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표현주의 6

 

 추상 표현주의 화파에는 드 쿠닝과 폴록과는 달리 표현적이지 않은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있었다. 두 사람을 주축으로 한 그룹에 대해 또 다른 그룹을 이룬 이런 계열의 화가들 가운데 바넷 뉴먼과 라인하르트가 두드러졌다. 뉴욕 주 맨해튼 태생의 바넷 뉴먼Barnett Newman(바루흐 네브만Baruch Newman, 1905~70)의 부모는 폴란드계 이민자이다. 뉴먼은 1922~26년 아트 스투던츠 리그에서 회화를 수학했고 1927년 뉴욕 시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 후 부친의 의류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1929년 공황으로 파산한 뒤 1937년까지 어렵게 경영을 계속했다. 1930년대에는 임시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일했고, 1934년 뉴욕 시장에 출마하는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뉴먼은 회화에 있어 미국의 지방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유럽의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은 끝났으므로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런 믿음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에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거의 모두 폐기했다. 새롭게 출발한 뉴먼은 1940년대 후반 점차 신비적 추상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진전시켰는데, 1948년 1월 단색조의 어두운 카드뮴 빛 빨강 캔버스에 밝은 카드뮴 빛 선 하나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합일>을 제작하여 비약적 결과를 성취했다. 또한 1948년에 로스코, 배지오티스, 머더웰 등과 협력하여 예술가의 주제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는 1950년대 초반 추상 표현주의의 화가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했던 잡지 <호랑이의 눈 Tiger's Eye>의 부주필로 활약하기도 했다.
뉴먼은 뉴욕 화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기술된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래리 푼스와 프랭크 스텔라 같은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추상 표현주의 이후에 나타난 여러 새로운 양식의 선구자로, 모노크롬의 색면 회화, 전체론적 회화 또는 비관계적 회화, 그리고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의 등장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셰이프트 캔버스는 1960년대 전통적인 직사각형 형태에서 벗어난 캔버스에 그려진 회화를 일컫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비직사각형 그림이 당시에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고딕과 르네상스 시대의 제단화는 종종 윗부분이 뾰족했고,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에는 타원형의 캔버스가 특히 유행했다. 그러나 현대 회화의 문맥에서 셰이프트 캔버스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그림이 다른 어떤 것을 베끼거나 참고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림의 ‘사물성’을 강조하는 추상 회화의 종류를 의미한다. 셰이프트 캔버스의 가장 유력한 발명자는 프랭크 스텔라로서 그는 V자형, 마름모꼴, 원형의 조각 형태를 이용했다. 그 뒤를 잇는 가장 독창적이고도 헌신적인 추종자는 엘리자베스 머레이였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스미스가 대표적이다.
뉴먼은 관람자의 시야를 압도하는 커다란 화면을 사용해 크기에 질적 중요성을 부여한 선구자로도 꼽힌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뉴먼의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마크 로스코, 라인하르트, 클리퍼드 스틸, 애드 라인하르트와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1955년 초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파티잰 리뷰>지에 뉴먼의 작품을 극찬하는 글을 기고했다.
뉴먼의 영향을 받은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70)는 라트비아의 드빈스크 태생으로 1913년 미국으로 와 1921~23년 예일 대학에서 공부했다. 1925년 회화를 시작했으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맥스 웨버에게 잠시 배운 것 외에는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다. 그는 1935년 표현주의 그룹 텐의 창립에 참여했다. 로스코, 고틀리브 등이 참여한 텐The Ten 그룹은 1935년에 창설되어 1940년까지 전시회를 개최했다. 텐 그룹의 화가들은 추상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표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룹을 1898년 존 위치먼이 결성한 같은 명칭의 인상주의 그룹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로스코는 1940년대 초에 미로, 고르키, 배지오티스 등이 그랬던 것처럼 생물 형태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들을 결합시키면서 추상적인 초현실주의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렸다. 1943년 방송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 작품들의 제목은 잘 알려진 고대 신화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이 기본적인 심리학적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영원한 상징들이기 때문에 다시 사용했다. 그것은 지역이나 시대에 상관없이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과 동기를 상징한다. ... 현대 심리학은 그것이 외부 생활 조건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꿈과 일상어와 예술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부터 로스코의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적 취향은 점차 사라졌으며, 1947년 무렵부터는 자신의 성숙한 양식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로스코는 캔버스를 2개 혹은 3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채를 엷게 칠한 뒤 그 위에는 좀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작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이 구름과 같은 형태는 점차 단순해졌고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로스코의 색채는 마치 내부의 빛으로 충만한 듯한 특별한 광휘를 지니는데, 그 효과의 대부분은 인접한 색조의 면들이 만나도록 되어 있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상호 작용에서 나온다. 그는 관람자가 완전히 총체적 색채 경험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거대한 규모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로스코는 1958년 말했다. “형상이 나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어버렸다. 이제 나와 동료들은 형상을 있는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시기가 온 것이다.” “고틀리브의 작품이나 나의 작품 그 어느 것도 추상화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색채-공간 배열을 창조하거나 강조하는 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다. 이 작품들은 주제를 희석시키거나 소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제목에 내포되어 있는 주제를 강화하기 위해 재현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나는 친밀한 상태를 창조하기 원하므로 대형 그림을 그린다. 대형 그림은 관람자에게 즉각적으로 그 느낌을 전달한다. 이 대형 그림은 너를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로스코의 색채는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더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 작용이 감소되었다. 로스코는 1960년대 말 타계하기 바로 직전에 균일하게 반짝이는 색채로 이루어진 두 개의 불균등한 직사각형 영역으로 나누는 기하적 분할의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화파의 어느 화가보다도 미국과 해외에서 가장 널리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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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표현주의 5

 

 추상 표현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와이오밍 주 코디 태생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이었다. 1929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지방주의 화가 토머스 하트 벤턴의 지도를 받으며 회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폴록은 지방주의 양식으로 작업하면서 동시에 멕시코 벽화가들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43년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곧 그 화랑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금세기 미술 화랑은 페기 구겐하임이 연 화랑으로 초현실주의의 온상과도 같은 화랑이었다. 1940년대 중반까지 다소 틀에 박힌 우아함을 지닌 선적인 양식과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낭만적 양식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추상 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이자 당대의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알려지게 한 ‘뿌리고 튀기는 drip and splash’ 기법은 1947년 무렵 다소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폴록은 이젤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에 캔버스를 마루 바닥이나 벽에 고정시키고 통에 든 물감을 붓고 뿌렸다. 그 다음 붓이 아니라 막대기, 흙손, 나이프로 물감을 다뤘고 때로는 모래, 유리조각, 혹은 이물질을 혼합하여 임파스토 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화가의 무의식을 드러내거나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동일한 이유에서 이는 제스처 회화로 불렸으며 미국에서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신조어가 사용되었다.
액션 페인팅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제스처 회화gestural painting는 좀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제스처 회화는 하나의 그림은 그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화가의 행위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몸짓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록된 행위가 화가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제스처란 명칭은 특히 물감을 사용하는 태도와 붓놀림이 시각적으로 확인되고 의도적으로 강조되는 회화에 적용된다. 이 용어는 이따금 앵포르멜 또는 타시즘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폴록은 올오버 회화all-over painting 양식을 도입한 화가로도 기억되고 있다. 화면 전체가 구조적으로 거의 구별하기 불가능하게 균일한 방식으로 처리되는 회화 양식인 올오버는 폴록의 ‘뿌리고 튀기는’ 기법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 뒤로 이 용어는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1928~)처럼 ‘휘갈겨 쓴’ 구성 요소를 사용하거나 색면 회화 화가들처럼 색채를 사용하여 캔버스 전체를 비교적 단일하게 처리한 회화 작품을 일컫는다. 1950년대 중반부터 추상 표현주의에서 이탈하여 일명 후기 회화적 추상이라고 알려진 일련의 미술 운동을 시작한 트웜블리는 ‘쓰여진 이미지들’이라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끄적거림이나 낙서와 외형상 유사했다. 그는 전통적인 구성 개념을 거부하고 폴록이 시작한 올오버 양식을 선호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폴록의 것보다 느슨하고 자유로웠다. 그는 중앙에 선을 그어 면을 나누거나 거의 색조의 변화가 없는 거대한 표면에 낙서가 된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조각들을 붙여 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트웜블리의 작품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탈분화 dedifferentiation’ 미술과 비교되기도 한다. 독일어로눈 ‘슈트로이-콤포지치온 Streu-Komposition’이라고 하는 올오버 양식의 그림은 관람자의 주의를 화면 전체에 고르게 분산시키며 균형, 조화, 리듬 등에 의해 서로 연결되는 중심 부분들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그림은 미니멀 아트의 기초적 구조들과 유사한, 구분이 없는 하나의 시각적 단일체가 된다. 이런 방법으로 연결된 요소들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종속시키거나 포함하지 않으므로 올오버 회화는 비관계적이다.
폴록의 회화는 캔버스의 형태와 크기에 좌우되지 않으며 실제로 완성된 작품을 보면 이미지에 맞게 캔버스의 일부가 깎여 있거나 잘라져 있기도 하다. 이후 이런 회화 양식에 반발하고 나온 후기 회화적 추상 화파들이 캔버스의 형태를 회화적 이미지와 일치시키는 데 역점을 둔 것도 부분적으로는 폴록의 올오버 양식의 영향이었다. 또한 폴록은 새로운 회화 공간을 도입했다. 서체적 혹은 갈겨 쓴 염료 기호들이 화면에 매우 얕은 깊이감을 창출하며, 움직임은 캔버스 내부가 아니라 캔버스를 가로질러 중앙을 향한다. 이런 모든 특징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개화한 새로운 미국 회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폴록은 1950년대에 올오버 양식의 작품뿐만 아니라 구상적이거나 유사 구상적인 흑백 작품 그리고 풍부한 임파스토를 강조한 작품을 계속해서 제작했다. 해럴드 로젠버그를 비롯한 진보적인 평론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지만 난해한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폴록은 20세기 미국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일반적으로 안정받았으나 화가들은 이미 그 운동에 반발하고 있었다. 폴록은 뉴욕 화파 중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가장 많은 지역에서 전시회를 가진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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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 교양문고 VS 시리즈
김광우 지음 / 페퍼민트(숨비소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과학과 예술의 조화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지면이 충분하지 않아 백남준과 앤디 워홀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어 아쉬운 점이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 같은 환경 뉴욕에서 활약했지만 만난 적이 없고 서로가 서로를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을 묶어 한 권의 책을 쓰는 데 있어 독자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언론의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서로의 활약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미술의 장르를 창안해내고 이 분야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영화를 제작한 워홀이 비디오아트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이며, 영상을 재료로 3차원의 작품을 제작한 백남준이라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대중적인 이미지였기 때문에 팝아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홀에 관해서 혹은 팝아트에 관해서 침묵한 것 또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비록 두 사람이 서로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을 한 권의 책에서 다룰 충분한 근거는 있는데, 그것은 두 사람 모두 대중적인 이미지와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이미지 혹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를 화랑에 걸 수 있는 회화작품으로 변형시킨 놀라운 재능을 가진 워홀은 실크스크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캠코더가 시판되자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전위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서양으로 가서는 과학문명의 총아인 텔레비전을 예술의 도구로 삼기 시작하면서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좇아 자신의 작품 경향을 만들어나갔다.
예술가들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할 경우 그들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백남준과 워홀은 과학과 예술을 조화시키는 예술을 추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활약한 1960년대는 과학의 결실이 풍성하게 수확된 시기였다.
과학과 예술을 조화시키는 노력이 없었다면 과학은 건조해졌을 것이고 예술은 문명에 뒤쳐졌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두 사람은 이런 분야에서 선구자들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많은 그 밖의 예술가들이 과학과 예술을 적절하게 접합시켜 다양한 작품들을 쏟아내게 된다.
그 후 나타난 홀로그래피아트Holographic art, 컴퓨터아트Computer art, 커뮤니케이션아트Communication art 등 이런 분야들을 테크놀로지아트 혹은 전자예술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을 수 있는데, 전자예술의 선구자는 비디오아트와 레이저아트를 실행한 백남준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업적은 두고두고 미술사에 빛날 것이다.

과학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워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제작을 통해 보여준 그의 감성, 기량, 야망은 복합체로서의 그를 재조명하게 만든다.
그의 주요 영화작품을 이 책에서 다루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미술사가와 평론가들은 사회문화적 표상을 만들어낸 워홀과 더불어서 영화에 나타난 그의 미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기계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경우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이 고도로 전문적이며, 시각적이고, 거대한 힘을 과시하게 된다.
그러나 워홀의 영화와 백남준의 멀티 모니터에 나타나는 영상들 중심에는 인간이 있어 두 사람의 미학이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작품에서 관람자를 참여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데, 관람자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초대받는다는 개념에서 탈피하여 보다 친밀하게 상호대화적인interactive 차원에서 참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공통점은 존 케이지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케이지가 백남준에게 미친 영향은 이 책에서 충분히 언급되었지만 워홀 또한 케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점을 좀 더 살펴본다면 일본 선불교의 영향으로 이는 동양의 사상이 서양미술에 그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이미 예고한 대로 과학문명의 발달은 서양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을 불러오게 했고, 그런 공황으로부터 탈출을 그들은 동양의 명상적인 문화에서 찾았다.
백남준이 홀로 서양으로 가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으로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양의 문화로부터 원기를 공급받고 있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음악에서도 발견되는 대로 1960년대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화해하고 조화를 이룬 시기였으며, 이는 동서양 모두에 바람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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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질료와 형상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는 질료matter와 형상form이 구별되는데 예를 들면 대리석은 질료이고 조각가가 보여준 조각상은 형상이다.
형상을 형태로 이해하면 문제가 없지만 그는 질료가 사물이 되는 것을 형상의 원인으로 간주하여 형상을 사물의 실체와 동일시했다.
그는 영혼을 육체의 형상으로 보았는데 물론 형태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형상, 즉 사물의 본질이 실체라고 생각했고, 이를 형상이 관여하는 질료와는 독자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형상을 질료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믿었다.
그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모든 개체들을 구성하는 이데아로 형상을 접목시켰다.
그에게 질료와 형상의 관계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관계로 질료는 형상의 가능태이다.
그러므로 한 덩어리의 대리석은 가능태에 있는 조각상이라고 말할 수 있거나 또는 하나의 조각상은 적합한 행위로서 한 덩어리의 대리석에서 생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가가 오브제들의 개별적인 모습보다는 그것들이 공유하는 객관적인 형상이나 본질을 모방한다면서 예술가의 입지를 한층 격상시켰다.
예술이 개별적인 종자의 형태보다는 객관적인 형상을 모방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미학인데 이런 의미에서 그는 객관적인 인식력의 역할을 역사보다는 과학에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예술가가 오브제의 형태보다는 그 형상 혹은 본질을 재현한다는 그의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오브제를 통해서 그 오브제가 지닌 형상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에게 훌륭한 화가란 호랑이, 사자, 말 혹은 어떤 류의 의자와 침대 혹은 인간의 코미디와 비극적 행위를 묘사할 때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장면들만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형상들을 더불어 묘사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혹은 형상론에 있어서의 문제는 수많은 호랑이, 사자, 말 혹은 어떤 류의 의자와 침대에서 어떻게 모든 것들이 공유하는 그 적합한 형상을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아무리 많은 것들이 나고 죽더라도 그 객관적 형상들은 존속하며, 따라서 더 영구적인 실재라고 했다.
그에게 형상은 기본 실재로 개별적인 것들과는 구별되는 존재이고 개별적인 것들은 변화의 흐름에서 단지 그 형상의 양상들이다.
플라톤은 예술가가 개별적인 것들을 모방한다고 하찮게 여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시적·개별적인 것들을 통해 예술가는 분별할 수 있는 그 객관적인 형상들을 모방할 수 있다고 스승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정정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이런 사상은 그리스인에게 만연되어 있었는데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자연이 하나의 교향곡이며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했다.
그리스인의 전설에 의하면 아리스토파네스가 연극작품 <에타루스>에서 언급한 대로 조각과 건축의 발견은 데다루스인데 호메루스Homer(BC 8세기경)는 그가 아킬레스의 방패를 제작한 사람이라고 했다.
헤시오도스Hesiodus(700년경 BC), 헤로도토스Herodotos(489-425 BC), 호메루스 등은 대장장이를 중요한 마술적·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자로 여겼다.
피타고라스 이후 그리스인은 수와 비례 속에서 자연의 심오한 법칙, 즉 존재의 원리를 찾았으며 피타고라스학파는 세계의 전체적 근간이 되는 이 원리를 음악에서 발견했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는 모든 사물에 비례가 있다고 보았는데 예를 들면 물에 있어서 산소와 수소의 비례라든가 사람의 몸에 있어 수분이 차지하는 퍼센트를 말한다.
물론 그가 이런 과학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피타고라스는 만물이 리듬처럼 고유한 비례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확한 비례와 부분들의 통합은 플라톤에게도 매우 중요했는데 그는 예술적 목적을 위해서 자연의 형식을 조금이라도 수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이데아들의 완전미와 불완전한 감각미를 대립시켰다.
이데아를 감각미의 ‘원형’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플로티누스에 의해서였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세 사람 모두 미를 아름다운 사물들의 객관적 한 특징으로 보았다.
그들은 사물의 미를 부분들의 비례 및 배열에 두었으므로 사물이 보기에 따라서는 아름다울 수도 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한 사물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밖의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원히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미에 대한 그의 판단은 가톨릭 미학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354-430)는 말했다.
“나는 어떤 사물이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지 아니면 아름답기 때문에 즐거움을 주는 것인지 묻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즐거움을 준다는 답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겠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말했다.
“어떤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아름다운 사물을 아름다운 본질essentialiter pulchra로 보고 미를 사물의 본질이자 실질essentia et quidditas로 여겼는데 플라톤의 영향이었다.
이런 미에 대한 관념이 르네상스 때까지 지속되었음을 알베르티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사물이 아름답다면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도 미는 하나의 커다란 혜택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플라톤은 “만약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미를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라고 했다.
미는 찬미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신성하게 여겨졌다.
내적이고 정신적인 미에 대한 찬탄이 외적이고 물질적으로 번졌으며, 가톨릭과 중세가 가졌던 미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미에 대한 생각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미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즉 자연의 한 특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예술 자체의 한 특성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미를 예술의 목적, 즉 예술들을 한데 결합시키고 규정짓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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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표현주의 4

 

 1940년대 말 뉴욕 화파는 두 그룹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하나는 드 쿠닝과 폴록을 주축으로 한 그룹으로 이 그룹의 예술가들은 유럽의 제스처 회화에 해당되는 태도를 표명하면서 회화 작품을 완성작이라기보다는 점차 드러나는 과정의 기록, 즉 창조 과정 중에 있는 예술가의 내적 정신 상태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로테르담 태생의 네덜란드계 미국 화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97)은 1916~20년 상업 장식 회사에서 견습 생활을 하면서 암스테르담에 있는 조형 예술 및 기술 과학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26년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을 제작했지만 곧 아슐리 고르키 및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다른 예술가들로 구성된 서클에 가입했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아 칸딘스키와 피카소의 말기 입체주의로부터 유래된 보다 발전된 추상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드 쿠닝은 1930년대에 여러 기법으로 그렸고 초상화와 인물 스케치는 쟈코메티의 후기 작품을 연상시켰는데, 이는 1970년대가지 그의 작품의 주조를 이룬 인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실제로 그는 동시대 화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인물을 주제로 삼은 화가로 처음에는 남성을 후에는 여성을 그렸다. 그는 동갑내기 가장 가까운 친구 고르키와 그 밖의 화가들처럼 초현실주의의 환상적인 측면에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유기체적이고 생물 형태적인 형태를 들죽날쭉한 선으로 표현한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1948년까지 전시회를 갖지 않았지만 드 쿠닝의 곡선 형태를 담은 차분한 회색 색조의 추상과 모호하게 암시된 생물 형태적 형태는 1940년대 초 뉴욕 화파의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948년 찰스 이건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뒤 드 쿠닝은 폴록과 함께 자발성과 액션 페인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추상 표현주의 화파의 비공식적인 리더가 되었다. 드 쿠닝의 공간 구성, 표현적 붓놀림에 담긴 에너지는 그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드 쿠닝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여성 주제도 함께 발전시켜 나갔다. 이따금씩 이것을 에로틱한 상징, 흡혈귀, 출산의 여신으로 바구어 갔는데, 인물화에서도 이전의 보다 순수한 추상화와 마찬가지로 공간의 문제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그는 인물의 모델링을 생략하고 울퉁불퉁한 윤곽선만을 사용하여 인물과 환경이 뒤섞여 흐르도록 표현함으로써 인물과 환경의 혼합체인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를 ‘비환경’이라고 칭했다. 그는 때때로 해부학적 형태를 분해하고 위치를 옮겨 격렬한 선적 추상을 만들어냈다. 드 쿠닝은 뛰어난 독창성으로 인해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으며 비록 순수 추상만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전 생애를 통해 표현주의에서 한 번도 이탈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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