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의 묵시록


보스는 묵시록적 장면들을 주로 그렸다.
1508년경 혹은 이후에 그린 것들로 보이는 <홍수 Flood>와 <화재의 참화 Devastation by Fire>는 양식이 상이하여 학자들 사이에 문제작으로 거론된다.
둘 다 종말론적인 지옥의 장면이다.
두 점 모두 세로로 기다란 직사각형의 그림들로 앞과 뒤 양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어 세쪽 제단화의 부분으로 추정된다.
중앙 패널은 현존하지 않는다.
보이만스 반 부닝겐 뮤지엄Boijmans Van Beuningen Museum이 1981년 이것들을 보수했는데, 두 점 모두 한쪽 끝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채 있어 이 부분이 중앙 패널에 접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들이 보스의 마지막 작품으로 가장 성숙한 회화로 본다.
<홍수>에서 보스는 배가 아라라트 산Mount Ararat 정상에 정박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노아의 방주에는 네 쌍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이들은 창세기 7장 13절이 말하는 600살의 노아와 아내, 그리고 세 아들 셈, 함, 야벳과 그들의 아내들이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는 이들 여덟 명만 홍수의 재앙 속에서 살아 남게 했다.
동물은 암수 한쌍씩 방주에 실어 씨가 마르지 않도록 했다.
노아의 이야기는 크리스천에게 익히 알려진 이야기로 12세기 베네치아 성 마가 교회에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성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렇게 야훼께서는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짐승들, 길짐승과 새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살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셨다.
이렇게 땅에 있던 것이 다 쓸려 갔지만, 노아와 함게 배에 있던 사람과 짐승만은 살아 남았다.
물은 백오십 일 동안이나 땅 위에 괴어 있었다.(창세기 7:23~4)
홍수의 재앙으로 노아의 가족만 살아 남고 인류가 전멸했다는 이야기는 곧 인류 가운데 흠이 없던 혹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의로운 인간은 노아뿐이라는 것이다.
홍수의 재앙은 시작일 뿐 또다른 재앙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만 그 날이 언제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예수가 말했다.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다.
그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홍수를 만났는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마태복음 24:37~39)
다음의 재앙은 <화재의 참화>다.
베드로가 말했다.
그들은 아득한 옛날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땅이 물에서 나왔고 또 물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물에 잠겨서 옛날의 세계는 멸망해 버렸습니다.
사실 하늘과 땅은 지금도 하나님의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에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5~7)
처음에는 물의 재앙이 있었지만 이제는 불의 재앙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이런 예언은 요한묵시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보스는 성서를 근거로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화재의 참화 Devastation by Fire>로 묘사한 것이 네쪽 패널화의 세 번째 그림이다.
그는 따뜻한 느낌을 주는 오렌지색과 황색 그리고 차거운 느낌을 주는 회색-파란색을 주로 사용했다.
중앙 왼편에 사람들이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성서의 구절을 상기시킨다.
그러자 세상의 왕들과 고관들과 장성들과 부자들과 세력자들과 모든 노예와 자유인들이 동굴과 산의 바위 틈에 숨어서 산과 바다를 향하여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옥좌에 앉으신 분의 눈을 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숨겨다오.
그리고 어린 양의 진노를 면하게 해다오. 그들의 큰 진노의 날이 닥쳐왔다.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고 부르짖었습니다.(요한묵시록 6:15~17)
보스는 <화재의 참화> 패널 뒷면 상단에 마귀들이 거주하는 화재가 난 건물을 빠져나오는 흰옷의 놀라움을 표하는 여인을 묘사하고 무릎을 꿇은 사람이 이를 바라보도록 했다.
하단에는 땅에 넘어진 남자의 모습이 보이며 그는 갈고리 모양의 기다란 발톱을 한 마귀가 말을 갈취하자 낙마한 것으로 보인다.
<홍수> 패널 뒷면 상단에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남자가 마귀들에 의해 뭇매를 맞고 있으며 하단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배경에는 천사가 헐벗은 남자에게 겉옷을 주고 있어 성서의 구절을 상기하게 한다.
그들은 흰 두루마기 한 벌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동료 종들과 형제들이 다 죽어서 그 수가 찰 때까지 잠시 쉬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요한묵시록 6:11)
흰 두루마기는 구원을 상징한다.
이 두 패널은 한쌍을 이루며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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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중세의 분류

 

고대의 예술 분류는 중세에 이론적·실천적으로 사용되면서 예술을 실천적 이성의 한 상태로 간주되었다.
아퀴나스는 예술을 “이성의 올바른 배열”로 정의했으며,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1266-1308경)는 “제작되어야 할 것에 대한 올바른 관념” 혹은 “참된 원리들에 근거한 제작능력”으로 정의했다.
중세에 예술은 고정된 규범과 길드의 규칙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후고Hugh of St. Victor(1096-1141)는 『학습론 Didascalicon』 2장에서 “예술은 규칙과 법규들로 되어 있는 하나의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적었다.
예술이라면 교양예술을 뜻하게 되었는데 일곱 개의 교양 과목은 논리학, 수사법, 문법, 산술, 기하, 천문학, 음악 등이었다.
이것들은 오늘날 예술이 아니라 학문이다.
중세에는 비교양 예술에 대한 관심도 컸으며, 이런 예술을 ‘기능술’로 불렀다.
기능술은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전통적인 일곱 개의 교양과목과 균형을 맞추어 일곱 가지로 구분되었다:
의복공급lanificium, 건축을 포함하여 주거지와 연장공급armatura, 농작술agricultura, 식품공급venatio, 항해술navigatio, 의술medicina, 오락제공theatrica. 이들 가운데 armatura와 theatrica, 즉 건축과 오락이 오늘날의 순수예술에 가깝다.
음악은 수학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교양예술로 간주되었지만 시는 일종의 철학이나 예언력, 기도문 혹은 고백문 같은 것이었으므로 전혀 예술로 취급되지 않았다.
회화와 조각은 분명히 법칙을 이용하는 기술들이었지만 교양예술로도 기능술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타타르키비츠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회화와 조각은 유용할 때만 인정받는 기능술로 분류되었고 회화와 조각의 실제적 유용성은 대단치 않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는 염격한 의미에서 우리가 예술로 간주하는 것이 중세에는 예술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었다는 그간의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클레니우스R. Goclenius(1547-1628)가 1607년에 출간한 『철학사전 Lexicon Philosophicum』에 예술이 건축과 같은 ‘주요’ 예술과 회화와 같은 ‘부수적’ 예술로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예술에 대한 고전적 분류가 르네상스 시대에 그대로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르네상스 및 바로크 시대에 넓은 의미의 예술들 중 회화, 조각, 시, 음악 등과 같은 예술들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분리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싹텄다.
다만 명확하게 표현되지 못했을 뿐이다.
순수 혹은 아름다운이라 칭하는 예술과 그 밖의 예술을 분류하는 데는 실로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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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69)는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의 천재성은 유화, 드로잉, 판화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무대 위의 한 장면처럼 그리는 그는 명암을 사용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줄 알았고 색을 강도있게 사용하면서 사람들의 동작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표현적인 얼굴의 묘사와 더불어 주제를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초상화를 주로 그린 그는 인물의 심리를 파악하여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요소들을 표정 있는 얼굴을 통해 시각적으로 묘사할 줄 알앗다
그는 회화의 심리학자였다.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의 리덴Lieden에서 5대째 물방앗간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9자녀들 가운데 8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가톨릭으로부터 칼빈교로 개종한 사람이었으며 어머니는 리덴 빵집의 딸이었다.
렘브란트는 7살 때 라틴 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했는데 형들이 모두 상업을 배우려고 진학한 것에 비하면 렘브란트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나타냈으므로 아버지는 그를 대학에 진학시켰다.

렘브란트는 1620년 5월 20일 리덴 대학에 진학했지만 곧 자퇴했는데 회화와 드로잉에 더욱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베네치아, 로마, 나폴리에서 15년 동안 거주하다가 막 돌아온 반 스와넨부르흐Van Swanenburch로부터 회화의 기초를 수학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스승을 통해 미켈란젤로에 관해 들으면서 미켈란젤로의 정밀한 사실주의와 명암법에 매료되었다.
사실주의와 명암의 효과적 사용은 렘브란트 회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반 스와넨부르흐로부터 3년 동안 수학한 후 그는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피에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1583~1633)으로부터 수학했는데 그가 고전과 신화 그리고 종교적 주제들에 관해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인 것 같다.
리덴에서 렘브란트가 이런 주제를 배우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라스트만도 이탈리아에서 3년 동안 체류하면서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몇몇 예술가들의 발명적 양식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예술의 고장이었으므로 유럽 예술가들은 그곳을 다녀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라스트만은 이탈리아 대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1620년대에 네덜란드에서 진보주의 화가로 명성이 높았고 젊은 화가들이 그를 추종했다.
이런 명성 있는 화가로부터 렘브란트가 6개월 동안만 수학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라스트만은 그에게 회화적 구도와 채색을 가르쳤는데 극적인 장면을 명암을 사용해 더욱 더 극적인 장면이 되게 하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인물이나 동물의 자세와 위치 그리고 얼굴 표정을 어떻게 나타내는지에 관해 가르쳤고, 풍경과 건축물을 그릴 때 각 요소들을 구성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라스트만의 가르침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했는지는 그의 그림과 라스트만의 그림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라스트만의 회화방법은 그대로 그에게 전수되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곧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났는데 그가 그린 <천사와 예언자 발람 The Angel and the Prophet Balaam>을 보면 동일한 주제로 라스트만이 1622년에 그린 것과는 구성이 달랐고 오히려 16세기 초의 화가 더크 벨러스Dirk Vellert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1620년대에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16세기와 17세기 이미지들을 혼용하는 그림을 그렸고, 그가 그린 <토빗과 새끼연소를 들고 있는 안나 Tobit and Anna with the Kid>를 보면 화면을 그가 여러 곳에서 요소들을 구해 혼용했으나 빛을 중요한 요소로 사용했음을 본다.
처음으로 그는 그림의 배경을 어둡게 만들었으며, 빛은 바랬고, 벽의 선반은 어두워서 알아보기 어려우며, 의도적으로 모델들을 연출시켜 매우 극적인 장면으로 감성의 톤을 고조시켰음을 본다.
그는 빛을 사용하여 명암을 현저하게 만들었는데 라스트만의 그림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고 오히려 또다른 네덜란드 화가 제리트 반 혼토르스트Gerrit van Honthorst의 회화방법에 더 근사함을 알 수 있다.
반 혼토르스트는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1620년에 돌아온 화가로 미켈란젤로의 회화방법과 이탈리아 북쪽의 양식을 혼용하여 촛불을 그림에 사용하면서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이런 그의 그림을 네덜란드 사람들이 매우 좋아했다.

촛불과 램프에 의한 빛을 사용하여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들로는 <환전꾼 Money Changer>, <스투디오에 있는 예술가 The Artist in His Studio>, <이집트로 피신 The Flight into Egypt> 등 많다.
<엠마우에서의 부활한 그리스도 The Risen Christ at Emmaus>에서의 빛의 사용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불분명하게 만들면서 그리스도에게 경이와 존경을 나타내는 모델의 얼굴 표정을 헐리우드 일류 스타의 연기를 방불케 한다.
게다가 화면 뒤로 여인의 행위를 작은 조명으로 연출한 것은 그림의 주제를 더욱 더 극적이며 입체감을 주는 효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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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의 정체된 허무주의 예술

이 글은 교수신문에서 청탁받아 쓴 글입니다.

이우환의 정체된 허무주의 예술

1960년대 말 미니멀리즘 이후 미술은 통로가 막힌 외길로 들어섰다.
공간에 대한 사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형상의 최소화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 했다.
70년대 들어서서는 형상마저도 사라지고 개념의 문제에 집착하게 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미술의 주류 미학이 된 '예술은 모방'이란 미학 자체에 회의를 일으키면서 사고의 혁명이 일어났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하나와 세 의자 One and Three Chairs>는 개념예술의 상징적 작품이다.
미니멀리즘이 한창 성행할 때 이우환은 삼십대였고 자연히 미술과의 만남은 미니멀리즘에서 시작된다.
개념미술은 일본대학교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그의 지성적 취향에 맞았고, 그는 미술을 통해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작업을 했다.
그의 초기 작품을 보면 서양미술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공간이 있다.
이것이 동양의 관념으로 서양사람들로서는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들에게는 예로부터 나와 타자의 관계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 나와 타자 모두 사회적 구성원들에 불과하고 사회적 상황이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우환 작품의 특징은 사회적 상황이 집단적 이성의 한계로 폐허가 된 마당에 순수 나와 타자와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역설한 데 있다.
이런 시각은 본질적이며 존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근대를 폐허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 자연히 그는 문명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60년대, 70년대 그의 작품은 동, 서양에 시사하는 바가 많았고 자아의 본질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그의 미학이 정체되었다는 사실이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래 그가 피력한 예술관을 보면 삼십여 년 동안 달라진 게 없고 매우 심약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우환 예술의 바탕에는 허무주의가 깔려 있다.
무기력한 이성의 자조적 성격이 농후하다.
이는 그가 바라보는 역사와 현 세계에 기인하는데 동감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한 지성인이 오랜 사변 끝에 결론적으로 단정지은 것을 무턱대고 동감할 수 없다는 말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적 요소는 늘 있어 왔고 이념과 문화의 충돌에서 맹목적 물리적 현상이 인간을 무기력한 상태로 내몰고 결국 허무주의의 너울을 쓰고 더이상 희망이 없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갖게 만든다.
허무주의는 곧 패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며 예술에 있어서의 허무주의는 도피의 성격이 강하다.
비판의 객관성을 띠기 위해 그의 논리에 맞춰 다음과 같은 비판론을 제기한다.

그가 2002년 2월 파리에서 쓴 <여백의 예술>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의 근래의 심경을 알 수 있다.
"... 캔버스나 어떤 곳에 붓으로 점 하나 둘 찍는 일이나, 전시장이나 어떤 곳에 철판과 돌 한두 개 갖다놓는 ㅇ리이 과연 '예술'이 파산한 시대의 표현으로서 얼마만한 새로움과 필연성을 갖는가. 또 소위 '인간'이 퇴장한 오늘날 조금이나마 무슨 말로 누구에게 글을 쓴다는 것일까."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 대했을 때 그의 명성가는 달리 나는 새로움을 느끼지 못했고 시대적 필연의 예술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는데 집에 와서 그의 글을 읽고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우환은 "물론 제도로서의 문화란 카테고리는 존재하고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벌써 썩고 금이 가서 사상적으로는 설득력이 없는 것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이라는 말로 현재의 문화를 "근대의 폐허"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는 자신의 예술행위를 근대의 폐허 가운데서 "잡것이 배어든 자기 이질성"으로서의 '나'로서 "불순분자의 증표"를 나타내보이는 것으로 본다.
얼마나 자포자기적인 탄식인가!

예술을 떠나서 그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면 이해되는 점이 많다.
일본에서 오래 지내다보니 일본인은 자신을 "침입자 취급"했고, 국내의 한국인은 "일본 바ㅏㅁ을 탄 도망자"로 몰았으며, 더 나은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삼십여 년 헤맸더니, 그쪽에서는 또 동양적이니 이방인이니 하며 칭찬으로 점잖게 제외시키려 들지 않는가" 하고 탄식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설 곳을 찾지 못하자 사람을 만나 관계를 상대화하는 데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의 예술은 이런 상황 설정에서 시작되었다.

이우환의 미학은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표현은 근대적인 자기실현과 같은, 주변과 절단된 오브제주의를 지양해야 한다. 이미 캔버스가 내가 경영하는 식민지가 아니듯이 사람도 자연도 붓도 물감도 나의 이미지나 재료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사이좋은 친구인 한편 미지수의 남이다."
근대의 폐허의 절망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폐허만은 자각하고 주저앉아 '고도 씨'를 기다리는 허무주의 미학이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표현이다.
그는 "표현이란 어차피 설정일진대"라는 말로 "어떤 그림의 울림이" 나오지마는 "현실 공간과 뉴트럴하게 연관"짓는다고 해서 "이런 조각에서 무엇이 보이나" 하고 예술가 개인의 표현이 무용함을 주장한다.

이우환의 미학에 대한 나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그가 말한 "이쪽과 저쪽이 만나고 매개할 수 있는 중간항"의 설치가 곧 예술이다.
그는 "중간항에 있어 나와 타자와의 상호 한정이 함축과 암시를 자아내어 지각과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표현으로만 가능하다.
그는 나와 타자의 만남을 강조하지만 버스나 전철과 같은 우연한 공간에서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한 만남 자체가 설정이다.
나와 이우환이 만나고 매개될 수 있는 중간항은 갤러리와 그가 자신의 사고를 표현한 <여백의 예술>이다.
그는 자신을 충분히 표현했고 나는 만남을 통해서 그에 관한 나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했다.
만약 그가 끝내 오지 않는 '고도 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나를 만난 것이 아니고 앞으로도 누구와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만남을 찾아서>라는 그의 예술적 전제는 삼십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것처럼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나는 이를 정체된 허무주의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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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어두움을 뚫고 나오는 거대한 빛을 바라보며 황홀감을 맛본다

 

베니스의 총독 궁전에 소장된 <지상의 천국 Terrestrial Paradise>과 <축복받은 자들의 승천 Ascent of the Blessed> 그리고 <저주받은 자들의 추락 Fall of the Dammed>과 <지옥 Hell>을 <최후의 심판> 양날개를 구성한 패널화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고 독립된 작품으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그림에 두터운 붓칠이 가해졌고 진한 니스로 인해 손상되었다.
이것들이 보스의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려워 그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 있다.
<지상의 천국>에는 천사가 대리석 트로피처럼 생긴 데서 축복받은 자들을 생명의 샘이 솟아나는 구릉진 곳으로 안내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하며 바라본다.
이런 구릉진 동산은 『툰데일의 지옥 환영』에도 기술되어 있으며 당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낙원이다.
<축복받은 자들의 승천>에는 축복받은 자들이 육체를 벗어버리고 자유로워진 영혼이 밤의 길을 통해 승천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하늘에서 어두움을 뚫고 나오는 거대한 빛을 바라보며 황홀감을 맛본다.
연통처럼 생긴 데서 나오는 빛은 당시 12궁도 다이어그램zodiacal diagram에서 혹은 스헤르토겐보스의 운하에서 영향을 받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는 12궁도를 회랑으로 변형시켜 축복받은 자들이 승천하는 통로가 되게 했다.
이 염천coelum empyreum을 통해 영혼은 하나님과 결합된다.
이는 중세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한 신과의 일체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저주받은 자들의 추락>이다.
저주받은 자들은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 추락하다가 악마에게 붙잡혀 바위 틈새로 뿜어나오는 지옥 불에 태워진다.
<지옥>에는 화염을 내뿜는 산이 있고 아래 바닷가에는 절망한 영혼들이 있다.
여기서는 고통이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 나타나 있는데, 박쥐 날개를 한 악마가 잡아당기는 것도 모르고 한 영혼은 좌절한 자세로 앉아 있다.
<지옥>의 구성은 간결한 점에서 보스의 작품들 중 이례적이다.
보스가 신에 대한 개념을 빛으로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플라톤 이래 만물의 근원으로 빛이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에서도 빛은 신성을 의미한다.
16세기 초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도 <성모자 Madonna and Child>를 빛 가운데 묘사했는데, 화면 상단 천상의 악사들이 아기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를 빛으로 뿌리는 장면이다.
손상이 심해 부분만 남아 있는 <최후의 심판>이 뮌헨에 있다.
말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1504년 미남으로 알려진 필리프 공작으로부터 주문받은 제단화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하단 왼편에 커다란 크기의 옷만 보이는데, 이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일부러 과장되게 크게 그린 인물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식의 과장법은 일부 화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었다.
왼쪽 중앙과 상단에 땅으로부터 부활하여 출몰하는 인물들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 왕과 성직자의 모습도 보인다.
왕과 성직자는 그들이 쓰고 있는 관으로 구별 된다.
주변 괴물들은 기다랗고 화려한 날개를 달고 있고 코나 턱에는 가는 털이 있으며 이것들은 어두움 속이지만 빛을 발한다.
괴물들은 저주받은 자들을 괴롭히는 데 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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