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기 돌아오다
 

  코시모가 1464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재산과 권력 그리고 취향을 50살의 아들 피에로가 계승했다.
피에로는 바교적 재능이 있는 인물로 도덕적이었고 아버지를 따라 여행을 하면서 외교에도 정통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친절했으며 문학과, 종교,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는 코시모의 지성, 온화함, 세련된 미적 감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코시모는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시민들에게 빌려줬지만 피에로는 갑자기 이 돈을 회수했다.
일부 채무자들은 파산이 두려워서 사람들을 선동해 혁명을 쟁취하자고 선언했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는 "이들이 한때 정부를 장악했지만 메디치 사람들이 다시 권력을 회복했고 피에로는 1469년 죽을 때까지 권좌를 지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적었다.

피에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로렌초는 20살이었고 줄리아노는 16살이었다.
피렌체인들은 두 아들이 아직 어려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정부의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저으기 염려했는데, 피렌체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경우 혼란이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란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에로의 건강이 좋지 않은 줄 안 코시모는 로렌초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생전에 손자를 훈련시켰다.
로렌초는 할아버지의 뜻대로 요아네스 아르지로풀로스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고, 피치노로부터 철학을 배웠으며, 어렸을 적부터 어깨너머로 정치인, 시인, 예술가, 그리고 인문주의자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전술을 배웠으며 19살 때 피렌체의 주요 가문 자식들의 군대놀이 경기에서 용맹성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고관 로렌초가 경기에서 내건 모토는 "황금기 돌아오다 Le temps revient"였다.
그는 1469년부터 1492년까지 피렌체를 통치했으며 이 시기는 피렌체의 황금기에 속했다.

피에로는 세상을 떠나던 해 로렌초로 하여금 클라리체 오르시니와 결혼하게 했는데, 이로서 메디치가는 로마의 가장 유력한 두 가문 중 하나와 사돈이 되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 기반이 더욱 탄탄해졌다.
로렌초의 결혼식은 피렌체 전체의 잔치로 잔치가 사흘 동안 지속되었고 사탕과자만도 5천 파운드가 소요되었다.
피에로가 타계했을 때 로렌초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자였으며 이는 이탈리아에서도 최고 부자임을 의미한다.
메디치가와 관련된 채무자, 고객, 친구, 직원들이 아주 많았고 피에로가 사망한 후 이틀 동안 시민 지도자들은 로렌초의 집으로 와서 그가 앞으로 정부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에 관해 물었다.
메디치가의 재무구조는 시와 맞물려 있었으므로 로렌초는 현상을 유지하려고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적이나 메디치가에 맞먹는 가문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로렌초는 경험이 많은 시민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주요 문제들에 관해 자신에게 충고하도록 했다.
그는 동생 줄리아노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나누게 했지만 줄리아노는 음악, 시, 마상 창시합, 그리고 사랑을 즐기면서 모든 권력을 형이 행사하도록 했다.

피렌체에 번영이 지속되었으므로 시민들은 로렌초의 통치에 묵묵히 따랐다.
밀라노 공작 갈레아조 마리아 스포르차는 1471년 피렌체를 방문하고 메디치가가 코시모와 피에로의 대를 이어 로렌초가 번영을 이루고 메디치 궁전과 정원을 조각, 도자기, 보석, 그림, 고전 사본, 건축 유물로 뮤지엄을 이룬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메디치가의 번영은 로렌초가 사절단을 이끌고 로마로 가서 교황에 즉위한 식스투스 4세를 축하한 데서 알 수 있다.
식스투스는 계속해서 메디치가가 교황청의 재정을 담당해줄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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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
 

  수세기 동안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 1444/5~1510)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지만 현재 콰트로첸토의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다.
보티첼리란 이름의 뜻은 '작은 몸통 little barrel'인데 그의 형이 살이 쪄서 붙여진 별명으로 그에게도 사용되었다.
이 별명이 그의 성이 되었다.
보티첼리는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오기 전에 필리포 리피로부터 수학했으며 그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양식은 15세기 후반 예술가들의 것들과 유사한 데가 있는데 마사초의 과학적 자연주의에 반하는 고딕 양식으로 감성적이고 여성적 우아함과 장식적 요소가 두드러졌다.

보티첼리가 자신의 작업장을 가지고 독립한 것은 1465년경이었다.
그는 독립하고 곧 메디치가로부터 주문을 받아 일했는데, 로렌처의 어머니 루크레지아 토르나부오니를 위해 <유딧 Judith>를 그렸으며 그녀의 남편 피에로 고토소를 위해 <위대한 마돈나 Madonna of the Magnificat>와 <동방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를 그렸다.
그는 <위대한 마돈나>를 마돈나가 찬송가를 적고 있는 장면으로 묘사하면서 로렌초와 줄리아노 형제를 각각 열여섯 살과 열두 살의 소년들로 마리아가 쓰고 있는 책을 붙들고 있게 했다.
이런 아이디어는 그가 프라 리포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동방박사의 경배>에서는 코시모가 마돈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그렸으며, 그 아래 피에로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고, 열일곱 살의 로렌초가 칼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열일곱 살이면 법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나이이다.
보티첼리는 메디치가의 세 세대를 그림에 삽입한 것이다.
피에로가 사망한 후 로렌초와 줄리아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티첼리를 후원했으며 보티첼리가 그린 유명한 초상화는 줄리아노와 줄리아노의 애인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를 그린 것이다.

보티첼리는 대부분의 생애를 피렌체에서 보냈고, 유일하게 피렌체를 떠난 기간은 1481~2년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는 그때 페루지노, 로젤리, 기를란다요와 함께 나란히 작업했다.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한 것만 봐도 당시 그가 유명한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주문을 받고 <프리마베라 Primavera>,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Pallas and the Centaur> 세 점을 그렸으며 현재 모두 우피치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보티첼리는 종교적?신화적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초상화도 그렸고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을 위해 펜으로 드로잉도 많이 그렸다.
그는 작업장을 운영했는데 그의 제자들 중 가장 유명한 화가는 필리포 리피Filippino Lippi(1457년경~150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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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업가
 

  도나텔로로부터 수학한 후에도 베로키오는 그의 작업에 협력했으며 도나텔로가 늙어서 작업을 할 수 없을 때는 구매자들을 젊은 베로키오에게 소개해주었다.
베로키오는 1464년에 '국부 father of the state;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묘비를 의뢰받아 제작했다.
이 중요한 작업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묘비를 제작한 후 그에게는 일감이 쏟아져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조각가와 금 세공가일 뿐 아니라 화가이며 장식가임을 널리 광고했다.
비아 데 아그놀로에 있는 그의 작업장에서는 온갖 작품들을 제작해냈다.
그의 작업장은 오늘 날 상점과도 같았는데, 아래층이 거리에 있어 상품을 진열하듯 작품을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했고 사람들이 아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고 개, 닭, 돼지들도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바사리의 말로는 베로키오가 싼 것과 비싼 것을 가리지 않고 모든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문하생과 조수들은 같은 지붕 아래서 스승과 함께 기숙하면서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그들은 스승의 말에 복종해야 했다.
스승은 어버이와도 같았으므로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는 제자들에게 매질을 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배우고 조수로 활동한 기간은 12, 13년이나 되었다.
화가이면서 작가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1370년경~1440)는 13년의 기간이면 도제discepolo의 단계에서 수습기간을 마치고 제구실을 하는 장색garzone의 단계를 거쳐 숙련공maestro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도제기간에 견습생은 첫 6년 동안 그림 그리는 데 사용하는 붓 만들기, 겉칠하기, 참피나무나 버드나무 페널에 캔버스를 잡아당겨 붙이기, 알료를 알아보고 준비하기 등을 배우게 되며 매일 알료를 섞어서 원하는 색을 내는 일을 배우게 된다.
이후 6년 동안은 색을 사용하는 방법, '착색료로 장식하기 decorate with mordants', 금실로 천에 수놓기, 벽에 직접 그리기 이 모든 일을 주말에도 휴일에도 쉬지 않고 하게 된다.
첸니니는 1430년대에 쓴 무려 189장에 이르는 『회화에 관한 논문』이란 제목의 책에서 이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예술이 기술적인 사업임을 지적하려고 했다.
그는 기교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기술했는데, 고급 피지 패널에 어둡게 착색하는 방법, 늙은 남자의 얼굴 묘사, 동정녀 마리아의 파란색 겉옷 그리기, 물고기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강물 그리기 등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남자의 몸을 사용해서 인체의 비례에 관해 기술했는데 매우 정확했다.

베로키오는 1467년에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묘비를 완성하여 상 로렌초 교회에 장식했다.
이 시기에 그는 거대한 크기의 구체를 청동으로 제작하여 피렌체 대성당 두오모Duomo 제등 위에 놓았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업을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보았다.
대성당은 수세기에 걸쳐 건립되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1302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가 1300년 이전에 산타 마리아 교회 부지에 건립하기 시작했다가 중단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조토가 종탑을 디자인했으며, 그후 안드레아 피사노, 프란체스코 탈렌티, 기베르티, 브루넬레스키가 작업해 완성했다.
브루넬레스키는 고대 이래 가장 큰 둥근 지붕을 올려놓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는데 이런 무거운 지붕을 올려놓으려면 부축벽이나 이에 상응하는 힘을 지탱하게 하는 구조물이 필요한 데도 그런 것 없이 기하적으로 디자인했다. 브루넬레스키가 1446년에 타계했을 때 둥근 지붕은 올려졌지만 그 위에 장식물이 없었다.
대리석으로 제등을 막 만들 때였으므로 그것을 완성시켜 지붕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로서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했던 디자인이 모두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제등 위에 구체와 십자가를 올려놓아야 비로소 완성된다.
이 일이 베로키오에게 주어졌다. 그는 쇠로 제작했는데 폭이 6m에 높이가 107m로 무게가 2톤에 이르렀다.
이것을 제등 위에 올려놓은 후에야 대성당은 완공되었다.
1471년 5월 27일 모든 피렌체 사람들이 구체와 십자가를 높이 얼려 제등 위에 세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튿날 오후 3시 트럼펫의 팡파르가 울려퍼졌고 역사학자들은 이 날을 기념했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가자마자 공학부터 배우게 되었고 이 날 예술가이면서 공학가의 작품이 영광을 받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수학한 사람은 물론 레오나르도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페루지노, 로렌초 디 크레디, 보티첼리, 그리고 145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예술가들이 그로부터 수학했으며 기를란다요와 루카 시그노렐리도 그로부터 수학한 것 같다.
작가 우골리노 베리노Ugolino Verino는 1490년에 "베로키오의 제자들 거의 모두가 지금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적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갔을 때 그곳은 마치 피렌체 젊은 예술가들의 회합장소와도 같았을 것이다.
바사리에 의하면 베로키오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레오나르도를 포함해서 젊은 예술가들은 그로부터 음악도 배웠을 것이다.
산드로 보티첼리는 레오나르도보다 일곱 살 혹은 여덟 살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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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The Great Couples 3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중에서
 

에곤 쉴레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만남 

 

에곤 쉴레가 비엔나의 어느 카페에서 45살의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을 때 17살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당구를 좋아하던 쉴레가 카페에서 평소 존경하던 클림트를 만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쉴레에게만 감동이었던 것이 아니라 클림트에게도 사건이었다.
클림트의 화실을 처음 방문하던 날 쉴레는 드로잉 몇 점을 갖고 가서 대가의 고견을 듣고 싶어 했다.
클림트는 “음, 좋아, 매우 좋아!”라고 칭찬했다.
과분한 칭찬에 부끄러워하며 쉴레가 자신의 드로잉 몇 점을 줄테니 클림트의 드로잉 한 점을 달라고 제의하자 클림트는 “왜 내 것과 바꾸려고 하느냐? 네가 나보다 더 잘 그리면서 ...”라고 하며 기꺼이 드로잉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누드를 많이 그렸는데, 클림트에게 누드는 성적 대상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의 작품에 상징주의 요소가 농후한 건 인체를 표현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인생을 표현하는 고상한 상징물로 본 그에게 누드는 자유와 평화의 여신을 의미했으며 무엇보다도 에로스 자체였다.
이에 반해 쉴레는 누드를 억압된 성적 충동을 병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 보았으므로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했다.
그는 표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드로잉이 만화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밝은 면 못지않게 어두운 면도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림트는 여자를, 남자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육체를 가진 아름다운 이성으로 보았다.
처녀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꿈과 환상에 도취된 감성적으로 민감한 존재인 동시에, 요염한 제스처로 남자의 정신에 깊이 파고드는 동물적 감각이 농후한 존재로 나타났다.
그는 성적 충동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여인을 그렸고 자위행위에 가까운 노골적으로 선정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런 점은 쉴레에게서도 발견하며 그는 여자를 성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존재, 섹스를 갈망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두 사람의 여자관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희망> 연작
클림트는 오랜 관계를 유지했던 여인이 자신의 아들을 낳았으나 곧 사망하자 이 시기부터 임산부를 다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겪으면서 인생의 본질에 관해 탐구하면서 <희망 I>에서 임산부와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병치시켰다.
새 생명의 잉태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곧 죽음의 위협을 받고 죽음과 연결된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죽은 아들 오토 짐머만의 얼굴을 그린 스케치가 남아 있어 그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클림트는 헤르마라는 여자를 모델로 고용하려고 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모델이 되는 것이 수치스러워 거절했지만 클림트의 집요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모델이란 직업은 천하게 여겨지고 있었지만 클림트는 모델들을 각별하게 대했다.
모델 가족의 장례비를 주기도 하고 집세를 대신 내주기도 해서 모델들은 클림트를 좋아했다.
클림트는 4년 후인 1907~8년에 <희망 II>를 그리면서 양식과 상징의 형태를 달리 했다.
여기서는 죽음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고 여인의 뒤로 숨어 얼굴만 빼꼼 드러내고 있다.
모호한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보다 장식적으로 그렸으며 젖가슴을 드러낸 임산부를 아름다운 의상을 한 모습으로 이상화했다.
죽음과 삶에 대한 집착은 1903년작 <망자들의 행렬>에서 여실히 나타났고, 1916년에 그린 <죽음과 삶>에는 좀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인류 전체를 상징하는 무리와 해골로 상징되는 죽음을 병렬하여 죽음이 삶 가까이에 있음을 지적했다.
클림트의 회화는 전통이나 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숨김 없이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학문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은 여하튼 실망하게 되고, 행복도 지식도 안겨주지 못하며, 운명은 필히 존재하고 인간의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복과 지식을 추구하며 운명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이 당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특징으로 쉴레에게 계승되었다.

나르시즘적 자화상
클림트의 작품에 나타난 인생의 어두운 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가 쉴레이다.
클림트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지만 쉴레가 그린 기괴한 형태의 자화상에서 클림트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클림트는 모델의 다양한 제스처와 장식적 요소를 혼용하여 그리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카메라의 발명은 초상화에 변혁을 초래했고, 화가들은 모델의 내면의 힘이나 특징을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당시 입센과 스트린드베르크의 작품이 비엔나에서도 애독되었는데, 두 사람의 작품에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없는 내용이 있어 비이성적인 것 혹은 잠재의식으로 여겨졌다.
이런 요소가 쉴레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화가로서 불과 1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산 쉴레는 인생의 어두운 곳들만 찾아 헤맨 예술가였다.
그는 100점도 더 되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기괴한 모습들이 많아 거울 앞에서 얼마나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나르시즘에 빠졌는지 짐작된다.
<오른쪽 팔꿈치를 들어올린 자화상>은 쉴레가 아니면 취하기 어려운 제스처이며 <팔을 올린 자화상>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제스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그의 나르시즘은 어릴 적부터 나타났는데 거의 모든 드로잉에 사인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종종 사인을 다른 스타일로 바꾸기도 했으며 자신을 알리는 일에 여간 관심이 많지 않았다.
초상화는 그의 주요 장르가 되었고 자화상을 많이 그림으로써 자신이 회화의 중요한 주제임을 알렸다.
쉴레는 다양한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1910년에 그린 출판업자 <에두아르 코스맥>은 에드바르트 뭉크가 1894년에 그린 <사춘기>에서 포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1909년 벨기에, 프랑스 화가 외에도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작품이 포함된 전시회가 비엔나에서 열렸고 쉴레는 전시회에 가서 뭉크의 작품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현재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춘기>는 1894년에 그린 것이지만, 이를 처음 유화로 그린 것은 1886년이고 1890년에 소실되자 다시 그린 것이다.
원래의 작품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 작품이 가장 우수하며 뭉크의 표현주의 회화를 대표할 만하다.
벗은 몸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소녀는 양팔을 앞으로 모으고 관람자를 향해 눈을 크게 뜨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뒤로 드리워진 불분명한 커다란 그림자는 소녀의 기대와 불안을 상징한다.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뭉크 특유의 포즈와 배경의 어두운 그림자로 표현했다. 

풍경화
클림트의 풍경화는 방을 품위 있게 장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는 인공적 자연을 만들어 관람자의 즐거움을 증가시켰다.
빼어난 자연주의 묘사 기술과 섬세한 색상 그리고 장식적 요소는 관람자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그의 작품에는 눈에 즐거운 것이 마음에 즐거운 것이라는 쾌락주의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극도로 이상화된 그의 풍경화를 보노라면 인공적 자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는 그가 원하는 자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자연에서 장식적 소재를 찾아 회화를 위해 자신의 것으로 바꾸었다.
쉴레의 풍경화에서는 그의 누드화에서 보았던 이그러진 비정형적인 요소와 장식적인 요소가 있다. 고독한 사람의 눈에 비치는 쓸쓸한 자연이 보이는데 이는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담은 풍경화이다.
<수령초가 있는 가을 나무>는 회화의 주제로 삼기에는 기형적인 불구의 나무처럼 보인다.
클림트가 숲을 선호한 데 비해 쉴레는 자신의 고독한 마음을 상징하는 앙상하고 야윈 불구의 나무를 선택했다.
<죽은 동네>는 동네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은 동네로 바라본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흑사병과 같이 무서운 속도로 전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에도 번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유럽에서 독감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1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사람의 수보다 더 많았다.
그해 1월 11일 뇌졸증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클림트도 독감에 걸려 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10월 28일에는 쉴레의 아내 에디스가 독감으로 죽었는데 결혼 한 지 3년이 조금 지난 그녀는 임신 6개월 중이었다.
쉴레도 독감에 걸렸고 사흘 후 아내의 뒤를 따랐는데 그의 나이 겨우 28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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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의 역사


양식의 역사를 넓은 의미의 미술사라 한다면 형식의 역사는 이와 유사하지만 좁은 의미의 미술사라 할 수 있다.
형식이라는 말의 의미가 다양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개념이 또한 다양하게 전개된다.
형식form은 라틴어 포르마forma에서 유래했는데 포르마는 그리스어에서 왔고, 원래의 뜻은 모르페와 에이도스이다.
모르페는 시각적 형식들에 사용된 말이고 에이도스는 개념적 형식들에 사용된 말이었다.
타타르키비츠는 형식에 대한 반대말들, 즉 내용, 소재, 요소, 제재 등이 있어 형식의 뜻이 다양함을 지적했다.
내용이 반대말일 경우 형식은 외관 혹은 외적 양식을 의미하지만 소재가 반대말일 경우에는 형식은 형체로 간주되며, 요소가 반대말일 경우 형식은 각 부분들의 배열 혹은 배치에 상당하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63)
타타르키비츠는 형식을 말의 뜻에 따라 최소한 다섯 가지로 구분했는데 편의상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64)
1 부분들을 배열한다는 의미로서의 형식
2 감각에 작용하는 형식
3 대상의 윤곽으로서의 형식
4 대상의 개념적 본질로서의 형식
5 대상에 대한 정신의 기여로서의 형식
그는 1, 2, 3을 미학의 고안물로 보았고, 4와 5를 철학에서 미학으로 유입된 것으로 간주했다.
내가 이 책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5의 개념으로서 칸트가 창안한 역사관이다.
선천적 형식으로서의 이 개념은 앞서 설명한 양식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형식은 예술가의 주관에 의해 미술품에 부과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형식이 주관적이라서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닌다.
칸트의 선천적 형식이 플라톤의 이데아를 정신의 형식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플라톤의 『테아에테투스 Theaetetus』를 참고하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저서는 이데아가 세상을 이룬다는 존재론적 개념으로 일관한다.
초기 르네상스 사상가이면서 플라톤의 추종자 니콜라우스Nicholas de Cusa(1401-64)는 1565년에 “형식은 인간적 예술을 통해서만 생겨난다. … 예술가는 자연 대상의 형체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예술의 형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 뿐이다. … 가시적인 모든 형식은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참되고 비가시적인 형식의 닮은꼴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는데 칸트의 이론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인식론에서 지식의 선천적 형식을 발견했으나 미학에서는 선천적 형식을 찾지 않았는데 힐데브란트가 형식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뵐플린과 리글이 증명했다.
뵐플린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트로의 전이에 따른 형식의 양자택일적 본질을, 선적인 것에서 조형적인 것으로, 닫힌 형식에서 열린 형식으로 설명했으며, 리글은 시각형식과 촉각형식 사이의 예술의 파동에 대해 탐구했다.
뵐플린과 리글의 선례를 따라 보링거는 추상형식과 감정이입을 형식에 대비시켰다.
이들 모두 칸트가 창안한 선천적 형식을 다원적인 형태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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