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을
클레멘트 7세가 사망하기 이틀 전 1534년 9월 23일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갔다.
새로 선출된 교황 바오로 3세가 그를 바티칸의 공식 조각가, 화가, 그리고 건축가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1536년 5월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었는데, 단테의 저서를 읽고 영감을 받은 그는 부활에 자신도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가 쓴 시에는 죽음이 고딕 냉혹한 수확자가 인간을 낫으로 건초를 잘라내듯 잘라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루를 더 사는 것을 구원에 덜 이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산 자는 좀 더 용서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을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에 의해 성난 구세주 발아래 지옥으로 던져지는 죄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나의 허물을 당신의 순결한 귀로 듣지 마소서
나를 향해 당신의 의로운 팔을 들지 마소서
주여, 최후의 순간에 당신의 관대한 팔을 나를 향해 내미소서
<최후의 심판>은 분명히 미켈란젤로 자신의 영혼을 위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것은 1541년 10월 31일 ‘성자들의 밤 All Saints Eve’에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완성하지 못한 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하다 원래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1545년 2월에 완성함으로써 젊은 시절 그것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율리우스 2세의 무덤> 기단 위에는 <모세>를 포함해서 네 점의 조각이 있는데 이것들은 노예상과 승리상이 있는 지상의 영역과 교황의 운구를 운반하는 두 천사의 천상의 영역 사이에 있다.
이것들은 천상적인 영역과 지상적 영역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
이는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의 의미로서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네오플라톤주의 철학의 의미로서의 상승으로 나타났다.
기단 위 네 조각들 가운데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의 의인상이 의미하는 활동과 관조의 원리, 즉 ‘정의 institia’와 ‘종교의 덕 religio’은 영혼을 천상으로 나르는 두 날개에 비유되고, 지상세계와 천상세계 사이 매개체로 작용함으로써 불사성을 보증하는 능력을 상징하며, 맨 아래 장식은 교황의 인격적 업적을 찬미하는 동시에 지상에서의 그의 생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