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의미

 
예술가들에게 낭만주의는 자의로 그리고 타의로 붙여졌다.
낭만주의와 유사한 경향을 띠었던 과거 예술가들도 낭만주의에 속하게 된 것이다.
디드로는 <극적 시에 관하여 De la poesie dramatique>(1758)에서 시는 "무지막대하고 야만적이며 미개한 것을 목표로 삼는다"라고 했는데
이는 낭만적 속성들 중 하나이지만 낭만주의가 시작된 시기에 비하면 40년 전의 선언이었다.
디드로는 낭만주의의 선조가 되었다.
원래는 작가들에게만 한정되었던 '낭만적'이란 명칭이 유사한 사고를 가진 당대의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붙여지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화가들로 외젠 들라크루아, 다비드 프리드리히, 조각가로는 당제르, 작곡가들로는 슈만, 베버, 베를리오즈 등이었다.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상의 유사성만으로 계보를 이루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이 계보에 속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타칭으로 분류된 예술가들 사이에 유대가 없었으므로 하나의 계보에 속했다하더래도 공통된 권리를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자라고 하면 매우 다양하고 서로 이질적인 인물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결과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가 애매모호하게 된 것이다.
타타르키비츠Wladyslaw Tatarkiewicz(1886-1980)는 낭만주의에 대한 무수히 많은 정의들 중 25개를 선별해 저서 <미학의 기본 개념사 A History of Six Ideas: An Essay in Aesthetics>에 소개했는데
그것들 가운데 17개만 선별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낭만적 예술은 전적으로 혹은 두드러지게 느낌, 직관, 충동, 열정, 믿음 등 심의의 비합리적인 기능들에 의존하는 예술이다.
고양과 직관이 미키비츠에게는 "시대의, 낭만주의 시대의 성사적 표현"이었다. 폴란드인이라면 누구나 외워서 알고 있는 낭만주의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느낌과 믿음은
과학자의 현미경과 눈보다
더 강력하게 내게 말한다. 
 

이런 정신에서 문학사가인 크르차노브스키는 낭만주의를 이성과 감정의 싸움으로 규정했다.
"예술은 느낌이다"라고 드 뮈세는 선언했다.
또 "시는 결정화된 열정이다"라고 드 뷔니는 말했다.
낭만주의에 있어 본능은 신중한 계획보다 더 중요하다. 브로진스키가 썼다시피 "고전주의는 보다 훌륭하게 완성된 취미를 필요로 하고 낭만주의는 보다 훌륭하게 완성된 감수성을 요구한다."
2. 낭만적 예술은 상상력에 의존하는 예술이다.
시와 일반예술이 주로 혹은 전적으로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은 낭만적인 신념이다.
상상력은 낭만주의자들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숭상하는 것이었다.
샤또브리앙이 "상상력은 풍요롭고 풍부하며 불가사의하다.
반면 존재는 하찮고 빈약하며 무능하다"고 했듯이 낭만주의자들은 상상력이 현실보다 더 풍요롭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싶어했다.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일기에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예술가의 순수한 상상력을 표현하는 작품이지" 어떤 모델에 의존하는 작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3. 낭만주의는 문학 및 예술에서 시적인 것을 지고한 가치로 인식하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와 함께 작업해던 드샹은 1824년 이렇게 적었다.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 사이의 복잡한 논쟁은 다름 아니라 산문적 정신과 시적 영혼 간의 해묵은 전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9세기 후반에 밀려온 서세동점의 물결을


19세기 후반에 밀려온 서세동점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조요한은 동양 3국이 각각 주체적인 수용에 힘쓰면서 중국에서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목표로 했고, 한국은 동도서기동도서기를 꾀했으며,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이상으로 삼았다면서 세 나라가 모두 정신세계는 동양의 것으로 하고 서양의 과학문명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취했다고 『관심과 통찰』에 적었다.
조요한은 일본의 경우 서양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과학, 의회, 법제 등 모든 사회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혁하여 이른바 명치유신이란 역사적 과업에 성공했고, 청나라는 중화라는 자존의식에서 출발하여 전통을 재긍정하는 범위에서 자강론을 펴나갔지만, 탈아세아적 일본의 개화론과 자기 긍정적 중국의 자강론 사이에서 한국은 일제의 통치를 받아 적극적인 수용도 비판적 수용도 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따라서 개화파의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을 것을 주장했지만, 주자학을 고수하며 외세를 막으려고 한 수구파는 위정척사를 표방하며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의병운동을 일으킨 최익현 등은 화서華西 이항로의 문인들로서 이들은 우암 송시열을 추앙했다.
1905년 평양의 숭실학당에 대학부가 설치되어 미국인 선교사 번하이슬C. F. Bernheisel이 철학을 강의했고, 1910년대에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에서 철학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외국에 가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귀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이다.
1921년 외국에서 처음 학위를 취득한 이관용을 위시하여 김법린, 정석해, 이정섭, 백성욱, 안호상이 유럽에서, 최현배, 채필근, 윤태동, 김두헌이 일본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귀국했다.
3·1운동 이후 국립대학이 존재하지 않는 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이상재, 이승훈 등이 민주대학 건립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지하는 뜻에서 일제가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설립하고 1926년에는 법문학부에 철학과를 설치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철학 연구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1930년대로 학회가 발족되고 학보가 발간되었다.
1931년 헤겔 100주기를 맞이하여 『신흥』 제5호에 경성대학 출신 김계숙이 ‘헤겔 사상의 전사前史’를, 신남철이 ‘헤겔 100년제와 헤겔 부흥’이란 논문을 실었다.
1935년 일본에서 발간된 철학 잡지 『이상』에 박종홍의 논문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지평의 문제’가 일본 철학자들의 논문과 함께 발표되었으며 보성전문학교에서 1934년에 발간한 『학회논집』에 실린 안호상의 논문 ‘헤겔에 있어서의 판단의 문제’는 1941년 일본 교도대학에서 발간된 『철학연구』에 독일어로 실리기도 했다.
논문들은 트특정한 이론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 현실의 문제, 문화의 미래에 관한 포괄적인 내용들이었다.
1933년에 결성된 철학연구회는 강연회를 열고 학술지 『철학』을 제3회가지 발간했으며, 발행 대표 이재훈이 1936년 일본 경찰에 의해 피검되면서 중단되었다.
이 학술지에 집필한 사람은 박종홍, 권세원, 이재훈, 이종우, 안호상, 긴두헌, 신남철, 박치우, 이인기, 전원배, 갈홍기 등이다.
이때 동양철학 논문이 한 편도 발표되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철학연구회가 해산되자 1933년부터 성대 철학과 연구실에서 철학담회회를 가졌는데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김계숙, 권세원, 박종홍, 고형곤, 김용배, 박의현, 최재희, 안호상, 이종우, 손명현 등이었다.
이들의 모임은 실질적으로 1930년대 우리나라 철학회나 다름 없었다.
한국어 말살을 꾀하던 총독부 치하에서 한치진은 1936년에 우리말로 『철학개론』을 출간했고 1942년에 안호상이 우리말로 『철학강론』을 출간했다.

민족해방운동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병합조약을 강요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12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초대 총독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부임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합방의 제일의 목적은 조선인을 질서 있게 지도하여 문명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고 천자의 은혜를 입은 문명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총독은 현역 육·해군 대장 중에서 선발되고 일본 국왕을 제외한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존재였다.
총독은 입법·사법·행정 등 조선 통치의 전권을 행사했으며 조선 주둔 일본군을 통솔했다.
총독부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조선인의 모든 신문과 출판물을 강제 폐간한 반면 『매일신보』, 『서울프레스』 , 『경성일보』 등 관제 어용신문을 발간하여 총독부 정책을 미화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성과 경험의 마찰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에게는 따로 예술론이 없었지만 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Je pense, donc je suis(라틴어: cogito ergo sum)”4)라고 하는 자아에 대한 성찰은 신고전 미학에 크게 이바지했다.
본질적으로 대수학과 기하학에 기인한 그의 인식론적 방법론과 귀결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고찰에 이바지했다.
데카르트의 인식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요소들은 이성과 자연에 관한 여러 의미의 개념들에서 혼용되어 나타났다.
자연을 좇는 것과 이성의 규칙을 좇는 것이 판단력비판에서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예술가에게 귀감이 되었다.
데카르트로부터 추상화된 이성적·지성적인 관점이 라이프니츠, 볼프, 바움가르텐의 미학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덜 추상화된 경험적·감성적 경향의 베이컨, 로크, 샤프츠베리, 흄의 미학에 대조가 되었다.
16세기에 미술품을 만들고 판단하는 데 대한 규칙은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사람들과 고전주의 작가들에 의해 성립되었다.
미학에서의 새로운 이성주의가 예술이 객관적이고, 본질적이며, 이상적인 자연의 모방이라는 그런 이론과 같은 기본 자명한 이치로부터 연역에 의해 기초가 되게 해서 그들의 규칙들을 선험적인 것으로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son(1709-84)은 1765년 『셰익스피어 서문 Preface to Shakespeare』에서 “일반 자연의 정확한 재현들이” 미술의 끝이라고 지적했고, 6년 전에는 화가를 “개별적인 것이 아닌 종species을 측정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여호수아 레이놀드스 경Sir Joshua Reynolds(1723-92)은 1778년 『논문들 Discourses』에 화가는 “자연을 개요 안에서 고찰할 것을 충고하고, 자신의 모습들 하나하나에서 종의 성격들을 나타낸다”고 적었다.
이듬해 그가 발표한 『게으름뱅이 Idler』는 그로 하여금 『모던 화가들 Modern Painters』을 출간하게 했는데 책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의 흐름은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구성하고 … 모든 식물과 마찬가지로 모든 동물의 종자들은 다양한 선들이 중심에서 종결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경향이 생기게 하는 자연을 향한 고정되거나 결정적인 형태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또는 한 중심으로부터 다른 방향들로 흔들거리는 진자들에 비교할 만하다.
그리고 오직 하나만이 그 외의 점을 경유해서 지나갈지라도 그것들 모두가 그 중심을 가로지르듯 완전미는 종종 기형보다는 자연에 의해 생산된다.”4-1)
레이놀드스는 하나의 종one species이 다른 종에 비해 객관적으로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같은 종의 것들에서 미는 모든 다양한 형상들의 매체 또는 중심”4-2)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확실히 각 종의 중심적 혹은 평균적 형상이 자연의 목적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레이놀드스와 존슨 두 사람은 미술을 자연의 본질을 적합하게 모방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예술에 적용한 규칙들은 이성과 경험 사이에서 문제를 야기시켰다. 코네일Corneille은 1660년에 출간한 『논문들』에서 드라마의 구성에서 공간과 시간 그리고 행위의 관측되는 통일성의 요구는 인정하지만 자신은 그것들에 노예가 되지 않고 드라마의 효과 혹은 관객들의 즐거움을 위해 종종 규칙들을 깨거나 수정했다고 고백했다.
적합한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규칙을 따를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일종의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회의였다.
드라마가 기능이나 종결을 가졌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규칙들이 있어야 하지만 그 규칙들은 단지 그럴 듯하며 부분적으로는 경험에 근거해야 할 것이라는 사고가 생겼다.
이성과 경험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예술은 이성보다는 오히려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음악에서 이성과 경험의 충돌은 병행되는 5도 음정들의 기피와 같은 절대적인 규칙들에서와 같이 하모니와 협화음에서 발생했다.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화음을 위한 수학적 기초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받아들일 만한 화음인지는 귀가 판단할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음악이 관객의 입장에서 판단의 대상이라는 것이며 이는 다른 예술에도 해당하는 문제였다.
이런 상반된 주장에 화해적인 이론이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1646-1716)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는 『자연과 고상함의 원리들 Principles of Nature and of Grace』에서 모든 감각들과 마찬가지로 음조들을 그 밖의 개체들의 지각들과 더불어 미리 정해 놓은 하모니에서 매순간마다 사소한 지각들의 무한한 경향의 혼돈된 뒤범벅으로 보았다.
느낌의 형태 속에 이성이 있다고 믿은 그는 현을 듣는 데서 영혼은 무의식적으로 장단을 세며 단순할 때 협화음을 만드는 수학적 비율을 비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합리적인 사고는 한동안 이성과 경험의 문제를 잠재울 수 있었지만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커지면서 이성에 대한 반발이 다시금 거세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라바조, 촌스럽지도 않은 미술 이야기

 
카라바조Michellangelo Merisida Caravaggio(1571~1610)
17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할 만한 화가는 카라바조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그림을 무대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그린 화가로 기억할 것입니다.
모델을 연출하여 극적인 그림을 그의 회화방법을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영향을 받았습니다.
카라바조는 그림을 극적으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도 극적으로 살았는데 촌스럽지도 않은 미술 이야기가 될런지 ...
카라바조의 이름은 베르가모Bergamo 근처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직업 외에도 고향 마을의 명칭을 자신의 성last name으로 삼았는데 레오나르도의 성이 빈치Vinci인 것을 알지요?
그러니까 Leonardo da Vinci는 빈치의 레오나르도란 뜻입니다.
조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났지요.
르네상스의 메디치Medichi 가문을 다 알줄 아는데 메디치는 영어 메디신의 원어로 의사란 뜻입니다.
즉, 조상이 의사라는 자부심으로 의사를 성으로 삼은 것이지요.
직업과 고향 마을은 이렇듯 성이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흘렀고 본론으로 가서,
카라바조는 밀라노에서 회화를 수학한 후 1592년 로마로 가서 주로 활약했습니다.
1592년이라고 하면 레오나르도가 50살, 미켈란젤로가 불과 17살 때로 르네상스가 성기로 접어들 때였습니다.
카라바조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599년부터였습니다.
그는 색을 심도있게 사용하면서 그늘을 강렬한 색채로 강조했습니다.
그는 추기경 프란체스코 델 몬테의 후원을 받아 기독교 주제의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촌스럽지도 않은 미술 이야기는 다음의 내용입니다.
카라바조는 불같은 성격으로 많은 사건을 일으켰는데 1606년 어느날 내기 테니스를 치다가 심한 말다툼 끝에 상대를 살해하고 로마로 도망친 후 나폴리(1606~7), 말타(1607~8), 시실리(1609)를 전전하다가 다시 나폴리로 돌아와 외롭게 지내다 161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라바조의 유명한 작품, <매장 The Entombment>, 1602~4, 유화, 300-203c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낭만의 유래

 
'낭만적'이란 말은 '기발한 fanciful' 혹은 '있을 법 하지 않은 improbable'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미술의 한 양식으로 불리워진 건
1798년으로 독일 평론가 프리드리히 본 슐레겔Friedrich von Schlegel(1772-1829)과 그의 형 아우구스트 빌헬름August Wilhelm(1767-1845) 그리고 노발리스Novalis(1772-1801)가 관여한 기관지 <아테네움 Athenaeum>(1798-1800)에서
낭만적 시를 가리켜서 이 말을 사용한 후
슐레겔 형제가 후원하는 환상적인 내용의 문학과 중세 미술 그리고 거칠고 미개한 내용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미술에 사용되었다.
프리드리히 본 슐레겔은 낭만주의를 넓은 의미에서 근대의 특징을 지적하는 말로 사용했는데
근대 문학이 고전 문학과 다른 한에 있어서 '낭만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그 특질로 개별적인 모티프의 우위, 철학적 모티프의 우위, '충만과 생명력 Fulle und Leben'에서 얻어지는 쾌감, 형식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규칙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 기괴하고 추한 것 속에 있는 평정함, 환상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는 감상적인 내용 등을 꼽았다.
그는 '낭만적'이란 명칭을 근대 문학 전체에 적용시켰으며 낭만주의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에게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작가들에게서도 낭만주의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괴테와 실러처럼 걸출한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낭만주의라는 말이 독일 밖에서도 사용된 것은 프랑스의 여류작가 드 스탈 부인Madame de Stael(1766-1817)의 <독일론 De l'Allemagne>(1813)에서 소개된 후였다.
18세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유행하는 기존의 가치관에 반발하면서 이성적, 감정적 경험에 만족할 만한 것에 근거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성적, 감정적 경험의 일반적 공통 특징은 "자연으로 돌아가자 Return to Nature"였다.
이성주의자들은 자연을 이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존중한 데 비해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경계가 없고 거칠며 항상 변하는 것으로 숭배했다.
이들 모두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위하는 한 악은 사라질 것으로 믿었으며 욕구에 자유를 부여했다.
이런 이상을 마음에 품은 낭만주의자들은 잰슨의 말로 "자유, 권력, 사랑, 격렬함, 그리스 문명, 중세, 이런 것들에서 부상된 그 밖의 것들"을 환호하며 반겼다면서 그들은 감정을 강렬하게 하는 것을 그 자체 목적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낭만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미술품을 제작하기보다는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고 적고 있다.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드워츠William Wordworth는 1798년 시란 "평정 안에서 불러일으켜진 감정"이라고 했는데
이는 낭만주의 미술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신속하게 생기는 경험을 영원한 형상으로 남기기 위해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이에 걸맞는 양식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기존의 질서에 반발했으므로 자신들의 시대에 유행하는 로코코 양식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선택 친화력 elective affinity'(이를 잰슨은 또 다른 낭만주의의 개념으로 본다)과 관련된 다양한 양식들을 재활하면서 과거에 경시했거나 냉소한 형상들을 재발견하고 채택하여 그것들 자체를 원리로 진전시켰으므로 재활된 양식들이 낭만주의의 양식들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신고전주의를 낭만주의의 첫 단계로 분류한다.
그러나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그 밖의 재활들과는 달리 신고전주의는 19세기에도 유행했으며 20세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보수적 취미의 예술가와 건축가들에 의해 이 양식이 사용되고 있다.
잰슨은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를 동일한 동전의 앞과 뒤,
즉 양면성으로 보고 있다.
이 둘은 1800년 이전의 상황에서 비교한다면 신고전주의는 그 밖의 낭만적 재활들보다도 크게 불쑥 거대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 이유는 계몽주의가 낭만적 영웅들에 대한 조명보다는 자유를 더욱 중시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