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전한 분류는 플로티누스에 의해서


그리스인이 말한 테크네의 의미는 오늘날의 순수예술로서의 아트보다는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 테크닉technic에 더 가까웠다.
그들에게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로서의 아트에 대한 차별성이 없었으므로 조각가의 작업과 목수의 작업을 기술적인 면에서 동일하게 생각했으며, 학문과 기능 모두 예술로 간주했다.
키케로Cicero(106-143 BC)는 『아카데미카 Academica』에서 사물을 파악하기만 하는 것과 사물을 제작하는 것으로 예술을 분류했는데 사물을 파악하기만 하는 것을 우리는 학문으로 간주한다.
고대 그리스인의 예술에 대한 개념이 포괄적이었지만 흥미롭게도 시는 예술에서 제외시켰다.
그 이유는 예술 특성의 결핍인데 시가 법칙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고 영감, 즉 개인의 창조에 달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시詩가 절寺에서 나온 말言이듯 서양에서도 시는 사원에서 나왔다.
그리스인은 시를 일종의 예언이나 기도문으로 생각했다.
그리스인은 영감에 음악을 포함시켰는데 광기적 성격의 음악이 시와의 친근성, 즉 시가 노래로 불리어지고 음악은 발음화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예술 분류법은 실재 대상과의 관계를 근거로 했는데 예를 들면 건축은 사물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예술로 본 반면 회화는 사물을 모방하는, 즉 이미지만을 만들어내는 ‘모방적’ 예술로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법은 플라톤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 그는 모든 예술을 자연을 보완하는 것과 모방하는 것으로 나누었다.
시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견해를 달리했는데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열광으로부터 나오는 시와 문예적 기술에 의한 시 즉 ‘광기적’ 시와 ‘기술적’ 시로 나눠서 후자보다는 오히려 전자를 시로 간주했다.
시를 명확하게 예술로 분류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시에 아주 많은 법칙들을 부여한 후 모방예술로 간주하며 “시인은 화가, 그리고 닮은 꼴을 제작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모방자이다”23)라고 했다.
그리스인이 기능과 학문을 예술의 영역에서 제외시킨 이래 이 같은 인식은 헬레니즘과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 때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순수예술의 개념은 근대에 와서야 확립되었다.
예술에 대한 분류가 고대인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널리 인정받은 것은 소피스트들의 분류로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유용성을 추구하는 예술과 향락을 제공해주는 예술로 분류했다.
플루타르크Plutarch(45-125년경)는 여기에 학문을 포함시켰다.
그 밖에도 예술에 대한 분류 시도가 있었는데 누구에 의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인정받은 분류는 ‘교양 liberal’예술과 ‘범속 vulgar’예술로 라틴어로 아르테스 리베랄레스artes liberales와 아르테스 불가레스artes vulgares로 알려졌다.24)
그리스인은 교양예술을 ‘동문통달 encyclic’예술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백과사전적 encyclopedic’이란 의미와 유사한 동문통달은 “하나의 원을 형성한다”는 어원을 갖고 있는데 그리스인은 이 원을 교양 있는 사람이 지녀야 할 예술의 원을 뜻했다.
로마의 수사가 퀸틸리아누스Quintilinus(35-95경)는 예술을 ‘이론적’ 예술, ‘실천적’ 예술, ‘포이에틱 poietic’ 예술이었다.25)
키케로는 주요한 예술artes maximae, 평범한 예술artes mediocres, 사소한 예술artes minores로 분류했다.26)
가장 완전한 분류는 고대 말 플로티누스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는 정신성의 정도에 따라 다섯 부류로 구분했다.27)
1 건축과 같이 물리적 사물들을 만들어내는 예술
2 의술 및 농업과 같이 자연을 도와주는 예술
3 화화와 같이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
4 수사법 및 정치와 같이 인간의 행동을 개선하거나 장식하는 예술
5 기하학처럼 순수하게 지적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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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의 근거

 
미술품을 해석함에 있어 어떤 기본규정을 정하지 않으면 해석할 수 없다.
기본규정들 중 고립주의Isolationism라는 것이 있으며 이는 미술품을 감상할 때 오직 예술가의 일대기와 역사적 배경만을 염두에 두고 그 밖의 것들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방법이다.
다음으로 맥락주의Contextualism라는 것이 있으며 이는 미술품을 그것의 배경 안에서만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초상화를 감상할 때도 적용된다.
고립주의는 음악의 경우 더 적합하고, 예술가의 주관적인 작품을 해석할 때 적합한 반면 맥락주의는 역사화와 종교화를 해석하는 데 적당하다.
두 가지 이론을 병행할 수도 있다.
맥락주의가 고립주의보다 광범위에 걸쳐 해석에 적합해보인다.
미술품의 의미는 예술가의 의도가 성공적으로 표현될 때 고스란히 나타나지만 제대로 표현되지 못할 때는 그 의미가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은유 혹은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며, 문학의 경우 사용된 언어를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할 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또한 예술가의 의도가 부분적으로 드러날 경우 혹은 그 의도가 불분명하게 나타날 경우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평론가가 예술가의 의도보다는 자신의 의도를 더욱 드러내려고 할 때 미술품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평론가의 몫이 된다.
평론가는 아니지만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1828-1910)에 의해 미술품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제안된 주정주의Emotionalism가 있다.
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What Is Art?>에서 예술을 쾌를 위한 수단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면서 인간 삶의 조건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해야 할 것을 역설했다.
톨스토이는 예술의 역할들 중 하나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제의 수단으로 꼽으면서 웅변이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전달하는 것으로 인간들 사이의 합일의 수단에 기여하듯 예술도 유사한 목적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웅변이 사고를 전달하는 데 비해 예술은 느낌을 전달한다고 보았다.
미술품을 통해서 관람자가 작가의 느낌의 표현을 전달받는데 이는 작가의 감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적었다.
예술은 형이상학자들이 말한 어떤 신비로운 미의 개념이나 신의 표명이 아니다.
그것은 미적 생리학자가 말한 인간이 자기의 저장된 에너지의 여분을 발사하는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외적 표적들에 의해 인간의 감성들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을 제공하는 오브제들의 생산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쾌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일한 느낌들 안에서 인간들을 서로 연결시켜서 하나가 되게 하는 수단이며, 개인과 인류의 복지를 향한 삶과 발전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예술의 전염력 수준이 세 가지 조건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1. 전달한 느낌의 크고 작은 특성에 달렸다.
2. 느낌이 전달한 것과 더불어 크고 작은 명확성에 달렸다.
3. 예술가의 성실, 즉 예술가 자신이 전달하려는 감성에 대한 느낌과 더불은 크고 작은 힘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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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의 출현

 
프랑스의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77)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이는 양식이라기보다 주제의 혁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낭만주의 풍경화가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1796-1875)의 그림에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사실주의의 가능성이 나타났다.
코로는 1825년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그때 받은 영향이 그의 평생에 걸친 회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그때 스케치한 것을 토대로 자신의 느낌을 풍경화를 통해 그려냈다.
그래서 꿈만 같은 장면이면서도 그때의 장면을 상기시킬 만큼 실재처럼 보인다.
코로는 결코 극적으로 과장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눈으로 본 사실을 재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듯한 자연을 꾸밈없이 묘사한 데서 사실주의의 기미가 엿보인다.
이 점을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화가들이 받아들였고 19세기 후반 거의 모든 풍경화가들이 받아들였다.
사실주의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그림을 최초로 그린 사람은 쿠르베였다.
그는 일상장면을 기념비적으로 그렸는데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75)가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시민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영웅주의를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큰 사건을 일으킨 사람만이 영웅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자신의 직업에 대한 열심에서 영웅적인 점을 발견해냈다.
이는 보들레르가 말한 모더니즘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자신의 별채를 따로 지어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카달로그 서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더이상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 ...
생동감 있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라고 적었다.
이런 내용의 글은 아방가르드 정신의 선언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미술사에 남겼다.
그는 카달로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830년대 사람들에게 '낭만적'이란 타이틀이 붙여진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내게 '사실주의자'란 타이틀이 붙여졌다. ... 나는 고대와 현대 미술을 어떠한 독단적 개념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 채 배웠다.
나는 고대 미술을 모방하지도 않고 현대 미술을 배끼지도 않으며 ... 지식을 통해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 되었다.
화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이 본 것들,
즉 살아 있는 미술을 창조하는 것으로 시대의 풍습, 아이디어, 관점을 기록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밀레와는 달리 쿠르베는 예술가의 감성을 그림에서 삭제했으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재현했다.
그는 회화의 목적이 더이상 이야기를 전하거나 성서의 내용 또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교육적인 목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일시적인 환경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임을 주장했다.
아름다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나 전설에서 찾을 필요가 없으며,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 가운데 있는 것이며, 머리 속에서 관념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 앞에 전개되는 대상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의미했다.
사실주의는 쿠르베에게 '인도주의 미술Humanitarian Art'이었고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의미했다.
쿠르베는 17세기 이래 가장 비감상주의적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였으며 1850년과 60년 사이에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1860년대 후반부터는 바다를 좀더 과격하게 표현했으므로 그때부터 그의 그림은 표현주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실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에 의해 주제가 다양해졌는데
이국적 장면, 즐거움을 제공하는 일화, 모험적인 풍경이나 편안함을 제공하는 풍경,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정물 등이었다.
이런 주제들은 사실에 입각한 것들로 사실 그 이상의 논리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누드에서 많은 사실주의 그림이 쏟아져나왔다.
누드의 경우 고전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대중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려는 의도와 더불어서 전통을 쉽게 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과격한 화가들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는 누드를 그렸는데
물속의 누드나 물가의 누드를 그리면서 <일광욕하는 사람들 Bathers>이란 제목을 주로 사용했다. 낭만주의 이후 누드가 부쩍 화가들의 선호하는 주제가 된 것은 대중이 육체적 욕망을 일으키는 누드를 보기 원했기 때문에 기인하기도 했다.
쿠르베의 <일광욕하는 사람들>이 1853년 살롱전을 통해 소개된 후 사람들이 경악해 했는데
10년 후 마네가 <올랭피아 Olympia>를 그려 더욱 놀라게 했다.
마네는 창녀의 누드를 현대의 비너스의 모습으로 파리 시민들에게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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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네덜란드 시대의 불안을 표현한 보스의 <최후의 심판>

 

보스의 <최후의 심판>은 당시 네덜란드 시대의 불안을 표현한 작품이다.
현존하는 작품들 중 가장 큰 그림으로 야심을 갖고 그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작품 왼쪽 날개에는 필리프의 주문대로 <대 성 야고보 St. James the Greater>가 오른쪽 날개에는 <성 바보 St. Bavo>가 그려져 있다.
순례자들의 수호성인 야고보는 고행자의 모습으로 광야를 걷고 있다.
그의 모자에는 가리비 조개 장식이 달려있는데 순례자 배지이다.
네덜란드 귀족 태생의 바보는 실내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모습이다.
전설에 의하면 크리스천으로 개종한 후 바보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광야에서 은자로 살았다.
패널화 날개를 열면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시작되는데, 최후의 심판에 인류 최초의 사건이 포함된 건 드문 예이다.
왼쪽 날개에는 에덴동산에서의 타락한 아담과 이브를 <낙원 Paradise>의 장면으로 장식했고 오른쪽 날개에는 이와 반대되는 <지옥 Hell>을 처참한 상황으로 묘사했다.
<낙원> 하단에 아담이 잠들었을 때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 하나님이 이브를 창조하는 장면이 있고 그 위 선악과를 따 먹게 하려는 유혹이 묘사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칼을 든 천사의 위협을 받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 있다.
상단에는 하나님을 반역한 천사들의 추방이 묘사되어 있으며 천사들은 지상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로 변한다.
타락한 천사들의 왕은 루시퍼Lucifer이며 그가 아담을 질시하여 죄를 짓게 만든 장본인이다.
보스는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근거해 죄의 기원과 이에 대한 인과응보의 심판을 연결시켰다.
보스는 최후의 심판이 불로써 이루어지는 참상으로 묘사했는데,
13세기의 찬송가 『디에스 이라에 Dies Irae』는 최후의 심판을 “분노의 날, 세계가 불에 타 재로 사라지는 날”로 예고했다.
보스는 요한이 쓴 묵시록에 서술된 그리스도가 정죄하기 위해 재림하는 최후의 날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이 환영으로 본 묵시를 드라마처럼 펼쳐 구체적으로 서술한 신약성서 마지막 권인 요한묵시록은 15세기 말 시대적 불안으로 인해 널리 읽혀졌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며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땅 위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요한묵시록 1:7)

화면 중앙 넓게 펼쳐진 계곡은 최후의 심판의 장소로 알려진 여호사밧 골짜기Valley of Jehoshaphat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구약시대 예언자 요엘은 최후의 날을 예고했다.

그 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주리라.
나는 하늘과 땅에서 징조를 보이리라.
피가 흐르고 불길이 일고 연기가 기둥처럼 솟고
해는 빛을 잃고 달은 피같이 붉어지리라.(요엘 3:2~4)

뭇 민족은 떨쳐 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오너라.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방 모든 민족을 심판하리라.(요엘 4:12)

보스는 사탄의 군대가 저주받은 자들을 무리지어 공격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영원한 고통이 시작되고 있음을 표현했다.
신비주의를 추구한 선각자들은 지옥을 영원히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옥은 그런 정신적인 고통의 상태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심한 아픔이 끊임 없이 지속되는 악몽과도 같은 곳으로 상상되었다.
보스는 다수가 생각하는 그런 육체적인 고통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지옥을 묘사했다.
저주의 심판을 받은 자들은 놀라며, 겁에 질리며 벌거벗겨진 육체는 토막으로 잘리우고, 뱀에 물리며, 용광로 속에서 달궈지고 잔혹한 고문을 가하는 기구 속에 갇혀진다.
고통을 가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화면 중앙에 배가 불룩한 생물체가 한 남자를 쇠꼬챙이에 끼워 양념을 바르고 천천히 굽는다.
발 아래 계란 두 개를 바닥에 놓고 여성 악마는 저주받은 자를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굽는다.
갖가지 괴물들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오른쪽 날개 <지옥>에는 갈귀처럼 생긴 것을 오른손에 든 괴물이 염라대왕처럼 위엄을 갖추고 있으며 발 사이로 꼬리가 앞으로 나와 있다.
뒤로는 불구덩이가 여기저기 있어 불의 재앙이 땅의 곳곳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중세에 문학을 통해 지옥이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되었다.
중세 사람들은 악마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이 아니라 온갖 기괴한 동물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는 창조물들로 인식했다.
악마는 쥐, 개구리, 두꺼비, 파리, 곤충, 기생충, 물고기, 개, 곰, 돼지, 뱀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문학에서 지옥에 관한 일반적인 형식은 지옥을 다녀온 사람이 모험담을 회상하는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형식의 가장 유명한 것이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편 Inferno’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의 큰 별로 불리우는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제공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익명의 작가가 쓴 『툰데일의 지옥 환영 Tundale’s Vision of Hell』과 나사로가 부활 후 전한 연옥의 묘사가 더 보편적으로 알려졌다.
『툰데일의 지옥 환영』은 님베겐Nijmwegen 출신 출판업자에 의해 네덜란드어 판으로 1484년 스헤르토겐보스에서 출간되었으며 보스가 이 책을 읽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지상 쾌락의 동산>에서 <지옥> 패널에 그린 내용은 튠데일의 지옥 환영과 관련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보스는 그 밖의 지옥에 관한 문학작품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는 특정한 묘사들인 불구덩이, 용광로, 호수, 강 등을 예로 들면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지옥의 요소로 삼았던 것들이다.
화면 중앙 오른편에 불에 달궈진 자를 망치로 두들기는 인간 형상을 한 악마는 보스 이전에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화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보스가 문학작품과 과거 회화에서 일부 인용했음을 알게 해준다.
바위를 기어올라 저주받은 자의 피를 먹어치우는 두꺼비, 독사, 용 등도 과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본장식화가들도 사본의 가장자리를 괴물들로 장식했는데 보스가 이런 그로테스크한 것들에서 영감을 받은 건 당연하다.
사본장식화가의 모티프를 변형한 것으로 오리 머리를 한 괴물이 왼손에 활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화살에 맞은 인간을 나무에 거꾸로 매단 채 걸어가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보스는 이런 익히 알려진 괴물과 동물들 외에도 자신이 고안한 다양한 형상의 괴물과 동물들을 삽입하여 지옥의 세계를 더욱 더 넓고 복잡하게 구성했다.
화면 하단 오른편 커다란 칼을 짊어진 날개 있는 괴물은 보스의 창조물이다.
그는 사본장식화가의 삽화를 커다란 패널화로 확대시킨 최초의 화가였으며 자신의 창작을 보태어 구성을 더욱 더 파노라마가 되게 했다.
그의 지옥도는 다양한 형상들로 복잡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었다.
『툰데일의 지옥 환영』을 포함해서 최후의 심판에 관한 문학 서적과 회화 그리고 설교를 통해서 저주를 받게 되면 어떠한 벌을 받게 되는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란 어려운데, 당시의 문학과 미술 그리고 관습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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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르텐는 미의 명칭이며 느낌의 표명으로서의


데카르트가 종합과 분석의 수학적인 방법으로 사물의 모습이나 크기를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성격으로 파악하려고 한 명백하고도 명증적인 인식방법은 예술의 형이상학을 좀 더 체계화 해주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들 Principles of Philosophy』과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 관한 논문 Discourse on Metaphysics』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1714-62)은 데카르트의 명백하고 모호한 개념들 사이, 구분되고 혼돈된 개념들 사이의 구분방식으로 인식을 상급인식(오성적 인식)과 하급인식(감성적 인식)으로 구분했다.

그는 미의 명칭이며 느낌의 표명으로서의 심미적 지식, 느낌 혹은 감각적 지식의 완전함이 “지성적 지식 속에서 나타났을 때 이를 참”으로 보았다.
보상케Bernard Bosanquet는 이런 완전함의 내용에 대한 그의 분석이 그의 미학의 확신에 적절치 못했음을 『미학사 A History of Aesthetic』에서 지적했다.
보상케는 그의 미학이 낡은 이론들 그 이상으로 진전되지 못했고 플라톤의 사상이 배어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동향의 발단이었다고 했다. 보상케는 완전함의 개념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견해에 매우 중요했는데 이 개념이 볼프를 통해 바움가르텐에게 전달되었다고 보았다.18-1)
따라서 완전함은 모든 것이 실재한다는 하나의 선결조건이 되었는데 왜냐면 바움가르텐에게 실재란 많은 조건들을 조화시키는 힘에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볼프는 완전함을 부분과 전체 혹은 다양함 안에서의 통일에 대한 단순한 논리적 관계로 보았는데 이런 견해를 바움가르텐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바움가르텐은 미의 내용을 다양함의 통일 그 이상으로는 간주하지 않았으며, 감각에 의한 지각 속에서의 부분들의 통일인 그 감각적 지식의 완전함에 상반되는 것을 추한 것으로 여겼다.

독일 볼프Wolff 학파를 대표하는 바움가르텐은 미학19)이란 말을 처음 사용하여 미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 로마의 명칭인 cognitio aesthetica, 혹은 줄여서 aesthetica란 명칭을 붙였다.
그는 1750년에 최초의 미학서 『미학 Aesthetica』을 출간했는데 미학을 아름다운 예술론, 저급한 인식형식, 아름다운 사유형식으로 정의했으며, 일반적으로 감성적 지각의 학문으로 규정했다.
그에게 있어 미학의 목표란 감성적 인식의 완성, 즉 미였다.
그의 이론이 수사학과 시학에 근거했음은 그가 자주 인용한 키케로, 폴리니우스, 롱기누스, 퀸틸리아누스 등의 이름들로 알 수 있다.
그가 미술품을 개념적으로 규정하다 보니 오성이 범주에 따라 현상들을 정돈하는 규정적 판단과 감정의 형태 하에서 주체의 능력들 간의 비규정적인 관계와 연관되는 반성적 판단에 혼동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받았다.20)

이 시기에 독일인은 아직도 완전미의 개념을 찾고 있었다.
크리스천 볼프Christian Wolff(1679-1754)는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따라 이런 관점에서 미를 고찰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우주의 존재에서 완전무결함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밖의 어떤 가능한 시스템도 덜 완전했다.
이런 관점은 바움가르텐에게 전수되었다. 볼프는 지성적 인식cognittio intellectiva과 감각적 인식cognittio sensitiva을 구별 짓는 고대의 구분을 계속 유지하면서 감각적 인식을 미의 인식과 동일시했다.
그에게 미적 경험이란 하나의 인식이었지만 그것은 완전히 감각적인 것representatio sensitiva이어서 혼돈스러울 만큼 열등한 종류의 인식이었다.
미를 감각적 인식의 완전성으로 관련지운 것은 이내 실책으로 낙인찍혔지만 그와 볼프학파뿐만 아니라 18세기의 많은 이들이 이런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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