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반 고흐에 관해선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고갱에 관해선 별로 이야기가 없었지요?
아쉬운 부분입니다.
고갱에 관해 몇 꼭지 올려서 발란스를 맞추지요.

1890년대를 미술사학자들은 부르기 편하게 후기인상주의라고 합니다.
후기post는 단지 after란 뜻으로 후기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종료를 알리는 것 외에 특별한 말은 아닙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 이후라는 것 외에 별로 그 의미가 없듯이 말이지요.

후기인상주의에서 반 고흐와 고갱의 미학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두 사람이 우정이 두터웠고 함께 아를에서 작업했기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을 상징주의로 분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말했지만 반 고흐의 경우 성경책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상징했다던가, 자신이 즐겨 앉던 의자와 고갱이 즐겨 앉던 의자를 그려서 두 사람을 상징했다던가 등등 말입니다.
고갱이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잔에 비유했다는 건 어제 이야기했지요?
그것도 상징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상징주의는 원래 문학의 경향으로 1886년 상징주의 작가들이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다음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종교, 도덕, 정의는 이제 종말에 와 있다.
노이로제, 히스테리, 최면술, 마약중독, 학문적 야바위행위 등은 모두 사회적 진화의 증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증세가 처음 언어로 나타났다.
달라진 요구사항들은 새롭고 다양하며 미묘한 아이디어들로 해소되었다.
이 점을 미뤄보더라도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의 다양함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퇴폐주의 시대에 살면서 반 고흐와 고갱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다양함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노이로제란 말이 유행어처럼 사용되었고 많은 사람이 문명의 질주에 적응하지 못해 신경과민을 일으켰으며 병적 증세를 나타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빠르게 질주하는 컴퓨터 문화가 정신없게 만들고 많은 네티즌의 글에서 노이로제 증상을 봅니다.

여하튼
이런 노이로제로부터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반 고흐는 리처드 바그너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면 강렬한 색을 사용할 수 있으며 정신적으로 안정과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그는 회화를 음악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관람자들이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화가는 현대인이 겪는 노이로제 증세를 치료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이는 반 고흐의 미학적 특징이자 고갱에게도 적용됩니다.
반 고흐는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답니다.

오, 나의 다정한 친구, 미학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건 베를리오즈와 바그너가 작곡한 음악과도 같아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네.
자네와 나 그리고 몇몇 사람이 이 점을 알 뿐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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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미술학교


현재 동경 예술 대학의 전신인 동경미술학교 교수 미국인 어네스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1853~1908)는 1882년에 ‘미술진설美術眞說’이란 주제로 강연했는데
일본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전통적인 일본 미술의 우위를 이론적으로 해석한 서양인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고심원高古深遠의 미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버리고 분별없이 외국의 풍조를 모방하는 건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든다.
한 나라의 문화는 과거의 역사를 기틀로 해서 건설되어야만 한다."
그의 ‘미술진실’은 통속적 관념론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 화가들의 정신과 실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전통 일본화와 사실주의 서양화와 비교하여 일본화 혹은 동양화의 우월을 주장한 것은 당시 일본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페놀로사는 미국 메사추세스 주의 세람 시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878년 일본에 와 동경대학에서 정치학·사회학·철학·경제학을 가르쳤다.
페놀로사는 1881년부터 심미학을 강의했는데 일본에서 최초로 미학을 강의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2년 후 中江兆民과 野村泰亨이 프랑스의 우제뉴 베론의 저서를 번역하여 『유씨미학維氏美學』으로 출판하면서 미학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페놀로사는 미술사는 강의하지 않았다.
페놀로사는 일본 미술에 관심을 갖고 수집과 연구에 주력했는데 『고화비고古畵備考』가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미술진설’ 강연에서 “일본화에 비해 유화는 사진처럼 실물을 묘사한다”면서 이는 ‘자연 실물에 대한 모사가 미술의 근본을 이룬다’는 인식은
곧 ‘진정한 미술’로부터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화는 ‘묘상妙想idea’을 잘 담아내고 있음에 비해 “유화는 거의 대부분 이 묘상을 결여한다”고 했다.
그의 강연은 열세에 몰려 있던 일본 전통 화가들에게 소생할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서양화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작업이 역사에 뿌리를 내린 미술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가 안겨졌다.
이 무렵 서양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서양화가들이 자신들의 존립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880년 4월과 8월 사이에 간행된 『와유석진臥游席珍』은 다카하시 유이치가 아들 다카하시 겐키치를 편집주간으로 하여 출간한 월간 미술잡지였으며
이 잡지를 통해 처음으로 화화和畵(일본 그림), 한화漢畵와 함께 서양화의 기원, 역사, 기법, 화가의 일대기 등이 소개되었다.
매우 간단한 서술이기는 했지만 통사로서 이집트, 앗시리아, 그리스, 로마 미술을 다뤘으며,
중세를 문화적 암흑시대로 보아 13세기의 이탈리아 화가 치마부에Cimabue(1240?~1302)를 언급한 후 다시금 그리스가 주목받게 되는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음을 언급했다.
또한 플랑드르 유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에 의해서 완성되었으며,
라파엘로Sanzio Raffaello(1483~1520), 티치아노, 카르라치 등에 의해 이탈리아 회화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 시대가 되어 훌륭한 화가들이 배출되었으며, 영국에서 초상화가 발달했다는 등의 내용을 다뤘다.
화가전으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 등의 경력과 함께 사진을 실었다.
그 외에도 나폴레옹이 회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일화와 함께 그의 총애를 받은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에 관한 내용을 그의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르네상스
르네상스Renaissance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지적 운동 전체를 말한다.
재생rebirth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rinascita에서 비롯한 르네상스라는 말의 어원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처음 고전 학문의 부흥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여러 예술의 부흥에도 적용되었는데,
이 부흥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1511~74)의 유명한 저서 『이탈리아의 뛰어난 건축가, 화가, 조각가의 생애 Le Vite de piu eccellenti architectti, pittori, et scultori italiani』(1550)로 약칭 『미술가 열전』이라고 한다.
바사리는 조토에서 미켈란젤로에 이르는 이탈리아의 미술사를 연속적인 발전으로 보고 이를 생물의 유기적 성장에 비유했다.
이런 그의 견해는 근대 이전의 미술사관을 지배했다.
이 용어의 의미가 한 시대 전체로 확대된 것은 18세기로 역사가 쥘 미슐레는 1855년에 프랑스 역사의 한 시기를 ‘라 르네상스 La Renaissance’로 부르면서 일번적으로 통용되었다.
이미 러스킨은 『베네치아의 돌 Stones of Venice』(1851~53)에서 ‘르네상스 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1860년에 스위스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 문화’를 하나의 유기적인 존재로 기술했다.
그에게 있어 ‘세계와 인간의 발견’은 고전 문예의 부흥리라기보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새로운 고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와유석진』 제3호 ‘서양화 부문’의 연혁 서술 부분에서는 미술을 육성하고 보호하며 존중하는 것은 “문명이 도래한 개화 시기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품위 있고 또한 정신적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으로서
즉, 미술이 사회상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런 논설은 2년 전에 출간된 니시 아마네의 『미묘학설』에 나타난 견해와 거의 일치한다.
『와유석진』에 실린 서양미술에 관한 내용은 서양화가 단순히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다 수준 높은 미술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씌여진 것이다.
서양 미술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지만 일본 전통회화를 고수하려는 대세에 의해 부진한 상태였다.
1889년 공부 미술 학교에서 수학한 몇 사람을 중심으로 ‘명치 미술회’라는 단체가 결성되면서부터 서양 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양 미술은 여전히 이단아 취급을 받고 있었다.
같은 해에 관립인 동경 미술 학교(오늘 날 동경 예술 대학 미술학부)가 설립되었지만 서양화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 미술사 과목이 개설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개교한 해인 1889년 9월 11일부터 이듬해 7월 10일까지 ‘미학과 미술사’ 과목을 어네스트 페놀로사가 담당했으며 그의 강의를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1862~1913)이 통역했다.
페놀로사는 일본에서 최초로 동경 대학에서 미학을 강의하고 동경 미술 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 미술,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코로, 밀레, 휘슬러, 인상주의 등에 관해 강의했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미학이었고,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명제 하에 테인Hippolyte Taine, 러스킨John Ruskin 등의 이론을 자신의 비평을 첨가해서 가르쳤으므로 역사적 관점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시켰다.
그의 의도는 일본 미술을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품위 있는 일본 미술이 서양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미학
미학이란 쉽게 말해서 미와 예술에 관한 이론적 고찰이다.
그러나 미학이 하나의 학과로 대학에서 다뤄진 것은 18세기 중엽 독일에서였다.
이는 예술에 대한 개념이 르네상스 시기에 사고되기 시작하여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성숙되었고 미학 또한 이 시기에 겨우 성립되었다.
프랑스의 봐뙤C. Batteaux(1713~80)의 『예술론』(1746)의 서문 ‘같은 원리로 환원된 여러 예술’에 나타난 대로,
예술가의 활동이 점차 직인의 손작업과 구별되는 데
이어서 시와 음악, 회화, 조각 등의 여러 예술이 결국 자연모방을 원리로 하여 실용성보다는 즐거움을 목표로 하는 미적 예술beaux-arts(schone Kanste)로서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예술이 고유의 논리에 기초한 자율적 세계라는 것이 이론적으로 명백해진 것은 18세기 중엽에서 말엽 사이였다.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합리주의 입장에 서서 라이프니츠-볼프 학파의 철학자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1714~62)의 『미학 Aesthetica』(1권은 1750년, 2권은 1758년에 출간)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시가 명료·판명의 개념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므로 논리학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감각적·미적 인식을 이성과 유사한 여러 능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
그러한 하급 인식능력에 의한 ‘감성적 인식학’으로서 미학이라는 철학의 새로운 부분을 열게 되었다.
그러므로 미학이 성립되던 당시 그 명칭이 의미하는 대로 미학Aesthetica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감각, 지각이란 뜻이며,
이성적 인식의 여러 법칙을 다루는 논리학에 대해 감성적 인식의 논리학, 즉 감성학 또는 감성론이었다.
이성적 인식이 명료·판명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추상에 기초한 것임에 반해,
감성적 인식의 장소는 대상을 그 자체가 나타내는 대로 생생하게 포착하는 데 있다.
바움가르텐은 그처럼 감성적 인식의 확실함을 보증함으로써 완전성을 높여,
“미학의 목표는 감성적 인식 그 자체의 완전성, 즉 미에 있다”고 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1790)의 전반 ‘미적 판단력 비판’에서 취미와 천재를 중심으로 미와 예술의 문제를 다뤘는데,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미적 판단을 그는 취미 판단이라고 불렀다.
그가 말하는 취미Geschmack는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판정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는 취미 판단을 분석함으로써 미적 판단을 내리는 인식 능력을 비판, 음미하는 방법으로서의 미가 무엇인지 탐구했다.
그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을 구별했다.
칸트에 의하면 아름답다고 말하는 우리의 취미는 대상의 표상과 우리의 주관 및 주관의 쾌·불쾌 감정과의 관계에 기초한다.
그가 말하는 취미 판단은 미적 판단으로 인식 판단은 아니더라도 오성, 이성과 함께 상급 인식능력의 하나인 판단력에 기초한다.
취미 판단은 대상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구상력과 오성과의 자유로운 조화적 활동인 아 프리오리한 근거에 기초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정당하게 동의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그가 미의 비판을 학문으로 부른 것은 그것이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조화적 활동이라는 취미의 주관적 원리를 반성적 판단력의 아 프리오리한 원리인 주관적 합목적성,
즉 목적없는 합목적성으로 발전시켜 그것의 합법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을 천재Genie에 의한 미적 이념의 표현으로 규정했다.
칸트 미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실러J. Schiller 이후 19세기 전반의 독일 미학은 실질적으로 헤겔G. W. F. Hegel(1770~1831) 등의 독일 관념론 미학에서 예술철학이 되었다.
즉 예술철학으로서의 미학이다.
여기서는 자연미보다는 인간의 창조적 정신에 의한 예술이야말로 진실한 미로 보고 예술에 관해 많은 발전된 철학적 성찰이 생겨났다.
헤겔은 예술의 본질을 미와 결부시켜 생각하고 예술이 절대정신의 감각적 표현이라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취했다.
이에 반해 미와 예술을 분리시켜 비형이상학적 입장에서 예술의 독자적인 형성작용을 기초짓는 동시에 근대 예술사 기술의 가능성을 연 사람은
근대 예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피들러Konrad Fiedler(1841~95)였다.
피들러는 『조형 예술작품의 평가에 관하여』(1876)에
“예술작품을 미적 감각이나 취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작품을 작품으로서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고 적었다.
칸트는 미의 학문을 부정했지만 피들러는 미와 예술을 분리시켜 예술의 독자적 원리를 구함으로써 예술 학문의 가능성을 열었다.
원래 페놀로사의 미학은 헤겔 미학에 근거했으며 미술사는 다윈니즘을 사회 발전에 적용한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미술사는 일본에 있어서 미술의 수집 연구와 수야파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방법론은 서양미술사가 아니었다.
양식과 화풍을 특정하기 위해 기초가 된 감정은 수야파에 의한 것이었고 정보의 근거가 된 것은 일본과 중국의 회화사와 화론이었다.
그의 독창성을 말한다면 그가 수집한 작품들을 근거로 한 것인데
현재 보스턴 뮤지엄Boston Museum of Fine Arts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컬렉션 7백여 점을 보면 명품 위주의 것들이 아니라 유파 별로 다양한 화가들의 작품들이다.
페놀로사의 전문 분야는 철학과 정치학이었고 일본 미술 연구는 취미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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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게 에로스는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예지와 감각의 중간에 해당하며 예지와 감각의 결합이 이데아를 추구하여 불멸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에로스는 예지와 감각의 결합으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전제가 되는 가운데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다.
신적인 사랑이 선 혹은 미로 하여금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게 했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자신과 일체가 될 수 있는 의지가 생기게 했으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이 자연을 통해 다시 자신에게도 돌아오게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런 사랑은 육체의 미를 통해 신적 미로 상승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욕구이다.
사랑은 미를 소유하려는 인식적 덕에 의한 욕구 혹은 선이 창조해 퍼뜨린 미를 향한 욕구desiderio di bellezza, 혹은 소유하려는 욕구이며, 사랑을 통해 선은 자신이 창조한 자연을 자연에 내재한 미를 통해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는 것이 피치노의 논증으로 선은 정신, 영혼, 자연, 질료의 중심이며 그 모든 것에 미가 두루 퍼져 있다.

정신에는 이데아가 있고, 영혼에는 이성이 있으며, 자연에는 영혼이 생성될 수 있는 씨앗이 있고, 질료에는 형상이 있으며, 미의 원리가 되는 선은 모든 미적 사물들의 원인이 된다.
사람은 자연에서 선의 특색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게 되고 자연의 힘 즉 자연에 내재한 미에서 선의 위력을 어림할 수 있으며, 이런 자연의 유용성에서 선을 볼 수 있다.
자연미는 선의 광휘로서 변화의 현상을 나타내지만 그 자체는 불변한다.
자연미는 형이상학적 실재의 미가 지닌 형상의 반영으로 완전한 미는 아니다.

피치노의 사랑과 미에 대한 사고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정신에 내재한 추상적 형상을 질료로 구현하게 했는데 예술가들은 그렇게 하는 데서 형상의 구체성이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15세기와 16세기 미술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플라톤주의와 네오플라톤주의를 따른 것이다.
피치노의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저술에 대한 주석이 패러다임이 되었다.
묵상을 통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의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될 수 있다는 피치노의 주장은 플라톤이 가까스로 인정한 광기의 경우라 하겠다.
이런 영혼을 가진 사람은 예술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피치노의 주장하는 바였다.
미켈란젤로는 피치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피치노는 예술이 “자연보다 더욱 지혜롭다”고 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자연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공언했다.
바자리는 그를 최고의 예술가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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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아마추어 화가의 승리입니다 

한 마디로 아마추어 화가의 승리입니다.
당시 프랑스 화단에서 이름을 날리려면 당연히 에콜 데 보자르로 진학하고 살롱전에서 입상하고 유명작가의 문하에서 수학해야 합니다.
헌데 미대출신도 아닌 사람이 그것도 당시 변방에 불과한 네덜란드 촌놈이 파리에 와서 이름을 날려보겠다고 꿈 꾼 건 거의 불가능했을 뻔한 망상이었습니다.
반 고흐의 작품이 평생 한 점밖에 팔리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반 고흐는 말년에 상징주의 작가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었고 조금씩 그의 작품에 대한 호평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절망에서 헤어나 2, 3년만 더 버텼더라도 생전에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걸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아마추어의 솔직한 표현과 솔직한 화법이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 출신으로서는, 프랑스 유명화가의 전통적인 화법으로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소박하도고 진실한 표현이 반 고흐의 작품에 있었습니다.
붓질을 1인치가량 톡톡 끊어서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색의 동력주의를 창안한 그의 기교는 그의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색과 표현의 극치였습니다.
색들이 지렁이가 되어 캔버스 위에서 꿈틀거렸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마추어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보다는 졸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활한 것보다는 졸렬한 게 더욱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교활한 매너리즘의 작품만큼 구역질이 나는 건 없습니다.
미대출신들 중에 세련된 기법으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아무런 흥을 주지 못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혐오감을 줄 뿐이지요.

종종 아마추어 화가들의 전시회에 가게 되는데 그들의 작품을 보면 깊이는 없더라도 우선 상쾌합니다.
순수한 느낌이 생동하기 때문이지요.
기교를 부릴 줄 모르기 때문에 순수한 맛이 일품입니다.
제발 오늘날 화가들은 남의 것을 모방하려고 하지 말고
그림을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기교를 뽐낼려고 하지 말고
자신도 만족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걸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자신만의 진실한 언어를 구사했으면 싶습니다.
깊이는 차치하고라도
진실이 없으면 그 작품은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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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반 고흐가 유명하냐고 물은 분에 대한 답 
 

대부분은 사람들은 애절하고 초인적인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애절할 바에는 더욱 애절하고 초인적일 바에는 보통 사람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비극은 더욱 슬플 때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덜 애절하거나 덜 초인적일 경우 사람들은 이야기를 극적으로 보내서라도 더 애절하고 더 초인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자신들의 바램을 충족시킵니다.
빈센트의 경우가 이런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됩니다.
현재 그에게 주어지는 전세계인의 애정과 관심의 반에 반 그리고 다시 반에 반을 다른 작가에게 쏟는다면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미술사에는 빈센트말고도 더욱 가난한 가운데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고 빈센트보더 더한 고통 속에서 작업한 사람이 있으며 빈센트보다 더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작품에 몰입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명의 화가에게 지나치게 동정심을 쏟는다면 다른 훌륭한 화가들이 받아야 할 마땅함 몫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 의견으로는 현재 빈센트가 받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80% 정도는 떼어 내고 그 80%를 다른 예술가들을 발굴해서 골고루 나눠줘야 한다고 봅니다.
대중은 그의 그림을 먼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자르고 발작을 일으키고 정신병원에 갇히고 끝내 자살한 불쌍한 화가의 그림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동정을 보냄으로써 아마 자신이 그보다 나은 상황에 있다는 위안을 받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라면 빈센트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빈센트를 사람들은 찾아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중은 어차피 우상을 만들어야 식성이 풀릴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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