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예지를 신뢰한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가 로마로 간 것은 1496년이었다.
추기경 그로슬라에Jean Villiers de la Groslaye의 의뢰로 <피에타>(1498-1500)를 대리석으로 제작한 후부터 그는 가톨릭에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피치노로부터 사랑과 미의 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정신에 내재하는 이미지 immagini dell intelletto’를 대리석이란 질료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예지를 신뢰한 그는 예지 안에서 미를 질료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의 형상을 질료로 구체화하는 것을 예술가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미술을 형상과 질료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보다 더욱 고상한 정신의 형상 혹은 선의 원형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가 정신의 형상을 돌덩이에 새겨 넣으면 돌덩이가 생명력을 지녔고 조각의 드러난 형상은 정신 안에 있는 그의 형상에 상응했다.

그에게 조각을 제작하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불멸하는 지고의 선 혹은 미에 대한 사랑으로 질료는 사랑의 대상으로 임시 존재할 뿐이다.
그는 인체의 미적 형체에 전념했는데 그에게 인체는 우주와 다름없었으며, 아름다운 인체는 신으로 하여금 관조를 용이하게 해주는 작업이었다.
현재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를 제작하면서 그는 삼십 중반에 가까운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젊은 여인으로 묘사하였다.
실제 오십을 넘었을 마리아를 젊은이의 모습으로 묘사한 이유는 불멸의 젊음으로 마리아의 온전한 순결을 상징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최소한 천박한 사고라도 환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육체를 문제가 되게 한 것 같았다.

<피에타>를 완성한 이듬해 로마로부터 피렌체로 돌아온 후 1504년 4월에 <다비드 David>를 완성했고 이 시기에 그는 피렌체의 대가로 익히 알려졌다.
지방자치회가 <다비드>를 가리켜 피렌체의 도덕적 힘을 은유적으로 나타냈다고 호평하면서 그것을 청동으로 제작할 것을 의뢰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의 실세 통치자 마레살 드 기에Marechal de Gie에게 외교적 제스처를 취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지방자치회는 그에게 1364년 피렌체와 파사 사이에 벌어진 “카시나의 전투 Battle of Cascina”를 주제로 팔라조 베치오Palazzo Vecchio에 있는 오백the Five Hundred 복도에 벽화를 그릴 것을 의뢰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년장자이며 예술의 위대한 적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와 대결하게 했는데 레오나르도가 그때 복도 반대편에 “앙기아리의 전투 Battle of Anghiari”를 그리고 있었다.
복도는 나중에 파괴되었지만 커다란 벽에 그림을 그린 경험이 그로 하여금 일그러진 남자 누드를 그리는 데 관심을 집중시켰고, 나중에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최후의 심판>을 그릴 수 있게 했다.

그가 남자의 누드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해부학에 전념한 데 기인하기도 하지만 정신에 내재하는 형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관조하는 데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조각상이 신적 광기의 황홀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믿었으며, 이는 영혼이 개별적인 사물 속에서 지상으로의 하강 이전에 누린, 피치노의 말로 하면, “형언할 수 없는 신적 광휘”를 일시적으로 목격한 흥분을 반영시키는 것이었다.
플라톤적 사랑의 광기에 의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영혼의 상승을 조각상에서 나타내려고 했으며, 형상이 질료의 감옥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해서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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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미술 평론가가 되느냐고 묻길레..

 

여러 날 전 홍대 앞 아지오에서 어느 여자분이 어떻게 해야 미술평론가가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미학이나 미술사를 공부해야겠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미술비평에 관한 글입니다.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는 1964년 미술사나 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미술비평을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들이 학문이나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적 만족을 위해서만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술비평사 History of Art Criticism>에서 미술사, 미학, 미술비평 이 세 분야가 상호관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투리는 비평가가 자신의 감정에만 복종한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는 미술비평가는 미술품의 효과적 구성에 작용하는 모든 요소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을 인용했다.
미적 비평이 역사적 해석을 필요로 한다 해도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시하게 된다.
미술비평가가 고려해야만 하는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예술가가 태어나고 성장한 나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지리적, 기후적, 인종적 조건인가?
그의 역사적 계기를 이루는 정치적, 사회적 조건인가?
그의 사생활인가?
그의 병리학적이고 생리학적 체질인가?
그가 다른 예술가들과 갖고 있는 관계인가?
그의 종교관인가, 도덕관인가?
이들 범주 가운데 어느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들 모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들 모든 범주가 절대로 필요할 수도 있고 이들 가운데 어떤 것도 그렇게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비평가가 현재 꼭 붙잡고 있어야만 하는 사실의 요소들은 바로 그가 조사하고 있는 미술품의 효과적 구성에 참여하는 제 요소이고, 그가 자신에게 제시한 비평 문제의 해결에 절대 필요한 요소들일 뿐이다.
이들 요소들이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는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결정된 문제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해결되는 것이다.
벤투리는 크로체의 말을 인용해 미술사와 미술비평의 동일성을 확증한 후 미술비평과 미학 사이에도 동일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아무리 보편타당성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미적 판단은 우리가 논리적 판단을 논증하듯 논증될 수는 없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벤투리는 미술품이 직관의 대상이 될 때만 미적 판단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판단이 보편적 이념과 개인적 직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직관이란 단순하지 않으며 역사적 제 요소라고 하는 미술품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그 자체 내에 함유하고 있으며 이들 요소들의 체계화란 불가능하다.
벤투리는 말했다.
미술적 직관들을 아는 것이 미술사이다.
하지만 역사적 요소들의 인식이 직관에 참여할 경우 과연 무엇이 참여하게 되는가?
그것은 미술사는 아닌 것이다.
그들 제 요소들을 검토하면서 누구나 직관으로부터 추출하기 때문이다.
미학사도 아니다.
이들 제 요소들 가운데는 미적 요인과는 상이한 실질적이며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요인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벤투리는 미적 원리를 안다는 것을 미적 원리를 자기 개인의 체험으로 입증해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비평하는 것으로 보았다.
역사적 경험은 가정된 미적 원리에 의해 해명되며 변형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미적 원리를 유일한 방법으로 미학사를 통해 미적 원리 안에서 이론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을 꼽았다.
미술비평이 아니면 미술을 이해할 다른 방법이 없음을 그가 역설한 것이다.
벤투리에게 미술비평이란 미학과 미술, 미술의 이념과 미술적 직관과의 관계였다.
그에 의해서 미술비평사라는 학문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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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들의 가르침

 
상카라와 엑카르트는 모두 혼이 신성과 더불어 일체를 이루는 데 방법이 따로 없음을 역설했다.
두 사람은 환희를 경험함으로써 도달하는 감성적 신비주의emotional mysticism를 배척하면서
오히려 순수한 지각에 근거하는 지성적 신비주의intellectual mysticism를 주장했는데
이런 점에서 서양과 동양의 신비주의가 다르지 않다.
지성적이란 말은 지의 최고 등급을 뜻하며 나중에 플라톤의 신비주의에 관해 언급할 때 좀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상카라와 엑카르트 두 사람 모두 당대에 존경받던 신비주의의 대가들로서 당대 일반적 신비주의 경향과 운동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다.
두 사람은 당대의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을 존재론으로 풀었는데
두 사람 모두 고대 경전에 대한 지식이 많아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신비주의 이론을 정립했다.
상카라는 힌두의 경전 <우파니샤드>를 새롭게 해석했으며 <바가바드 기타>의 내용을 새롭게 조명하는 주석을 썼다.
엑카르트는 성서를 새롭게 해석했는데
두 사람 모두 경전의 내용을 자신들의 교리로 삼았음을 본다.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타>가 무엇인지 잠시 설명하기로 한다.

<우파니샤드>

산스크리트어인 우파니샤드는 세 말이 합성된 단어로 upa우파는 가까이란 뜻이고,
ni니는 아래란 뜻이며,
shad샤드는 앉다란 뜻이다.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제자가 스승에게 가까이 가서 그분의 발 아래에 앉는다는 뜻이다.
스승들의 가르침이 구전으로 전해오다 문헌으로 남아 경전이 되었고 이것들을 통칭하여 <우파니샤드>라 한다.

스승들의 가르침에 대한 탐구가 후세에 있었고 이런 기록들을 <베다>라 하는데 네 가지 종류의 베다가 있다.
<리그베다Rig-Veda>,
<야유르베다Yajur-Veda>,
<사마베다Sama-Veda>,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이다.
베다가 쓰여진 연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고 그 내용을 보아 기원전 2400년과 1200년 사시의 신비주의자들의 가르침으로 어림한다.
<베다>를 <우파니샤드>에 대한 또 다른 명칭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파니샤드>는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왔으며 문자화된 것은 기원전 8세기와 5세기 사이이고 현재 108개가 남아 있다.
이것들 가운데 13개를 묶어서 <우파니샤드>의 정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대 인도사람들은 일찍이 인생에 관해 사유했으며
나중에는 아트만Atman과 브라만Brahman이란 말로 함축된 자아self와 참 존재True Being와의 관계에 관해 사유했다.
아트만과 브라만의 관계를 깨달은 사람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해탈은 산스크리트어 모크사moksha의 중국어 번역으로
그 뜻은 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상카라가 주석을 붙인 <바가바드 기타>란 무엇인가?

<바가바드 기타 Bhagavad Gita>를 '거룩한 자Bhagavad의 노래Gita'라고도 한다.
<기타>는 힌두교도들 가운데 가장 애송되는 경전으로
<우파니샤드>와 <베다>에 비하면 권위가 떨어지지만
인도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으로는 가장 두드러진 경전이다.
<기타>는 본래 비슈누교의 한 종파인 사타바타Satavata 파에 속했지만
신비주의자들은 그 내용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비슈누교나 시바교 경전들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상카라도 <기타>를 힌두의 근본 경전으로 받아들였으며
<기타>에 관한 주석을 썼는데
가장 오래된 권위있는 주석으로 오늘날 알려져 있다.
<기타>가 쓰여진 연대에 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지만 일반적으로 기원전 2세기 혹은 그후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함석헌은 저서 <바가바드 기타>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전통적으로 <베다>는 하층 천민들이 드을 수 없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져 왔고
<우파니샤드> 또한 전문 지식인도 이해하기 어려운 비전이었으니
대게의 사람들에게 <베다>와 <우파니샤드>는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저편의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하여
<바가바드 기타>는 늘 서민 대중의 삶 속에서 호흡해 온 대중들의 경전이다."

<기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게 귀의하면 프라타의 아들이여,
천한 대생의 사람, 여자, 바이샤, 그리고 수드라라 할지라도 지고의 목표로 가기 때문이다."

<기타>는 말하자면
<베다>와 <우파니샤드>로부터 버림받은 서민층 사람들까지도 해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타>야말로 힌두의 살아 있는 경전이라 하겠다.
베단타 학자들은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기타>를 포함시켜 세 경전에 주석을 다는 것으로 사상을 전개하는 것을 전통으로 여기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1869-1948)가 <기타>를 영적인 지침서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간디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기타>를 암송하듯 외웠다고 한다.
시인 타고르도 <기타>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1785년 찰스 윌킨즈Charles Wilkins가 <기타>를 영어로 번역했으므로
그때부터 서양사람들이 <기타>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 말로도 번역되어 동양과 서양의 사랑받는 책이 되었다.

<기타>는 원래 인도의 유명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Mahabharata> 제6권의 일부였는데
내용상 하나의 독자적인 문헌으로 읽혀졌으며
오늘날에는 <마하바라타>보다도 더욱 세계적인 종교 문헌으로 알려졌다.
일부 학자들은 전후 문맥상 <기타>가 <마하바라타>의 일부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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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미켈란젤로에게



르네상스Renaissance(1300~1600)는 이탈리아어 리나쉬타Rinascita의 번역인데 재탄생rebirth 혹은 새로운 탄생의 뜻으로 미술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로의 약진을 특징지운 말로 생겼다.
역사가 조바니 파피니Giovanni Papini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미켈란젤로에게 있다면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무덤(1505-1545)을 호화스럽게 장식하게 하려고 면죄부의 판매를 지나치게 늘렸기 때문에 루터와 그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둘로 분리했다고 적었다.

미켈란젤로는 바로크의 아버지로도 불리는데 그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12)에 나타난 비틀리고 긴장한 사람들을 모습들에서 바로크를 예고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바로크와 관련해서 언급하는 것은 미술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그에게는 엄청난 영예이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의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될 수 있는 사람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가 그중 한 사람이다.
프란체스코 베르니Francesco Berni는 적었다.

나는 그의 몇 작품을 본적이 있지만,
배운 바는 없더라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플라톤의 저작에서 그것들 전부를 읽었다는 점이다.59)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카프레세Caprese로 불리운 아레조Arezzo 근처 작은 언덕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그곳의 공식명칭은 카프레세 미켈란젤로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로도비코Lodovico는 시장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3살 때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jo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기본 미술 the prime art”이라고 한 조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메디치 정원에서 베르톨도 디 조바니Bertoldo di Giovanni 문하에서 조각을 수학했다.
로렌초는 고대 조각품들을 수집해서 자신의 정원을 장식했는데 그곳은 예술가 지망생들의 캠퍼스와도 같았다.
메디치의 후원이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메디치의 후원 하에 있는 피치노와 시인 폴리티안Politian을 알게 했으며, 그들로부터 받은 사상적 영향을 자신의 미술과 시에 반영하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의 사람 Medici man”이 되었는데 이는 자신의 운명을 메디치의 정치적 위상과 변화에 맡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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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예술품?
 

 

가장 오래된 예술품?으로 독일의 지역 Neanderthal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묘비가 있는데 약 3만 5천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 동굴 속에 그려진 벽화들 중에는 무려 2만 7천 년 전에 제작된 것들도 있고, 오스트랄리아에 있는 동굴벽화는 적어도 2만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앞으로 구석기시대에 제작한 벽화들이 세계 도처에서 더 발굴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새로운 형태의 벽화와 좀더 오래된 것들이 우리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것이다.

우리의 궁금증을 다소 풀어주는 대부분의 오래된 예술품들은 프랑스 남서쪽과 스페인 북쪽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그것들은 작은 형상의 돌, 뼈다귀, 야성을 상징한 흙으로 빚은 조각, 장식적 물체들로 연장, 무기, 그리고 벽과 천장에 그려진 그림들인데 주로 동물들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미술책에 나오는 라스코Lascaux 동굴벽화는 1940년 소년들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아직까지는 유럽인 최초의 사실주의 그림이다.
벽에 그려진 소와 사냥장면은 원시인이 기억을 더듬어 상황을 재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재현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벽화를 보면 사냥꾼이 뻗어있는데 아마 사냥하던 중에 거대한 들소의 날카로운 뿔에 받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땅바닥에는 그가 사용하던 창이 놓여져 있고 다른 창 하나는 그가 들소의 배를 찔렀으므로 배에 꽂힌 채 땅에 넘어져 있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냥에 실패한 사냥꾼의 죽음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 장면은 죽은 사냥꾼의 동료에 의해서 그려졌을 텐데 동료는 이 그림을 기억을 되살려 그리면서 들소를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들소를 그리면서 두려움을 떨쳐냈을 것이다.

또 한가지는 원시인들에게 동굴은 가장 안전한 장소였을 것이다.
동굴은 그들에게 성소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들소를 벽에 그린 데서 사냥에 필승하려는 저의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거대한 들소는 실재보다 작게 그린 데서 과학적 관찰을 알 수 있는데 큰 것을 작게 그리고 작은 것을 보고 큰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는 과학이 아니겠는가!
동굴은 원시인들에게 가장 안전한 지성소나 다름 없었으므로 종교와 과학이 동굴에서 동시에 출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궁금한 점은 그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색으로 칠했으며 그 색이 여태까지 보존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동물의 기름에 색이 있는 돌을 빻아 섞어서 그것을 벽에 짖이겨 발랐다. 동굴은 통풍이 잘 되어 있어 채색이 보존될 수 있었다.
학자의 말에 의하면
원시인들이 동굴에서 이런 그림을 그릴 때 프랑스 인구가 약 2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세계인구는 약 1억이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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