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종말 이후 -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동시대 미학 1
아서 단토 지음, 이성훈 외 옮김 / 미술문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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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고 끝에 <예술의 종말 이후>가 출간되었습니다.
김광우 님 글, 2004/11/25, 147 회 조회.

  산고 끝에 <예술의 종말 이후>가 출간되었습니다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예술의 종말 이후 After The End of Art>가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나와 경성대 철학 교수 이성훈의 공역으로 출간된 책입니다.
이 책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여러분이 읽기를 권합니다.
단토는 포스트모던이란 말을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포스트모던이 모던을 계승하고 초월한다고 하지만 모던이 현재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계승과 초월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던은 성급하게 사용된 용어로 양식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니지만 그러한 정의에 해당되지 않는 현재의 작품도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단토는 Contemporary(동시대)라는 말을 사용할 것을 주문합니다.
동시대란 예술의 종말 이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현재 미국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미술 이론가들의 글에 단토가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예술 종말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매우 난해해서 국내 모 출판사가 단토의 저서 한 권을 오래 전에 계약해놓고도 여태까지 출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학 학회에서 단토에 관해 논문을 발표한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나도 가서 직접 들어봤지만 저서를 제대로 읽고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단토에 관해 쓴 것만 읽고 마치 단토를 이해하는양 발표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매우 난해한 책인데 최대한으로 이해 가능하게 번역하는라 3년은 족히 걸렸습니다.
내가 초역을 하고 이성훈 교수가 2차역을 하여 완성했습니다.
단토가 한국 독자를 위해 서문을 써 보내주셔서 고맙게 생각하며 실었는데 그분은 우리나라 도자기에도 관심이 많아 익히 잘 알고 계십니다.
책 뒤에 이 교수와 나의 역자 해설이 있습니다.
읽기 전에 참고가 될 것입니다.
단토는 1964년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기점으로 예술이 종말을 고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서양의 미술 개념인 예술은 모방이란 사고가 <브릴로 상자>에서는 발견할 수 없고,
미술품은 만들기라고 오랫동안 생각되어 왔는데, 뒤샹의 레미 메이드에서 보듯 그리고 <브릴로 상자>에서 보듯 작가가 만들지 않아도 미술품이 될 수 있으며 평범하지 짝이 없는 비누를 담은 브릴로 상자도 작가가 변용시킬 의도만 있으면 미술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과거 미술의 개념 또는 미술사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논지입니다.
과거에는 미술품이 되기 위한 조건이 미리 정해져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러한 조건이 따로 없고 화랑에 쓰레기를 거져다 놓든, 고장난 자전거를 가져다 놓든, 다리가 하나 없는 책상을 가져다 놓든 미술품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작가가 창작의 자유를 한껏 누린 때가 과거에는 없었도 현재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를 동시대의 특징으로 꼽은 것입니다.
문제는 평범한 물질도 미술품이 될 수 있다면 미술의 개념이 혼란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
동시대 작품은 자기-지시성, 즉 스스로 미술품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의미를 지녀야 합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이 점을 밝히지 못하면 비평가가 또는 철학자가 설명을 통해 그 의미를 관람자에게 전달할 때 비로소 미술품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비평가의 역할, 철학자의 역할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한 몫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단토의 논리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담겨 있고 이 책을 읽고나면 창작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혹시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저에게 질문하시면 되겠습니다.
번역자로서 after service를 할 의무가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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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르, 숭고한 감정은 발생, 사건, 동요이다



리오타르가 숭고한 감정을 ‘발생 occurence’으로 본 이유는 그것이 의식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며, 또한 의식에 의해 구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이 정립할 수 없는 것이고 의식이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 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 quid’이냐고 묻기 전에 ‘우선’ 일어나는 ‘사태 quod’로 보았다.

1950~51년에 이미 자신의 그림에 <숭고한 영웅 Vir heroicus sublimis>이란 제목을 붙인 바네트 뉴만Barnett Baruch Newman(1905-70)은 60년대 초 최초의 조각품 세 점에 <여기 I>, <여기 II>, <여기 III>란 제목을 붙였으며, 그림들에는 <저기가 아니라 여기 Not over there, here>, <지금 Now>, <존재 Be>라고 붙였다.
그는 1948년 12월에 에세이 「숭고한 것은 지금이다 The Sublime is Now」를 발표하여 벌써부터 숭고한 감정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나타냈다.

뉴만의 작품들은 리오타르의 말로 하면 “숭고한 것은 다른 어떤 곳, 저기 혹은 거기, 이전 혹은 이후 혹은 다른 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지금 …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이 그림이다라는 것에 존재한다. 이 그림이 여기 지금 존재한다는 것,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 바로 이것이 숭고한 것”4)으로 발생, 사건, 동요를 뜻한다.5)
사건은 하이데거가 사용한 말인데 그에게 ‘사건 ein Ereignis’이란 무한히 단순한 것으로 박탈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것이다.6)
칸트는 이를 ‘동요 agitation’라 했는데 판단력을 실행하는 정신의 활동을 의미한다.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의 동요는 규정되어야 할 어떤 것이 규정되고 있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리오타르는 숭고한 감정을 어떤 것이 기대될 때마다 “이제는 무엇이?”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비참함에 비유했다.
화가가 조형적인 면 앞에서, 음악가가 음적인 면 앞에서, 철학자가 사고의 황량함 앞에서 갖게 되는 비참함에 비유했다.
그는 우리가 종종 불안감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연관시킴을 지적하면서 실제로 기다림이 문제시될 때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지만 이런 기다림, 즉 ‘긴장 suspense’은 미지의 것을 느끼는 것에서 오는 류의 쾌락이나, 혹은 스피노자Benedict (Baruch) Spinoza(1632-77)의 말을 빌려 사건이 수반하는 존재의 증가에서 오는 기쁨조차 야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놀라움과 경탄을 함축한 이런 감정은 쾌와 불쾌·즐거움과 두려움·감정의 강화와 저하가 결합된 모순적 감정으로 17세기와 18세기 유럽에서 ‘숭고’란 명칭으로 불리었고, 이 명칭 하에 “고전시학의 모험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미학이 예술에 대해 비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 것도 그리고 낭만주의, 즉 근대성이 승리를 거둔 것도 역시 이 명칭 하에서”7)였고, 모순적 감정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는 의문 자체로서 “‘일어나고 있다’가 억제되고 ‘일어나고 있는가?’가 언명되는 방식”8)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말까지 예술적 반성에서 주요 쟁점이 된 숭고한 감정이 모던을 특징지우는 예술적 감성의 양식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리오타르는 가장 오래된 숭고한 감정에 대한 고찰을 1세기 말엽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에서 찾았다.
숭고성을 연설 속에서 규정하려고 한 롱기누스는 이를 망각할 수 없는 것, 저항할 수 없는 것, 많은 것을 상기하게 하는 것, 즉 “그것에 의해 많은 성찰 hou polle anatheoresis”이 야기된다고 했다.
리오타르는 롱기누스가 “연설가의 에토스와 파토스 속에서 그리고 비유 단어 선별과 표현색인 단어의 결합과 같은 연설기법 속에서 숭고의 원천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논문들(수사학, 시학, 정치학)의 규범에 따라 - 이것의 기능은 행위자들에게 모델로 되는 것이다 - 숭고의 원천을 찾으려 한다”9)고 보았다.
그러나 숭고가 주제가 되었을 때는 수사적인 혹은 시학적인 체계적 서술은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면서 롱기누스가 연설에서 종종 극히 단순한 표현을 통해 알려지는, 즉 연설가의 어귀 강조나 단순한 침묵에 의해 더욱 큰 장엄성이 예상되는 사고의 숭고성이 존재한다고 본 것을 상기시켰다.
그는 롱기누스가 말한 침묵을 수사법의 한 형태로 보고 침묵이 모든 수사법들 가운데 가장 비규정적인 것임을 지적했다.

롱기누스는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문장론이 동요되는 것을 숭고 효과의 예로 제시했는데 그의 저서를 번역한 브왈로는 서문(1683년과 1701년에 첨가한 부록)에서 그리고 1713년 사후에 출간된 제10 성찰에서 고전주의적 기법제도에 대해 암시의 차원을 넘어 완전한 결별을 밝혔다.
그는 숭고란 가르쳐지지 않는 것이라서 모든 교수법이 이에 대해 무력하다고 했다.
그는 숭고가 시학에서 확립될 수 있는 규칙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파악능력, 취미 및 “모든 세계를 지각하기 위한 감각”만을 독자나 청자에게 요구할 뿐이라고 했는데 리오타르는 그의 견해가 페레 부르Pere Bouhours의 것10)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브왈로에 의하면 “숭고는 증명되거나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다가와서 흔들어놓고 느끼게 하는 어떤 경이로운 것이다.”

숭고가 규칙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 숭고에 의해 비규정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증언하는 것은 19세기와 20세기 미학의 과제가 되었다.
낭만주의 회화에서는 캔버스, 구도, 선, 색, 공간, 형상이 재현이란 것에서 제약을 받지만, 현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표현하는 것은 재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모더니즘 회화는 재현에 관한 일련의 규칙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다.
이는 회화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세잔의 그림을 예로 들면 선·공간·빛에 대한 고려가 없는데 그가 지각이 발생하는 순간에 지각을, 지각하기 이전에 지각을 포착하고 재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를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발생으로서 색채, ‘일어나고 있다(어떤 것 - 색채 - 이 일어나고 있다)’는 놀라움, 적어도 어떤 것이 눈에 비치고 있다는 놀라움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것”11)이라고 했는데 리오타르는 그의 판단이 경솔하다면서 세잔이 종종 미세한 감각들의 부적절성을 개탄했고, 이것들에 있어서는 추상들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캔버스를 모두 채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 말을 지적했다.
그는 회화에 틀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색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대상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최소한 전시 공간조차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세잔, 말레비치, 바디아트와 해프닝 예술가들, 뒤샹, 뷔랑Daniel Buren의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모더니즘이 지각할 수 있는 ‘지금’을 거대한 재현적 회화의 붕괴 속에, 표현될 수 없는 ‘지금’을 앞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으로 설정시켰으며, ‘주체’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가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가?” 결핍에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았다.
이러므로 모더니즘이 숭고의 미학에 속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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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를 즐긴 레오나르도
김광우 님 글, 2004/11/25, 145 회 조회.

  유머를 즐긴 레오나르도


당시 피렌체 젊은이들은 오늘 날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파티를 좋아했고 많은 시간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에 관해 생각했다.
그들은 평범한 생활을 싫어했다.
레오나르도에게는 유머가 있었고 그 역시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했고 남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기도 했다.
그가 만든 재담 중에 이런 것도 있다.

"페트라르카가 월계수잎을 좋아했다면 그 이유는 소세지와 개똥지빠귀 요리를 만드는 데 적당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왜 아이들이 못생겼지만 네 그림에서는 아름답게 묘사되었느냐고 물으면 그는 "그림은 낮에 그렸지만 아이들은 밤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과학을 좋아한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속임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유리컵 사이에 나무막대기를 올려놓고 유리컵을 손상시키지 않는 가운데 나무막대기를 자른다든가 끓는 오일에 붉은색 포도주를 부어 다양한 색의 화염을 만든다든가 했다.

세르 피에로의 두 번째 부인이며 레오나르도의 두 번째 의붓어머니 프란체스카 란프레디니가 1473년에 죽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해 여름 레오나르도가 그린 풍경화 뒤에 "나는 행복하다"라고 적혀 있다.
피에로는 2년 후 젊은 여인 마르게리타 디 프란체스코 디 야코포 디 구글리엘모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혼인지참금으로 365플로린을 갖고 시집왔다.
피에로는 공증인으로의 직업을 완전히 굳혀 사업이 성공적이었다.
시인 베르나르도 캄비니Bernardo Cambini는 "법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할 경우 다 빈치 피에로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세 번째 부인은 1476년에 사내를 낳았고 피에로는 세례식을 거대하게 행하면서 아이의 할아버지 안토니오의 이름을 그에게 주었다.
그녀는 그뒤 다섯 아이를 더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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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The Great Couples 1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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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중에서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식사>


에두아르 마네(1832~83)는 삶의 경험 자체가 변화하므로 예술이 변화해야 하며 화가는 현대생활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런 점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선구자이다.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평편한 표면이라는 회화의 물리적인 성질을 인식하기 시작한 마네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모더니스트 회화>(1960)에서 모더니스트 회화란 말을 사용했다.
1863년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를 그리기 얼마 전 마네는 친구이며 훗날 프랑스 문교부장관이 된 프루스트와 함께 센 강가에서 일광욕하는 여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도 누드를 그려야 할 것 같아. 음, 내가 저들에게 누드를 보여주겠어!”라고 했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스페인 의상을 한 두 중년 신사와 누드의 여인이 준비해온 점심식사를 풀밭 위에 펄쳐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주말이면 중산층이 센 강가로 피크닉 가서 오찬을 즐기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작품처럼 여인이 누드로 남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경우는 없었다.
피크닉 장소에 여인이 누드로 앉아 있다는 것은 아주 과격한 회화적 시도였으며 그런 모습을 본 관람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고전적인 누드가 아니라 벌거벗은 모습으로 평론가들은 고전적인 주제의 누드를 평범한 여인에게 적용한 데 놀랐다.
누드 여인은 마네가 아까던 모델 빅토린 뫼랑이다.
마네는 화실에서 누드를 그린 후 피크닉 장소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다.
두 남자는 마네의 동생과 여동생의 미래의 남편이었다.
황제가 이 작품을 “뻔뻔스러운 그림”이라고 비난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문제의 작품을 보려고 주말이면 전시장 밖에 줄을 섰다.
평론가 아메르통은 황제의 말에 동조하면서 적었다.
“철면피 같은 프랑스 작가 마네의 그림은 조르조네의 <샴페르트 컨서트>를 프랑스의 사실주의로 해석한 것이다.
비록 여인들이 벌거벗었지만 조르조네의 작품은 아름다운 색상으로 용서받을 만했다.
그러나 마네의 작품에는 사내들의 복장이 아주 해괴망칙하고, 다른 여인은 스미즈차림으로 냇가에서 나오고 있으며, 두 사내는 바보같은 눈짓을 한다.”
마네는 이 작품의 제목을 <일광욕>이라고 하려 했는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꾀했다.
르네상스의 조르조네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서도 바토, 부세, 코로 등에게 친근해진 고전적 주제를 마네는 현대화하여 나타내려고 했다.
이 작품에 쏟아질 비난을 마네는 상상조차 못했다.
이 작품에서 누드뿐 아니라 앞의 세 사람의 구성, 옆으로 쓰러진 바구니, 정물 등 부분들의 묘사가 뛰어나다.
마네는 이 작품을 88-116cm의 크기로 그렸다가 그로서는 처음으로 커다란 캔버스에 다시 그렸다. 야심을 갖고 그렸음을 알게 한다.
이 작품은 에밀 졸라가 호평한 후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이 무슨 외설이란 말인가! 장성한 두 남자 사이에 옷을 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라니! ...
사람들은 화가가 뚜렷한 화면공간의 배분과 가파른 대비의 효과를 위해 인물의 구성에서 외설적이고 음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말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풀밭에서의 오찬이 아니라, 강렬하고도 세련되게 표현한 전반적인 풍경이다.
전경은 대담하면서도 견고하며 배경은 부드럽고 경쾌하다.
커다란 빛을 듬뿍 받고 있는 것 같은 살색의 이미지, 여기에 표현된 모든 것은 단순하면서도 정확하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마르크 앙투안느의 <파리스의 심판>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것이다.
마네는 누드 여인으로 하여금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게 했다.
과거에 누드를 그린 화가들은 모델이 다른 곳을 응시하게 하여 관람자가 누드를 제삼자를 바라보듯 거리낌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했지만, 마네는 모델을 이인칭으로 그려서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게 했다.
이는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관람자와 그림이 더욱 친숙하게 되었으며, 또한 관람자가 주제를 자신들의 시대적 감각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것으로 작품감상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1863년 살롱전에 출품하여 낙선하자 낙선전을 통해 파리 시민에게 소개되었다.
낙선전은 살롱전 개막 2주 후 5월 15일에 개최되었고 입장료는 1프랑이었는데 무려 7천 명이 관람했다.
낙선전은 큰 규모로 개최되었는데 12개의 화랑에 무려 1천 2백 점이 소개되었다.
마네는 낙선전의 스타로 부상했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젊은 세잔의 마음을 뒤흔들었는데 그는 1870~71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두 점을 그렸다.
세잔은 이 시기에 과격한 그림을 그렸으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느낌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서 나무 위로 곧게 솟은 것과 그 아래 세로로 같은 선상에 있는 세워진 포도주병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다.
마네와 달리 그는 환상의 누드 속에서 성적 욕구를 느끼는 남자의 모습을 묘사했다.
1863년 낙선전에서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를 본 모네는 마네의 작품에 버금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습작을 거듭한 끝에 1866년에 418-367cm의 크기로 완성했다.
25살의 모네의 야심이 담긴 작품이다.
그의 의도는 마네의 작품보다 자연스러운 장면을 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모네의 작품도 화실에서 그린 모델을 풍경 속에 배치한 것이다.
그는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것 같은데 12명이 등장하는 피크닉 장면이다.
모네는 사람 하나하나를 습작으로 연구하면서 그림 전체에 대한 구성을 시도했는데 중앙에 왼팔을 내밀어 접시를 권하는 여인의 모습만이 예외로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포즈를 취하는 것도 아니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피크닉을 위해 마련한 음식이 화면 중앙에 펼쳐진 것이 전부이다.
그림에는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빛이 그림을 과격하게 보이도록 한다.
빛이 나무 아래로 쏟아졌고, 따라서 명암이 분명하게 그림 전체에 나타났다.
모네의 관심은 모델들이 아니라 빛이 사람과 자연에 작용하는 데 있었다.
빛은 나뭇잎에 닿아 푸른색과 금빛으로 아롱진다.
그는 빛이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닿아 눈부시게 나타나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미완성으로 그쳤다.
쿠르베가 그림을 비평하고 돌아간 뒤 모네는 1866년 살롱전 출품을 포기한 것 같다.
쿠르베는 너무 크게 구도를 잡은 그림이라서 야외풍경화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림의 남자들 대부분은 바지유를 모델로 한 것이며 중앙에 앉아 있는 수염난 남자는 쿠르베로 보인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에 여인이 여러 명 등장하지만 모두 카미유 한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다.
열여덟 살의 카미유는 모네의 애인으로 나중에 그의 첫 부인이 된다.
훗날 왜 단 두 명의 모델로 여러 사람을 묘사했느냐는 질문에 모네는 두 사람밖에 모델을 구할 수 없었고 돈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개개인의 인물에 대한 성격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족했던 것 같았다.
1920년 모네의 화실을 찍은 사진을 보면 <풀밭에서의 점심식사>가 벽에 걸려 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방치했으므로 왼쪽과 오른쪽 부분이 손상되어 그 부분들을 잘라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모네가 1926년 타계할 때 지베르니의 화실에 있었으며 크기가 248-244cm였다.
그는 이것을 1920년 80회 생일을 맞아 자신을 방문한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마네의 그림을 따라서 그렸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난 야외에서 그림을 구성한 후 화실에서 완성했지.
난 이 작품을 좋아하는데 미완성이며 많이 상해 있네.
세 얻은 방의 보증금 대신 이 작품을 집주인에게 준 적이 있었는데 집주인은 캔버스를 둘둘 말아 지하실에 쳐박아 두었네.
돈이 생겼을 때 이 작품을 도로 찾아왔지만 작품이 조금 상한 상태였어.”
1866년 모네가 동일한 주제로 다시 그린 그림을 보면 원래 그림 중앙 부분을 그대로 보존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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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판단력비판』 제1부에서 건축의 예를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내 눈 앞에 보이는 궁전을 아름답게 생각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물론 나는 그같은 사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단지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갓된 대상의 표상이 내 안에 즐거움을 동반하여 내가 그렇게 표상된 대상의 현존을 보는 데는 전혀 무관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단지 알고자 할 뿐이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내가 취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내가 이런 표상으로부터 내 안에 만들어낸 것이지, 내가 대상의 현존에 의존하게 되는 그러한 요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 후 칸트는 다음의 설명으로 나아갔다.
“미에 대한 이런 해명은 그것이 일체의 관심을 떠난 즐거움의 대상이라고 했던 앞의 해명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대상에 관한 즐거움이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일체의 관심과 무관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경우에, 그는 그 대상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즐거움의 근거를 내포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즐거움은 주관의 어떤 경향성에 (또 그밖의 어떤 숙고된 관심에도)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이 대상에 몰두함으로써 얻어지는 만족에 관하여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주관만이 의거하고 있는 개인적 조건들이 즐거움의 근거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때문에 즐거움이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전제될 수 있는 그러한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는 비슷한 즐거움을 누구에게나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스스로 갖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칸트는 이런 전제들로부터 다음의 사실을 논리적으로 추론해낸다.
“따라서 그는 아름다운 것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마치 미란 대상의 성질이며 또 그 판단은 논리적 판단(객관적인 것의 개념에 의해서 객관적인 것의 인식을 형성하는)인 것처럼 말할 것이다.
그 판단이 미감적 판단에 지나지 않으며 한갓 대상의 표상과 주관의 관계만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한 까닭은 미감적 판단도 우리가 그 판단의 타당성을 누구에게 대해서나 전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리적 판단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이 개념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개념으로부터 쾌 혹은 불쾌의 감정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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