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츠시카 호쿠사이
카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그가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다가 결국 1798년 이후에 사용한 이름이다.
호쿠사이는 에도의 외곽 시골에서 태어났고, ‘카추시카 지역의 농부 정신’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여러 가지 공예를 시도한 후 1778년에 그는 카츠카와 순쇼勝川春章의 화실에 들어가 15년 동안 순로春郞라는 이름으로 배우 초상화, 연재소설의 삽화 등을 그렸다.
1792년 스승이 타계하자 동료 순코春好와의 의견충돌로 화실을 떠났다.
호쿠사이는 카노파의 유센狩野融川, 고전 토사파의 한 갈래의 스미요시住吉, 소타츠-코린파로부터 사사했으며, 심지어 네덜란드의 동판화 기법까지도 배웠다.
소타츠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는 타와라야 소리俵屋宗理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기도 했다.
서양화와의 만남은 그의 양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쿠가와德川 막부의 엄격한 고립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상인들은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일본과 교역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호쿠사이는 네덜란드 판화의 영향으로 서양 화풍의 순수 풍경판화 세트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에도의 경관이나 그 주변의 바다풍경을 그린 판화들에는 라틴 알파벳을 흉내낸 일본 글씨로 화제畵題가 쓰여 있고 과장된 기하적 투시법과 음영법이 적용되어 선묘로 그려진 인물들과 이상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호쿠사이는 여기서 처음으로 일본 회화에서는 전혀 이질적인 아주 낮은 단일 시점을 채택했다.
이 두 가지 원리가 그로 하여금 후지산富士山 연작과 같은 걸작품을 낳게 한 것이다.
예기치 못했던 이 동서의 만남은 반 세기 이후 파리에서 화가들이 호쿠사이의 판화를 발견하고 연구하게 되었을 때 또 한 번의 반향을 가져오게 되었다.
1804년부터 호쿠사이는 토카이도東海道 연작과 에도의 명소를 그린 연작들을 몇 세트 제작했다.
1814년에는 유명한 『호쿠사이 만가』, 즉 그의 평생의 결실이 담긴 모든 드로잉들로 형성된 일종의 그림백과사전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의 생전에 13권이, 그리고 사후에 2권이 더 출간되었다.
1825년경부터 1831년까지 그는 드디어 최초의 후지산 연작을 출간했는데,
제목에는 <후가쿠산 쥬록케이 富獄三十六景>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46경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시점에서 떠나 그는 대체로 낮은 시점에서 본 산의 모습을 그렸는데 아름답고 인상적인 효과를 창출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풍경화를 생기 있게 하는 것은 그 안에 포함된 몇몇 점경인물들이다.
그러나 <붉은 후지산>은 어떤 인적에 의해서도 전혀 방해받지 않은 경이로운 산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특히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의 가수 La Chanteuse des rues>에서 일본 판화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종 모양으로 둥글게 한 드레스를 평편하게 이차원적으로 채색하고 가장자리를 밝은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모습이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게 한 효과는 일본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이다.
그 외에도 당시 화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감한 생략과 사선구도 등은 일본 판화에서 받은 강렬한 시가적 효과를 이용한 것들이다.
특히 모네는 대각선 구도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모네가 그린 풍경화와 해양화에서 나타난 파도가 치솟는 형태 등은 히로시게와 호쿠사이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이다.
모네가 얼마나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그가 1876년에 그린 <일본 소녀 The Japanese Girl>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제2회 인상주의 전람회에 출품된 것으로 아내 카미유에게 화려한 기모노를 입히고 금발 가발을 쓰게 한 후 그린 것으로 일본화를 모방한 것이다.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통해 소개된 일본 미술은 유럽인에게 파란을 일으켰는데,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의 수가 늘었고, 판화 사본을 벽에 장식하는 살롱과 카페가 늘었으며, 일본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프랑스인에게 우키요에 학파의 대가들 호쿠사이, 히로시게, 우타마로의 목판화는 프린트물로 익히 알려졌다.
반 고흐도 일본 판화를 모사하며 일본화풍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몽마르트르 근처에 있는 상점에서 판화 사본을 구입했으며 그것들이 수백 점에 달해 얼마나 일본화에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아틀리에 벽은 일본 판화들로 장식되었으며 그것들을 그림 배경에 사용하기도 했다.
유럽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에 일본 판화의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판화를 배경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1891년 평론가 로저 막스Roger Marx는 일본 미술은 모더니즘에 있어 중요하다고 했고,
“일본은 우리들의 스승이다”라고까지 말한 평론가도 있었다.
따라서 일본 관립미술학교에서 인상주의를 아카데미즘으로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저항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를 자긍심을 갖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