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노는 자연을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로 보고



피치노는 자연을 미 혹은 선의 작품으로 보고 선과 자연이 일치하는 데 사람의 영혼이 매개적 존재로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는 르네상스를 특징짓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의 철학적 표명이기도 하다.
영혼이 매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플라톤이 전한 소크라테스의 말로 하면 육체는 땅에서 왔지만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영혼이 신성을 지녔으므로 불멸성을 마땅히 지니게 되며 인간의 존엄성 또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치노는 자연을 형상과 질료의 결합체로 보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영혼Spiritus mundanus의 매개를 통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질료는 형상을 결여할 뿐만 아니라 생명도 없는 비존재에 불과하다.
질료가 형태와 운동 그리고 존재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은 형상을 입을 때인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영혼이다.
영혼은 영원을 좇으면서 동시에 일시적인 질료를 정신화하고 고양시킨다.
이는 불과 물 사이를 매개하면서 불을 열에너지로 변화시키고 물을 수분으로 증발시키는 공기에 비길 만하다.

피치노는 영혼의 불멸을 사람의 인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로 보았고, 플라톤의 에로스 개념을 가톨릭의 자비나 사랑charitas과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하여 심리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가 융합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플라톤적 사랑Amor Platonicus이라는 말을 만들어 플라톤이 묘사한 정신적인 사랑 혹은 그 자신이 말하는 신적인 사랑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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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질문에 관해서는 금시초문입니다.
 

반 고흐에게 시력의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군요.
생각해봐도 시각적 문제가 그에게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의 특징으로 볼 때 시각적 문제가 있었다면 눈에 띄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은 그의 작품의 특징입니다.
참고하세요.
반 고흐는 1880년부터 자살한 1890년까지 10년 동안 그림을 그렸습니다.
1885년에 그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걸작으로 본다면 첫 5년은 습작을 한 기간이고 나머지 5년은 제대로 된 작품을 그린 기간입니다.
그가 10년 동안 그린 그림은 모두 879점이지만 동생 테오Theo에게 보낸 편지에도 드로잉을 수없이 했으니 668통의 편지도 문장으로 봐도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1547점이라고 해야겠지요.
10년 동안의 작업치고는 엄청난 양입니다.
그의 서한집을 읽도록 하세요.
서한집을 꼼꼼히 읽는다면 그에 관해 쓴 많은 사람들을 '반 고흐 일대기'는 읽지 않아도 되고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편지에 적혀 있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자신이 언제 스케치하고 언제 유화로 완성했으며 어디서 어떻게 왜 그렸다는 내용을 글로 드로잉으로 전했습니다.
편지를 읽으면 반 고흐의 감성이 얼마나 섬세하고 그림에 대해서 얼마나 정교하게 묘사했는지 놀랄 정도입니다.
오히려 작품이 그가 말한 대로 정교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879점의 작품에 대한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고 우선 장르별로 구분한다면,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자화상, 그리고 자신의 삶이 있는 실내장면 등입니다.
정물과 풍경은 그가 그리고 싶을 때 자유롭게 그린 것들이고,
인물화는 돈 주고 모델을 사서 그린 것들이 아니라 가까운 이웃의 초상화들로 내성적인 그가 그린 인물들이라면 그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우체부, 친구, 술집마담, 농부 등입니다.
자화상은 거울만 있으면 그릴 수 있는 것으로 그는 모두 35점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삶의 실내장면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들로 카페, 침실, 정신병동 등입니다.
회화적 특징으로 말하자면,
태양의 빛남을 레몬빛 노란색으로 표현한 점, 들라크루아의 종교화에서 영향을 받아 대비채색법을 사용한 점,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현대화한 씨 뿌리는 사람으로 변형시키면서 때로는 씨 뿌릴 시기가 아닌 데도 막 추수가 끝난 밭에 씨 뿌리는 사람을 삽입한 것 등인데 이는 표현을 위해서라면 사실을 무시할 수 있다는 용맹스러운 그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학적 특징을 말하라면,
반 그흐 자신이 말한 대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반 고흐는 이런 정신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자신과 폴 고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화가로서 반 고흐의 눈이 창조적으로 열린 것은 그가 프랑스 남쪽 아를에 가서부터였습니다.
그는 아를을 '빛의 왕국'으로 묘사했는데 빛이 충만한 그 지역에서 그는 영롱한 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네덜란드에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화가에게 주어지는 축복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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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빈센트 반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했나. 
 

 

빈센트 반 고흐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7년 동안의 아트 딜러의 생활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접고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 입시시험 준비에 열심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명석하지 못해 시험을 치룰 자격을 얻지 못햇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신도로서 할 수 있는 전도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교본부가 정한 일정한 교육만 받으면 되었지요.
그는 전도자가 되어 벨기에인들의 탄광으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되기에는 그의 성격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럴 필요도 없는데 자신의 몸을 혹사했습니다.
열정이 과해서 자신의 몸을 여윈 모습이 되도록 혹사하자 동생 테오는 물론 선교본부에서도 그가 전도자로 접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목사도 전도자도 될 수 없게 되었지요.
그때 반 고흐는 렘브란트의 성화를 봤습니다.
그는 그림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전도자-화가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을 헌신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살겠다는 고상한 생각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반 고흐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자, 문제는 그의 성격입니다.
그는 본래 순진하고 감성이 섬세하며 남에게 동정심이 많았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일단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열정적으로 끝까지 지속하면서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융통성이 없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약아빠지지 않아서 입니다.
그러나 그의 주변 사람들은 이런 반 고흐가 부담이 되었습니다.
지나치게 격정을 갖고 대하니까 부담스러운 거지요.
특히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폴 고갱에게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자유를 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반 고흐는 사람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것으로 보여지고 실재로 그렇게 느껴지게 됩니다.
반 고흐에게 가까운 친구가 없었던 것은 이런 부담 때문이었지요.
그를 이해한 유일한 사람은 네 살 어린 그의 동생 테오뿐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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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廣大


우리말에 남자 무당을 광대廣大라고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광대란 ‘풍족하다’란 뜻으로 의식이 광대하다고 말하면 입을 것과 먹을 것이 풍족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광대가 남자 무당을 지칭한 말이 된 것은 무당의 직이 의식을 광대하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광대廣大는 가면을 뜻하는 말이 되었으며, 가면극假面劇 연희자演戱者를 가리키는 말에서 더 나아가 일반 연희자로까지 의미가 확대되어 춤과 노래를 하는 배우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었습니다.
무당이 춤과 노래로 신을 즐겁게 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기 때문에 배우의 기예와 통하는 것입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에서 가면을 쓰고 놀이를 하는 사람을 광대라고 했습니다.
남자 무당을 광대라 한 것을 정다산丁茶山(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다산(다산은 정약용의 호)은 『목민심서』 「호전육조戶典六條」 세법(상)에서 “광대가 봄과 여름에는 고기잡이를 따라 어촌으로 몰려들고, 가을과 겨울에는 추수를 노려 농촌으로 몰렸다”고 했습니다.
『목민심서』는 지방관地方官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면서 논한 책입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지은 『잡동산이雜同散異』 「인물품人物品」에 “창우倡優는 일명 원관顐官이라고도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인물품人物品」은 잡기류 저술이며, 원관顐官이란 농담을 전문으로 하는 관리를 말합니다.
해신원관諧臣顐官이라고 하면 해학諧謔을 잘하는 신하, 농담을 전문으로 하는 관리란 의미입니다.
왕의 표정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뜻에서 해신희관諧臣戱官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말에 남자 무당을 재인이라고 하는데, 재주와 기술을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1785년(정조 9년)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재인才人과 백정白丁을 같은 항목에 수록했으며, 이를 줄여 재백정才白丁이라 했습니다.
조선 명조 때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은 박학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나, 서자 출신이기 때문에 현달顯達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말했습니다.
“세상에 전하기를 관청에서 무당에게 세포稅布를 너무 과중하게 징수했으므로, 매번 관원이 문에 이르러 큰소리로 외치며 들이닥치면 온 집안이 쩔쩔매고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면서 납부 기한을 늦추어달라고 애걸한다. 이런 일이 하루걸러 혹은 날마다 계속되어 그 괴로움과 폐해가 헤아릴 수 없었다. 설이 되었을 때 광대들이 이 놀이를 대궐 뜰에서 상연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명을 내려 세금을 면제하도록 했다고 하니, 우인優人들 또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된다 하겠다. 지금도 여전히 우인들이 그 놀이를 공연하는 것은 이러한 고사 때문이다.”
세포稅布는 세금으로 거두는 베를 말하고, 우인優人이란 재인才人을 말합니다.
무당들은 징세徵稅의 괴로움을 연극演劇으로 연출했으며, 가정생활상의 비극을 소재로 한 자연스런 각본을 토대로 진실한 경지를 연출했으므로 군주君主의 마음을 움직여 세금을 면제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옛날에는 나희儺戱 혹은 나례儺禮라고도 하는 산대희山臺戱가 있어 외국 사신使臣의 관람용으로 제공되었으며, 대체로 추악한 가면을 쓰고 공연했습니다.
나례儺禮는 민가와 궁중에서 음력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마귀魔鬼와 사신邪神을 쫓아내기 위해 베푼 의식으로 중국에서 비롯했습니다.
가면극假面劇은 신라에서 시작되었으며 향악鄕樂을 말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수록된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는 황금색의 방상씨方相氏 가면을 쓰고 귀신을 쫓는 모습을 가리켜서 서역西域에서 들어온 듯한 곡예와 춤인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 등의 연기 광경을 읊고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금환金丸은 신라 오기五伎의 하나로 금칠을 한 방울을 여러 개 받고 굴리는 놀이입니다.
월전月顚은 신라 오기五伎의 하나로 서역西域 우전국于國에서 전해진 노래와 춤이 결부된 해학희諧謔戱입니다.
대면大面은 신라 오기五伎의 하나로 황금빛 탈을 쓰고 구슬 달린 채찍을 잡고 귀신 쫓는 시늉을 하며 추는 춤입니다.
속독束毒은 신라 오기五伎의 하나이며, 서역 계통의 탈춤으로 남색 탈을 쓰고 북소리에 맞춰 떼를 지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추는 춤입니다.
산예狻猊는 신라 오기五伎의 하나이며, 사자탈을 쓰고 연출하는 연극입니다.
「향악잡영鄕樂雜詠」에는 처용무處容舞도 언급되는데, 다섯 사람이 각각 황, 청, 홍, 백, 흑색의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처용무는 섣달그믐날 궁중의 나례의식儺禮儀式에서 공연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대나의大儺儀에서 가면이 사용되었으며, 이것이 후일 산대희가 되었습니다.
대나의를 조선 때 천문, 지리, 역수, 물시계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관상감觀象監에서 주관했습니다.
궁중에서 구나驅儺를 할 때 주문을 외우는 붉은 옷을 입고 탈을 쓴 창수가 주문을 외면서 십이신十二神을 쫓아내면 아이 초라니는 머리를 조아려 복죄伏罪하고 여러 사람은 소리를 쳐서 각 방위方位에 따라 악귀惡鬼를 사문四門 밖으로 몰아내는 내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산대희山臺戱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연극으로 도감都監을 설치해 그 일을 주관했으며 그것을 칭하여 산대도감山臺都監이라 했는데, 도감이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맡아보게 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부官府를 말합니다.
산대도감은 산대놀음을 하는 사람들의 단체이며 산디도감이 원말입니다.
산대도감의 유속遺俗이 잔존하고 있으며, 양주楊洲의 고읍古邑이 산대도감의 본고장입니다.
국가의 공적인 연희로서의 산대희가 쇠퇴함에 따라 연희자들이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각지에서 산대놀이가 행해진 것입니다.
이중 서울 변두리의 애오개, 녹번에서 전승되던 것을 본산대라 하고 이를 본받은 것을 별산대라 하는데, 별산대놀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양주변산대놀입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과거 양주의 중심지였던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서 전승되는 가면극으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조롱, 서민생활의 애환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여주는 춤과 기예가 매우 조잡해 보고 듣는 것이 괴로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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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노는 영혼이야말로 신이 창조한


피치노는 영혼이야말로 신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 진정한 매개체로서 상위의 존재들과 하위의 존재들 사이 중간에 있고 상위와 하위의 일부 속성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언급한 대로 에로스 혹은 사랑을 모든 사물을 한 데 묶는 행위적인 힘으로 받아들인 그는 인간의 영혼이 그것의 사고와 사랑을 상위의 사물들로부터 하위의 사물들에 이르기까지 만물에 확장한다고 주장했는데 영혼은 정녕 만물의 중심이었다.

자연의 모든 경이로운 사건들 중 영혼이 가장 위대한 점은 만물을 혼용하고, 만물의 중심이며, 만물의 힘들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적 체험을 중시한 그의 사상은 16세기에 매우 영향력이 컸다.
그의 사상은 네오플라톤주의뿐 아니라 중세의 신비사상과도 더러 관련이 있다.
사유를 통해 영혼이 더욱 심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그는 사유의 삶이 영혼으로 하여금 항상 더 고상한 수준의 진리와 존재로 상승하게 하며, 종국에는 일시적으로 신의 비전과 지식 안에서 절정에 달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의 상승이란 신비주의에서 절대존재와 일체를 이루는 것과 다르지 않다.
플로티노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런 최상의 체험은 현세에서 가능하며 최소한 소수 특별한 자들에게 일어난다고 했는데 자신도 그런 체험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신을 향한 영혼의 상승은 두 가지의 도움으로 달성되는데 지성과 의지이다.
신에 대한 지식은 신에 대한 에로스를 수반하고 궁극적인 비전은 즐거움의 행위를 수반한다.
그는 『플라톤의 신학, 영혼들의 불멸성에 관하여』 대부분을 영혼의 불멸에 관해 논했는데 영혼의 불멸에 대한 옹호의 논증을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의 사상에서 빌려왔다.

그의 논증은 당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한 인문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영혼의 불멸에 대한 사상은 당대 예술가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쳐 육체의 아름다운 표현을 통해 불멸하는 신의 광휘를 갈구하게 했다.
특히 르네상스 전성기의 미켈란젤로에게 이는 예술적 신념이 되었으며 그로 하여금 그 같은 정신을 작품에 구현하게 했다.
신의 광휘란 윤회를 통해 만물이 신과 결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신에 대한 개념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가톨릭의 영향으로 신을 인격체로서의 창조주 그리고 분노를 통해 인류를 심판하는 최후의 심판자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런 개념만을 신에 적용하면 그리스인을 통해 사고된 이데아 혹은 형상이 가톨릭 신학과 한데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잘못 이해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데아 혹은 형상의 의미는 영원이다.
가톨릭 신학자들이 여기에 Being이란 말을 접속시켜서 자신들이 원하는 영원한 존재자의 뜻으로 개념화했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혹은 형상은 영원 외에도 미와 선을 의미하며, 이데아가 자연을 주재한다는 말에서는 힘이란 뜻도 된다.
피치노가 말한 신 혹은 형상을 미 혹은 선이란 말로 바꾸어 사용한다면 미술과 관련해서 더욱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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