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학예를 연결시킨 레오나르도
 

  미술과 학예를 연결시킨 최초의 인물을 꼽으라면 레오나르도라 할 것이다.
원근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말했다.

"자연계의 원인과 이유를 탐구하다 보면 빛이 주로 관람자를 사로잡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학의 특성 중에서 증명의 확실성이야말로 탐구자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가장 주요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원근법은 인간의 모든 지식 체계와 학설 중에서 으뜸으로 인정되어야 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이 문학보다 손작업이 훨씬 많이 요구되기 때문에 품격이나 권위면에서 시에 비해 뒤떨어진 대접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미술은 정신보다는 육체적 노동이 훨씬 더 요구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레오나르도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회화가 그 어떤 것보다도 손으로 하는 일이라고 해서, 또 상상을 통해 착상된 것을 손이 만든다고 해서 회화를 기계적인 일로 보는데, 작가들 역시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펜을 이용해 손으로 적지 않는가."

레오나르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화가의 창조력이 시인의 것에 비해 못하지 않음을 역설하면서 회화가 어떤 의미에서 시보다 더욱 더 완벽하게 재현해내며 특히 시가 뽐내는 도덕적 목적을 회화가 시만큼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했다.

"시인이 '내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나 짓겠다'고 말한다면 화가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아펠레스Apelles가 중상Calumny이란 주제의 작품을 그렸듯이 시가 도덕철학에 관련되었다면 회화는 자연철학과 관련이 있다. 시는 정신의 활동을 묘사하며 회화는 정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점을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나타낸다. 시가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사람에게 겁을 준다면 회화도 동일한 이야기를 재현함으로써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가 동작과 얼굴 표정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보여주기 때문에 도덕적 목표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오나르도의 사고와 감정은 그가 말한 대로 그가 묘사한 인물의 제스처, 태도, 행위 등으로 나타났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글을 쓰듯 신속하게 손을 놀렸을 것이다.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1451~1508)의 궁전 소속 시인 베르나르도 벨린치오니Bernardo Bellincioni는 1492년에 사망했는데 그는 레오나르도가 작업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며 또한 드로잉하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그의 『서리 Rime』는 1493년에 출간되었는데 그는 저서에서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을 먼저 칭찬했고 다음에 채색을 칭찬했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사클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는데, 베로키오의 작업장은 마스터 예술가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로 마음만 먹으면 베로키오를 도와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가능하면 자신의 독단적인 사업에 매진했다.
레오나르도는 안토니오(1432년경~98)와 피에로 풀라이우올로Piero Pollaiuolo(1441년경~96년경)의 작업장과도 관련을 맺었다.
그는 형제의 작업장에서 인체의 운동에 따른 근육의 변화와 뒤틀린 인체의 근육을 배웠다.
레오나르도는 피에로의 <벌거벗은 남자들의 전투 The Battle of the Nude Men>를 보고 해부학의 필요성과 근육의 기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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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감정이 전달되어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잠시 고향을 여행한 후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했음이 틀림 없을 텐데 현존하는 작품이 없다.
레오나르도는 곧 베로키오 작업장의 반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메디치 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직접 볼 수 있었다.
로렌초는 베로키오에게 공작을 위해 로마 스타일의 갑옷과 헬멧을 디자인하라고 했다.
레오나르도가 전사의 옆모습을 그렸는데 아마 그런 갑옷과 헬멧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갑옷은 소용돌이 무늬, 사자의 얼굴과 발톱, 잇빨, 독수리 날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을 것이다.

밀라노 공작이 피렌체를 방문하는 중에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를 포함한 조수들과 함께 종교적 축제 행렬과 함께 교회 상 펠리체에 <수태고지 Annunciation>를,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에 <그리스도의 승천 Ascension of Christ>을, 산토 스피리토에 <사도들에게 성령의 내림 Descent of the Holy Ghost to the Apostles>을 걸었다.
3월 21~22일 그림을 모두 걸었을 때 재앙이 닥쳤는데 불이 나서 교회를 전소하고 말았다.
화재의 원인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세워놓은 많은 횃불들 가운데 하나가 쓰러져 일어난 것 같았다.

레오나르도에 관해 정통한 학자 케네스 클락Kenneth Clark은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의 취미는 "옷을 잘 입고, 말을 길들이며, 류트lute(14~17세기의 기타 비슷한 현악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1472년 견습생활을 마치고 마스터로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는데 20살 때였다.
그 해 그의 이름이 페루지오와 보티첼리 이름과 나란히 성 누가 교회의 지출 명단에 올라 있었다.
성 누가 교회가 레오나르도의 후원자가 된 것은 <동정녀 마리아 Virgin Mary>의 초상을 그린 후부터였다.
레오나르도가 마스터가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수련기간이 끝났다는 것 뿐이지 여전히 베로키오의 조수로 그를 도왔다.
그는 여전히 드로잉하면서 기술에 완벽을 기했는데, 석고로 제작된 "웃음짓는 여인의 머리와 아이들의 얼굴을" 드로잉했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마스터가 된 후 처음 제작한 것을 아버지가 싼값에 팔았다고 적었고 이는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
세르 피에로가 지방에 있을 때 소작인 한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소작인은 자신이 무화과나무로 방패를 만들었다면서 피에르가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에게 장식을 의뢰하면 그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피에로는 그러마하고 그 일을 레오나르도에게 시켰다.
레오나르도는 나무가 거칠게 깍인 것을 보고는 자신이 깍아 매끈하게 한 후 특별한 유약을 발라 광택을 냈다.
그는 방패에 고르곤Gorgon(그리스 신화의 동물로 머리가 뱀이며 보는 사람을 도로 변화시켰다는 세 자매의 괴물)의 머리를 그려 넣었는데 적을 두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는 고르곤을 그리기 위해 크고 작은 도마뱀, 귀뚜라미, 메뚜기, 박쥐, 그리고 그 밖의 낯선 동물들을 드로잉하며 습작했다.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괴물을 만들기 위해 그는 "검은 바위의 갈라진 틈으로부터 나와 턱을 크게 벌리고 불을 토해내고 눈에서는 빛이 나며 코에서 독이 있는 김이 방사되는" 모습을 그렸다.

그는 뱅패의 장식을 완성한 후 아버지를 오게 해서 의견을 들으려고 했다.
피에로는 아들의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만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는 자신이 마귀를 봤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는 "방패는 이래야 합니다. 가져가세요"라고 했다.
바사리는 이 말에 덧붙여서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예술에서 기대하는 점입니다"라고 레오나르도가 말한 것으로 적었다.
피에로는 곧바로 장터에 가서 화살이 방패에 꽂힌 모습으로 장식된 것을 하나 사서 소작인에게 주었고 소작인은 매우 흡족해 했다.
피에로는 아들이 장식한 방패를 몰래 피렌체 상인에세 100두카트를 받고 팔았다.
그 상인은 그것을 미라노 공작에게 300두카트에 팔았다.
이 이야기는 바사리에 의해서만 전해오지만 사실을 그가 기록한 것 같으며 그 방패는 현존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쓴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화가는 환상적인 동물을 실재의 요소들에서 구성해야 한다고 적었다.
용을 그릴 경우 그는 "맹견이나 사냥개의 머리에 고양이의 눈, 소마기porcupine의 귀, 그레이하운드(몸이 길고 날쌘 사냥개)의 주둥이, 사자의 눈섭, 늙은 수탉의 볏, 거북이의 목"으로 할 것을 권했다.
이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베로키오가 의전에 사용하는 헬멧에 장식한 적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를 글로서 분명히 했다.
레오나르도는 미술품이 단지 장식적이서는 안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영향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은 그가 고향의 동굴 앞에서 두려움과 욕망으로 보고 싶어 했던 것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예술이라는 미지의 동굴 속에 이런 것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는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드로잉을 시에 비유하면서 느낌, 인상,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매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드로잉의 기능을 기교적, 과학적 화제에 시각적으로 시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드로잉을 시인의 언어에 비유하면서 객관적 실재를 가장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적었다.

"드로잉을 하는 사람은 이야기적 회화를 구성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외양을 예리한 선으로 종료시키는 것을 억제해야 하며 대부분의 화가들이 목탄으로 세심하게 묘사하는 데 이런 방법을 억제해야 한다. 세심하게 묘사하는 것이 완벽하게 보일런지는 몰라도 예술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살아 있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사고나 감정을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드로잉을 완성시키고, 아름답게 하며, 모양을 잘 배열하기 위해서 화가는 터무니 없는 모양을 그리기도 하고 높거나 낮게 또는 멀리 있거나 바로 앞에 있는 것인양 그려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보여주는 지식에 대해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다. 자, 시인들이 어떻게 시를 짓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쓴 시인들에게는 몇 구절을 삭제해서 나은 문장으로 새롭게 쓰는 것이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므로 화가는 오브제의 부분을 대충 그려야 하며 인물의 아름다움과 장점에 깊이 생각하기 전 인물의 동작을 적절하게 재현하는 데 숙고해야 하고 이야기적 회화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정신적인 점을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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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미와 숭고의 감정에 대한 고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신의 요리사가 그들의 가장 재기넘친 창작자이고, 자신의 섬세한 취미의 작품들을 고작 자신의 창고에서 발견하는 뚱보들은, 세속적인 농담과 조야한 익살에서 생기넘치는 즐거움을 얻게 되는데, 그들은 이러한 농담과 익살을 사람들이 고상한 느낌으로 자부심을 갖게 되는 바로 그러한 것으로 여긴다.
책을 읽으면서 잘 잠들 수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태한 사람이 있을 것이요, 모든 만족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상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인은 영악한 사람이 상업적 이윤을 계산할 때의 즐거움만을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즐거움을 주는 대상으로 간주되는 한에서만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파리쫓기를 즐겨하는 도미티안같은 새나 야생동물을 사냥하고 싶어하는 A씨같은 시냥애호가나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특성에 따라 만족을 향유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때 사람들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개념을 형성할 수 없어도 된다.”
칸트는 미적 지각과 개념 형성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인간적인 천재가 어떤 전적인 파괴로부터 일종의 재생을 통해 다행히도 스스로 고양을 이루어낸 후라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예술과 학문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견지에서도 미와 우아에 대한 올바른 취미가 꽃피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를 쉽사리 기만하는 거짓된 미광이 우리를 고상한 단순함으로부터 눈에 띄게 소외시킨다는 사실은 더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더욱이 일찌감치부터 도덕적인 감정을 젊은 세계 시민들의 가슴 속에 활동적인 느낌으로 고양시키기 위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교육의 비밀을 낡은 광기로부터 떼어내야 한다는 것도 더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순수함이 우리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단순한 취미로 판단해버리는 데서 얻어지는 일시적이고 범용한 만족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그러한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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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호의 『필법기 筆法記』



신神: 신적인 화가를 말하는데 이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대자연의 변화를 따름으로써 자연스럽게 형상을 성취하는 사람을 말한다.
묘妙: 놀라운 화가 혹은 경이로운 화가를 말하는데 이는 그의 사상으로 천지만물의 본성을 꿰뚫어 봄으로써 모티프의 진리에 따라 사물들이 그의 붓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람을 말한다.
기技: 슬기로운 화가를 말하는데 이는 모티프의 진리에 일치하지 않는 대강의 윤곽들을 그리는 사람을 말한다. 즉 그가 그린 사물들에는 이치가 없고 유사성도 없다.
교巧: 숙련된 화가를 말하는데 이는 단지 자연의 모방자로서 오로지 위대한 원리들에 부합하는 미의 흔적들을 잘라내어 조합한다.
이런 분류는 형호荊浩의 유명한 논집인 『필법기 筆法記』에 설명되어 있다.
형호의 분류는 당대 말기에 씌여진 『당조명화록 唐朝名畵錄』에 있는 주경현朱景玄의 분류 및 1005년에 출간된 『익주명화록 益州名畵錄』에 있는 황휴복黃休復의 분류와 같은 이전의 분류방식을 수정한 것이다.
이들 초기 주장은 724-777년에 쓰여진 『서단 書斷』 속에 있는 장회관張懷瓘의 서예작품에 대한 분류에 기초하고 있다.
장회관은 화가들을 신·묘·능能의 세 등급으로 구분했다.
주경현은 이에 덧붙여 네 번째 범위로 자발적이거나 충동적인 것, 즉 일逸이라는 제4의 범위를 설정했다.
그렇지만 일逸格이 등급상 어디에 속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경현은 그것이 뛰어난 것으로서 또한 저급한 것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낼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반면에 황휴복은 일격을 등급 중에서 첫 번째로 두었으며 형호는 일逸을 기奇로 대체한다.
오스발드 시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경현과 황휴복에 의해 제시된 이론체계의 틀을 수정한 이러한 분류는 실로 그 나름의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자발적으로 충동적인 화가(逸)를 신적인 화가(神)로부터 구별해내는 것은 슬기로운 화가(奇)를 숙련된 화가로부터 구별해내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The Chinese on the Art of Painting』, New York: Schocken Books, 1963, pp.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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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메디치가를 공격하다
김광

  교황은 몹시 분노하면서 메디치가와 맞먹는 부와 권력을 쥔 파지가, 리아리오가, 살비아티가로 하여금 로렌초를 전복시켜도 좋다는 뜻을 전했다.
교황은 젊은 로렌초를 살해하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이들 가문은 1478년 4월 26일 부활절 날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던 로렌초와 줄리아노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베키오 궁전을 점령하고 의회를 쫓아냈다.
부활절 로렌초는 여느 때와 같이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은 채 성당 미사에 참석했다.
줄리아노는 그날 늑장을 부리고 있었는데, 프란체스코와 베르나르도 반디니가 그의 집으로 가서 농담을 해가면 그로 하여금 성당으로 오게 했다.
신부가 미사를 위해 성병(빵)을 들어올릴 때 반디니가 줄리아노의 가슴을 칼로 찔러 죽였다.
줄리아노는 바닥에 쓰러졌고 프란체스코는 줄리아노에 달려들어 어찌나 정신없이 그를 찔러댔던지 그만 자신의 다리를 찌르기도 했다.
한편 안토니오 다 볼테르라와 신부 스테파노는 대검으로 로렌초를 공격했다.
로렌초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무기로 방어했고 칼로 조금 베이는 정도였다.
친구들이 로렌초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를 성물실로 데리고 갔다.
공격자들은 군중 틈으로 유유히 빠져나갔으며 줄리아노의 시신은 메디치 궁전으로 옮겨졌다.
대성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대주교 살비아티, 아이아코포 데 파지는 무장한 공모자 백 명을 거느리고 베끼오 궁전을 덮쳤다.
그러나 시민은 메디치가의 편에 섰다. 살비아티가 궁전 안에 들어서자 장관 체사레 페트루치가 그를 때려눕혔고, 인문주의자의 아들 아이아코포 디 포지오는 궁전 창문에 목을 매달았으며, 계단을 오른 몇 명의 공모자들은 붙잡혀 창문 밖으로 던져져서 돌이 깔린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로렌초가 많은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나타나자 시민들은 그가 무사함을 알고 환호하며 메디치가를 공격한 수상쩍은 모든 공모자들에게 공격했다.
시민들은 프란체스코를 잡아다가 대주교 옆에 목을 매달았으며 죽은 아이아코포 데 파지의 시신을 벌거벗겨 아르노 강물에 던졌다.

대주교를 목매달아 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황 식스투스는 충격을 받았다.
교황은 로렌초를 카톨릭, 도시장관, 행정판사, 그리고 피렌체의 모든 종교적 행사에서 추방했다.
일부 성직자들은 교황의 이런 금지령에 반대하여 시위했고 교황의 매도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식스투스의 명을 받고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드 1세는 피렌체에 사절을 보내 의회와 시민들에게 로렌초를 교황 앞에 끌고가든지 아니면 피렌체에서 추방하라고 강요했다.
피렌체 의회는 지도자를 배신하느니 어떤 사태에도 대처하기로 결의했고 식스투스와 나폴리 왕은 1479년에 피렌체에 선전포고를 했다.
나폴리 왕의 아들 알퐁소는 포지본시 근처에서 피렌체 군대를 섬멸하고 피렌체의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전쟁으로 인해 과중한 세금을 물게 되자 불평하기 시작했고 로렌초는 자신 한 사람을 위해 피렌체가 더이상 희생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결심을 해야 했다.
그는 피사에서 배를 타고 나폴리로 가서 자신을 왕에게 데리고 가달라고 했다.
왕은 그의 용기에 탄복했다.
로렌초는 피렌체가 직면한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나폴리 왕에게 교황이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나폴리에게도 위험하다고 말했다.
교황이 피렌체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때 터키족이 지상과 바다로 내려오면서 곧 이탈리아를 침략할 기세였고 나폴리가 장악한 아드리이틱을 칠 태세였다.
로렌초는 포로이면서 고귀한 손님의 상태로 있게 되었다.

로렌초의 입장은 불리해지고 있었고 알퐁소가 계속해서 피렌체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식스투스는 계속해서 나폴리 왕에게 로렌초를 로마로 보내 자신의 포로로 삼아야 한다고 종용했다.
피렌체인들은 로렌초가 처형될 경우 피렌체의 독립은 끝장나게 되므로 석달 동안 불안해 했다.
로렌초는 나폴리에 머무는 동안 친절과 온화함으로 친구들을 만들었으며 나폴리 장관이며 공작 카라파를 설득해서 자신의 문제를 도와주게 만들었다.
나폴리 왕도 로렌체의 인격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나폴리 왕 역시 품위가 있고 고결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렌초와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그가 통치자로 있는 동안 피렌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로렌체와 평화조약을 맺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말 한 필을 선물로 줬으며 나폴리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로렌초가 나폴리와 평화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식스투스는 몹시 분해하면서 자신 혼자서라도 그와의 전쟁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모하메드 2세가 1480년 군대를 이끌고 오트란토에 진입하면서 이탈리를 완전히 장악할 태세였다.
식스투스는 라틴 기독교 왕국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는 피렌체 시민 대표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피렌체 시민을 용서하는 대신 터키족을 대항해 군함을 15척 만들게 하고 평화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로렌초는 타의 도전을 받지 않는 명실공히 토스카니의 군주가 되었다.

로렌초는 이제 30살이 되었고 성격은 젊었을 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그보다 더한 것으로 갚았으며, 십여 개의 종교적 사업에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술가, 학자, 시인들을 후원했으며, 국가에 큰 돈을 빌려줬다.
1480~90년은 피렌체의 정치, 문학, 예술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로렌초는 자신이 수집한 건축적 유물과 조각품들을 코시모와 피에로가 수집한 것들과 함께 메디치 궁전과 상 마르코수도원 사이의 정원에 장식했다.
바사리는 로렌초의 후원 아래 이 정원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예술가가 되었다고 적었다.

예술 후원가로서의 로렌치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베르톨도 디 조반니Bertoldo di Giovanni(1420년경~91)와의 관계이다.
베르톨도는 비주류에 속하는 소품 조각가였지만 도나텔로로부터 수학한 후 조수로 그를 도왔고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
그가 15세기위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와 16세기의 위대한 조각가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로렌초는 예술가들 가운데 베르톨도를 가장 가까이 했다.
베르톨도는 로렌초와 한 집에 살면서 매일 함께 식사를 하고 로렌초가 여행을 갈 때 동행했으며 로렌초의 미술 자문으로 로렌초가 세운 미술 아카데미의 첫 원장이었다.
그는 유머가 있었고 요령이 있었으며 임기응변에 재주가 있었고 로렌초가 가까이 했지만 주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는 로렌초의 예술에 대한 견해와 소망을 재빨리 알아채고 공감하는 재능이 있었으며 이는 곧 궁정 예술가의 이상형이다.
재료를 유연하며 오래보존되는 최상품 청동에 국한시켜 작은 크기의 장식적이며 우아한 형상의 작품을 제작하는 베르톨도의 양식이 로렌초의 취향에 가장 부합되었던 것 같다.
로렌초는 소품을 좋아했으며 그가 수집한 커다란 조각품은 드물다.
로렌초 수집품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5, 6천 점으로 조각 또는 부조가 있는 보석류였다.
이 장르는 고대부터 있어왔고 베르톨도는 고대 기술과 고대 모티프를 사용했다.
로렌초의 예술적 취향은 장식적인 것과 값비싼 것, 유희적인 것과 기예적인 것으로 소군주국 영주들의 로코코적 취향과 매우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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