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시인으로 알려진 미켈란젤로


중세에 예술론이나 비평은 거의 부재한 상태였다.
그래서 예술적 자의식과 기술의 성취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었는데 미켈란젤로의 확고한 직업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성기 르네상스의 주요 특징들 중 하나로 나타나게 했다.
그는 예술가이면서 이론가였다. 그가 즐겨 사용한 말은 “나는 확고한 의견을 갖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모순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본래의 의견을 유지할 것이다” 등이었다.
이런 태도가 그로 하여금 1555년 율리우스 3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마르첼로 2세Marcellus II(Marcello Cervini)와 불화하게 했다.

가톨릭과 피치노가 소개한 플라톤주의에 평생 심취한 그는 늘 자신의 정신을 맑게 하는 데 전념했으며, 따라서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정신에 내재한 형상을 두드러지게 구현할 완벽한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미술사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을 가장 잘 실현시킨 예술가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미켈란젤로다.
회화의 무궁무진한 예술적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준 미켈란젤로에 관해 콘디비는 회상했다.

우리가 보고 있듯이 미켈란젤로는 수천 가지 형상을 그렸지만, 그 중에 서로 비슷한 모습이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반대로 그는 어떤 선 하나를 그을 때에도 이전에 이미 사용한 선이 아닌가를 반드시 확인하며, 남에게 보여줄 그림을 그릴 때 만일 그런 선이 발견되면 다시 지워버린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있다.60)

회화와 조각 그리고 드로잉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할 만한 미켈란젤로는 뒤늦게 시인으로도 알려졌다.
예술 전반에 걸친 그의 사고는 여러 출처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쓴 편지 495편이 1623년에 발견되었고, 대부분 가족이나 후원자에게 보낸 개인적인 내용이거나 일에 관한 것들로서 예술론을 알아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그가 쓴 시들은 예술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거의 없더라도,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이므로 미에 대한 그의 사고를 추론하게 해준다.

미켈란젤로 자신이 직접 쓴 글 외에도 세 명의 당대인이 그에 관해 써놓은 자료가 남아 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포르투갈 화가 프란시스코 데 홀란다는 1538년 로마로 와서 미켈란젤로 주변에서 한동안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1548년에 『대화편 Tractato de Pintura Antigua』을 출간했는데 자신이 미켈란젤로라는 대가와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나타내어 자기 자신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저서는 그의 자만심의 결과물이지만 미켈란젤로의 생애 중 전기 작가들이 소흘히 다룬 시기에 관련된 것이므로 소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당대에 출간된 두 번째 저술로는 바자리가 『미술가 열전』에 기록한 미켈란젤로의 전기이다.
이것은 1550년에 첫 출판되었으며, 1568년의 두 번째 판에서는 거의 다시 썼다 싶을 정도로 수정 증보되었다.
이 책은 자료 제공 면에서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치지만 미켈란젤로의 제작방법을 기술해 놓고 있으며 아울러 그의 견해를 약간이나마 수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아스카니오 콘디비A. Condivi가 쓴 미켈란젤로의 전기는 1553년에 출간되었으며, 셋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다룬 이 책은 바자리가 잘못해 놓은 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씌어진 듯하다.
콘디비는 다소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한 말과 사고를 기록하는 데 있어 바자리나 홀란다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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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열 번째 저서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가 출간되었습니다.
 

 매번 책을 출간할 때면 자식을 세상에 내보내는 심정입니다.
세상에 나가 사랑받는 책이 되어야지 아비 얼굴에 먹칠하는 자식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그동안 아홉 권 모두 언론의 좋은 평을 얻었고 두 권은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어 어느 자식 하나라도 미움을 받지 않아 뿌듯합니다.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는 책이 출간된 그저께 교보문고에서 다량을 매절로 구입해주어 어째 출발부터 길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책을 자식에 비유하는 이유는 오래 잉태했다가 산고의 아픔 끝에 세상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464페이지에 490장 이상의 도판을 싣느라 편집자가 무척 고생을 했습니다.
표지를 디자인 해준 정유심씨의 노력에도 감사하고 ...
정유심씨는 앞서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을 디자인해주었는데 이 The Great Couples 시리즈 전권을 디자인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분의 표지 디자인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듭니다.

딴에는 자부심을 갖는 것은 나 때문에 뭉크, 쉴레, 클림트가 한 지붕 세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을 한 데 묶어서 표현주의를 다룬 예가 서양에도 없습니다.
세 사람은 아마 지하에서 나를 통해 우리나라 독자에게 고마워할 줄 압니다.

다음에 세상에 내보내려는 자식은 쌍둥이입니다.
두 권을 묶어서 한쌍으로 내보내려고 잉태했는데 아마 산고가 조금은 더 클 줄 압니다.
글을 쓸 바에야 좀스럽게 쓰지 않고 팍팍 쓰고 있습니다.
딴에는 많이 풀어서 쓰고 있지만 아직도 더 쉽게 쓰라는 충고가 있어 그러려고 노력은 하지만 너무 서술적으로 쓰다가 지적인 맛이 다 떨어질까봐 어느 정도는 내 고집대로 쓰고 있습니다.
난 많은 독자보다는 꼭 필요로 하는 독자를 원하고 그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성적으로 교감하기를 원하지 무턱대고 팔리기만을 바라는 식으로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여하튼 열 번째 자식을 어제 세상에 내보내고 자축하는 의미로 이 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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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건 문제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저것은 아름답다"고 지각하더라도 그 대상은 절대적으로 아름다울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저것은 추하다"고 지각될 때도 절대적으로 추할 수는 없다.
아름답다든가 추하다든가 하는 건 상대적 상황에서의 관람자의 판단일 뿐이다.
김영자가 이순자에 비해 아름다운것이고 저 놈이 이 놈에 비해 추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 절대적인 아름다운 사람과 추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학은 헤겔에 와서 종착역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헤겔은 미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절대absolute란 말을 정신에 붙여 '절대정신'이라고 했듯이 절대란 말을 사용한 건 아니지만 미를 거의 이런 개념으로 보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인이 미를 절대적 개념으로 이해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인은 세상을 정신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 즉 이원적으로 보았으므로 우리가 눈으로 보는 자연의 갖가지 대상들에 대한 절대적인 본보기가 되는 것들이 따로 정신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런 사고가 철학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나타난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이데아 즉 정신계에는 아름다운 영자와 순자가 있다.

아름다움을 독자적 개념으로 인식하게 되면 자연히 절대미에 대한 모방미를 말하게 된다.
절대미를 얼마만큼 모방했느냐에 따라서 미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자연을 절대미로 보고 아름다움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미술품은 자연스러운 모방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자연스럽지 못하면 추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이다.

예술철학이 자연이 무엇이며 인간의 존재와 능력이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노력해온 것은 이 때문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모방의 가능성을 통해서 예술을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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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츠시카 호쿠사이


카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그가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다가 결국 1798년 이후에 사용한 이름이다.
호쿠사이는 에도의 외곽 시골에서 태어났고, ‘카추시카 지역의 농부 정신’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여러 가지 공예를 시도한 후 1778년에 그는 카츠카와 순쇼勝川春章의 화실에 들어가 15년 동안 순로春郞라는 이름으로 배우 초상화, 연재소설의 삽화 등을 그렸다.
1792년 스승이 타계하자 동료 순코春好와의 의견충돌로 화실을 떠났다.
호쿠사이는 카노파의 유센狩野融川, 고전 토사파의 한 갈래의 스미요시住吉, 소타츠-코린파로부터 사사했으며, 심지어 네덜란드의 동판화 기법까지도 배웠다.
소타츠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는 타와라야 소리俵屋宗理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기도 했다.
서양화와의 만남은 그의 양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쿠가와德川 막부의 엄격한 고립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상인들은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일본과 교역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호쿠사이는 네덜란드 판화의 영향으로 서양 화풍의 순수 풍경판화 세트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에도의 경관이나 그 주변의 바다풍경을 그린 판화들에는 라틴 알파벳을 흉내낸 일본 글씨로 화제畵題가 쓰여 있고 과장된 기하적 투시법과 음영법이 적용되어 선묘로 그려진 인물들과 이상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호쿠사이는 여기서 처음으로 일본 회화에서는 전혀 이질적인 아주 낮은 단일 시점을 채택했다.
이 두 가지 원리가 그로 하여금 후지산富士山 연작과 같은 걸작품을 낳게 한 것이다.
예기치 못했던 이 동서의 만남은 반 세기 이후 파리에서 화가들이 호쿠사이의 판화를 발견하고 연구하게 되었을 때 또 한 번의 반향을 가져오게 되었다.
1804년부터 호쿠사이는 토카이도東海道 연작과 에도의 명소를 그린 연작들을 몇 세트 제작했다.
1814년에는 유명한 『호쿠사이 만가』, 즉 그의 평생의 결실이 담긴 모든 드로잉들로 형성된 일종의 그림백과사전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의 생전에 13권이, 그리고 사후에 2권이 더 출간되었다.
1825년경부터 1831년까지 그는 드디어 최초의 후지산 연작을 출간했는데,
제목에는 <후가쿠산 쥬록케이 富獄三十六景>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46경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시점에서 떠나 그는 대체로 낮은 시점에서 본 산의 모습을 그렸는데 아름답고 인상적인 효과를 창출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풍경화를 생기 있게 하는 것은 그 안에 포함된 몇몇 점경인물들이다.
그러나 <붉은 후지산>은 어떤 인적에 의해서도 전혀 방해받지 않은 경이로운 산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특히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의 가수 La Chanteuse des rues>에서 일본 판화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종 모양으로 둥글게 한 드레스를 평편하게 이차원적으로 채색하고 가장자리를 밝은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모습이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게 한 효과는 일본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이다.
그 외에도 당시 화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감한 생략과 사선구도 등은 일본 판화에서 받은 강렬한 시가적 효과를 이용한 것들이다.
특히 모네는 대각선 구도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모네가 그린 풍경화와 해양화에서 나타난 파도가 치솟는 형태 등은 히로시게와 호쿠사이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이다.
모네가 얼마나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그가 1876년에 그린 <일본 소녀 The Japanese Girl>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제2회 인상주의 전람회에 출품된 것으로 아내 카미유에게 화려한 기모노를 입히고 금발 가발을 쓰게 한 후 그린 것으로 일본화를 모방한 것이다.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통해 소개된 일본 미술은 유럽인에게 파란을 일으켰는데,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의 수가 늘었고, 판화 사본을 벽에 장식하는 살롱과 카페가 늘었으며, 일본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프랑스인에게 우키요에 학파의 대가들 호쿠사이, 히로시게, 우타마로의 목판화는 프린트물로 익히 알려졌다.
반 고흐도 일본 판화를 모사하며 일본화풍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몽마르트르 근처에 있는 상점에서 판화 사본을 구입했으며 그것들이 수백 점에 달해 얼마나 일본화에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아틀리에 벽은 일본 판화들로 장식되었으며 그것들을 그림 배경에 사용하기도 했다.
유럽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에 일본 판화의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판화를 배경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1891년 평론가 로저 막스Roger Marx는 일본 미술은 모더니즘에 있어 중요하다고 했고,
“일본은 우리들의 스승이다”라고까지 말한 평론가도 있었다.
따라서 일본 관립미술학교에서 인상주의를 아카데미즘으로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저항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를 자긍심을 갖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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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을


클레멘트 7세가 사망하기 이틀 전 1534년 9월 23일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갔다.
새로 선출된 교황 바오로 3세가 그를 바티칸의 공식 조각가, 화가, 그리고 건축가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1536년 5월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었는데, 단테의 저서를 읽고 영감을 받은 그는 부활에 자신도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가 쓴 시에는 죽음이 고딕 냉혹한 수확자가 인간을 낫으로 건초를 잘라내듯 잘라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루를 더 사는 것을 구원에 덜 이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산 자는 좀 더 용서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을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에 의해 성난 구세주 발아래 지옥으로 던져지는 죄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나의 허물을 당신의 순결한 귀로 듣지 마소서
나를 향해 당신의 의로운 팔을 들지 마소서
주여, 최후의 순간에 당신의 관대한 팔을 나를 향해 내미소서 


<최후의 심판>은 분명히 미켈란젤로 자신의 영혼을 위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것은 1541년 10월 31일 ‘성자들의 밤 All Saints Eve’에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완성하지 못한 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하다 원래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1545년 2월에 완성함으로써 젊은 시절 그것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율리우스 2세의 무덤> 기단 위에는 <모세>를 포함해서 네 점의 조각이 있는데 이것들은 노예상과 승리상이 있는 지상의 영역과 교황의 운구를 운반하는 두 천사의 천상의 영역 사이에 있다.
이것들은 천상적인 영역과 지상적 영역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
이는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의 의미로서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네오플라톤주의 철학의 의미로서의 상승으로 나타났다.
기단 위 네 조각들 가운데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의 의인상이 의미하는 활동과 관조의 원리, 즉 ‘정의 institia’와 ‘종교의 덕 religio’은 영혼을 천상으로 나르는 두 날개에 비유되고, 지상세계와 천상세계 사이 매개체로 작용함으로써 불사성을 보증하는 능력을 상징하며, 맨 아래 장식은 교황의 인격적 업적을 찬미하는 동시에 지상에서의 그의 생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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