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의 <건초 수레>
보스는 죄와 어리석음을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으로 보았으므로 화염에 싸인 지옥을 만인의 운명으로 표현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본성을 비관적으로 보는 견해는 <최후의 심판> 이후에 제작한 유사한 구성의 <건초 수레>와 <지상 쾌락의 동산>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인물과 사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인물들은 상호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매우 낯설게 보이는 에스코리알 소재 <건초 수레 The Hay Wain>는 1498년과 1504년 사이 스헤르토겐보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도시 대부분의 인구가 들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건초 수레는 그들에게 매우 낯익은 오브제였다.
건초는 겨울 가축 사료로 매우 중요한 준비물이다.
건초hay(hooi)는 육신의 무상함을 상징하며 동시에 궁극적으로 물질이 무가치함을 의미한다.
15세기 플랑드르 민요에는 부자를 건초더미에 비유하면서 모든 사람이 함께 사용하라고 신이 제공한 것들을 부자들이 한 곳에 쌓아둔다고 비탄의 노래를 불렀다.
많은 격언에서 건초는 세상의 무상한 것들을 상징했으며 불멸하는 영혼의 영생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우리 말에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아무 쓸모 없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15세기 미술품은 당시 사람들이 근면과 게으름, 가난과 부유함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스는 여러 점의 작품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었으며 종종 부분적으로 다루었지만 주제로 다룬 적도 있었다.
<건초 수레>는 지상의 유익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성을 다룬 작품으로 보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세쪽 제단화 <건초 수레>는 두 가지 유형으로 현존한다.
하나는 마드리드의 에스코리알에 소장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마드리드의 프라도에 소장되어 있다.
프라도 소재의 작품은 1510년과 1516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두 작품 모두 보존상태가 나쁘고 수차례에 걸쳐 복원했으므로 어디까지가 보스의 솜씨인지 가려내는 데 있어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두 작품 전체를 보스가 제작한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두 작품 양쪽 날개는 보스의 솜씨로 보이지 않고 조수들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점 중 하나는 보스가 완성한 지 백 년 후에야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 필리프 2세가 구입하여 자신의 수도원이 있는 에스코리알로 가져 갔다.
<최후의 심판>에서와 같이 왼쪽 날개에는 ‘인간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반역천사의 추방’이 묘사되어 있으며 전경과 후경의 일화가 뒤바뀐 상태이다.
오른쪽 날개에는 지옥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중앙 패널에는 새로운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졌다.
커다란 건초 수레가 광대한 풍경을 가로질러 가고 황제와 교황을 포함한 세속의 권력자들이 뒤를 따른다.
교황은 훗날 알렉산더 6세로 알려졌다.
당시 합스부르크의 대공으로 훗날 황제에 오른 막스밀리안이 네덜란드 지방을 통치하며 세금을 과하게 징수했는데, 황제를 가리킨 것 같다.
황제와 교황 뒤 화면 왼편 가장자리에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가 그려진 막스밀리안의 깃발이 보인다.
교황뿐 아니라 수도사와 수녀들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보스가 가톨릭의 부패를 낱낱이 드러내려고 의도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 교회와 수도원이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교황과 수도원이 헐벗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했으므로 중세 말에는 회의주의와 염세주의가 만연했다.
황제와 교황이 행렬에 참여한 건 지상의 최고 권력자들이 부패했음을 의미한다.
신분이 낮은 농민, 시민, 수녀, 성직자들은 수레로부터 건초를 잡아채거나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더러는 수레바퀴에 깔린다.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의 주제를 변형시킨 이 광적인 상황을 그리스도가 구름 가운데서 내려다보고 있다.
마귀들이 수레를 이끌고 있고 수레 위에는 건초가 잔뜩 실려 있다.
그리스도는 황금 후광에 싸인 모습이며 내려다보면서 양팔을 들어 자신의 상처를 보인다.
이런 제스처는 절망의 표현이다.
아무도 그리스도와 건초 위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기도하는 천사를 바라보지 않는다.
원근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비례에 맞지 않게 크게 그려졌다.
그리스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건초 수레 위에서 기도를 올리는 천사뿐이다.
이는 죄 짓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는가를 보여주며 인류의 비극적 운명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구원의 임무를 완성했다.
방탕한 인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하면서 구원을 성취했다.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질 수 있게 했으며 하나님은 독생자의 희생으로 인류의 죄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이런 사고는 정신적인 종교 지도자들의 저술을 통해 알려졌고 보스도 이런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상처를 인류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이 받은 고통을 상기하게 하며 하나님을 망각한 인류를 구원한다.
지옥에서 온 낯설게 생긴 마귀들이 지옥과 저주를 향해 건초 수레를 끌고 간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마귀들 중 하나는 물고기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둘 모두의 형상을 갖춘 보스의 창조물이다.
전경과는 달리 배경에는 풍요로운 들판이 아름답게 전개되어 있다.
건초 수레는 죄의 심판이 기다리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건초 수레가 화면 중앙에 테마로 부각되기는 처음이다.
건초를 실은 수레는 단순히 지옥으로 가는 신속한 수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건초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나약한 면을 뜻한다.
1470년경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노래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신은 모든 사람을 위해 좋은 것들을 건초더미처럼 지상에 쌓아두었지만 혼자 전부를 차지하려는 인간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잡다한 군중은 건초를 차지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고 있다.
1550년 이후 플랑드르 엔그레이빙에 묘사된 우의적 건초 수레는 이런 의미이다.
건초 수레는 1563년 안트베르펜의 종교적 행렬에도 등장했다.
당대의 기록에는 수레에 ‘기만 Deceitful’이란 이름의 마귀가 타고 있었으며 세속적인 소유물은 ‘모두 건초 al hoy(all hay)’와 동일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건초를 뽑으며 뒤따랐다고 적혀 있다.
네덜란드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세계는 건초 수레이며 모두가 건초를 가질 수 있을 만큼 갖게 된다.
성서에도 건초에 관한 기록이 있다.
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 말아라.
풀(건초)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시편 37:1~2)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입이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입이옵니다.(시편 90:4~5)
한 소리가 있어 명하신다. “외쳐라.”
“무엇을 외칠까요?” 하고 나는 물었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가는 여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야 40:6~8)
<일곱 가지 죽을 죄와 네 종말이 있는 테이블 커버>와 마찬가지로 <건초 수레>는 죄에 몸을 내맡기고서 하나님의 계명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자신들 앞에 놓인 운명을 망각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