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표현주의 6
추상 표현주의 화파에는 드 쿠닝과 폴록과는 달리 표현적이지 않은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있었다. 두 사람을 주축으로 한 그룹에 대해 또 다른 그룹을 이룬 이런 계열의 화가들 가운데 바넷 뉴먼과 라인하르트가 두드러졌다. 뉴욕 주 맨해튼 태생의 바넷 뉴먼Barnett Newman(바루흐 네브만Baruch Newman, 1905~70)의 부모는 폴란드계 이민자이다. 뉴먼은 1922~26년 아트 스투던츠 리그에서 회화를 수학했고 1927년 뉴욕 시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 후 부친의 의류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1929년 공황으로 파산한 뒤 1937년까지 어렵게 경영을 계속했다. 1930년대에는 임시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일했고, 1934년 뉴욕 시장에 출마하는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뉴먼은 회화에 있어 미국의 지방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유럽의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은 끝났으므로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런 믿음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에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거의 모두 폐기했다. 새롭게 출발한 뉴먼은 1940년대 후반 점차 신비적 추상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진전시켰는데, 1948년 1월 단색조의 어두운 카드뮴 빛 빨강 캔버스에 밝은 카드뮴 빛 선 하나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합일>을 제작하여 비약적 결과를 성취했다. 또한 1948년에 로스코, 배지오티스, 머더웰 등과 협력하여 예술가의 주제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는 1950년대 초반 추상 표현주의의 화가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했던 잡지 <호랑이의 눈 Tiger's Eye>의 부주필로 활약하기도 했다.
뉴먼은 뉴욕 화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기술된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래리 푼스와 프랭크 스텔라 같은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추상 표현주의 이후에 나타난 여러 새로운 양식의 선구자로, 모노크롬의 색면 회화, 전체론적 회화 또는 비관계적 회화, 그리고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의 등장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셰이프트 캔버스는 1960년대 전통적인 직사각형 형태에서 벗어난 캔버스에 그려진 회화를 일컫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비직사각형 그림이 당시에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고딕과 르네상스 시대의 제단화는 종종 윗부분이 뾰족했고,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에는 타원형의 캔버스가 특히 유행했다. 그러나 현대 회화의 문맥에서 셰이프트 캔버스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그림이 다른 어떤 것을 베끼거나 참고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림의 ‘사물성’을 강조하는 추상 회화의 종류를 의미한다. 셰이프트 캔버스의 가장 유력한 발명자는 프랭크 스텔라로서 그는 V자형, 마름모꼴, 원형의 조각 형태를 이용했다. 그 뒤를 잇는 가장 독창적이고도 헌신적인 추종자는 엘리자베스 머레이였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스미스가 대표적이다.
뉴먼은 관람자의 시야를 압도하는 커다란 화면을 사용해 크기에 질적 중요성을 부여한 선구자로도 꼽힌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뉴먼의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마크 로스코, 라인하르트, 클리퍼드 스틸, 애드 라인하르트와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1955년 초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파티잰 리뷰>지에 뉴먼의 작품을 극찬하는 글을 기고했다.
뉴먼의 영향을 받은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70)는 라트비아의 드빈스크 태생으로 1913년 미국으로 와 1921~23년 예일 대학에서 공부했다. 1925년 회화를 시작했으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맥스 웨버에게 잠시 배운 것 외에는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다. 그는 1935년 표현주의 그룹 텐의 창립에 참여했다. 로스코, 고틀리브 등이 참여한 텐The Ten 그룹은 1935년에 창설되어 1940년까지 전시회를 개최했다. 텐 그룹의 화가들은 추상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표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룹을 1898년 존 위치먼이 결성한 같은 명칭의 인상주의 그룹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로스코는 1940년대 초에 미로, 고르키, 배지오티스 등이 그랬던 것처럼 생물 형태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들을 결합시키면서 추상적인 초현실주의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렸다. 1943년 방송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 작품들의 제목은 잘 알려진 고대 신화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이 기본적인 심리학적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영원한 상징들이기 때문에 다시 사용했다. 그것은 지역이나 시대에 상관없이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과 동기를 상징한다. ... 현대 심리학은 그것이 외부 생활 조건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꿈과 일상어와 예술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부터 로스코의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적 취향은 점차 사라졌으며, 1947년 무렵부터는 자신의 성숙한 양식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로스코는 캔버스를 2개 혹은 3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채를 엷게 칠한 뒤 그 위에는 좀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작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이 구름과 같은 형태는 점차 단순해졌고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로스코의 색채는 마치 내부의 빛으로 충만한 듯한 특별한 광휘를 지니는데, 그 효과의 대부분은 인접한 색조의 면들이 만나도록 되어 있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상호 작용에서 나온다. 그는 관람자가 완전히 총체적 색채 경험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거대한 규모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로스코는 1958년 말했다. “형상이 나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어버렸다. 이제 나와 동료들은 형상을 있는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시기가 온 것이다.” “고틀리브의 작품이나 나의 작품 그 어느 것도 추상화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색채-공간 배열을 창조하거나 강조하는 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다. 이 작품들은 주제를 희석시키거나 소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제목에 내포되어 있는 주제를 강화하기 위해 재현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나는 친밀한 상태를 창조하기 원하므로 대형 그림을 그린다. 대형 그림은 관람자에게 즉각적으로 그 느낌을 전달한다. 이 대형 그림은 너를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로스코의 색채는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더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 작용이 감소되었다. 로스코는 1960년대 말 타계하기 바로 직전에 균일하게 반짝이는 색채로 이루어진 두 개의 불균등한 직사각형 영역으로 나누는 기하적 분할의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화파의 어느 화가보다도 미국과 해외에서 가장 널리 전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