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메디치가를 공격하다
김광

  교황은 몹시 분노하면서 메디치가와 맞먹는 부와 권력을 쥔 파지가, 리아리오가, 살비아티가로 하여금 로렌초를 전복시켜도 좋다는 뜻을 전했다.
교황은 젊은 로렌초를 살해하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이들 가문은 1478년 4월 26일 부활절 날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던 로렌초와 줄리아노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베키오 궁전을 점령하고 의회를 쫓아냈다.
부활절 로렌초는 여느 때와 같이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은 채 성당 미사에 참석했다.
줄리아노는 그날 늑장을 부리고 있었는데, 프란체스코와 베르나르도 반디니가 그의 집으로 가서 농담을 해가면 그로 하여금 성당으로 오게 했다.
신부가 미사를 위해 성병(빵)을 들어올릴 때 반디니가 줄리아노의 가슴을 칼로 찔러 죽였다.
줄리아노는 바닥에 쓰러졌고 프란체스코는 줄리아노에 달려들어 어찌나 정신없이 그를 찔러댔던지 그만 자신의 다리를 찌르기도 했다.
한편 안토니오 다 볼테르라와 신부 스테파노는 대검으로 로렌초를 공격했다.
로렌초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무기로 방어했고 칼로 조금 베이는 정도였다.
친구들이 로렌초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를 성물실로 데리고 갔다.
공격자들은 군중 틈으로 유유히 빠져나갔으며 줄리아노의 시신은 메디치 궁전으로 옮겨졌다.
대성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대주교 살비아티, 아이아코포 데 파지는 무장한 공모자 백 명을 거느리고 베끼오 궁전을 덮쳤다.
그러나 시민은 메디치가의 편에 섰다. 살비아티가 궁전 안에 들어서자 장관 체사레 페트루치가 그를 때려눕혔고, 인문주의자의 아들 아이아코포 디 포지오는 궁전 창문에 목을 매달았으며, 계단을 오른 몇 명의 공모자들은 붙잡혀 창문 밖으로 던져져서 돌이 깔린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로렌초가 많은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나타나자 시민들은 그가 무사함을 알고 환호하며 메디치가를 공격한 수상쩍은 모든 공모자들에게 공격했다.
시민들은 프란체스코를 잡아다가 대주교 옆에 목을 매달았으며 죽은 아이아코포 데 파지의 시신을 벌거벗겨 아르노 강물에 던졌다.

대주교를 목매달아 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황 식스투스는 충격을 받았다.
교황은 로렌초를 카톨릭, 도시장관, 행정판사, 그리고 피렌체의 모든 종교적 행사에서 추방했다.
일부 성직자들은 교황의 이런 금지령에 반대하여 시위했고 교황의 매도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식스투스의 명을 받고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드 1세는 피렌체에 사절을 보내 의회와 시민들에게 로렌초를 교황 앞에 끌고가든지 아니면 피렌체에서 추방하라고 강요했다.
피렌체 의회는 지도자를 배신하느니 어떤 사태에도 대처하기로 결의했고 식스투스와 나폴리 왕은 1479년에 피렌체에 선전포고를 했다.
나폴리 왕의 아들 알퐁소는 포지본시 근처에서 피렌체 군대를 섬멸하고 피렌체의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전쟁으로 인해 과중한 세금을 물게 되자 불평하기 시작했고 로렌초는 자신 한 사람을 위해 피렌체가 더이상 희생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결심을 해야 했다.
그는 피사에서 배를 타고 나폴리로 가서 자신을 왕에게 데리고 가달라고 했다.
왕은 그의 용기에 탄복했다.
로렌초는 피렌체가 직면한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나폴리 왕에게 교황이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나폴리에게도 위험하다고 말했다.
교황이 피렌체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때 터키족이 지상과 바다로 내려오면서 곧 이탈리아를 침략할 기세였고 나폴리가 장악한 아드리이틱을 칠 태세였다.
로렌초는 포로이면서 고귀한 손님의 상태로 있게 되었다.

로렌초의 입장은 불리해지고 있었고 알퐁소가 계속해서 피렌체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식스투스는 계속해서 나폴리 왕에게 로렌초를 로마로 보내 자신의 포로로 삼아야 한다고 종용했다.
피렌체인들은 로렌초가 처형될 경우 피렌체의 독립은 끝장나게 되므로 석달 동안 불안해 했다.
로렌초는 나폴리에 머무는 동안 친절과 온화함으로 친구들을 만들었으며 나폴리 장관이며 공작 카라파를 설득해서 자신의 문제를 도와주게 만들었다.
나폴리 왕도 로렌체의 인격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나폴리 왕 역시 품위가 있고 고결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렌초와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그가 통치자로 있는 동안 피렌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로렌체와 평화조약을 맺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말 한 필을 선물로 줬으며 나폴리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로렌초가 나폴리와 평화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식스투스는 몹시 분해하면서 자신 혼자서라도 그와의 전쟁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모하메드 2세가 1480년 군대를 이끌고 오트란토에 진입하면서 이탈리를 완전히 장악할 태세였다.
식스투스는 라틴 기독교 왕국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는 피렌체 시민 대표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피렌체 시민을 용서하는 대신 터키족을 대항해 군함을 15척 만들게 하고 평화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로렌초는 타의 도전을 받지 않는 명실공히 토스카니의 군주가 되었다.

로렌초는 이제 30살이 되었고 성격은 젊었을 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그보다 더한 것으로 갚았으며, 십여 개의 종교적 사업에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술가, 학자, 시인들을 후원했으며, 국가에 큰 돈을 빌려줬다.
1480~90년은 피렌체의 정치, 문학, 예술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로렌초는 자신이 수집한 건축적 유물과 조각품들을 코시모와 피에로가 수집한 것들과 함께 메디치 궁전과 상 마르코수도원 사이의 정원에 장식했다.
바사리는 로렌초의 후원 아래 이 정원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예술가가 되었다고 적었다.

예술 후원가로서의 로렌치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베르톨도 디 조반니Bertoldo di Giovanni(1420년경~91)와의 관계이다.
베르톨도는 비주류에 속하는 소품 조각가였지만 도나텔로로부터 수학한 후 조수로 그를 도왔고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
그가 15세기위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와 16세기의 위대한 조각가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로렌초는 예술가들 가운데 베르톨도를 가장 가까이 했다.
베르톨도는 로렌초와 한 집에 살면서 매일 함께 식사를 하고 로렌초가 여행을 갈 때 동행했으며 로렌초의 미술 자문으로 로렌초가 세운 미술 아카데미의 첫 원장이었다.
그는 유머가 있었고 요령이 있었으며 임기응변에 재주가 있었고 로렌초가 가까이 했지만 주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는 로렌초의 예술에 대한 견해와 소망을 재빨리 알아채고 공감하는 재능이 있었으며 이는 곧 궁정 예술가의 이상형이다.
재료를 유연하며 오래보존되는 최상품 청동에 국한시켜 작은 크기의 장식적이며 우아한 형상의 작품을 제작하는 베르톨도의 양식이 로렌초의 취향에 가장 부합되었던 것 같다.
로렌초는 소품을 좋아했으며 그가 수집한 커다란 조각품은 드물다.
로렌초 수집품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5, 6천 점으로 조각 또는 부조가 있는 보석류였다.
이 장르는 고대부터 있어왔고 베르톨도는 고대 기술과 고대 모티프를 사용했다.
로렌초의 예술적 취향은 장식적인 것과 값비싼 것, 유희적인 것과 기예적인 것으로 소군주국 영주들의 로코코적 취향과 매우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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