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란 말은 '기발한 fanciful' 혹은 '있을 법 하지 않은 improbable'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미술의 한 양식으로 불리워진 건
1798년으로 독일 평론가 프리드리히 본 슐레겔Friedrich von Schlegel(1772-1829)과 그의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August Wilhelm(1767-1845) 그리고 노발리스Novalis(1772-1801)가 관여한 기관지 <아테네움 Athenaeum>(1798-1800)에서
낭만적 시를 가리켜서 이 말을 사용한 후
슐레겔 형제가 후원하는 환상적인 내용의 문학과 중세 미술 그리고 거칠고 미개한 내용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미술에 사용되었다.
프리드리히 본 슐레겔은 낭만주의를 넓은 의미에서 근대의 특징을 지적하는 말로 사용했는데
근대 문학이 고전 문학과 다른 한에 있어서 '낭만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그 특질로 개별적인 모티프의 우위, 철학적 모티프의 우위, '충만과 생명력 Fulle und Leben'에서 얻어지는 쾌감, 형식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규칙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 기괴하고 추한 것 속에 있는 평정함, 환상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는 감상적인 내용 등을 꼽았다.
그는 '낭만적'이란 명칭을 근대 문학 전체에 적용시켰으며 낭만주의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에게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작가들에게서도 낭만주의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괴테와 실러처럼 걸출한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낭만주의라는 말이 독일 밖에서도 사용된 것은 프랑스의 여류작가 드 스탈 부인Madame de Stael(1766-1817)의 <독일론 De l'Allemagne>(1813)에서 소개된 후였다.
18세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유행하는 기존의 가치관에 반발하면서 이성적, 감정적 경험에 만족할 만한 것에 근거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성적, 감정적 경험의 일반적 공통 특징은 "자연으로 돌아가자 Return to Nature"였다.
이성주의자들은 자연을 이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존중한 데 비해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경계가 없고 거칠며 항상 변하는 것으로 숭배했다.
이들 모두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위하는 한 악은 사라질 것으로 믿었으며 욕구에 자유를 부여했다.
이런 이상을 마음에 품은 낭만주의자들은 잰슨의 말로 "자유, 권력, 사랑, 격렬함, 그리스 문명, 중세, 이런 것들에서 부상된 그 밖의 것들"을 환호하며 반겼다면서 그들은 감정을 강렬하게 하는 것을 그 자체 목적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낭만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미술품을 제작하기보다는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고 적고 있다.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드워츠William Wordworth는 1798년 시란 "평정 안에서 불러일으켜진 감정"이라고 했는데
이는 낭만주의 미술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신속하게 생기는 경험을 영원한 형상으로 남기기 위해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이에 걸맞는 양식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기존의 질서에 반발했으므로 자신들의 시대에 유행하는 로코코 양식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선택 친화력 elective affinity'(이를 잰슨은 또 다른 낭만주의의 개념으로 본다)과 관련된 다양한 양식들을 재활하면서 과거에 경시했거나 냉소한 형상들을 재발견하고 채택하여 그것들 자체를 원리로 진전시켰으므로 재활된 양식들이 낭만주의의 양식들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신고전주의를 낭만주의의 첫 단계로 분류한다.
그러나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그 밖의 재활들과는 달리 신고전주의는 19세기에도 유행했으며 20세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보수적 취미의 예술가와 건축가들에 의해 이 양식이 사용되고 있다.
잰슨은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를 동일한 동전의 앞과 뒤,
즉 양면성으로 보고 있다.
이 둘은 1800년 이전의 상황에서 비교한다면 신고전주의는 그 밖의 낭만적 재활들보다도 크게 불쑥 거대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 이유는 계몽주의가 낭만적 영웅들에 대한 조명보다는 자유를 더욱 중시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