 선생님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뒤샹: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그들의 추상을 난 늘 좋아하지 않았네. 주요 화가들인 에른스트, 마그리트, 달리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닐세. 내가 말하는 예술가들이란 약 1940년경의 추종자들일세. 그때는 이미 초현실주의는 빛이 바랬지. ... 근본적으로 초현실주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회화학파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다른 것들처럼 그것은 시각예술의 학파가 아니었어. 그것은 보통 주의ism가 아닌 이유는 철학, 사회학, 문학 등을 다루었기 때문이지.

카반느: 마음의 상태였지요.

뒤샹: 실존주의와 같은 것이었어. 실존주의적인 회화는 없었더라도 말일세.

카반느: 행위의 문제였겠지요.

뒤샹: 그거야.

카반느: 초현실주의 화가들 가운데 누구를 좋아하십니까?

뒤샹: 모두 좋아. 미로, 에른스트, 그리고 데 키리코를 특히 좋아하네.

카반느: 이런 경우 그들의 작품보다는 그들에 대한 우정 때문입니까?

뒤샹: 아냐, 작품도 좋아하네. 난 이들 화가들의 작품을 매우 좋아하는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마음을 움직이며 ...

카반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에 여전히 망막적retinal 요소가 있었는데 그 점이 선생님에게 거슬리지는 않았습니까?

뒤샹: 아냐, 자네가 알아야 할 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이지. 그들의 궁극적인 의도는 그것을 넘어선 것이었고, 특별히 환상적인 것들에서 그랬네.

카반느: 시각적이기보다는 좀더 개념적이었지요.

뒤샹: 바로 맞추었네. 충분히 개념적이지 않아도 내가 좋아할 수 있다는 점을 자네가 알기 바라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완전히 비개념적인 것들로 순전히 망막적인 그림들이라네.

카반느: 선생님은 늘 개념적이었지요.

뒤샹: 오! 그래, 늘 그랬어. 일반적인 것도 공리주의적인 것도 아닌 개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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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광기는 쇼펜하우어에게 관조론을 펴게 했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미적 경험을 플라톤의 광기와 연계시켰으므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1860)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에서 미적 경험을 단순한 관조contemplation(willess perception)로 주장할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가의 관심이 행위나 이의 가능성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관조에 있다고 보았다.
칸트를 좇아 취미Geschmack나 미적 가치의 모든 판단을 무관심한disinterested 것으로 본 그는 자연의 장면 혹은 미술품 혹은 문학작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 속에서의 자체를 위한 판단으로 원인이나 결과를 염두에 둔 일반 지각적 판단들과는 상이한 것으로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슐레겔Fr. von Schlegel(1772-1829)을 통해 고대 인도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슐레겔은 1813년에 『고대 힌두의 언어와 지혜에 관하여 On the Language and Wisdom of the Ancient Hindus』를 출간했으며 쇼펜하우어는 오리엔탈리스트 메이어Mayer에 정통했다.
두페론Duperron이 1801년에 라틴어로 번역한 『우파니샤드 Upanishads』를 쇼펜하우어는 자주 인용했다.
우파니샤드는 산스크리트어로 ‘가까이 아래에 앉다’는 뜻이다.
우파upa는 가까이, 니ni는 아래에, 샤드shad는 앉다란 뜻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스승에게 가까이 가서 그분의 발 아래 앉는다는 뜻이다.
구전으로 전래된 <우파니샤드>에 대한 주석을 단 것이 <베다 Veda>인데 기원전 2400년과 1200년 사이에 쓰여진 <베다>는 <우파니샤드>에 대한 또 다른 명칭으로 불리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 외에도 피히테와 셀링의 영향도 받았는데 셀링은 “의지가 궁극적인 존재이다”라고 했다.
쇼펜하우어의 근원적인 의지는 헤겔의 개념에 상반되는 것으로 지성에서 유추하여 해석한 세계의 단일성이다.
궁극적인 실재로서의 이 의지는 지식의 대상으로는 무력한 존재이며, 그 자체 안에서는 그런 하나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오직 그것의 구체화 안에서는 하나의 대상이 되는데, 구체화란 특정한 존재의 외적인 유형들이 등급들의 체계를 그것들이 의지를 나타내는 것과 더불어 완전함 안에서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플라톤의 개념들 Platonic ideas”이라 명명했다.
이런 궁극적이며 전형적 개성들, 즉 과학의 개념들에 상반되는 것들은 오직 예술적 지각, 자아 억제, 묵상적 감각에 대한 만족에 의해 예언된 것들로 알려졌다.
그것들은 끊임없는 원인에 의한 법칙 하에서의 관련 있는, 정신이 관여될 수 없는 것으로 구성된 그런 관념들과는 완전히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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