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은 동물들의 형태 안에서


헤겔은 개념의 최초(가장 단순하고 수준 낮은)의 존재를 자연 안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최초의 미를 자연미로 보았다.45-5)
자연미는 물론 오직 지각하는 의식을 위해 존재하지만 헤겔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미적 결과에 대한 견해를 갖게 하는 예술미와는 달리 취급했는데 그가 자연을 인간과 대조가 되는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인간을 자연미에 포함시키면서 인간을 동물들의 미와는 대조가 되는 것으로 취급했다.
헤겔은 동물들의 형태 안에서 미와 추에 관해 언급하면서45-6) 추를 비교적인 개념으로 간주했다. 그는 창조물들이 우리에게 추하게 보이는 이유를 그것들의 형태들이 일반적으로 생명력에 반하는 전형적인 특성들 혹은 우리가 그것들 자체들의 생기 있는 존재의 특별하거나 전형적 형태로 간주하는 것으로 배운 때문으로 보았다.
그래서 생명력이 있는 게으름뱅이들, 모순되는 유형들의 혼용으로 보이는 오리너구리들, 악어와 많은 종류의 벌레들이 추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들의 형태들을 생의 적당한 표현들로 간주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이는 인간과 예술보다 낮은 수준에 절대적인 추가 없음을 뜻한다.
보상케는 미에 대한 헤겔의 개념을 네 가지 특성이 축약된 개념으로 보았는데
1 단순한 반복의 일정불변
2 상이한 반복으로서의 대칭
3 정당함으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데, 얼마만큼의 상이함들이 단순히 서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법칙에 의해 함께 제한되는 모든 전체성들로 예를 들면, 포물선들, 호가드의 미의 선Hogarth’s line of beauty, 두 반대 윤곽들 안에서의 인간의 팔의 상이한 선들
4 주로 양적 속성들 사이의 정당함처럼 주로 질적 속성들 사이의 동일한 관계로서의 조화로서 예를 들면 색의 관계들을 말한다.
미는 여전히 상이한 질들 안에서의 일치의 시사를 통해 나타나는 전체성의 원리 안에 구성된다.45-7)
하지만 순수한 자연미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한데 그 이유는 정신적 존재의 개체를 나타내는 데 대한 무능력 때문이다.45-8)
헤겔은 동물과는 대조가 되는 인간의 형태가 거의 이 요구를 어떻게 준수하는가에 대해 피부의 빛깔과 민감함, 삶의 특정한 나타남 등으로 설명했다.
헤겔에게 미는 지각적으로 표현되는 이성적인 것으로 이성인 내용이 지각적인 형태로 발현되는 이었다.
이성적인 것이 구현된 지각적인 것들 건축, 조각, 회화, 음악, 시를 그는 세 부류의 진보적인 예술-형태들 상징적, 고전적, 그리고 낭만적 예술로 분류했다. 상징적 예술형태로는 건축이 중점을 이루고, 고전적 예술형태로는 조각이 중점을 이루며, 낭만적 예술형태로는 나머지 세 가지 회화, 음악, 시가 중점을 이루는데 특히 음악을 중심으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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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이 출현했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매너리즘Mannerism이다.
매너리즘은 예술과 자연의 일치라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미술사에 있어서 최초로 예술과 관련된 인식론적 문제였으며 자연주의, 즉 '소박한 독단주의'에 반하는 것이었다.
매너리즘이라고 하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할 때의 뜻으로 개념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순수미술 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을 말한다.
고전기 이후의 미술을 몰락현상으로 보고 매너리즘에 의한 미술품 제작을 거장의 양식을 노예적으로 모방하는 기계적인 작업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런 사고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의 저서 안니발레 카라치의 전기에서였다.
바사리가 사용한 '마니에라 maniera'란 말은 예술적 특성, 즉 역사적, 개인적 혹은 기술적으로 규정된 표현방식으로 넓은 의미로 '양식 style(stil)'이었다.
그가 '그란 마니에라 gran' maniera'라고 했을 때는 위대한 혹은 장대한 양식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당시 통용되던 마니에라가 없다는 말은 양식이 결여되었음을 유감스럽게 표현한 말이 된다.
마니에라란 개념을 가시적이며 진부하고 일련의 공식에 도입시킬 수 있는 성격의 양식이라는 관념과 처음 결부시킨 사람은 이탈리아 화가이며 미술학자 그리고 골동품 연구가 카를로 말라시아와 17세기 고전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매너리즘을 고전주의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으로 보았다.

성기 르네상스의 기간이 짧았던 것은 매너리즘의 성행 때문이었다.
성기 르네상스는 언덕에 오르자마자 하강해야 했는데,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의 작품에서도 고전주의를 와해시키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에서는 안정과 지속의 양식이었던 고전주의가 왜 르네상스에서는 단순한 '과도기적 단계'로 나타났는가?
이에 대해 하우저는 말한다.

"그 이유는 아마 친퀜첸토의 고전주의에서 예술적 표현을 얻었던 균형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견고한 현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이상이자 허구였고 르네상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본질적으로 동적인 시대, 어떠한 해결책에도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한 근대의 자본주의적 정신과 변증법적인 복잡한 근대의 자연과학적 세계상을 정리, 극복하려는 르네상스의 노력은 후대의 노력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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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과 부를 누리게 된 예술가들
 

  작품을 주문한 사람과 예술가의 관계가 때로는 시간제 보수를 지급받는 임금제 노사관계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
1485년에 체결된 한 계약서를 보면 기를란다요는 작품에 사용되는 물감 비용까지 명시했다.
1487년에 리피가 체결한 한 계약서에는 재료비를 자신이 부담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계약을 1498년 미켈란젤로도 맺었는데, 15세기 말에나 와서야 예술가들은 시간제 임금제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다.
이것 역시 미켈란젤로를 통해 뚜렷이 부각된다.
콰트로첸토(15세기)에서는 계약을 체결할 때 발주자가 예술가에게 계약의 완수를 보증하는 보증인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미켈란젤로에 이르러서는 이런 보증은 형식이 되었다.
예술가의 의무도 엄격하게 세밀히 쓰지 않게 되었다.
1524년의 계약서를 보면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는 성인의 이미지만 아니라는 조건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기로 했으며, 동일한 수집가는 1531년 미켈란젤로와 계약을 맺으면서 그림이든 조각이든 한 점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그들이 받은 보수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콰트로첸토 후반 피렌체 사람들은 벽화에 많은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조반니 토르나부오니는 1485년 기를란다요와 계약을 맺으면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가족예배당벽화를 위해 1,100굴덴을 지불하기로 했다.
리피는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벽화를 그려주는 댓가로 2천 금 두카트를 받았는데, 이는 2천 굴덴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천장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은 무려 3천 두카트였다.
콰트로첸토 말기에 이르면 예술가들이 돈을 모으게 되는데, 리피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으며, 페루지노는 집을 몇 채 갖고 있었고, 베네데토 다 마야노는 대저택을 소유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모로의 궁정화가로 총애를 받으며 2천 두카트의 여봉을 받았고, 그후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모델로 삼았던 냉혹하고 유능한 참주 체자레 보르지아의 수석 전쟁기술자로 대접을 받았으며, 프랑스에서는 왕의 총애하는 화가이자 측근으로 매년 3만5천 프랑을 받았다.
친퀘첸토(16세기)의 두 거장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는 거액의 수입을 올려 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을 뿐 수입은 많았으며 상 피에트로 성당을 장식한 댓가를 받기를 거절했을 때는 이미 큰 재산을 모은 후였다.
예술가들의 수입이 증가한 것은 물가가 오른 데도 그 영향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콰트로첸토 말부터 친퀘첸토 초까지 로마 교황청이 미술시장의 전면에 나서 피렌체의 미술 수요와 경합을 벌였기 때문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때 거주지를 아예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겼다.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친퀘첸토 초부터였다.
이때부터 유명한 예술가들은 후원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귀족계급과 같은 위치를 마련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라파엘로는 대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다.
그는 로마에 궁전을 갖고 있었으며, 군주와 추기경들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교제했고, 당시 유명한 귀족이며 미술애호가 아고스티노 치지의 친구였으며, 그의 아내는 비비에나 추기경의 질녀였다.
티치아노는 라파엘로보다 더욱 더 출세한 화가였다.
황제 카알 5세는 그를 라테라노 궁정의 공작에 임명하고 자기 궁전에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세습귀족의 권한과 같은 일련의 특권을 부여했다.
왕후와 귀족들은 다투어 그로부터 초상화를 얻고자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티치아노가 그림을 그려줄 때마다 값비싼 선물을 주었고 그의 딸 라비니아가 결혼할 때는 막대한 지참금까지 주었다. 앙리 3세는 노령에 접어든 이 거장을 몸소 방문했으며 티치아노가 1576년 페스트에 걸려 죽었을 때 페스트로 죽은 사람은 절대로 성당에 매장해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엄격한 관례를 깨고 최대한의 예를 갖춰 프라리 성당에 시신을 안장했다.
미켈란젤로는 과거에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적 명성에 도달했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위대성은 너무나 자명해서 공적 명예나 칭호, 표창 따위는 아예 사절했다. 그는 군주와 교황들과의 교제를 하찮게 여겼는데, 자신이 그들의 반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태도였다.
그는 공작도, 추밀원의 고문관도, 교황청의 감독관도 아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신과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의 젊은이들을 제자로 두기를 선호했으며 그림은 "손으로 colla mano"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col cervello" 그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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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러에게 미적 가상이란


칸트가 미를 주관적이라고 했지만 실러는 주관적이면서 또한 객관적임을 역설했다.
실러는 미가 인간의 지각과 행위 내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에 집착하여 미적 가상의 개념과 유희 충동의 개념을 고안해냈다.
보상케는 그가 칸트의 근본적인 단순한 형상 안에서의 실천적인 목적에 대조되는 쾌의 특징들을 받아들인 채 그것들로부터 문명의 성장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결과들을 끌어내려고 시도했다고 보았다.
실러에게 미적 가상asthetischer Schein이란 정직으로서 유사 그 이상의 허위를 꾸미지는 않으며, 독자적이어서 모조의 오브제의 진정한 존재를 통해 쾌한 것들을 증대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미적 가상은 감각적이든 논리적이든 속임수와는 그리고 실재와 관련 있는 식욕을 증진시키는 것들이나 실천적인 것들과는 단번에 구분된다.
인류학적 관점으로부터 가상에 대한 관심의 점진적 성장 그리고 나타낸 미와 분명히 관련된 모든 어려움들이 진정으로 가상의 비현실이 아니라 그것의 ‘정직’ - 그것의 명백한 비현실 - 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부상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에 의해, 보상케에 의하면, 실러는 칸트가 소유한 자연적 그리고 예술적 미에 관한 비교적 가치보다는 좀 더 참에 가까운 개념 그리고 개화된 삶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들에 의해 차지된 자리를 위한 명확한 정당화를 위한 길을 닦았다.
그의 역설인 인간이 (평범한 실천적) 실재의 것들 그 이상에서 가상의 것들에 가치를 매기는 것을 배우는 데서 오직 비례하여 개화된다는 주장은 플라톤이 취한 이론을 놀랄만하게 반전시킨 것이었으며, 칸트 이후 미학의 성찰에 영향을 끼쳤다.
미적 가상과 마찬가지로 실러는 유희 충동의 개념 또한 칸트의 수사적인 논리로부터 구했다.
칸트가 ‘유희’라는 말을 미적 판단을 구성하게 하는 조화 안에서 능력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계속해서 사용한 데서 실러가 유희 충동이란 개념을 고안했는데 이는 간단히 말해서 탈출구를 요구하는 축적된 에너지의 방출을 뜻한다.
그는 “동물은 … 생의 여분이 자체를 행위 속으로 이식할 때 유희한다”고 했다.
이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그 자체를 위한 바라보는 쾌를 자각할 때 유희 충동이 생긴다.
보상케는 그러므로 실러가 ‘형상’이나 ‘가상’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방에 의한 그것에 자립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44-2)
실러는 충동을 순수한 이상적 행위로 보았는데 그는 <서한 26>에 적었다.
인간이 눈을 통해서 쾌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자마자 그리고 자신을 위한 하나의 독자적 가치를 획득한 것을 바라볼 때 그는 미적으로 자유롭게 되고, 유희 충동을 깨닫게 된다.
실러는 <서한 15>에서 매사에 있어서 유희 충동과 모방적 혹은 드라마적 경향(흉내나 가상을 즐기는 경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게임과 오락에는 어떤 삶의 흉내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양 보인다고 했다.
유희 충동론은 미에 있어 사회적 관심과의 관련 속에서의 칸트가 제시한 개념들에 의존한 예술의 사회적 성격 그리고 미적 느낌의 본질적 전달성에 대한 분석으로 진전되었다.
그는 <서한 27>에서 말했다.
우리가 감각적인 것들 혹은 지성적 쾌들을 보편화할 수 없는 이유는 전자는 본질적으로 개별적이고 후자는 개성의 깊게 자리 잡은 기반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미에서만이 우리는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인종적이다. 미가 모든 세계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고, 모든 존재가 아름다운 것들의 마력 아래 있는 동안 그것의 한계들을 망각한다.
보상케는 미에 관한 유희론의 결점을 일과 유희 둘 안에서 인생을 자르려는 경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와 유희 충동 사이의 두 진정한 고리는 실천적 종말들로부터의 그것들의 보통 자유이며, 흉내로의 그것들의 보통 경향 혹은 커다란 의미에서 실재에 대한 이상적 취급으로 보았다.
달리 말하면 유희가 우리에게 오락과 우리의 능력의 완화를 시사하며, 자아 발표력의 진지한 요구나 숙련공에게 어떤 자유도 없는 가운데 모든 일에 관련된 표현적 요소에 공평하게 평하지 않는 양 보인다는 것이다.
유희 충동은 한 마디로 그것의 근본적으로 부정적 자유가 상상적 표현을 요구하는 하나의 내용과 더불어 충전되었을 때만 오직 미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형상을 취하는 어떤 충동이라도 그것이 어쩌다가 우리에게 유희를 상기하게 하든 안 하든 미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칸트를 추종한 실러는 미의 객관성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개화된 인간의 진화 안에서 그것의 위치와 가치의 정당함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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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수입
 

  예술가들의 수입


미술품의 질에 관해 말하면 르네상스 초기만 해도 수공업적 작업을 한다고 해서 예술가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산드로 보티첼리, 필리포 리피, 피에로 디 코지모 등은 16세기에 들어서서도 가구에 그림을 장식하는 화가들로 유명했다.
작업의 질로 예술가를 판단하기 시작한 것은 미켈란젤로에 와서였다.
조르조 바사리는 수공업적 일감을 받는 것이 더이상 예술가의 자존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견해가 받아들여진 것은 길드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계가 종말을 고하는 걸 의미했다.
조반니 바티스타 포지가 길드에 의해 규정된 칠 년 동안의 견습기간을 모두 채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노바에서 화가로 활동하는 행위를 금지하려는 소송을 화가조합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이는 예술가와 조합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예술가들의 경제적 상황으로 말하면 소시민적 상공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귀족과 같은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비참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예술가들에 대한 보수가 형편 없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이 많았던 건 사실이었다.
마사초는 조수들에게 월급을 줄 수 없을 정도였으며 세상을 떠날 당시 빈곤했고 빚에 쪼들렸다.
바사리에 의하면 리피는 양말 한 켤레도 살 형편이 못되었고 파올로 우첼로는 노령에 이르러서 가진 재산도 없었으며 일도 할 수 없었고 집에는 병든 아내가 있어 탄식했다.
그러나 궁정이나 후원자들로부터 주문을 받은 예술가들은 생활이 나았으며 프라 안젤리코는 교황청으로부터 매달 15두카트를 받았는데, 당시 피렌체에서는 년수입 300두카트면 귀족처럼 호화스럽게 살 수 있었다.
당시 특색 중 하나는 유명한 예술가가 평범한 예술가에 비해 돈을 훨씬 더 많이 받은 건 아니란 점이다.
도나텔로와 같은 명망 있는 예술가들은 좀더 많은 보수를 받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기작가에 대한 엄청난 보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작품을 주문한 사람과 예술가의 관계는 물주와 노동자의 관계인 노사관계였다.
예술가들은 작업하는 동안 돈을 분할해 받아야 했으며 주문한 사람도 재료비를 여러 차례에 걸쳐 분할해 지불했다.
왕후, 군주들까지도 현금이 없어 쩔쩔매는 경우가 있었으며 레오나르도는 후원자 로도비코로부터 보수를 다 받지 못해 여러 차례 불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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