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에 밀려온 서세동점의 물결을
19세기 후반에 밀려온 서세동점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조요한은 동양 3국이 각각 주체적인 수용에 힘쓰면서 중국에서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목표로 했고, 한국은 동도서기동도서기를 꾀했으며,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이상으로 삼았다면서 세 나라가 모두 정신세계는 동양의 것으로 하고 서양의 과학문명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취했다고 『관심과 통찰』에 적었다.
조요한은 일본의 경우 서양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과학, 의회, 법제 등 모든 사회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혁하여 이른바 명치유신이란 역사적 과업에 성공했고, 청나라는 중화라는 자존의식에서 출발하여 전통을 재긍정하는 범위에서 자강론을 펴나갔지만, 탈아세아적 일본의 개화론과 자기 긍정적 중국의 자강론 사이에서 한국은 일제의 통치를 받아 적극적인 수용도 비판적 수용도 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따라서 개화파의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을 것을 주장했지만, 주자학을 고수하며 외세를 막으려고 한 수구파는 위정척사를 표방하며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의병운동을 일으킨 최익현 등은 화서華西 이항로의 문인들로서 이들은 우암 송시열을 추앙했다.
1905년 평양의 숭실학당에 대학부가 설치되어 미국인 선교사 번하이슬C. F. Bernheisel이 철학을 강의했고, 1910년대에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에서 철학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외국에 가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귀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이다.
1921년 외국에서 처음 학위를 취득한 이관용을 위시하여 김법린, 정석해, 이정섭, 백성욱, 안호상이 유럽에서, 최현배, 채필근, 윤태동, 김두헌이 일본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귀국했다.
3·1운동 이후 국립대학이 존재하지 않는 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이상재, 이승훈 등이 민주대학 건립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지하는 뜻에서 일제가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설립하고 1926년에는 법문학부에 철학과를 설치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철학 연구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1930년대로 학회가 발족되고 학보가 발간되었다.
1931년 헤겔 100주기를 맞이하여 『신흥』 제5호에 경성대학 출신 김계숙이 ‘헤겔 사상의 전사前史’를, 신남철이 ‘헤겔 100년제와 헤겔 부흥’이란 논문을 실었다.
1935년 일본에서 발간된 철학 잡지 『이상』에 박종홍의 논문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지평의 문제’가 일본 철학자들의 논문과 함께 발표되었으며 보성전문학교에서 1934년에 발간한 『학회논집』에 실린 안호상의 논문 ‘헤겔에 있어서의 판단의 문제’는 1941년 일본 교도대학에서 발간된 『철학연구』에 독일어로 실리기도 했다.
논문들은 트특정한 이론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 현실의 문제, 문화의 미래에 관한 포괄적인 내용들이었다.
1933년에 결성된 철학연구회는 강연회를 열고 학술지 『철학』을 제3회가지 발간했으며, 발행 대표 이재훈이 1936년 일본 경찰에 의해 피검되면서 중단되었다.
이 학술지에 집필한 사람은 박종홍, 권세원, 이재훈, 이종우, 안호상, 긴두헌, 신남철, 박치우, 이인기, 전원배, 갈홍기 등이다.
이때 동양철학 논문이 한 편도 발표되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철학연구회가 해산되자 1933년부터 성대 철학과 연구실에서 철학담회회를 가졌는데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김계숙, 권세원, 박종홍, 고형곤, 김용배, 박의현, 최재희, 안호상, 이종우, 손명현 등이었다.
이들의 모임은 실질적으로 1930년대 우리나라 철학회나 다름 없었다.
한국어 말살을 꾀하던 총독부 치하에서 한치진은 1936년에 우리말로 『철학개론』을 출간했고 1942년에 안호상이 우리말로 『철학강론』을 출간했다.
민족해방운동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병합조약을 강요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12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초대 총독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부임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합방의 제일의 목적은 조선인을 질서 있게 지도하여 문명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고 천자의 은혜를 입은 문명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총독은 현역 육·해군 대장 중에서 선발되고 일본 국왕을 제외한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존재였다.
총독은 입법·사법·행정 등 조선 통치의 전권을 행사했으며 조선 주둔 일본군을 통솔했다.
총독부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조선인의 모든 신문과 출판물을 강제 폐간한 반면 『매일신보』, 『서울프레스』 , 『경성일보』 등 관제 어용신문을 발간하여 총독부 정책을 미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