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에게 있어서 미란


계몽주의 시대는 예술을 순수예술과 기능술로 나눴을 뿐 순수예술을 세분화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예외가 하나 있었는데 시각예술에서 문예를 분리시키고 순수예술에서 순문학belles-lettres을 분리시킨 것이었다.
계몽주의 시대는 언어의 제작과 사물의 제작이라고 하는 창조성의 심오한 이원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인식은 한 예술을 다른 종류의 예술을 본받도록 하지는 슬로건인 “시는 그림과 같이 ut pictura poesis”와 “그림은 시와 같이 ut poesis pictura”를 반대하는 것이었다.28)
이에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이 컸던 사람이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1729-81)이었다.
바움가르텐과 마찬가지로 크리스천 볼프를 통해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받은 레싱은 미학에 새로운 활기를 고취시켰다.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말년에 신학에 몰두했지만 그의 주요 관심사는 문학과 미술이었다.
레싱에게 있어서 미란 질료적인 것으로서 시의 본질적인 특성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시에서의 미의 지위에 관해 언급할 때 그는 질료적 미가 얼마만큼이나 언어로 유용하게 묘사될 수 있을까 하는 데 의문을 제기하면서 버크의 우아함의 개념을 따라 다만 그것의 결과들을 시사하거나 매력적인 점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라고 했는데 그는 미를 운동 안에서 정의했다.
그에게 시와 미술은 대조가 되는 것들이었다.
그는 1766년에 출간한 『라오콘 혹은 회화와 시의 경계 Laokoon oder uber die Grenzen der Malerei und Poesie』(짧게 ‘라오콘’이라 한다)에 적었다.
회화와 시는 서로 비슷하게 여러 가지의 상징들을 사용한다.
말하자면 회화의 상징은 공간 내의 형태와 색이며, 시의 상징은 시간 속에서 발음된 소리이다.
회화의 상징은 자연스러운 것들이며, 시의 상징은 임의로운 것들이다.
… 회화는 공간적으로 연속된 대상들을 재현할 수 있으며, 시는 시간적으로 연속된 대상들을 재현할 수 있다.
『라오콘』의 핵심 내용은 문학과 조형미술의 경계를 긋는 것, 즉 시적 그리고 회화적 미 사이의 관계였다.
루카치는 그의 논증 중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아가멤논의 왕홀王笏, 아킬레스의 방패, 헬레나 그리고 트로이의 노인들을 지적하면서 그가 회화에서는 반드시 직접적·사물적·감각적 존재의 모든 특징들을 갖추고 나타날 그런 문학의 대상이 문학적으로는 어떤 특정한 행위의 단순한 요소가 됨을 파악했다고 보았다.
레싱은 조형미술은 “늘 가변적인 속성으로 인해 결코 단 한순간 이상의 어떤 것을” 재현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라오콘』에 “이 단 한순간이 예술을 통해 불변의 지속성을 얻게 되면 일시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그 어떤 대상도 표현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고 적었다.
그에게 미와 표현은 양립되지 않는 것들로 하나가 오직 다른 하나의 손실에 의해서만 존재했다.
이런 종류의 태도를 빙켈만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빙켈만은 『라오콘』의 특징인 상대적인 냉정을 그리스인의 정신에 일치하는 영혼에 구성된 위대한 표현으로 보고 그것이 고통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에 대한 그의 분류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는데 이는 『라오콘』의 핵심이 되는 내용이다.28-1)
나는 최초의 근거로부터 문제를 연역하기를 시도해야만 한다.
… 나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만약 회화가 시의 매우 다른 방편들media이나 기호들인 모방을 사용하는 것이 사실일 경우 회화는 공간에 형태와 색을 사용하는 것인데 비해 시는 시간 안에서 색조들을 또렷하게 발음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그 기호들이 기호로서 언어의 개념을 표시한 것과 편리한 관계를 가져야만 한 것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면 공존하는 기호들은 공존하거나 그것들의 일부가 공존하는 대상들을 오직 표현할 수 있으며, 성공적인 기호들은 성공적이거나 그것들의 일부가 성공적인 대상들을 오직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공존하거나 그것들의 일부가 공존하는 대상들을 본체들이라 한다.
결과적으로 그것들의 시각적 특징들과 함께 본체들은 회화의 고유한 대상들이다.
… 성공적이거나 그것들의 일부가 성공적인 대상들을 행위들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행위들은 시의 고유한 대상들이다.
… 하지만 본체들은 공간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시간 안에서도 존재한다.
그것들은 지속되고, 그것들의 존속하는 매순간마다 다르게 나타나며, 다른 결합들로 존재한다.
이런 순간적 현상들과 결합들 각기는 선행하는 것의 결과로서 즉 말하자면 행위의 중심이다.
결론적으로 회화는 행위들을 또한 모방할 수 있지만 오직 암시로 본체들을 통해 나타낼 뿐이다.
… 다른 한편 행위들은 따로 존재할 수는 없지만 존재들에 존속되어야만 한다.
이런 존재들이 본체들인 한에서 혹은 본체들로 간주되는 한에서 시는 본체들을 또한 묘사할 수 있지만 오직 암시로 행위들을 통해 할 수 있을 뿐이다.
… 공존하는 구성들 속에 있는 회화는 오직 행위의 한 순간만을 사용할 수 있고, 그러므로 해서 그 선행하고 버금가는 것들이 가장 명료해지는 것들로부터 가장 충만한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 성공적인 모방에서의 시가 오직 본체의 단일한 특징을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꼭 같이 시는 요구되는 관점에서 깨닫게 하는 그 대상의 가장 감각적인 이미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회화적 형용 어구들의 단일의 규칙과 본체적 대상들의 설명 안에서 비축의 규칙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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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건초 수레>


보스는 죄와 어리석음을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으로 보았으므로 화염에 싸인 지옥을 만인의 운명으로 표현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본성을 비관적으로 보는 견해는 <최후의 심판> 이후에 제작한 유사한 구성의 <건초 수레>와 <지상 쾌락의 동산>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인물과 사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인물들은 상호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매우 낯설게 보이는 에스코리알 소재 <건초 수레 The Hay Wain>는 1498년과 1504년 사이 스헤르토겐보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도시 대부분의 인구가 들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건초 수레는 그들에게 매우 낯익은 오브제였다.
건초는 겨울 가축 사료로 매우 중요한 준비물이다.
건초hay(hooi)는 육신의 무상함을 상징하며 동시에 궁극적으로 물질이 무가치함을 의미한다.
15세기 플랑드르 민요에는 부자를 건초더미에 비유하면서 모든 사람이 함께 사용하라고 신이 제공한 것들을 부자들이 한 곳에 쌓아둔다고 비탄의 노래를 불렀다.
많은 격언에서 건초는 세상의 무상한 것들을 상징했으며 불멸하는 영혼의 영생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우리 말에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아무 쓸모 없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15세기 미술품은 당시 사람들이 근면과 게으름, 가난과 부유함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스는 여러 점의 작품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었으며 종종 부분적으로 다루었지만 주제로 다룬 적도 있었다.
<건초 수레>는 지상의 유익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성을 다룬 작품으로 보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세쪽 제단화 <건초 수레>는 두 가지 유형으로 현존한다.
하나는 마드리드의 에스코리알에 소장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마드리드의 프라도에 소장되어 있다.
프라도 소재의 작품은 1510년과 1516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두 작품 모두 보존상태가 나쁘고 수차례에 걸쳐 복원했으므로 어디까지가 보스의 솜씨인지 가려내는 데 있어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두 작품 전체를 보스가 제작한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두 작품 양쪽 날개는 보스의 솜씨로 보이지 않고 조수들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점 중 하나는 보스가 완성한 지 백 년 후에야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 필리프 2세가 구입하여 자신의 수도원이 있는 에스코리알로 가져 갔다.
<최후의 심판>에서와 같이 왼쪽 날개에는 ‘인간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반역천사의 추방’이 묘사되어 있으며 전경과 후경의 일화가 뒤바뀐 상태이다.
오른쪽 날개에는 지옥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중앙 패널에는 새로운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졌다.

커다란 건초 수레가 광대한 풍경을 가로질러 가고 황제와 교황을 포함한 세속의 권력자들이 뒤를 따른다.
교황은 훗날 알렉산더 6세로 알려졌다.
당시 합스부르크의 대공으로 훗날 황제에 오른 막스밀리안이 네덜란드 지방을 통치하며 세금을 과하게 징수했는데, 황제를 가리킨 것 같다.
황제와 교황 뒤 화면 왼편 가장자리에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가 그려진 막스밀리안의 깃발이 보인다.
교황뿐 아니라 수도사와 수녀들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보스가 가톨릭의 부패를 낱낱이 드러내려고 의도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 교회와 수도원이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교황과 수도원이 헐벗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했으므로 중세 말에는 회의주의와 염세주의가 만연했다.
황제와 교황이 행렬에 참여한 건 지상의 최고 권력자들이 부패했음을 의미한다.
신분이 낮은 농민, 시민, 수녀, 성직자들은 수레로부터 건초를 잡아채거나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더러는 수레바퀴에 깔린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의 주제를 변형시킨 이 광적인 상황을 그리스도가 구름 가운데서 내려다보고 있다.
마귀들이 수레를 이끌고 있고 수레 위에는 건초가 잔뜩 실려 있다.
그리스도는 황금 후광에 싸인 모습이며 내려다보면서 양팔을 들어 자신의 상처를 보인다.
이런 제스처는 절망의 표현이다.
아무도 그리스도와 건초 위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기도하는 천사를 바라보지 않는다.
원근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비례에 맞지 않게 크게 그려졌다.
그리스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건초 수레 위에서 기도를 올리는 천사뿐이다.
이는 죄 짓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는가를 보여주며 인류의 비극적 운명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구원의 임무를 완성했다.
방탕한 인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하면서 구원을 성취했다.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질 수 있게 했으며 하나님은 독생자의 희생으로 인류의 죄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이런 사고는 정신적인 종교 지도자들의 저술을 통해 알려졌고 보스도 이런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상처를 인류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이 받은 고통을 상기하게 하며 하나님을 망각한 인류를 구원한다.

지옥에서 온 낯설게 생긴 마귀들이 지옥과 저주를 향해 건초 수레를 끌고 간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마귀들 중 하나는 물고기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둘 모두의 형상을 갖춘 보스의 창조물이다.
전경과는 달리 배경에는 풍요로운 들판이 아름답게 전개되어 있다.
건초 수레는 죄의 심판이 기다리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건초 수레가 화면 중앙에 테마로 부각되기는 처음이다.
건초를 실은 수레는 단순히 지옥으로 가는 신속한 수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건초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나약한 면을 뜻한다.

1470년경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노래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신은 모든 사람을 위해 좋은 것들을 건초더미처럼 지상에 쌓아두었지만 혼자 전부를 차지하려는 인간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잡다한 군중은 건초를 차지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고 있다.
1550년 이후 플랑드르 엔그레이빙에 묘사된 우의적 건초 수레는 이런 의미이다.
건초 수레는 1563년 안트베르펜의 종교적 행렬에도 등장했다.
당대의 기록에는 수레에 ‘기만 Deceitful’이란 이름의 마귀가 타고 있었으며 세속적인 소유물은 ‘모두 건초 al hoy(all hay)’와 동일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건초를 뽑으며 뒤따랐다고 적혀 있다.
네덜란드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세계는 건초 수레이며 모두가 건초를 가질 수 있을 만큼 갖게 된다.
 성서에도 건초에 관한 기록이 있다.

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 말아라.
풀(건초)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시편 37:1~2)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입이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입이옵니다.(시편 90:4~5)

한 소리가 있어 명하신다. “외쳐라.”
“무엇을 외칠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가는 여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야 40:6~8)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와 마찬가지로 <건초 수레>는 죄에 몸을 내맡기고서 하나님의 계명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자신들 앞에 놓인 운명을 망각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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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빼로의 『순수예술 일람』


순수예술과 기능술의 구분은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고, 순수예술이란 용어가 확립된 것도 이 시대였다.
순수예술이란 용어가 16세기에 프란체스코 다 홀란다F. da Hollanda에 의해 사용된 적이 있었지만 17세기에 좀더 보편화되었고, 이 용어가 책의 제목으로 등장한 것은 1690년에 출간된 샤를 빼로Charles Perrault(1628-1703)의 『순수예술 일람 Cabinet des beaux arts』에서였다.
그러나 순수예술 전부가 열거된 것은 1747년에 출간된 바뙤C. Batteux(1713-80)의 『동일한 한 가지 원리로 귀결되는 순수예술들』에서였다.
바뙤가 순수예술로 구분한 것은 다섯 가지 음악, 시, 회화, 조각, 무용(동작예술l’art du geste)이었다.
바뙤는 이것들이 자연을 모방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는 공통된 목적 속에서 이들의 특수성을 찾았다.
그는 예술을 즐거움을 제공하는 순수예술과 실용성이 있는 기능술로 나누면서 여기에 즐거움과 실용성 모두를 특징으로 하는 중간적인 제3의 예술을 추가했는데 건축과 수사법이었다.
시와 회화 간의 상호접근은 저 유명한 호라티우스Horace(65-8 BC)의 “시는 그림과 같이 ut pictura poests”로 인해 가속되었다.
그의 구호는 16~17세기에 때에 따라서는 거꾸로 “그림은 시처럼 ut poesis pictura”으로 되기도 했는데 이는 시적인 특질, 즉 시와의 근사성이 회화와 같은 예술을 공예와 구분 짓는 요인이라는 확신을 표현한 것이다.

프랑스어로 된 『대백과사전 Great Encyclopaedia』의 제1권이 출간된 1751년에도 예술 분류의 문제는 여전히 애매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디드로는 백과사전의 ‘예술’에 관한 항목에서 교양예술과 기능술로 나누는 옛 분류를 계속했다.
그러나 같은 해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1717-83)는 백과사전의 서문에서 회화, 조각, 건축, 음악과 시를 열거하면서 순수예술beaux arts(혹은 beautiful arts)라는 용어를 이미 사용했다.
보자르라는 프랑스어는 이탈리아어, 독일어, 폴란드어와 같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
영어로는 해리스J. Harris(1709-80)가 『세 개의 논문 Three Treatises』(1744)에서 사용한 ‘우아한 예술 elegant arts’ 혹은 ‘품위 있는 예술 polite arts’로 불리어졌으나 결국에는 순수예술로 통용되었다.
순수예술로 바뙤가 구분한 다섯 가지는 그의 창조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되었던 상태였고, 그에 의해 구분이 뿌리를 내리고 인정을 받아 그 개념에 있어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
하지만 그가 제3의 예술로 구분한 건축과 수사법은 순수예술에 포함되었다.

순수fine로 구분된 예술arts들이 참예술로 인정받았고, 예술이란 명칭은 이것들에만 적용되었다.
그래서 예술을 말하는 사람들은 중세의 예술이 기능술에 반대되는 교양예술이었듯이 순수예술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이는 예술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축소된 것을 뜻한다.
예술의 분류는 이제 순수예술의 분류가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예술의 분류보다는 인간의 모든 제작활동에 대한 분류가 있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활동을 이론적·실천적·제작적인 것으로 나눈 구분이 복귀된 것이다.
이런 분류는 인식, 행위, 제작의 분류이고, 또한 학문, 도덕, 예술의 분류이다.
영국인이 이미 이렇게 구분했고 독일에서는 칸트가 이런 구분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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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감정 표현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갖가지 회화방법을 실험했으며 판화, 드로잉, 유화로 자신의 표정과 자세를 표현하면서 아울러 명암의 사용을 극대화했다.
그가 1627~29년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그림의 분위기와 감정을 표현하는 기교가 매우 진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익힌 기교가 훗날 그린 역사화에서 나타났다.
그의 자화상은 익살맞거나 근엄하거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감정의 표현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입은 의상 또한 세심한 의도에 따른 것으로 그의 세밀한 묘사의 기교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그의 세밀한 묘사는 <세금 The Tribute Money>, <성전에서의 그리스도 출현 Presentation of Christ in the Temple>, <사스키아 Saskia> 등에서 발견된다.

렘브란트는 1631년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중요한 상업도시들 가운데 하나였고 주식시장이 있어 폴랜드, 러시아, 헝가리, 그리스, 터키의 상인들이 왔다.
그는 지성의 신장과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암스테르담으로 간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그곳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잘 사주었다.
이 시기에 그는 돈을 꽤 벌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631년 6월 20일에 암스테르담에 있는 딜러 반 율렌버그Van Uylenburgh에게 1천 길더guilder를 꿔주었는데 이는 여느 예술가와 딜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반 율렌버그의 성공적인 사업의 이익금을 나눠갖는, 즉 주식 투자에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반 율렌버그는 부잣집 자식들이 돈을 내고 회화를 배우는 미술학교를 갖고 있었고, 학생들은 그의 상점에 있는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여 사람들에게 팔았다.
렘브란트는 한때 그의 집에 묵기도 했는데 얼마 동안 묵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사꾼의 속셈으로 두 사람은 만난 것 같았으며 렘브란트는 그의 미술학교에서 한동안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그는 주문을 받아 그렸는데 부자 사업가 <니톨라스 럿스의 초상 Portrait of Nicolaes Ruts>도 이때 그렸다.
아마 반 율렌버그의 소개로 그의 초상화를 그린 것 같다.
렘브란트는 반 율렌버그의 친척들을 포함해서 장사꾼들, 성직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유대인 학자들의 초상을 그렸다.
명암을 사용해 인물의 개성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그의 그림을 사람들은 매우 좋아했으며 1630년대 초 암스테르담에서 그는 인기 있는 화가였다.

이대 많은 돈을 받고 그린 그림들 중에는 <니콜라스 털프 의사의 해부학 강의 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도 있다.
이 작품은 외과의사협회가 그에게 주문한 것으로 당시 의과대학 강의장면을 상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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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는 21살 때 고유한 회화방법을 발견했다

 
렘브란트는 21살 때 고유한 회화방법을 발견했다.
그는 암스테르담을 떠나 고향 리덴으로 돌아와 라스트만의 제자 얀 리벤스Jan Lievens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것은 1626년부터 1631년까지였다.
렘브란트보다 10살 손위인 컨스탄틴 후이겐스Constantijn Huygens(1596~1687)가 쓴 자서전을 보면 그가 1626년에 렘브란트를 방문했으며, 후이겐스는 그때 주지사 프레데릭 헨드릭Frederik Hendrik의 비서였는데 그는 렘브란트와 리벤스에게 이탈리아로 유학 갈 것을 권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두 사람이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처럼 유명해지려면 최고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렘브란트와 리벤스는 그에게 "우리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갈 시간이 없지만 훌륭한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네덜란드에서 볼 수 있다"고 했다.
후이겐스는 두 사람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자서전에 기술했다.
"렘브란트는 생동감이 있는 느낌에서는 리벤스를 능가하지만 웅대한 상상력과 주제의 솔직함은 리벤스가 렘브란트를 능가한다."
그는 저서에서 렘브란트가 1629년에 그린 <은 삼십 량을 돌려주는 유다 Judas Returning the 30 Pieces of Silver>를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렘브란트가 적당한 자세와 운동 그리고 표정을 묘사하는 데 인상 깊었으며, 특히 화면 중앙에 있는 유다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애통해 하면서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용서를 간청하는 모습에서 인상이 깊었다."
그러면서 그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이탈리아와 고대의 어떠한 작품과도 견줄 만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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