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숭고와 미의 감정에 관한 고찰들』


칸트Immanuel Kant(1724-1804)는 1764년 『숭고와 미의 감정에 관한 고찰들 Beobachtungen uber das Gefuhl des Schonen und Erhabenen』(영어로는 Observations on the feeling of the Sublime and Beautiful이다)에서 18세기 초반의 전통과 영국 예술론가 샤프츠베리와 허치슨이 언급한 숭고와 미의 감정에 동의했으며, 그런 개념들을 실천적 의미에서 정의하려고 했다.
이 책에서 그는 각기 다른 인간 집단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 만족의 경험에서 출발했다.40)
그의 미학은 완전히 형이상학적 성찰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주요 저서들은 레싱이 사망한 후, 따라서 빙켈만이 사망한 후에 출간되었지만 그는 레싱보다 5년 먼저 태어났고 빙켈만보다는 7년 후에 태어났다.
아름답고 숭고한 것들에 대한 판단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들의 명백한 주관적 견해에서 일반 타당성에 대한 그것들의 무조건적인 주장의 정당성이 어떻게 입증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들을 칸트는 1781년의 『순수이성비판 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처음으로 자연적 요구의 개념으로 보았으며, 두 번째 1788년의 『실천이성비판 Critique of Practical Reason』에서 도덕적 요구의 개념으로 파악했고, 1790년에 출간한 세 번째 책, 소위 제3비판서로 알려진 『판단력비판 Critique of the Power of Judgment』에서 자연적 요구와 도덕적 요구 사이의 일치성의 개념을 파악하는 가운데‘아름다운 것에 대한 분석 Analytic of the Beautiful’과 ‘숭고한 것에 대한 분석 Analytic of the Sublime’이란 제목으로 다루었다.41)
칸트가 『판단력비판』을 쓴 목적은 구분이 되는 두 개의 힘으로 과학적 사실들의 요구에 의한 자연과 도덕적 삶의 사실에 의한 자유 두 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으로 두 세계의 모순을 지양함으로써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예술의 개념적 의미와 가능성을 규명하는 데 있었다. 그는 적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우리가 자연 개념의 영역, 즉 감각적인 것들과 자유 개념의 영역, 즉 감각적 이상의 것들 사이를 가로질러서 볼 수 없는 한계가 있으므로 전자로부터 후자까지에는 (말하자면 이성의 이론적 용도로서의 의미로) 그것들이 전자가 후자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상이한 세계들이듯 이와 꼭 마찬가지로 통로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전자에 영향을 반드시 끼쳐야 하는데, 즉 자유의 개념이 그것의 법칙들에 의해 그 목적이 부과된 감각의 세계 내에서 반드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자연은 그것의 형태의 법적 영구함이 최소한 자유의 법칙들에 의해 부과된 그것 내에서 초래되는 그 한계들의 가능성과 모순이 없을 그와 같은 방법 안에서 사고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결국 거기에는 반드시 자연의 개념 - 비록 그것(그 근거)의 인식에 이론이나 실습에서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따라서 특정한 영역을 차지하지 못할지라도 그 개념의 근거가 그 한 세계의 원리들에 의해 지령된 사고의 방식으로부터 또 다른 세계의 원리들에 의해 지령된 것으로의 한 변천을 가능하게 만든다 - 이 실질상 내포된 것과 더불어 자연의 그 뿌리에 있는 감각적 이상의 것들의 통일을 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41-1)
감각의 세계 안에서의 이성의 전형적인 것과 이성의 세계 안에서의 감각의 전형적인 것, 이런 두 세계의 만나는 지점이 되는 것이 높은 위치로서 칸트가 미적 그리고 목적론적 판단의 내용으로 파악하려는 바였다.
이 내용은 실재와 예술 안에서 숭고한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과 더불어 발생하며 유기적 자연의 생산품들인 것이다.
그래서 한 개념이 분해될 수 없게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데서의 실재 오브제들에 할당된 그 걸출한 중요성은 싹틈이었으며, 이로부터 확고한 이상주의가 용솟음쳤다.
보상케는 칸트가 언급한 판단력은 즐거움과 고통의 느낌이 지식과 욕망의 기능들 사이에 있듯 이해와 이성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였으며,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묵상적이며, 마치 자연이 모든 다양함 안에서 지성에 의해, 예를 들면 우리의 인식에 부합하는 것에 의해, 그것에 부과된 하나의 통일을 가졌듯이 그 자체에 자연 안에서의 목적적 개념을 명령한다고 보았다.
우리의 인식 혹은 이해의 힘에 대한 부합이 우리의 욕망에 부합되는 것에 속한 것과는 전혀 구별되는 쾌의 느낌을 지각할 때 산출한다.
쾌의 이 느낌은 미적 판단 안에서의 속성이며, 오직 그것의 형식의 이유에 의한 한 오브제의 현시 안에서의 쾌는 주관적일지라도 객관적이다.
그 속성이 쾌의 느낌이 아닌 종말의 개념과 관련이 있을 때 우리는 미적 판단이 아닌 목적론적 판단을 가진다고 보았다.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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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여건을 마련한 세 시인
 

 

르네상스의 여건을 마련한 세 시인
 

 

서로마제국이 476년 몰락한 후 그리스 문화는 약 천 년 동안 거의 잊혀졌으며 중세에는 카톨릭 신학, 철학, 연대기, 동화 등이 있었을 뿐이다.
천 년 암흑시대로 알려진 이 시기에 로마를 근거로 하는 카톨릭의 세력이 유럽을 지배했으므로 기독교 문화만 두드러졌을 뿐 이국의 종교문화는 이단으로 몰려 발전을 꾀할 수 없었다.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가 1303년에 타계하자 교권은 더욱 더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보니파티우스는 여든 살에 교황직에 올랐는데,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프랑스 왕 필립 4세와 극렬한 투쟁을 벌였으며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큰 과오를 범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타계했을 때 사람들은 "그는 여우 같이 되어 사자 같이 정치를 하다 개 같이 죽었다"고 했다.
그는 신의 심판이란 있을 수 없으며 지옥과 천국은 지상에 있다고 공언했다.
그는 성적으로 탐익되어 있었으며 늙고 병들고 성적 불능이 지옥이며 반대로 젊고 건강하며 아름다운 여인과 소년이 천국이라고 했다.
어느 신부가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리자 보니파티우스는 그에게 성을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천치야, 예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자기 생명도 구원하지 못한 자가 누구를 구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는 냉소주의자였으며, 정력적이었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내세에는 무관심한 르네상스 스타일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지식인들은 수도원에서의 금욕주의적 생활과 현세를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현재 인생의 권리를 주장하고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주장했다.
교회의 위선에 대한 지식인들의 증오가 르네상스의 가장 큰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여건은 13~14세기의 선구자 단테Dante(1265~1321), 페트라르카Petrarca(1304~74), 보카치오Boccachio(1313~75) 세 시인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들 3대 시인들 중 단테는 르네상스의 가장 큰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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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 대중적인 이미지의 천국은 육체적 욕정의 산물


연못 주변의 말 탄 한 떼의 남자들은 결혼식과 다산의 의식과 관련 있다.
승마자들은 시계 방향으로 돌게 되고 그들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결혼과 다산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보스는 이런 관념적인 상징성을 뒤집고 죄, 열정, 세속적인 것, 특별히 탐욕의 표상으로 사용했다.
둥근 연못은 여인들의 힘을 은유한 것으로 그들의 주위에 남자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16세기 사랑을 주제로 한 시에 여인들의 주위를 남자들이 맴돈다는 말이 보통이었다.
이런 형태를 15세기와 16세기에 ‘모리스 댄스’(네덜란드어로는 moreskendans)라고 불렀는데,
모리스는 ‘무어인의 Moorish’이란 뜻이며 이 말에는 애욕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연못에서 미역을 감으며 남자들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은 당시의 도덕성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배경의 유기적·인위적 구조물들은 자연에 대한 관념의 상징물들로 왼쪽 날개의 구조물과도 관련이 있다.
보스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구조물이 발견된다.
반은 자연적이고 반은 인위적인 구조물은 자연의 성별 특징을 나타낸다.
자연의 성별 경향을 보스는 악과 관련지었거나 적어도 위험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힘에 의해 복종을 강요당하는 존재로 보았다.
구조물을 흰색, 핑크색, 그리고 파란색으로 칠했는데, 겐트 소재 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Ghent Altarpiece>에서의 천국을 상기시키며 중세 화가들의 천국 묘사에도 이런 형태가 발견된다.
분수와 네 줄기 강 또한 천국의 근본 특징이다.
보스가 묘사한 천국은 그러므로 성적 타락과 위험이 내포된 곳으로 오른쪽 날개의 지옥으로 연결된다.
타락한 천국에 대한 관념은 중세 은유문학에서 사랑을 주제로 자주 등장했다.
올바른 천국과 타락한 천국의 차이는 탐욕이다.
섹스를 원하는 욕정이 천국을 타락한 곳으로 변질시킨다.
성적 욕정에 의한 타락한 천국은 최후의 심판 때에 저주를 면할 수 없다.
보스가 나타내려고 한 건 최후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타락한 천국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천국을 묘사하면서 이를 최후의 심판과 연관지으려고 했다.
독일 인문학자 하인리흐 베벨Heinrich Bebel은 1509년 『비너스의 승리 Triumphus Veneris』에서 이와 유사한 사고를 보였는데, 보스가 사전에 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일부 지성인들은 대중적인 이미지의 천국이 육체적 욕정의 산물임을 지적했다.
보스와 베벨 모두 인간의 내적 욕정이 도덕보다 강하게 나타날 때, 섹스가 결혼의 신성함을 무너뜨릴 때 인간은 파멸에 이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새들이 물에 있고 물고기들은 마른 땅 위에 있다.
보스의 자연에서는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이 하나가 된다.
거대한 과일은 인간과 동물 모두의 먹이가 되고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에는 젊음과 생성만이 있을 뿐 죽음은 부재한다.
개인은 없고 모두 인형처럼 생긴 모습에 인종의 구별만 있을 뿐이며 우리는 이들이 어떤 인종인지 알 수 없지만 벌거벗은 이들의 몸이 영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들의 모든 행위는 어린아이들의 행위처럼 순진해보인다.
지상에서는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유토피아적 환영으로 보인다.
왼쪽 하단 코너의 다섯 사람은 지상의 모든 인종을 상징한다.
백인이 오른손을 높이 들고 왼쪽 날개 패널화를 가리키면서 “이곳으로부터 우리가 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올빼미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은 밤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걸 의미하며,
그 아래 투명한 막으로 된 풍선 안에는 한쌍의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고,
풍선 아래 식물의 형상을 한 원형 안에 있는 남자는 둥근 구멍으로 연결된 투명한 시린더에 앉아 있는 쥐를 응시하고 있다.
투명한 유리 시린더는 이 그림에서 여러 개 등장하며, 보스는 연금술사들이 사용하는 유리 시린더를 사용하여 창조의 법칙을 깨드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신성한 창조를 모독하는 인류의 죄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연의 번성은 실험실에서 연금술사가 원소들을 화학적으로 변형시키는 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고 처음으로 지은 죄는 색욕이다.
자손을 얻기 위한 섹스가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섹스를 하면서 인간은 타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당시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색욕이 생기자 남자와 여지의 관계가 문란해졌고 따라서 시기와 질투가 생겨 죄가 더욱 커졌다.
이런 사고는 16세기 초 인간의 타락을 아담과 이브의 색욕적 장면으로 묘사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생명의 샘’이 있지만 인간은 어리석어서 그것에 등을 돌리고 육욕을 따른 것이다.
따라서 <지상 쾌락의 동산>은 오른쪽 날개에 묘사된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이것은 보스가 묘사한 가장 강렬한 지옥의 장면이다.
어둠 속에서 건물들이 화염에 휩싸이고 불길은 물을 피로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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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문드 버크의 숭고한 감정


인간의 숭고한 감정이 예술의 과제로 떠오르기 전까지 미학사에는 미에 대한 이론이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했다.
숭고는 근본적으로 미와는 달라서 미는 기쁨과 명랑한 감정을 생기게 하지만 숭고는 경탄과 두려운 감정이 일어나게 한다.
18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 영국에서는 애디슨이 상상력을 끌어당기는 특질로서 미와 숭고를 연결시켰다.
“아름다운 것과 숭고한 것”이 계몽주의 시대의 영국 미학에 있어 하나의 보편적 공식이 되었다.
에드문드 버크Edmund Burke(1729-97)가 1756년에 출간한 『숭고와 미에 대한 우리 관념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논구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the Beautiful』의 제목과 내용에서 숭고와 미를 병렬한 후 더욱 그랬다.39)
버크의 저서는 영국인의 미적 취미에 영향을 주어 18세기 초 고전적 형식주의로부터 후반의 낭만주의로의 전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현상학적 그리고 심리학적 두 측면에서 오브제들의 어떤 특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미에 대한 느낌, 즉 욕망이 없는 ‘사랑’과 숭고, 즉 실재 위험이 없는 ‘경악’을 자극시키는지에 관해 논했다.
숭고한 것에 대한 느낌은 그것을 응시하는 것에 의해 정신에 가득 차는 공포의 정도, 즉 조절된 전율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고통과 위험의 개념들을 자극할 수 있거나, 그런 대상들과 연합된 것들이나, 혹은 유사한 방법으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특성들을 지닌 대상들 어떤 것이라도 숭고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버크에게 미는 즐거움의 개념으로 인간의 사회적 본능과 관련이 있는 반면 숭고는 고통과 위험의 개념으로 낯선 감성을 야기하는데 그의 낯선 표현으로 말하면 자아보존의 원리와 관련이 있다.
미는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반면 숭고한 감정은 감성적으로 격렬하게 만든다.
숭고는 증명되거나 제시될 수는 없더라도 갑자기 와서 감성을 흔들어놓고 느끼게 하는 경이로운 것이다.
이런 상이한 경험은 상호 모순된다. 어둡고, 불확실하며, 혼돈된 숭고한 감정은 앞서 플라톤이 『필레부스』에서 이상적인 미에 대한 미적 가치에 논한 것에 상반되는 것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던 전통적인 플라톤의 예술론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그는 상응하는 미와 숭고를 조화시키기 위해 미에 상반되는 개념 추함을 부분적으로 숭고와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왜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이 재현된 실재를 바라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가” 하는 문제에 집착했다.
그는 진정한 고뇌와 재난은 관람자에게 순수한 고통을 주기보다는 경험이 증명하듯 매혹시키고 황홀하게 만드는 것을 알았다.
버크는 숭고에 기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강력하며, 결성과 공허, 무한에 가까운 광대함 등을 꼽았다.
이런 것들은 미를 죽은 것으로 그리고 효력 없는 것이 되게 한다.
플라톤에 따라 미를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일 경우 이와 상반되는 추함은 미적 가치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게 된다.
버크는 추함조차도 미적 감상의 한 오브제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인데 이런 사고는 19세기와 20세기 표현 개념의 초석이 되었다.
버크는 훌륭한 예술에서 명백함이 본질적 특성이라고 주장한 이성주의자와 고전주의자들을 공격했다.
그는 명백함보다는 오히려 무한한 것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고상하다면서 경계가 없는 무한한 것은 명료하거나 구별될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상상력은 대부분의 경우 명백하게 나타낸 것이 아닌 암시되거나 시사된 것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는 숭고한 감정의 즐거움에 주로 두려움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두려움은 지식에 의해 점차 줄게 되지만 숨은 암시에 의해 심해진다.
그에게 예술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특성은 명백함이 아니라 불명료함이었다.
그는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무지가 모든 우리의 감탄의 원인이 되고, 전적으로 우리의 열정을 흥분되게 만든다”고 했다.
그는 패러다임 감성은 여성미에 반응하며 정욕을 제거하고, 작고,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다양하고, 섬세한 것 등은 미의 느낌을 줄 수 있다면서 지각적 특성들이 미와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이유를 그것들이 실재 사랑과 공포 같은 심리적인 효과들을 만들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미는 전체 시스템의 단단함이 편안하게 되는 데서 행동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훗날 생리학적 미학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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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크가 전한 스파르타 사회
 

  플루타크가 전한 스파르타 사회

플라톤은 초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Renaissance 이후 사람들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플루타크Plutarch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인물로 인식된다.
플루타크의 영향은 1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진보주의자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을 발견한 청교도들에게도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간접적이지만 독일인의 사고에 크게 작용해 근래에까지 이르렀다.
플루타크는 스파르타에 법을 제공한 리쿠르구스Lycurgus에 관해 기록하면서 여러 나라의 정치체제를 연구하기 위해 여행을 많이 했으며 크레테Crete의 법이 "매우 직접적이고 가혹하다"고 좋아했다.
그는 아이오니아Ionia 법은 "사치스럽고 공허하다"고 싫어했다.
그는 이집트에서 군인을 시민과 분류하는 것이 유효함을 깨달았으며 이런 방법을 스파르타에 실행했고 시민들을 위한 고상한 공화국Commonwealth을 건설했다.
플루타크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구별이 없도록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했으며 돈을 금이나 은으로 만드는 것을 금했으며 쇠로 돈을 만들도록 했다.
사치스럽고 무익한 과학을 추방했는데 경제적으로 그런 데 심취할 여유가 없었으며 외부와의 교역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돈이 값어치 없는 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나라 상인들은 교역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시민들은 함께 식사하면서 동일한 음식을 먹게 했다.
소녀들을 벌거벗겨 스포츠, 놀이, 그리고 춤을 추게 했던 것은 플라톤이 말한 고상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청년들로 하여금 결혼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남자들은 늙어서 젊은 여인을 가져야지 하는 병든 생각을 하지 않으며 젊은 남자는 젊은 여인으로부터 아이를 가졌다.
그는 말했다.
"정직한 남자는 법적으로 다른 남자의 아내를 사랑할 수 있으며 ... 그녀의 남편에게 자기가 여인과 동침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간청할 수 있으며, 잠깐 간통하고 싶은 생각에서 또볼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어리석은 질투란 없으며, "리쿠르구스는 자녀들이 어떤 개인의 소유가 되는 걸 싫어했고 자녀들은 모든 시민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이유로 그는 모든 사내들이 자식을 가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가장 정직한 사내들만이 자식을 갖게 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플루타크는 이런 원리를 농부들이 자신들의 가축에 적용시켰다고 적었다.
자식이 태어나면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부족의 원로들에게 데려가 그들의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원로들은 아이가 건강하면 아버지에게 돌려주지만 그러하지 못하면 아이를 물구덩이에 빠뜨려 죽였다.
아이가 7살이 되면 집을 떠나 학교에 입학하고 주로 배우는 것은 복종하는 것, 고통을 이겨내는 것,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대부분 그들은 벌거벗고 지내며 12살이 되면 코트를 입지 않고 더럽고 추한 생활을 하면서 일 년에 몇 번 허락받은 날에 목욕을 하게 된다.
그들은 지푸라기 위에서 잠을 자며 겨울에는 지푸라기에 엉겅퀴thistle(스코트랜드의 국화)를 섞는다.
그들은 훔치는 방법을 배우는데 훔치기 위한 도둑질이 아니라 훔치다가 적발되면 벌을 받는데 어리석기 때문에 받는 벌인 것이다.
동성연애(사내와 사내 혹은 여자와 여자 사이)는 스파르타에서 보통 있는 일이며 청년기의 교육에서 동성연애를 가르치기도 한다.
사내 동성연애자의 칭찬과 벌은 같은 동성연애자에게도 적용된다.
플루타크가 전한 바에 의하면 한 소년이 싸우다가 다쳐서 소리를 내어 울면 소년이 겁장이이기 때문에 소년의 동성연애 상대자에게 벌을 주었다고 한다.
스파르타에서 시민들은 교역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여행이 허락되지 않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출입도 마찬가지의 경우에만 허락했는데 외부의 관습이 스파르타의 미덕을 헤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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