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廣大
우리말에 남자 무당을 광대廣大라고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광대란 ‘풍족하다’란 뜻으로 의식이 광대하다고 말하면 입을 것과 먹을 것이 풍족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광대가 남자 무당을 지칭한 말이 된 것은 무당의 직이 의식을 광대하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광대廣大는 가면을 뜻하는 말이 되었으며, 가면극假面劇 연희자演戱者를 가리키는 말에서 더 나아가 일반 연희자로까지 의미가 확대되어 춤과 노래를 하는 배우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었습니다.
무당이 춤과 노래로 신을 즐겁게 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기 때문에 배우의 기예와 통하는 것입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에서 가면을 쓰고 놀이를 하는 사람을 광대라고 했습니다.
남자 무당을 광대라 한 것을 정다산丁茶山(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다산(다산은 정약용의 호)은 『목민심서』 「호전육조戶典六條」 세법(상)에서 “광대가 봄과 여름에는 고기잡이를 따라 어촌으로 몰려들고, 가을과 겨울에는 추수를 노려 농촌으로 몰렸다”고 했습니다.
『목민심서』는 지방관地方官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면서 논한 책입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지은 『잡동산이雜同散異』 「인물품人物品」에 “창우倡優는 일명 원관顐官이라고도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인물품人物品」은 잡기류 저술이며, 원관顐官이란 농담을 전문으로 하는 관리를 말합니다.
해신원관諧臣顐官이라고 하면 해학諧謔을 잘하는 신하, 농담을 전문으로 하는 관리란 의미입니다.
왕의 표정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뜻에서 해신희관諧臣戱官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말에 남자 무당을 재인이라고 하는데, 재주와 기술을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1785년(정조 9년)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재인才人과 백정白丁을 같은 항목에 수록했으며, 이를 줄여 재백정才白丁이라 했습니다.
조선 명조 때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은 박학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나, 서자 출신이기 때문에 현달顯達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말했습니다.
“세상에 전하기를 관청에서 무당에게 세포稅布를 너무 과중하게 징수했으므로, 매번 관원이 문에 이르러 큰소리로 외치며 들이닥치면 온 집안이 쩔쩔매고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면서 납부 기한을 늦추어달라고 애걸한다. 이런 일이 하루걸러 혹은 날마다 계속되어 그 괴로움과 폐해가 헤아릴 수 없었다. 설이 되었을 때 광대들이 이 놀이를 대궐 뜰에서 상연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명을 내려 세금을 면제하도록 했다고 하니, 우인優人들 또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된다 하겠다. 지금도 여전히 우인들이 그 놀이를 공연하는 것은 이러한 고사 때문이다.”
세포稅布는 세금으로 거두는 베를 말하고, 우인優人이란 재인才人을 말합니다.
무당들은 징세徵稅의 괴로움을 연극演劇으로 연출했으며, 가정생활상의 비극을 소재로 한 자연스런 각본을 토대로 진실한 경지를 연출했으므로 군주君主의 마음을 움직여 세금을 면제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옛날에는 나희儺戱 혹은 나례儺禮라고도 하는 산대희山臺戱가 있어 외국 사신使臣의 관람용으로 제공되었으며, 대체로 추악한 가면을 쓰고 공연했습니다.
나례儺禮는 민가와 궁중에서 음력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마귀魔鬼와 사신邪神을 쫓아내기 위해 베푼 의식으로 중국에서 비롯했습니다.
가면극假面劇은 신라에서 시작되었으며 향악鄕樂을 말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수록된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는 황금색의 방상씨方相氏 가면을 쓰고 귀신을 쫓는 모습을 가리켜서 서역西域에서 들어온 듯한 곡예와 춤인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 등의 연기 광경을 읊고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금환金丸은 신라 오기五伎의 하나로 금칠을 한 방울을 여러 개 받고 굴리는 놀이입니다.
월전月顚은 신라 오기五伎의 하나로 서역西域 우전국于闐國에서 전해진 노래와 춤이 결부된 해학희諧謔戱입니다.
대면大面은 신라 오기五伎의 하나로 황금빛 탈을 쓰고 구슬 달린 채찍을 잡고 귀신 쫓는 시늉을 하며 추는 춤입니다.
속독束毒은 신라 오기五伎의 하나이며, 서역 계통의 탈춤으로 남색 탈을 쓰고 북소리에 맞춰 떼를 지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추는 춤입니다.
산예狻猊는 신라 오기五伎의 하나이며, 사자탈을 쓰고 연출하는 연극입니다.
「향악잡영鄕樂雜詠」에는 처용무處容舞도 언급되는데, 다섯 사람이 각각 황, 청, 홍, 백, 흑색의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처용무는 섣달그믐날 궁중의 나례의식儺禮儀式에서 공연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대나의大儺儀에서 가면이 사용되었으며, 이것이 후일 산대희가 되었습니다.
대나의를 조선 때 천문, 지리, 역수, 물시계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관상감觀象監에서 주관했습니다.
궁중에서 구나驅儺를 할 때 주문을 외우는 붉은 옷을 입고 탈을 쓴 창수가 주문을 외면서 십이신十二神을 쫓아내면 아이 초라니는 머리를 조아려 복죄伏罪하고 여러 사람은 소리를 쳐서 각 방위方位에 따라 악귀惡鬼를 사문四門 밖으로 몰아내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산대희山臺戱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연극으로 도감都監을 설치해 그 일을 주관했으며 그것을 칭하여 산대도감山臺都監이라 했는데, 도감이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맡아보게 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부官府를 말합니다.
산대도감은 산대놀음을 하는 사람들의 단체이며 산디도감이 원말입니다.
산대도감의 유속遺俗이 잔존하고 있으며, 양주楊洲의 고읍古邑이 산대도감의 본고장입니다.
국가의 공적인 연희로서의 산대희가 쇠퇴함에 따라 연희자들이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각지에서 산대놀이가 행해진 것입니다.
이중 서울 변두리의 애오개, 녹번에서 전승되던 것을 본산대라 하고 이를 본받은 것을 별산대라 하는데, 별산대놀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양주변산대놀입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과거 양주의 중심지였던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서 전승되는 가면극으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조롱, 서민생활의 애환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여주는 춤과 기예가 매우 조잡해 보고 듣는 것이 괴로울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