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 다다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다다의 성격과 표현 양태는 그것이 발생한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다다는 전쟁의 야만성에 환멸과 혐오감을 느끼고, 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전통 사회 가치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난 젊은 시인, 작가, 예술가, 음악가들의 운동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우상을 타파하며, 혁명적인 것을 추구했다. 또한 과격하고 도발적인 미래주의 기법을 과장했으며 이를 통해 기존 사회의 기준과 규범을 맹렬히 공격했고, 그들이 보기에 자살 직전에 놓인 문화를 냉소와 풍자로 비웃었다. 다다주의자들은 예술의 전통을 공격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아방가르드 경향까지도 대상으로 삼았으며, 반예술의 풍자적 패러디를 통해 예술의 개념 자체를 타도하려고 했다.
다다의 허무주의적 분규 이면에 내재한 긍정적 목적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일이란 어렵다. 다다가 한창일 때는 긍정적 목적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 되돌아볼 때 다다를 주도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격렬한 운동에는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긍정적 측면도 있었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예를 들어 취리히 다다의 일원으로 화가, 영화제작자 한스 리히터는 1964년 <다다. 예술과 반예술>에서 다다는 단일화된 형식적 특징을 갖고 있지는 않았더라도 새로운 예술 윤리를 가졌으며, 이것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새로운 표현수단을 탄생시켰다고 적었다. 새로운 윤리는 때로는 긍정적 형태를 때로는 부정적 형태를 취했고, 어떤 때는 예술로 어떤 때는 예술을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상당히 도덕적인가 하면 철저하게 비도덕적이었다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무고한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허탈과 절망에 빠지게 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무차별한 살육장으로부터 안전한 중립국 스위스의 취리히로 피신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야만적인 행위와 부조리를 조장한다고 자소하면서 이성 자체에 거세게 반발했는데, 이와 같은 자연발생적 혁명은 따지고 보면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그리고 상징주의 작가들의 우상과도 같았던 알프레드 재리의 작품에 등장한 기괴한 장면과 허세에서 이미 조짐이 나타난 적이 있었고, 데 키리코와 샤갈의 잠재의식의 세계에서 시각적인 환상들로 분출된 적이 있었다. 환상주의 혹은 형이상학의 예술가들로 알려진 데 키리코와 샤갈은 이성이 인간이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사고와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욕망과 꿈을 성취하기를 바랐다. 이와 같은 경향이 파리의 미술계에 널리 알려질 무렵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취리히 다다를 결성한 예술가들 중 한 사람인 독일인 시인이며 음악가 휴고 발은 어린아이들의 자연발생적이고 무책임한 요소를 환영하면서 이런 요소가 새 예술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1916년 일기에 적었다. 다다는 1916년 2월 발이 취리히 슈피겔 가 1번지에 예술 활동의 중심으로 카바레 볼테르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가수 에미 헤닝스(1919~53), 루마니아 시인이며 뒤에 <다다> 지의 편집장을 역임한 트리스탄 차라, 독일 시인 리하르트 휠젠베크(1892~1974)가 그와 함께 했으며, 1916년 말경에는 오스트리아의 허무주의 시인 발터 제르너가 동참했다. 미술가로는 루마니아 출신의 마르첼 잔코, 알사스 출신의 장 아르프, 1922년에는 후에 아르프와 결혼하게 되는 조피 토이버-아르프가, 1917년에는 독일 화가 겸 영화제작자 한스 리히터가 합류했다. 카바레의 포스터는 우크라이나의 미술가 마르셀 슬로트키가 제작했다.
다다란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리히터는 1917년 그룹에 가입했을 때 차라와 잔코가 슬라브어로 이야기하면서 다-다(예, 예)하는 것을 보고, 다다란 용어가 슬라브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휠젠베크는 다다란 용어는 자신과 휴고 발이 독불 사전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어에서 다다dada는 장난감 목마를 의미한다. 발은 “독일인에게 이것은 백치 같은 순진함과 출산에의 집착을 뜻한다”고 했다. 발은 이어서 “우리가 다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고차원적인 문제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허함에서 뽑아낸 어리석은 행위이며 투사의 몸짓이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가지고 시작한 놀이 ... 위선적인 도덕성을 단죄하는 공개처형이다”라고 했다.
취리히로 도피한 예술가들은 정신적으로 새 힘을 얻어 본능에 근거한 예술가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했다. 발은 자신의 볼테르 카바레에 전쟁으로 불만투성인 사람들을 초대하여 용기를 가지고 새 정신으로 무장하는 연합을 결성하자고 종용하면서 “전쟁과 민족주의의 이면에서 상이한 꿈을 가지고 살고 있는 독자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전 세계에 알리자!”고 외쳤다. 그들은 처음이자 유일한 잡지 <카바레 볼테르>를 6월에 간행했다. 서문에서 발은 다다란 말을 사용했고 다다란 용어가 프린트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잡지에는 아폴리네르, 아르프, 발의 여자친구 에미 헤닝스, 잔코, 칸딘스키, 마리네티, 휠젠베크, 모딜리아니, 피카소, 데 키리코, 에른스트, 피카비아, 마르크, 코코슈카, 그리고 차라의 글과 그림이 실렸다. 이 잡지는 1916년 11월에 뉴욕에 도착했으며, 데 자야는 11월 16일 차라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난 이제 막 9월 30일자로 쓴 자네의 편지와 10권의 흥미 있는 다다 간행물을 받았네. ... 그것들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네. 뉴욕의 서점에서 자네의 간행물을 팔 수 있도록 알아봐야겠네.” 차라는 다다 그룹의 미학적 대변이었고, 7월에 <미스터 소화기의 첫 하늘 모험>을 출판했으며, 컬러 목판화를 잔코가 제작했다. 차라는 저서에서 다다를 정의했다.
“다다는 우리의 맹렬함이다. 다다는 독일 아기의 수마트라인 머리를 이치에 맞지 않는 총검들로 장치한다. 다다는 양탄자 슬리퍼나 유사한 물건들이 없는 인생이다. 다다는 통일 원하면서도 또한 통일에 적대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분명히 적대한다. ... 다다는 훈련이나 도덕이 없는 가혹한 요구이며, 우리는 인간성에 침을 뱉는다.”
취리히에서 다다 잡지가 발행될 무렵 솜메에서 7월 1일에 벌어진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에서 6만여 명의 영국인이 생명을 잃었는데, 이는 하루에 발생한 사상자로는 가장 많은 수였다. 영국 군대는 처음으로 탱크를 사용하여 독일 군대와 힘을 겨루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치열할 때 차라는 저서에 “우리는 요구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색으로 오줌 눌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고 적었다. 취리히에 모인 예술가들은 원시주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미술의 가장 초보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아르프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915년 취리히에서는 세계대전의 도살장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모여 순수미술을 추구했다. 멀리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우렁찼으나 우리는 풀로 붙이고, 시를 지으며 낭독하면서 모든 혼으로 노래했다. 우리는 기본미술을 찾았으며, 그것이 우리가 처한 참혹한 상황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새로운 조직으로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기를 동경했다. 그러나 이런 미술은 차츰 비난의 목표물이 되었다. ‘산적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첫 다다의 밤을 1916년 7월 14일 볼테르 카바레에서 열면서 음악, 춤, 이론, 선언문, 시, 그림 등이 있는 가면무도회를 성대히 벌였다. 발의 피아노 반주에 맞춘 에미 헤닝스의 노래, 발의 스크리아빈과 바레즈의 음악연주, 미래주의자 루솔로의 소음음악과 유사한 소음음악을 반주로 한 시 낭송, 드럼을 사용한 흑인 리듬 음악의 즉흥적 연주, 청중에게 충격을 주는 여러 소소한 해프닝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뒤에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요 특징이 되는 자동주의 시와 집단 작곡 등의 실험이 행해졌다. 발은 추상적 혹은 음성적인 측면만을 고려한 시를 써서 어리둥절해하는 청중을 향해 낭독했다. 그들은 잔코가 준비한 옷을 입고 입체주의의 춤을 추었으며, 아프리카의 음악을 들으며 새로운 미학을 주장하면서 모처럼 광란의 밤을 보냈다. 잔코는 그날의 모습을 <카바레 볼테르>(뒤샹 139)란 제목으로 그렸다. 그들은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선언문에 나타난 과격한 언어의 구사와 소란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임에서 의장을 선출하고서는 의장을 무시하거나 격하하는 언행을 즐겼는데, 그들의 허무주의는 좀더 사회비평주의에 가까웠으며, 완전히 새로운 미술과 시를 창조하려고 했다.
아르프는 ‘잘라낸 조각 그림’을 위한 밑그림에, 잔코는 석고와 철사를 사용한 구성물에 우연의 요소를 도입했다. 리히터는 아르프가 만족스럽지 않은 밑그림을 어떻게 찢어서 그 조각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는가를 묘사했다. 아르프는 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이 만드는 우연한 형태가 자신이 원한 대로 하나의 표현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그대로 맞추어 붙였다. 차라는 이 기법을 문학에 적용하여 신문에서 오려낸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붙여 우연 시를 만들었다. 차라는 1917~20년 <다다> 지의 편집을 맡았다.
차라는 1916년 7월 14일 ‘안티피린 씨의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다다는 허약한 유럽 내에 국한되어 있다. 아무튼 똥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우리가 예술동물원을 모든 영사관에 걸려 있는 국기들로 장식하기 위해 온갖 색이 있는 똥을 볼 것이다.”
차라는 그때 겨우 스무 살에 불과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스위스로 유학 왔으나 시에 심취하여 온 정열을 시에 쏟았다. 예술가들은 차라를 좋아했다. 그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실내에서 말도 되지 않는 언어들을 연결시켜 시라고 낭독하곤 했고,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전략상의 방법을 받아들여 혹평과 독설을 일삼았다. 신문에서 닥치는 대로 글을 모아 시라고 주장하는 이런 ‘우발적인 시’는 아르프의 자동주의 콜라주와 같았다. 아르프는 1916~17년에 많은 콜라주 작품을 제작했는데 사각모양의 종이들을 높은 데서 떨어뜨린 후 풀로 붙여서 <우연의 법칙에 의한 배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다다에 대한 아르프의 이해는 취리히의 다다뿐만 아니라 뉴욕과 베를린의 다다를 이해하는 데도 적절한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다의 목적은 인간의 이성적인 오류를 분쇄하는 것이며, 자연스럽고 비이성적인 체계를 재건하는 것이다. 다다는 오늘 날 인간의 논리적인 얼토당토아니한 것들을 비논리적인 얼토당토아니한 것들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큰 북소리로 행진하는 우리 다다의 의지이고, 비이성을 찬양하는 트럼펫 소리이다. ... 다다는 무감각함이 자연과도 같다. 다다는 미술을 대적하며 자연을 따른다. 다다는 자연처럼 직접적이다. 다다는 무한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