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것에 관심을 둔 미국의 1960년대 미술(6)



키치Kitsch
키치는 한마디로 전위예술의 정반대인 후방예술을 말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1939년 『파티잰 리뷰 Partisan Review』지에 기고한 논문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에서 키치를 아방가르드의 정반대인 ‘모방의 모방’, 혹은 대중예술로 보았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소비문화가 만연하자 예술도 대중의 상품이 되었다.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에 굶주린 대중, 혹은 감상적 자기 향락을 좋아하는 대중을 위한 것으로 키치는 순수 문화의 질이 낮고 인습적인 시뮬라크라simulacra(가상 실재)를 그대로 소재로 이용한다.
키치의 선구자 중 한 사람 한스 라이만은 일찍이 1924년에 감미로운 것과 악마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에로티시즘의 묘사와 관련하여 “정욕이, 그러니까 목적이 그림에 거짓을 불어넣고, 이 거짓이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고 했다.
에로티시즘은 결국 누드를 묘사하고 즐기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에 굶주린 대중이 도덕적 정념과 에로틱한 욕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원하는 데서 키치의 양면성을 찾을 수 있다.
키치는 독일어로 ‘값싸게 하다’, ‘감상적으로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비롯한 것으로 ‘천박한 쓰레기’를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키치 대신 ‘싸구려 예술 Schlock art’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슐럭schlock은 결점이 있는 가짜, 싸구려의 조잡한 물건이란 뜻의 유태인의 이디시어에서 유래했다.
19세기 말의 인기 있는 회화는 하렘 장면이나 노예시장 장면이었다.
노예시장에서는 하렘의 백인 여자노예, 즉 오달리스크를 진열하여 매매했다.
이런 모티프는 여인을 누드로 묘사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며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말하자면 값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그림을 요구했으므로 화가들이 그들을 위해 그리게 된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에서나 볼 수 있는 경박하고 음란한 성격이 악마적으로 유혹하는 요부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를 지오 H. 에드워즈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깨끗한 피부에 빨간 머리를 한 미녀가 북극곰 두 마리 사이에 있는 그림이다.
그녀가 앉아 있는지 허공에 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미숙한 작품이다.
미숙함은 그녀의 양팔의 길이가 다르고, 다리의 길이가 실재보다 긴 데서도 나타난다.
화가는 원근법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드를 그리는 데만 관심을 두고 신비한 에로티시즘은 고려하지 않았다.
고대 건물이나 폐허는 감상적인 작품의 모티프로 적당하다.
폐허는 낭만주의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모티프였는데, 신비스러운 것, 과거의 이야기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폐허는 키치적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어 하는 수요를 충족시킨다.
폐허는 고대의 아름다운 것의 잔해인데, 사람들은 폐허 자체를 고대의 아름다움으로 바라본다.
부자 중에 폐허를 지어서 풍경을 미화시키고 부지를 더욱 흥미로운 장소로 만든 사람도 있다.
철학자 귄터 안더스는 이런 감정을 “열광적인 비애”라고 일컫는다.
열광적인 비애가 사람들로 하여금 산업적 폐기물을 아름다운 재료로 바라보게 만들며, 새것인데도 낡아 보이는 건물을 짓고, 일부러 허물어져가는 감상적인 분위를 불러일으키는 건물을 짓게 한다.
화가들은 폐허의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폐허풍경을 묘사하면서 그림에 아름다움의 기능을 제공한다.
한스 차츠카의 작품에는 폐허의 아늑한 분위기와 함께 묘령의 미인이 환상의 나래를 펼치는 모습이 있다.
들장미가 치부를 가리는 무화과 잎 역할을 하면서, 화가가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은 면을 장식한다. 음울한 폐허와 창백한 소녀 사이의 강렬한 명암대조가 작품에 감상적 요소가 된다.
그림은 보기에 따라서 폐허가 두드러지거나 소녀가 두드러진다.
장미와 머리카락이 서로 얽혀있고, 어스레한 벽은 잠든 소녀 및 무성한 장미와 결합되어 작품이 신비롭게 보인다.
종교적 이미지에 키치가 도입되면 신앙심이 감상으로 바뀌게 된다.
루르드 수녀원의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의 환상을 토대로 곱슬머리에 불그스레한 입술, 육감적 표정으로 그려진 <자비로운 그리스도>는 감동적 순간의 진지하고 깊은 감정을 진부하고 감상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이 그림은 그 앞에 있는 교황의 사진과 함께 2003년 10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즉위 25주년 기념식에서 발표되었다.
신, 성모 마리아, 예수 등을 플라스틱 이미지로 침대 탁자의 장식품으로 만들면 키치가 된다.
성물업자가 대량생산한 성화들에서는 깊은 종교적 감정이 진부하고 공허한 상투적인 표현으로 바뀐다.
키치는 복제를 통해 늘어난다.
광고 및 디자인에 나타나는 유명 미술작품이 그런 경우다.
라파엘로의 <시스틴의 마돈나>에 나오는 천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대표적이다.
1994년 이탈리아의 리치오네에서 열린 ‘예술과 담배’ 전시회에 F. 스피넬리는 천사들이 흡연하는 장면을 소개하면서 “흡연은 정말 유행이 지났는가?” 하고 물었다.
<최후의 만찬>을 100% 순면으로 만들면 키치가 된다.
사람들은 트럼프카드에서 <모나리자>를 보고 놀랄 것이다.
복제를 통한 키치의 생산은 앤디 워홀에 의해서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워홀은 1963년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전시회에 대응하여 이 유명한 작품을 서른 번이나 복제하면서 ‘기술복제시대의 미술작품’을 양산했다.
그가 실크스크린 인쇄방식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키치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으로 각광받았다.
그의 복제화는 원화와의 관계에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미술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한 당시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했다.
워홀은 “서른 개가 하나보다 낫다”라고 했지만, 보수적 비평가들은 “공허하고 초점을 잃은 그의 작품은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의식의 증거”라고 비판했다.
문제는 복제를 하게 되면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는가 하는 것이다.
미술사학자 게르노트 뵈메는 라스코 동굴화와 같이 보호를 위해 더 이상 전시될 수 없는 작품의 복제화에서 원화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음을 예로 들어 복제에서도 원화가 지닌 예술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면서 복제를 통해 통속화된 지 이미 오래이므로 워홀이 서른 번 복제했다고 해서 비난할 일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복제가 용인되자 만화, 광고, 낭만을 특징으로 하는 키치아트가 등장했다.
팝아트가 통속적인 회화세계를 다루고 원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는 데서 더 나아간 것이 키치아트이다.
제프 쿤스는 워홀이 멈춘 데서 출발하여 원화를 남용하지 않고 자신을 주제로 삼았다.
그는 ‘천국에서 만든 Made in Heaven’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일로나가 위에서>이다.
쿤스는 아내인 이탈리아 포르노 배우 치치올리나와 함께 자극적인 체위로 포즈를 취한 장면을 공개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장면이다.
예술에서의 엘리트주의를 철저히 배척한 쿤스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만을 제작한다.
<진부함의 도래>는 어린 천사가 목에 리본을 두른 분홍색 암퇘지를 예술로 끌어들이는 장면이다.
쿤스는 진부한 것, 즉 키치를 예술로 끌어들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하지만 내 마음에 들어” 하는 반응을 유도한다.
나쁜 취향으로 여겨졌던 키치를 애용하는 것이 키치아트이다.
유머와 아이러니가 키치아트의 생명이다.
그만큼 대중이 키치를 사랑하고 애호하기 때문에 이런 예술이 생겨난 것이다.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좋은 취향이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사람들이 키치를 진지한 미적 현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촌티패션, 찢어진 청바지, 배꼽티, 복고열풍을 통해서 값싼 재료로 모조한 옷들은 키치에 속한다.
음악에서의 웅얼거림, 무의미한 소리가 키치에 속한다.
사람들은 본래 금지되었던 것, 감동적인 것,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알게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내재한 키치적 성향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쁜 취향을 즐기던 사람이 떳떳해지고 그런 사람들이 일체감을 갖게 한 것이 키치아트의 성공이다.
키치는 경제상황이 나쁜 시기에 더 융성한다.
키치는 예술인 체 위장하기 때문에 키치를 키치로 식별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
도자기로 만든 섬세한 작은 인형 대부분이 키치이다.
키치는 예술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약간 아름답게 만들고 현실의 스트레스를 누그러뜨리려고 한다.
키치는 산업적 대중문화의 일부이다.
거의 차이가 없는 모티프를 늘 되풀이해서 그린 그림이 키치이다.
그런 그림이 과거에 이발소에 주로 걸려 있었으므로 ‘이발소 그림’이란 말이 생겼는데, 키치를 말한다.
요즘 중국 화가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대량으로 제작하는 원화의 서툰 복제화가 키치이다.
키치는 저렴하기 때문에 장식용으로 널리 애용된다.
상아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성모상, 석고로 만든 그리스도상, 주물로 만든 성물들이 키치이다.
성모상의 볼에 흐르는 눈물은 키치의 특징이다.
거기에 조개를 붙이고 반짝이는 값싼 플라스틱 꽃을 장식하면 최악의 키치가 된다.
그러나 루브르 박물관에서 파는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 복제품은 키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미술품으로 귀히 여긴다.
키치이지만 아름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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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대한 관찰과 그 해석이 예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는 예술론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더라도 자연은 예술의 패러다임이다.
자연에 대한 관찰과 그 해석이 예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앞서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그것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미국의 사학자 러브 조이A. Q. Lovejoy는 자신의 저명한 연구서 『미학적 규범으로서의 자연 Nature as Aesthetic Norm』(1948)에서 자연이 얼마나 여러 면에서 관찰되어 왔으며, 찬탄의 대상이었는지를 기술했는데 타타르키비츠가 이를 열 가지로 분류했다.16)

1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 전체라는 의미로 달랑베르J. d’Alembert(1717-83)가 이 경우에 속한다.

2 특별히 인간세계라는 의미로 브왈로Nicolas Boileau-Despreaux(1636-1711)가 이 경우에 속한다.

3 인간의 소산이 아닌 초인간적 세계의 의미로 샤프츠베리Shaftesbury(1671-1713)가 이 경우에 속한다.

4 세계의 일반적 형식들이라는 의미로 화가 레이놀즈J. Reynolds(1723-92)가 이 경우에 속한다.

5 세계의 평균적·통계적 형식들이라는 의미로 레싱G. E. Lessing(1729-81)이 이 경우에 속한다.

6 이상화된 실재라는 의미로 뒤 프레스누아가 이 경우에 속하고 어떤 면에서 바뙤C. Batteux(1713-80)도 이에 속한다.

7 자연을 지배하는 필연적 법칙들의 체계라는 의미로 앙드레D. M. Andre가 이 경우에 속한다.

8 우주적 질서의 의미, 단순성, 통일성, 규칙성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자연의 의미가 있고

9 이와는 반대로 무한히 다양하고 풍부한 변칙적인 자연이라는 의미도 있으며

10 관례 및 예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인위성이나 꾸밈이 없고, 똑바르고 단순하며 범상한 것, 구조나 신화나 이상적 형태 없이 존재하는 것 등의 의미가 있다.

이렇듯 자연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은 예술의 패러다임으로 이론과 작품을 통해 알려졌다.
자연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만큼 예술론과 작품들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17세기의 뉴턴의 패러다임 혹은 자연에 대한 관찰과 해석은 물리학에서 400년 동안 존속했다.
20세기가 시작되고 얼마 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의 상대성이론이라는 패러다임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했으며, 곧이어 출현한 새 패러다임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의 양자역학이 아인슈타인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오류임을 입증했다.

나는 시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정의 즉 두 사건의 관계라는 말에서 자연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끊임없이 시간이 흐르는 물이 아니고 쏘아놓은 화살이 아니라 사건들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사실에서 사건이 시간의 척도임을 알았다.
그 후 자연에 대한 나의 인식에 또 다른 변화가 생겼는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설을 알고 난 후부터였다.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공리의 총체”가 완벽한 것인 줄 알았다.
이는 1, 4, 5, 7, 8과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신은 매번 주사위를 던진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말에서 “공리의 총체”가 불확실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9와 10과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아인슈타인은 자연을 규정적인 것으로 이해한 반면 하이젠베르크는 비규정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패러다임이 자연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자연은 영화 ‘아폴로 13’의 한 장면이다.
우주선에 고장이 생겨 달에 착륙하지 못하고 아쉬움으로 우주인의 눈으로 달의 상공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무수한 사건들이 존재하는 지구와 아무런 사건도 알려지지 않은 달 사이에 펼쳐진 광활한 공간이 내가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자연이다.
이런 자연과 예술의 관계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 그 후 내게 생긴 숙제였다.

자연이 찬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의미가 다양하고 개념의 폭이 유동적이기 때문이었다.
17세기의 고전주의자들·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 감상주의자들, 낭만주의자들, 19세기의 신고전주의자들과 고대 찬미자들 그리고 이즘들 시대 이후17) 현재의 우리에게도 한결같이 자연이 패러다임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바로 유동적인 자연의 개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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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다다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다다의 성격과 표현 양태는 그것이 발생한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다다는 전쟁의 야만성에 환멸과 혐오감을 느끼고, 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전통 사회 가치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난 젊은 시인, 작가, 예술가, 음악가들의 운동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우상을 타파하며, 혁명적인 것을 추구했다. 또한 과격하고 도발적인 미래주의 기법을 과장했으며 이를 통해 기존 사회의 기준과 규범을 맹렬히 공격했고, 그들이 보기에 자살 직전에 놓인 문화를 냉소와 풍자로 비웃었다. 다다주의자들은 예술의 전통을 공격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아방가르드 경향까지도 대상으로 삼았으며, 반예술의 풍자적 패러디를 통해 예술의 개념 자체를 타도하려고 했다.
다다의 허무주의적 분규 이면에 내재한 긍정적 목적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일이란 어렵다. 다다가 한창일 때는 긍정적 목적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 되돌아볼 때 다다를 주도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격렬한 운동에는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긍정적 측면도 있었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예를 들어 취리히 다다의 일원으로 화가, 영화제작자 한스 리히터는 1964년 <다다. 예술과 반예술>에서 다다는 단일화된 형식적 특징을 갖고 있지는 않았더라도 새로운 예술 윤리를 가졌으며, 이것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새로운 표현수단을 탄생시켰다고 적었다. 새로운 윤리는 때로는 긍정적 형태를 때로는 부정적 형태를 취했고, 어떤 때는 예술로 어떤 때는 예술을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상당히 도덕적인가 하면 철저하게 비도덕적이었다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무고한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허탈과 절망에 빠지게 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무차별한 살육장으로부터 안전한 중립국 스위스의 취리히로 피신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야만적인 행위와 부조리를 조장한다고 자소하면서 이성 자체에 거세게 반발했는데, 이와 같은 자연발생적 혁명은 따지고 보면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그리고 상징주의 작가들의 우상과도 같았던 알프레드 재리의 작품에 등장한 기괴한 장면과 허세에서 이미 조짐이 나타난 적이 있었고, 데 키리코와 샤갈의 잠재의식의 세계에서 시각적인 환상들로 분출된 적이 있었다. 환상주의 혹은 형이상학의 예술가들로 알려진 데 키리코와 샤갈은 이성이 인간이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사고와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욕망과 꿈을 성취하기를 바랐다. 이와 같은 경향이 파리의 미술계에 널리 알려질 무렵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취리히 다다를 결성한 예술가들 중 한 사람인 독일인 시인이며 음악가 휴고 발은 어린아이들의 자연발생적이고 무책임한 요소를 환영하면서 이런 요소가 새 예술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1916년 일기에 적었다. 다다는 1916년 2월 발이 취리히 슈피겔 가 1번지에 예술 활동의 중심으로 카바레 볼테르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가수 에미 헤닝스(1919~53), 루마니아 시인이며 뒤에 <다다> 지의 편집장을 역임한 트리스탄 차라, 독일 시인 리하르트 휠젠베크(1892~1974)가 그와 함께 했으며, 1916년 말경에는 오스트리아의 허무주의 시인 발터 제르너가 동참했다. 미술가로는 루마니아 출신의 마르첼 잔코, 알사스 출신의 장 아르프, 1922년에는 후에 아르프와 결혼하게 되는 조피 토이버-아르프가, 1917년에는 독일 화가 겸 영화제작자 한스 리히터가 합류했다. 카바레의 포스터는 우크라이나의 미술가 마르셀 슬로트키가 제작했다.
다다란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리히터는 1917년 그룹에 가입했을 때 차라와 잔코가 슬라브어로 이야기하면서 다-다(예, 예)하는 것을 보고, 다다란 용어가 슬라브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휠젠베크는 다다란 용어는 자신과 휴고 발이 독불 사전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어에서 다다dada는 장난감 목마를 의미한다. 발은 “독일인에게 이것은 백치 같은 순진함과 출산에의 집착을 뜻한다”고 했다. 발은 이어서 “우리가 다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고차원적인 문제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허함에서 뽑아낸 어리석은 행위이며 투사의 몸짓이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가지고 시작한 놀이 ... 위선적인 도덕성을 단죄하는 공개처형이다”라고 했다.
취리히로 도피한 예술가들은 정신적으로 새 힘을 얻어 본능에 근거한 예술가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했다. 발은 자신의 볼테르 카바레에 전쟁으로 불만투성인 사람들을 초대하여 용기를 가지고 새 정신으로 무장하는 연합을 결성하자고 종용하면서 “전쟁과 민족주의의 이면에서 상이한 꿈을 가지고 살고 있는 독자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전 세계에 알리자!”고 외쳤다. 그들은 처음이자 유일한 잡지 <카바레 볼테르>를 6월에 간행했다. 서문에서 발은 다다란 말을 사용했고 다다란 용어가 프린트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잡지에는 아폴리네르, 아르프, 발의 여자친구 에미 헤닝스, 잔코, 칸딘스키, 마리네티, 휠젠베크, 모딜리아니, 피카소, 데 키리코, 에른스트, 피카비아, 마르크, 코코슈카, 그리고 차라의 글과 그림이 실렸다. 이 잡지는 1916년 11월에 뉴욕에 도착했으며, 데 자야는 11월 16일 차라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난 이제 막 9월 30일자로 쓴 자네의 편지와 10권의 흥미 있는 다다 간행물을 받았네. ... 그것들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네. 뉴욕의 서점에서 자네의 간행물을 팔 수 있도록 알아봐야겠네.” 차라는 다다 그룹의 미학적 대변이었고, 7월에 <미스터 소화기의 첫 하늘 모험>을 출판했으며, 컬러 목판화를 잔코가 제작했다. 차라는 저서에서 다다를 정의했다.
“다다는 우리의 맹렬함이다. 다다는 독일 아기의 수마트라인 머리를 이치에 맞지 않는 총검들로 장치한다. 다다는 양탄자 슬리퍼나 유사한 물건들이 없는 인생이다. 다다는 통일 원하면서도 또한 통일에 적대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분명히 적대한다. ... 다다는 훈련이나 도덕이 없는 가혹한 요구이며, 우리는 인간성에 침을 뱉는다.”
취리히에서 다다 잡지가 발행될 무렵 솜메에서 7월 1일에 벌어진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에서 6만여 명의 영국인이 생명을 잃었는데, 이는 하루에 발생한 사상자로는 가장 많은 수였다. 영국 군대는 처음으로 탱크를 사용하여 독일 군대와 힘을 겨루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치열할 때 차라는 저서에 “우리는 요구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색으로 오줌 눌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고 적었다. 취리히에 모인 예술가들은 원시주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미술의 가장 초보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아르프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915년 취리히에서는 세계대전의 도살장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모여 순수미술을 추구했다. 멀리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우렁찼으나 우리는 풀로 붙이고, 시를 지으며 낭독하면서 모든 혼으로 노래했다. 우리는 기본미술을 찾았으며, 그것이 우리가 처한 참혹한 상황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새로운 조직으로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기를 동경했다. 그러나 이런 미술은 차츰 비난의 목표물이 되었다. ‘산적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첫 다다의 밤을 1916년 7월 14일 볼테르 카바레에서 열면서 음악, 춤, 이론, 선언문, 시, 그림 등이 있는 가면무도회를 성대히 벌였다. 발의 피아노 반주에 맞춘 에미 헤닝스의 노래, 발의 스크리아빈과 바레즈의 음악연주, 미래주의자 루솔로의 소음음악과 유사한 소음음악을 반주로 한 시 낭송, 드럼을 사용한 흑인 리듬 음악의 즉흥적 연주, 청중에게 충격을 주는 여러 소소한 해프닝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뒤에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요 특징이 되는 자동주의 시와 집단 작곡 등의 실험이 행해졌다. 발은 추상적 혹은 음성적인 측면만을 고려한 시를 써서 어리둥절해하는 청중을 향해 낭독했다. 그들은 잔코가 준비한 옷을 입고 입체주의의 춤을 추었으며, 아프리카의 음악을 들으며 새로운 미학을 주장하면서 모처럼 광란의 밤을 보냈다. 잔코는 그날의 모습을 <카바레 볼테르>(뒤샹 139)란 제목으로 그렸다. 그들은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선언문에 나타난 과격한 언어의 구사와 소란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임에서 의장을 선출하고서는 의장을 무시하거나 격하하는 언행을 즐겼는데, 그들의 허무주의는 좀더 사회비평주의에 가까웠으며, 완전히 새로운 미술과 시를 창조하려고 했다.
아르프는 ‘잘라낸 조각 그림’을 위한 밑그림에, 잔코는 석고와 철사를 사용한 구성물에 우연의 요소를 도입했다. 리히터는 아르프가 만족스럽지 않은 밑그림을 어떻게 찢어서 그 조각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는가를 묘사했다. 아르프는 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이 만드는 우연한 형태가 자신이 원한 대로 하나의 표현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그대로 맞추어 붙였다. 차라는 이 기법을 문학에 적용하여 신문에서 오려낸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붙여 우연 시를 만들었다. 차라는 1917~20년 <다다> 지의 편집을 맡았다.
차라는 1916년 7월 14일 ‘안티피린 씨의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다다는 허약한 유럽 내에 국한되어 있다. 아무튼 똥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우리가 예술동물원을 모든 영사관에 걸려 있는 국기들로 장식하기 위해 온갖 색이 있는 똥을 볼 것이다.”
차라는 그때 겨우 스무 살에 불과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스위스로 유학 왔으나 시에 심취하여 온 정열을 시에 쏟았다. 예술가들은 차라를 좋아했다. 그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실내에서 말도 되지 않는 언어들을 연결시켜 시라고 낭독하곤 했고,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전략상의 방법을 받아들여 혹평과 독설을 일삼았다. 신문에서 닥치는 대로 글을 모아 시라고 주장하는 이런 ‘우발적인 시’는 아르프의 자동주의 콜라주와 같았다. 아르프는 1916~17년에 많은 콜라주 작품을 제작했는데 사각모양의 종이들을 높은 데서 떨어뜨린 후 풀로 붙여서 <우연의 법칙에 의한 배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다다에 대한 아르프의 이해는 취리히의 다다뿐만 아니라 뉴욕과 베를린의 다다를 이해하는 데도 적절한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다의 목적은 인간의 이성적인 오류를 분쇄하는 것이며, 자연스럽고 비이성적인 체계를 재건하는 것이다. 다다는 오늘 날 인간의 논리적인 얼토당토아니한 것들을 비논리적인 얼토당토아니한 것들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큰 북소리로 행진하는 우리 다다의 의지이고, 비이성을 찬양하는 트럼펫 소리이다. ... 다다는 무감각함이 자연과도 같다. 다다는 미술을 대적하며 자연을 따른다. 다다는 자연처럼 직접적이다. 다다는 무한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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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대한 공리의 총체로서의 이성



순수형상으로서의 누스 혹은 이성이 자신을 사유하는 것이 자연이라는 말은 이성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며, 순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 대한 사고에서 연유한 것으로 갈릴레이 이래 과학으로 규정된 자연의 의미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오늘날 이성이란 말은 어떤 담론이 대상을 인식할 경우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게 되는데 이때 담론이 고려할 규칙들이나 공리들의 총체나 체제를 의미한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대상 과학의 경우 관찰을 실행하고 반복하는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실험실에서의 과학자들의 경험은 이런 것들과 거의 관련이 없다면서 그러나 이런 경험이 인류학적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함을 지적했다.
극히 추론적인 규칙들의 총체는 경험과는 무관하며, 경험을 소흘히 함으로써 담론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식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뿐이라면서 예를 들어 정신분석에 의한 꿈의 해석은 이런 인지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8)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자료, 즉 꿈에 관한 이야기는 동일한 형태로 재현될 수 없으며, 따라서 보편적인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담론은 그 자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고찰하는 담론들, 즉 넓은 의미에서 인식론들과는 구별되고 인식론들은 과학적 이성의 이념을 반성, 조작, 변용, 이데올로기화 한다.9)

과학에 대한 주석들이 갈릴레이시대 이래 많아지고 있으며, 오늘날 과학에 대한 사회학적 과학, 과학적 욕망과 같은 과학에 대한 정신분석, 과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역사 등이 존재하는데 리오타르는 이런 것들이 기술적·사회적·심리적·공상적인 경험적 변수들과 과학적 이성이 무관하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빈번한 혼동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존성이 과학적 담론의 규칙체계보다는 오히려 그 내용과 연관된 것으로 보았다.10)
이런 규칙들의 지위에 관한 의문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는 오늘날 과학적 이성에 관한 주석이 어떤 커다란 불확실성의 감정을 초래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런 지위를 고찰하게 되면, “이런 규칙들은 주여져 있는가, 자연적인 것인가, 신적인 것인가, 필연적인 것인가?”11) 하는 인식에 관한 규칙들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이성의 이성 혹은 그 근거를 회의하는 것을 뜻한다.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성의 이성은 순환을 범함이 없이는 제시될 수 없으며, 새로운 규칙들 혹은 공리들을 확립하는 능력은 이런 규칙들에 대한 필요가 감지되는 정도로 나타난다.
과학은 이성을 ‘드러내는 수단 moyen de reveler’이며, 이성은 과학의 ‘존재근거 raison d’etre’로 남아 있다.12)

그러므로 이성에 귀속된 지위는 필요와 수단의 변증법, 기원에 대한 동등성, ‘새로운 것’이라는 무한한 능력의 요청, 잉여권력에 의한 정당화라는 기술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직접 유래한다.”13)

리오타르는 인지적 이성이 인식 자체에서가 아니라 공공이나 공공의 위임들이 추구하는 목적에서 발견된다면서 인지적 이성의 이성이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과학이 더욱 많은 정의, 복지, 자유를 가져다줄 것으로 믿고 있음을 지적했는데 파스칼이 명확하게 구별한 대로 지식과 세계 사이의 야합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보았다.14)
이 같은 이성들 사이의 혼란은 합리적으로 변명될 수 없으며, “혼란은 보편언어une langue universelle, 즉 개별적 언어들les langages partticuliers 속에 확립되어 있는 모든 의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메타언어un metalangue에 대한 지극히 ‘근대적’인 기획에서 기인한다.
이성에 대한 이같은 회의는 과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메타언어에 대한 비판, 즉 형이상학(그리고 또한 메타정치학)의 몰락에서 유래한다.”
그의 말에서 우리는 현재 철학적 사유의 처한 상황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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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상미술 2

 

한편 비시에르는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를 알게 되었을 무렵 입체주의 양식을 터득하여 “인간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입체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작품들은 뛰어난 감수성을 보여주는 탁월한 것이었다. 비시에르는 자연의 표현적인 속성들에서 영감을 얻어 타시즘 양식의 그림을 그린 에콜 드 파리 예술가들 중에서 표현 추상의 아버지라고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그린 그림들은 매우 개성적인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1938년에 은퇴한 뒤 사실상 무명 화가로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쟁 중 녹내장 때문에 정상 시력의 1/3도 안 되게 시력이 저하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태피스트리와 다른 재료들을 이어 붙인 작품을 제작했다. 1948년 수술이 성공하여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에 이르러 그토록 오랜 기간 누리지 못했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비시에르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말기 작품으로 인해 감식력이 보다 뛰어난 소장가들과 미술품 수집가들은 초기 및 중기의 작품들을 재평가하게 되었는데, 그는 머지 않아 그 작품들이 이미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말기 작품보다 더 높이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태피스트리 같은 작품 중 일부에는 상형문자가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의 주된 추상 방식은 자연의 외관을 서정적이고 세심한 구성의 추상 작품으로 표현해내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근원이 되는 것들의 표현적인 특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추상-창조 그룹은 추상 미술의 추구라는 커다란 원칙하에 외견상 매우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가보, 페브스네르, 리시츠키의 구성주의와 몬드리안, 포르뎀베르게-길데바르트, 도멜라의 신조형주의로부터 마넬리, 글레즈 같은 예술가들과 칸딘스키의 표현적 추상까지, 심지어는 아르프의 생물 형태적 추상이나 일부 추상적 초현실주의 등 많은 종류의 비구상 미술을 포괄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과 데 스테일의 지지자들이 강세를 보이면서 점차 표현적 추상이나 서정적 추상보다는 기하적 추상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러시아 화가, 조각가이며 그래픽 예술가 엘 리시츠키El Lissizky(옐리예제르 마르코비치Eliezer Markowich, 1890~1941)는 1909~14년 다름슈타트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모스크바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리시츠키는 입체-미래주의 양식과 루보크lubok라 불리는 농민 목판화 전통이 융합된 양식을 사용하면서 샤갈과 함께 유태교 서적의 삽화를 그렸다. 루보크는 밝게 채색된 러시아 민속 판화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민속 우화나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루보크는 17세기 중반부터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작되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루보크란 용어는 교육받은 계층이 평민 미술에 대해 내린 경멸적인 평가를 함축했다. 그리고 조잡한, 값싼, 단정치 못한, 심미안이 결여된 것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리시츠키는 1919년 비텝스크에서 말레비치를 알게 되었고 러시아 구성주의를 주도하는 예술가의 한 명으로 성장했다. 활자 인쇄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1920년에 직접 저술한 10쪽 분량의 책 <2개의 정사각형 이야기 The Story of Two Squares>를 디자인했는데, 1922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이 책은 현대 인쇄 디자인과 서적 디자인 분야에서 중요한 지표로 간주된다. 1922년 베를린으로 간 그는 일랴 에렌부르크와 함께 <베시치/게겐슈탄트/오브제 Veshch/Gegenstand/Object>란 제목의 구성주의 잡지를 창간했고, 반 두스뷔르흐 및 데 스테일의 일원들과 교류했으며, 한스 리히터, 모홀리-나기와 함께 구성주의 그룹을 창설하고 잡지 <게 G>를 창간했다. <게>는 형성Gestaltung을 의미한다. 리시츠키는 1923~25년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ABC 그룹을 조직하고 같은 명칭의 잡지를 그룹 회원들과 공동으로 발간했다.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추상 예술가였다. 그의 전성기 작품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타틀린과 로트첸코의 구성주의, 그리고 몬드리안의 네덜란드 신조형주의가 성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하노버 공과 대학에서 건축과 조각을 배운 독일 추상화가 프리드리히 포르뎀베르게-길데바르트Friedrich Vordemberge-Gildewart(1899~1962)는 그 대학에서 엘 리시츠키를 알게 되었다. 또한 아르프, 슈비터스, 반 두스뷔르흐와 접촉했으며, 반 두스뷔르흐를 통해 접하게 된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은 포르뎀베르게-길데바르트의 작품 세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나치 독일에서 비재현적 미술이 금지되자 1937년 스위스로 이주했다가 1938년에 네덜란드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국적을 취득했다. 1954년 독일로 돌아왔고 울름 조형 예술 대학의 시각 정보학과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의 목적이 미술과 기술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것임을 밝혔다. 세심하게 계획된 그의 작품은 염격한 환경에서 장식으로서는 세련되지만 사람을 끄는 매력이 결여되어 있고 감정적 호소력이 부족하다. 
암스테르담 태생의 세자르 도멜라 니벤호이스Cesar Domela Nieuwenhuis(1900~92)는 1919년 네덜란드를 떠나 아스코나와 베른에서 자연 풍경을 그리면서 구성주의와 추상 미술을 실험했다. 그 뒤 베를린으로 옮겨 1923년 노벰버그루페Novembergruppe의 전시회에서 비구상 작품을 선보였다. 노벰버그루페는 1918년 11월 베를린에서 결성된 급진적 독일 예술가 그룹으로 진보적인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국민 생활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것이 그들이 공언한 목적이었다. 그룹의 결성을 주도한 사람은 막스 페히슈타인, 세자르 클라인이나 후에 하인리히 캄펜동크, 루돌프 벨링, 에리히 부흐홀츠, 오토 뮐러, 한스 푸르만 등이 가담했다. 도멜라 니벤호이스는 1924~25년 파리에서 반 두스뷔르흐, 몬드리안과 교제하면서 데 스테일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1924년 헤이그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27~33년 베를린에 머물면서 나운 가보의 영향을 받아 여러 다른 재료의 재질과 색채의 대비를 이용하여 몽타주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유명해졌다. 1933년부터 파리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추상-창조 그룹에 가입했다.
피렌체 태생의 알베르토 마넬리Alberto Magnelli(1888~1971)는 1911년경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채 피렌체 미래주의 예술가들과 교제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넬 리가 공식적으로 미래주의 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1913~14년 파리에 머물면서 마티스, 피카소 및 여러 입체주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1915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잠시 동안 밝은 색채의 추상화를 그렸지만 곧 구상적 회화로 전환하여 이탈리아 형이상학적 화파의 영향을 받은 형식화된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1931년 카라라의 대리석 채석장을 방문한 마넬리는 바위덩어리의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 스스로 <깨진 돌>이란 제목을 붙인 추상에 가까운 화화 연작을 제작했다. 1933년 파리로 가서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완전한 추상 회화로 다시 돌아갔다. 실제로 마넬리는 작품 활동 초기에 칸딘스키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앵포르멜이나 표현적 추상 양식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추상 구성은 윤곽선이 뚜렷하게 그려진 기하적, 혹은 그에 가까운 형태들이 구성주의의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구축된 것이었으며 단지 색채만이 극히 표현적이었다. 또한 형태의 윤곽선을 처리한 방식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이에 대해 벨기에 화가, 판화가이며 미술평론가로서 원과 사각형, 추상-창조 등의 그룹 창립에 적극적으로 활약한 미셀 쇠포르Michel Seuphor(1901~99)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마넬리의 발견 중 가장 훌륭한 것 가운데 하나는 투명한 피부 같은 역할을 하는 다색선으로, 이것은 형태를 둘러싸거나 분할하기도 하며, 침투한 영역을 지니고 있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히 그 영역을 변화시킨다.”
프랑스 예술가로는 장 고랭, 오귀스트 에르뱅, 장 엘리옹이 추상-창조 그룹에 참여했다. 생테밀리옹블랭 태생의 장 고랭Jean Gorin(1899~1981)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했다. 1926년 몬드리안을 만나 신조형주의로 전환했으며 최초로 신조형주의 양식의 부조 구성물을 제작했다. 원과 사각형 그룹과 추상-창조 그룹의 일원이었고 추상-창조 그룹의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36년의 연감을 편집했다. 1946년 살롱 데 레알리티 누벨의 창립에 참여했다. 고랭의 작품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에 놓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구성주의 구조물의 유형을 예고했다. 후기 작품에서는 대각선적 형태와 원형을 도입했으나 몬드리안의 수평-수직 양식을 지속했다.
1930년대 파리에서는 모든 종류의 비구상 미술을 적극 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화가들은 두드러진 활약을 나타내지 못했다. 1936년경 몇몇 주요한 구성주의자들이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 뒤 그룹의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다. 1978년 뮌스터에서 과거의 그룹전을 되살린 ‘추상-창조’ 전시회가 열렸고 이는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에서도 잇달아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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