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도이치가 제시한 네 가지 “미적 관여의 차원”은

 

엘리엇 도이치가 제시한 네 가지 “미적 관여의 차원”은 다음과 같다.

1 문화적-작가적 세계관
예술적 통찰로서 자연이 인간의 정신과는 독립적인, 즉 인간 정신과 분리되어 있는 무한하고 생기가 넘치는 영역임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통찰의 예를 5세기 사혁謝赫이 쓴 중국회화의 육법六法 가운데 첫 번째 기운생동氣韻生動에서 볼 수 있다.16)
이 법은 예술가 자신이 정신적 활력氣, 즉 자연 속에 널리 펴져 있는 생명의 움직임生動과 일체감이 될 것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통찰이다.
이런 생동성이라는 힘, 즉 자연적·정신적 리듬이 그림에 반영되는 것이 작가의 예술적 통찰이다.
이럴 경우 그림에 나타난 인물의 존재와 자연의 힘 사이에는 역동적인 평형이 존재하게 된다.
작가의 예술적 세계관은 물론 그 작가가 속한 문화적 세계관도 아울러 이해할 때 그런 세계관이 나타나는 작품들로 파악할 수 있는 첫 번째 미적 관여의 차원이다.

2 문화적-작가적 미적 기호
지각을 조직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미적 기호는 결코 문화적-작가적 세계관Weltanschauung으로부터 어떤 명료한 논리적 방식으로 뒤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문화적-작가적 세계관과 양립해 있으며 대부분이 거기서 도출된다.17)
미적 기호는 예술가를 통해 개별적인 작품을 알게 해주는 하나의 문화적 범주지만 취미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까닭은 취미는 인정된 가능성들이나 양식의 범위 내에서 질적 식별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취미가 개인적인 반면 미적 기호는 하나의 문화와 조건들에 속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개인의 취미에 속한다.
그러므로 미적 기호는 주제의 고려에도 적용되며 또한 미적 내용 그 자체에도 적용된다.
미적 대상으로서의 낯선 작품의 성질을 인지하는 데 미적 기호가 반드시 필요하다.
상이한 미적 기호를 가지는 다른 문화에서 나온 작품들에 대해 취미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3 형식적 내용
형식적 내용이란 실현된 구성이나 디자인, 대조와 긴장의 해결, 그리고 공식적 용어로는 미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내적 생명력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가치 즉 미적 경험의 1차적 재료이다.
한 마디로 미적 경험이라는 가치의 기본적 담지자이다.18)
전적으로 문화에 얽매여 있는 예술에서 형식적 원리들이 존재한다는 것 또는 미적 정당성의 보편적 원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데서 형식적 내용을 미적 관여의 차원으로 사용할 수 있다.
형식적 내용은 작품 속에 전반적으로 존재하는데 이를 하나의 게쉬탈트Gestalt 즉 구조화된 혹은 유기체적인 전체로서 식별해야 한다.
작품에서의 형식적 내용이란 유일무이함을 의미한다.
형식적 내용이란 선, 색, 패턴, 대조, 긴장과 같은 생생한 존재로 다른 것으로는 절대 대체될 수 없는 특수한 작품인 것이다.

4 상징적 가치들
상징은 그리스어 심볼symballe , 즉 모으다, 맞붙이다, 통합하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상징 혹은 상징적 가치들은 예술에서 의미의 가장 기본적인 담지자이다.
이를 세 부문으로 분류하면 자연적인 상징적 가치들, 인습적인 상징적 가치들, 본질적인 상징적 가치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호킹은 말하기를 "나의 병은 ..."

 
나는 나의 병 ALS(운동신경병)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가능한한 평범한 인생을 살려고 하고 있으며,
나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상태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리고 그런 부자유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어렸을 적 활동적이 아니었으며 공을 갖고 노는 놀이들에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스포츠나 신체적인 운동들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옥스포드 대학에 진학하고나서는 보트의 노를 젓거나 키를 잡는 운동은 제법 했다.
대학 3학년 때 나는 나 자신이 조금씩 볼품없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한 번 혹은 두 번 쓰러지기도 했다.
내 병이 알려지게 된 것은 이듬해 캠브리지 대학원에 진학한 후 어머니께서 나를 가정학 의사에게 데리고 가서부터였으며 의사는 내가 전문의사에게 진찰을 받아야 한다고 어머니께 권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을 때 나는 막 스물 한 살이 되었다.
나는 두 주 동안 입원하여 진찰을 받았다.
병원측에서는 나에게 무슨 병인지 말해주지 않았고 갖가지 테스트를 하면서 고작 비타민만을 복용시켰다.
나는 내가 수년밖에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며 어째서 나는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의사는 나더러 캠브리지에 돌아가 연구를 계속하라고 권했지만 나는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전에 죽고말 것이란 생각 때문에 비탄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바그너의 곡을 듣고 지냈는데 잡지들은 내가 과음한다고 허풍을 떨었고 이런 기사는 다른 잡지사들로 하여금 그대로 복사해서 보도하게 만들면서 그들은 훌륭한 기사감으로 여겼다.
기사란 자주 반복해서 보도되면 자연히 사실이 되고 만다.
나는 인생에 회의가 생겼고 내가 무엇을 하든지 무가치할 것이란 좌절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무엇인가 선한 일을 남기고 싶어졌다.
결국 나는 죽지 않았으며 나 자신 이전보다 인생을 더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나의 연구에 진전이 있었고, 나는 약혼 후 결혼을 발표했으며, 캠브리지에 있는 카이우스 대학에서 급여를 받는 연구원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나의 건강 상태는 나의 연구에 그리 불편하지 않았으며 운도 딸아서 나의 연구 내용들이 학계에 환호로 받아들여졌는데
같은 시기에 나의 부자유함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강의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만 할 수 있는 혜택을 대학측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나는 결혼했으므로 대학 근처에 작은 집을 세얻어 살다가 대학으로부터 돈을 빌려 나중에는 그 집을 구입했다.
4년 동안 그 집에 살면서 나는 층계를 오르내리는 일이 자꾸 힘에 겨웁게 되었으며,
대학은 나에 대한 배려로 대학 소유의 건물 아래층을 내게 주었고,
그 집은 크고 문의 폭이 넓어서 좋았다.
나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그 집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나의 세 아이들은 매우 좋아했다.
1974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스스로 음식물을 먹을 수 있었고 스스로 침대에 눕거나 침대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
아내 제인이 날 도와주었지만 일이 너무 많아지자 나의 제자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기거했다.
아내와 제자는 내가 침대에 눕거나 일어나는 일을 도왔다.
나는 좀더 부자유스러워졌으며,
1980년에는 대화하는 시스템을 바꾸었고,
개인 간호사가 조석으로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날 간호했다.
이런 생활은 내가 폐염에 걸린 1985년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폐염 수술을 받았고 그후부터 24시간 간호를 받아야 했다.
이에 대한 비용을 몇몇 재단들이 맡아주었으므로 가능했다.
수술받기 전에는 불분명하지만 내가 말을 할 수 있었으며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적어도 나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비서에게 말하면 비서는 종이에 과학에 관한 나의 내용을 기록했고 내가 세미나를 주관할 경우에는 통역자가 나의 말을 좀더 분명하게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
하지만 수술 후 나는 전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잠시동안 나의 의사소통 방법이란 내가 눈섭을 올려 신호하면 알파벳을 들고 있는 사람이 알파벳들을 끄집어내어 문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화를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같은 나의 처지를 안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의 컴퓨터 전문가 왈트 월토츠가 이퀄라이저equalizer라고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내게 보내주었다.
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니 나는 스크린에 나타나는 갖가지 메뉴들을 손으로 스위치를 사용하여 단어들을 선택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나는 손이나 눈동작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말하기를 바라는 것을 확성기를 통해 알릴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컴퓨터를 책상에 놓고 사용하는 동안 캠브리지 대학의 대비드 메이슨은 이런 기구를 작은 컴퓨터로 제작해 휠체어에 부착시켜 사용가능하게 해주었다.
이 기구는 나로 하여금 이전보다도 더욱 의사소통을 잘 하게 해주었으며 나는 1분에 15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말을 한 후 이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보존하거나 글로 쓸 수 있게 되었고, 컴퓨터를 사용해서 두 권의 책을 썼으며, 과학에 관해서 많은 논문들을 썼다.
나는 과학에 관해 그리고 일반적인 것들에 관해 많은 대화를 했으며 사람들이 이를 잘 받아주었다. 내가 사용하는 확성기는 좋은 질의 소리를 내주었는데 오지 문제가 있다면 미국 액센트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의 소리를 갖게 되었으므로 영국 발음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확성기를 계속 사용하려고 한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이라도 된 느낌이다.
나의 병은 여전히 내게 남아 있지만 이 병이 나로 하여금 가족과 함께 지내고 내가 연구하고 있는 하문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못하다.
나는 나를 돕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단체들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사람들은 희망을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호킹은 블랙 홀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호킹의 자서전적 글입니다.
1970년까지 나의 연구는 우주 전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했던 나의 성과는 은하galaxy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으로 즉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발견은 나로 하여금 과거에는 은하들이 서로 가까이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모든 은하들이 하나로 뭉쳐져 있었을 때 바로 그때도 시간이 존재했었겠느냐 하는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주가 팽창한다면 우주란 무한한 것이냐는 의문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내게 새로운 수학적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나의 연구는 1965년부터 197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를 나와 로저 펜로우즈Roger Penrose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펜로우즈는 벌크벡Birkbeck 대학에 있었고 현재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와 펜로우즈는 수학적 기술을 사용하여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사실이라면 과거에 무한한 밀도density 상태가 우주에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런 무한한 밀도를 빅뱅이상Big Bang Singularity이라고 부릅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옳다면 불행하게도 우리의 과학은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을 수용하게 되면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장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최근 나의 연구 성과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거대한 별들이 자체들의 원자핵 연료nuclear fuel가 모두 소진될 때 스스로 붕괴된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펜로우즈는 모든 별들이 무한한 밀도의 이상singularity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붕괴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 이상은 시간의 종말을 의미하며, 이상의 중력적 필드gravitational field는 너무 강력해서 필드 주변에 있는 빛은 필드를 통과할 수 없고,
중력적 필드는 오히려 빛을 필드 속으로 끌어당기는데 빛은 필드 속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으며,
이런 중력적 필드를 블랙 홀black hole이라고 부릅니다.
블랙 홀의 경계boundary를 사건한계event horizon라고 부릅니다.
어느 누구라도 어떤 물체라도 블랙 홀 속으로 빨려들어가면 이상에서 시간의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나는 1970년 나의 딸 루시Lucy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 하루는 침대에 누워서 블랙 홀에 관해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나는 팬로우즈와 더불어 이상들을 증명하기 위해 진전시켜온 수학 기술을 블랙 홀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건한계 필드 블랙 홀의 경계는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블랙 홀이 합쳐져서 하나의 블랙 홀로 구성될 때 그 합해진 홀의 한계 필드는 두 블랙 홀의 한계 필드들의 합한 것보다 더욱 강력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나는 그날 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70년부터 1974년까지 나는 주로 블랙 홀들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1974년에 나는 연구의 성과를 이루었는데 블랙 홀들은 온전히 검정색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것들은 마치 뜨거운 물체들처럼 발광radiation과 미분자particle들을 발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74년부터 나는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혼용해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이론은 1983년 나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은 유한하지만 그것들은 어떤 경계도 없다는 사실을 발표하게 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지구의 표면과 같으나 두 차운two dimensions을 더 지니며 지구의 표면은 면적에 있어서는 유한하나 둥글기 때문에 어떤 경계도 지니지 않는 것과 같이 시간과 공간도 경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주의 생성은 과학의 법칙들로 이해가 되어 나는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욕망을 성취했으나 아직도 왜 우주가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운동


총독부의 문화정책하에 미약하지만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이 유입되고,
상해를 거점으로 한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조직이 결성되며,
해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선진적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고무되면서 이 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문단에는 기존의 낭만적 퇴폐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고 신흥 예술을 주창한 신경향파 문학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프로레타리아 예술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25년 8월에 결성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운동(카프 KAPF, 에스페란토식 표기로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은 ‘일체의 전제 세력과 항쟁하고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 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채택하고 대규모 문학·예술운동을 벌여나갔다.
카프 결성 이전에 이런 운동이 필연적으로 대두될 것을 예감한 듯한 글이 발표되었다.
김기진은 1925년 2월 『개벽』에 ‘피투성이 된 푸른 혼의 표백’이란 제목의 글에서 적었다.
사회 상태는 변천하야 계급의 대립을 세워놓았다.
이것은 생활 상태의 분열이다.
이 생활 상태의 분열은 생활 의식의 분열을 일으켰다.
여기서 부르주아의 미감과 프로레타리아의 미감이 달라졌다.
기교의 미를 찾고 인종의 미를 설하는 것은 부르주아의 미감 내지 미학이다.
이와 반대로 어디까지든지 정의의 미를 찾고 반역의 미를 고창하는 것은 프로레타리아의 미감 내지 미학이다.
카프 일원이었던 강호는 『조선미술』(1957년 5호)에 기고한 ‘카프 미술부의 조직과 활동’이란 제목의 글에서
카프 미술이 시작된 때를 “김복진이 자기의 창작 사업을 통하여 부르주아 미술의 소위 예술에서의 ‘초계급성’과 ‘순수미술’ 등 반동적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을 전개하면서 현실을 사회주의적 이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미학의 견지에서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게 된 그 때”로 꼽았다.
김복진은 1927년 5월 『조선지광』에 ‘나형 선언 초안’이란 제목으로 글에서 “다시 말해 예술운동이란 전민족적이고 전계급적인 운동에 복무하는 하나의 가지, 하나의 날개이며, 그 예술운동의 일분야가 형성예술, 다시 말해 미술운동이라는 것이다”고 적었다.
김복진은 1928년 가을, 3차 공산당사건으로 피검·투옥되었으며 이후 활동이 제약되었다.
카프 미술이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은 1927년 카프가 재조직되고 카프 내에 미술부가 조직된 이후부터였다.
프로레타리아 예술가를 자처한 김용준(1904~67)은 1927년 『조선일보』에 ‘프로레타리아 미술 비판’이란 제목의 글에서 “예술을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지배되어 도구로 이용할 것인가, … 프로레타리아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것인가” 물으면서 진정한 프로레타리아 미술에 관해 피력했다.
문학, 연극 등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은 민중과 적극적인 관련을 맺은 데 반해 미술은 그러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미술도 민중과 적극적인 관련을 맺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프로레타리아 미술이 단순한 계급투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됨을 지적하면서 합당한 형식이 창출되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프로레타리아 미술의 수준이 미의 본질을 등한시하거나 미의식을 무시하는 데 이른 것을 우려하면서 ‘프로레타리아 미술 비판’의 글에서 적었다.
“예술의 본질적 가치는 부인할 수 없다. 예술적 요소가 미를 본위로 한 이상 미의 표준과 미의식에 있어서는 시대와 사조 - 즉 환경을 따라 변환하거나 미의식을 부인하고는 예술이란 대명사는 붙일 수 없는 것이다.”
프로레타리아 미술의 형식적 가능성을 표현주의 양식에서 발견한 김용준은 표현주의가 가진 경탄적인 공포감이 프로레타리아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부르주아에게는 증오와 공포를 느끼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용준의 반성론에 대해 프로레타리아 미술의 주요 논객 임화는 1927년 『조선일보』에
‘미술 영역에 대한 주체 이론의 확립 - 반동적 미술의 저항’이란 제목의 글에서
“프로레타리아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고 프로레타리아의 실감에서 출발하면서 또한 그 본질을 잃지 않는 예술이야말로 진실한 프로레타리아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조선의 돈키호테 김용준 씨여! 무산계급 예술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도구가 되어 이용될 것을 염려한다면 무산계급에게 미를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그는 김용준의 주장을 “소부르주아지의 소음적 예술관”으로 매도했다.
임화는 프로레타리아 미술운동이 전계급적·전민족적 정치투쟁이 되어야 한다면서 김용준의 주장은 한낱 예술지상주의적 안일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김용준이 프로레타리아 미술에 형식이 필요함을 역설한 데 반해 임화는 정치적 효능만 있다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반발했다.
임화는 프로레타리아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선전용 포스터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용준과 임화의 논쟁은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논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27년 말 카프 영화부에 속한 강호와 임화가 미술부에 참가했으며 이주홍, 이상대, 추민, 이갑기, 이상춘, 정하보, 박진명 등이 그 때부터 1930년대 초까지 카프 예술가로 활동했다.
당시 그들의 활동은 만화·도안 및 선전·선동용 작품을 제작하는 데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강호는 앞서 언급한 『조선미술』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광범한 인민 대중과 보다 많은 접촉할 수 있는 그라휘크graphic 창작 부문에 전력을 경주하였는데,
이에는 일제 식민지 통치의 간악한 탄압이라는 사회·시대적 제약성이 많은 작용을 하기도 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역사적 과업에 자체 사업을 결부시킨 정당성에서 일어난 것이며 …
1930년 전후에 있어 조선의 노동운동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밀접히 결부되면서 국내 각처에서 파업투쟁과 소작쟁의가 치열히 일어나던 이러한 혁명적 정세하에서
카프 미술부에 부과된 계급적 당면 과업은 협소한 관람자를 상대로 하는 미술전람회를 조직하거나 또는 부유한 자의 서재와 일부 미술애호가들의 벽장을 장식하는 그러한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투쟁에 있어 선전·선동자적인 역할을 행하는 미술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카프 미술부는 평양 고무공장 파업을 비롯한 여러 파업 투쟁에 자기 예술가들을 파견하여 삐라, 포스타, 만화 등으로 노동자의 투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카프 미술부가 전람회를 거의 열지 못한 것은 일제 경찰의 탄압에도 기인하지만,
카프 미술부에 동양화가가 한 사람도 없었고 서양화가의 경우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으므로 재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끈질긴 탄압으로 카프는 1935년 4월에 해체되었고 따라서 미술부의 활동도 종료되었다.
카프 해산 후 프로레타리아 미술 이념과 운동은 일본 파시즘의 탄압으로 더욱 소진되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교미학 연구
엘리엇 도이치 지음, 민주식 엮음 / 미술문화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엘리엇 도이치는 『비교미학 연구』(미술문화)에서


우리는 여기서 잠시 동·서양인의 관점에서 미학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시도를 18세기의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는 없었겠지만 미학의 위기를 이런 관점에서 다시 고찰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엘리엇 도이치Eliot Deutsch는 『비교미학 연구 Studies in Comparative Aesthetics』(1975)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10)
미학이론은 종종 허세를 부려왔다.
미학이론은 항상 뚜렷하게 표방하지는 않았더라도 암시적으로 그 자체의 역사적 위치에 얽매이지 않고 미술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모든 미술품에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거창한 이론들 즉 의사전달, 표현, 모방, 계시 등과 같은 이론들은 문화 다원적 관점에서 볼 때나 심지어 역사적인 문화 내부적 관점에서 볼 때도 어떤 특정한 종류의 예술과 한정된 미적 경험에만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도이치는 미적 경험의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 미의 본성과 미적 경험의 관련성, 비교비평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세 가지를 논했는데 마지막 논제는 구체적인 예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는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뢰겔Pieter Bruegel(혹은 Brueghel)(1525경-69)의 작품과 13세기 중국 화가 마원馬遠의 작품을 비교·분석하여 전통적인 중국 비평가의 미에 대한 개념과 서양인의 개념이 왜 다른지를 기술했다.
그는 브뢰겔의 작품에 대한 오토 베네쉬Otto Benesch의 찬사를 예로 들었다.11)
대자연의 혼을 이렇듯 놀랍게 파악함에 있어 브뤼겔을 능가하는 예술가는 없다. … 피터 브뢰겔은 회화작품과 소묘작품에서 위대한 우주의 법칙에 이바지하는 형식과 형태를 가진 무한자로서의 우주의 관념을 명확하게 정복했다.
브뢰겔의 작품에 나타난 형상화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고정된 물체와 대기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 사람은 레오 포퍼Leo Popper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기는 물체를 세계에 대해 차단해주는 역할을 하며 … 그러면서 다시 물체를 아주 깊숙이 세계와 하나로 결합시킨다.
하지만 이 물체들이 대기를 제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바로 그 힘으로 물체들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먹고 먹히면서 서로를 소화시키고는 다시 먹고 함으로써 마침내 이 물체들은 모두 서로 간에 친화력을 가진 하나의 재료처럼 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꽃은 물의 어떤 면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가 서로의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브뢰겔 회화의 원재료Urstoff는 이렇게 탄생했다.
매우 동질적이고 온전히 사물들로 만들어져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화가 자신을 만들어낸 재료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12)
도이치는 10세기 중국 산수화가 형호荊浩가 화가들을 네 부류도 구분하기 위해 전통을 따라 미적 가치를 신神, 묘妙, 기技, 교巧로 나눈 등급을 적용하면서13) 중국학자 형호가 브뢰겔에 대한 베네쉬의 평가를 인정한다면 그는 브뢰겔을 첫 번째 혹은 최고의 범주에 두지 않고 두 번째 범주에 두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이는 동·서양인의 미적 기준이 상이함을 의미하며, 또한 미학이 상이한 전통과 문화에서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도이치는 상이한 전통과 문화에서의 상이한 미적 기준을 비교비평이란 말로 표현하면서 상이한 문화에서 나온 미술품과 그 문화 자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어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가 『도상학 연구 Studies in Iconology: Humanistic Themes in the Art of the Renaissance』(1939)에서 제시한 세 가지의 “의미층”, 즉 1차적 혹은 자연적 주제, 2차적 혹은 인습적인 주제, 본질적 의미 혹은 내용14)은 모든 종류의 예술적 의미들을 완전히 규명하지는 못한다면서 자신이 정립한 네 가지의 “의미층” 혹은 “미적 관여의 차원”이 보다 효과적임을 주장했다.15)
자신이 제시하는 네 가지의 “의미층”을 알면 다른 문화에서 나온 미술품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