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운동
총독부의 문화정책하에 미약하지만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이 유입되고,
상해를 거점으로 한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조직이 결성되며,
해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선진적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고무되면서 이 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문단에는 기존의 낭만적 퇴폐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고 신흥 예술을 주창한 신경향파 문학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프로레타리아 예술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25년 8월에 결성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운동(카프 KAPF, 에스페란토식 표기로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은 ‘일체의 전제 세력과 항쟁하고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 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채택하고 대규모 문학·예술운동을 벌여나갔다.
카프 결성 이전에 이런 운동이 필연적으로 대두될 것을 예감한 듯한 글이 발표되었다.
김기진은 1925년 2월 『개벽』에 ‘피투성이 된 푸른 혼의 표백’이란 제목의 글에서 적었다.
사회 상태는 변천하야 계급의 대립을 세워놓았다.
이것은 생활 상태의 분열이다.
이 생활 상태의 분열은 생활 의식의 분열을 일으켰다.
여기서 부르주아의 미감과 프로레타리아의 미감이 달라졌다.
기교의 미를 찾고 인종의 미를 설하는 것은 부르주아의 미감 내지 미학이다.
이와 반대로 어디까지든지 정의의 미를 찾고 반역의 미를 고창하는 것은 프로레타리아의 미감 내지 미학이다.
카프 일원이었던 강호는 『조선미술』(1957년 5호)에 기고한 ‘카프 미술부의 조직과 활동’이란 제목의 글에서
카프 미술이 시작된 때를 “김복진이 자기의 창작 사업을 통하여 부르주아 미술의 소위 예술에서의 ‘초계급성’과 ‘순수미술’ 등 반동적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을 전개하면서 현실을 사회주의적 이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미학의 견지에서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게 된 그 때”로 꼽았다.
김복진은 1927년 5월 『조선지광』에 ‘나형 선언 초안’이란 제목으로 글에서 “다시 말해 예술운동이란 전민족적이고 전계급적인 운동에 복무하는 하나의 가지, 하나의 날개이며, 그 예술운동의 일분야가 형성예술, 다시 말해 미술운동이라는 것이다”고 적었다.
김복진은 1928년 가을, 3차 공산당사건으로 피검·투옥되었으며 이후 활동이 제약되었다.
카프 미술이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은 1927년 카프가 재조직되고 카프 내에 미술부가 조직된 이후부터였다.
프로레타리아 예술가를 자처한 김용준(1904~67)은 1927년 『조선일보』에 ‘프로레타리아 미술 비판’이란 제목의 글에서 “예술을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지배되어 도구로 이용할 것인가, … 프로레타리아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것인가” 물으면서 진정한 프로레타리아 미술에 관해 피력했다.
문학, 연극 등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은 민중과 적극적인 관련을 맺은 데 반해 미술은 그러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미술도 민중과 적극적인 관련을 맺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프로레타리아 미술이 단순한 계급투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됨을 지적하면서 합당한 형식이 창출되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프로레타리아 미술의 수준이 미의 본질을 등한시하거나 미의식을 무시하는 데 이른 것을 우려하면서 ‘프로레타리아 미술 비판’의 글에서 적었다.
“예술의 본질적 가치는 부인할 수 없다. 예술적 요소가 미를 본위로 한 이상 미의 표준과 미의식에 있어서는 시대와 사조 - 즉 환경을 따라 변환하거나 미의식을 부인하고는 예술이란 대명사는 붙일 수 없는 것이다.”
프로레타리아 미술의 형식적 가능성을 표현주의 양식에서 발견한 김용준은 표현주의가 가진 경탄적인 공포감이 프로레타리아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부르주아에게는 증오와 공포를 느끼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용준의 반성론에 대해 프로레타리아 미술의 주요 논객 임화는 1927년 『조선일보』에
‘미술 영역에 대한 주체 이론의 확립 - 반동적 미술의 저항’이란 제목의 글에서
“프로레타리아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고 프로레타리아의 실감에서 출발하면서 또한 그 본질을 잃지 않는 예술이야말로 진실한 프로레타리아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조선의 돈키호테 김용준 씨여! 무산계급 예술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도구가 되어 이용될 것을 염려한다면 무산계급에게 미를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그는 김용준의 주장을 “소부르주아지의 소음적 예술관”으로 매도했다.
임화는 프로레타리아 미술운동이 전계급적·전민족적 정치투쟁이 되어야 한다면서 김용준의 주장은 한낱 예술지상주의적 안일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김용준이 프로레타리아 미술에 형식이 필요함을 역설한 데 반해 임화는 정치적 효능만 있다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반발했다.
임화는 프로레타리아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선전용 포스터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용준과 임화의 논쟁은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논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27년 말 카프 영화부에 속한 강호와 임화가 미술부에 참가했으며 이주홍, 이상대, 추민, 이갑기, 이상춘, 정하보, 박진명 등이 그 때부터 1930년대 초까지 카프 예술가로 활동했다.
당시 그들의 활동은 만화·도안 및 선전·선동용 작품을 제작하는 데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강호는 앞서 언급한 『조선미술』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광범한 인민 대중과 보다 많은 접촉할 수 있는 그라휘크graphic 창작 부문에 전력을 경주하였는데,
이에는 일제 식민지 통치의 간악한 탄압이라는 사회·시대적 제약성이 많은 작용을 하기도 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역사적 과업에 자체 사업을 결부시킨 정당성에서 일어난 것이며 …
1930년 전후에 있어 조선의 노동운동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밀접히 결부되면서 국내 각처에서 파업투쟁과 소작쟁의가 치열히 일어나던 이러한 혁명적 정세하에서
카프 미술부에 부과된 계급적 당면 과업은 협소한 관람자를 상대로 하는 미술전람회를 조직하거나 또는 부유한 자의 서재와 일부 미술애호가들의 벽장을 장식하는 그러한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투쟁에 있어 선전·선동자적인 역할을 행하는 미술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카프 미술부는 평양 고무공장 파업을 비롯한 여러 파업 투쟁에 자기 예술가들을 파견하여 삐라, 포스타, 만화 등으로 노동자의 투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카프 미술부가 전람회를 거의 열지 못한 것은 일제 경찰의 탄압에도 기인하지만,
카프 미술부에 동양화가가 한 사람도 없었고 서양화가의 경우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으므로 재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끈질긴 탄압으로 카프는 1935년 4월에 해체되었고 따라서 미술부의 활동도 종료되었다.
카프 해산 후 프로레타리아 미술 이념과 운동은 일본 파시즘의 탄압으로 더욱 소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