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드가에게는 야수 기질이 있네


코펜하겐에서 고갱은 미술잡지를 통해 파리 화단을 지속적으로 관망했으며 앵그르와 그의 위대한 적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당시 프랑스 화단에는 두 사람을 축으로 평행을 달리는 두 화파가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앵그르는 회화에 있어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반해 들라크루아는 색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사람의 선과 대립을 평론가들은 이상주의와 사실주의의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포함한 젊은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의 화풍을 따랐고 드가와 르누아르는 앵그르를 좇아 프랑스 전통주의를 계승하려고 했습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들라크루아의 <돈 주앙의 난파선> 복사본을 보내달라고 청하면서 그를 프랑스 화가 가운데 최고 화가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색채주의를 찬양하면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리는 표현주의 방법에 경의를 표하고 상상력에 탄복했으며, 색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실재 세계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는 기교에 감동했습니다.
슈페네커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서 그는 들라크루아를 가리켜 “그분에게는 야수 기질이 있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잘 그릴 수 있는 것이라네. 그의 필치는 늘 힘 있고 유연한 호랑이의 동작을 연상시키네”라며 감탄의 소리를 높였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기본 교육은 루브르 뮤지엄에 가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가운데 절로 이루어졌는데 그는 루벤스와 베네치아 화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들라크루아가 처음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822년의 살롱전에 <단테의 배>를 출품하고부터였습니다.
이 작품을 정부가 구입했습니다.
2년 후 그린 <키오스의 대학살>이란 역사화로 그의 성공은 분명해졌습니다.
친구 화가 그로는 이 작품을 보고 “회화의 대학살”이라고 했으며 시인 보들레르는 “운명과 구제 불가능한 고통을 영화롭게 하는 지독한 찬송”이라고 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에 모르네이 백작과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이국적 장면들에 감동을 받았고 이때의 감동이 후기 작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1830년대 후반부터 그의 양식과 기교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색을 붓을 쓸듯이 하여 사용했고 또한 색을 쪼개 칠하는 기교를 사용했는데 이런 색의 효과를 와토가 이미 극대화하면서 색을 회화적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와토의 방법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이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색을 중시하는 방법은 다비드의 제자 앵그르의 선을 중시하는 방법과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두 사람을 추종한 화가들에 의해 두 학파간의 불화가 심했습니다.
선이 우선이냐 색이 우선이냐 하는 문제가 프랑스 화단의 쟁점이 되었는데 인상주의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의 방법을 진전시켰으며 반 고흐를 위시한 후기인상주의 화가들도 들라크루아의 채색주의를 회화의 본질로 받아들였습니다.

들라크루아가 타계한 후 그의 아틀리에에는 9천 점에 이르는 유화, 파스텔화, 드로잉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5층 건물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사람을 땅에 떨어지기 전에 스케치할 수 없다면 결코 기념비적인 작품을 제작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그의 말은 젊은 화가들에게 교훈이 되었습니다.

처가에서 캔버스 제조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도록 직장을 구해주었지만 고갱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처가 사람들과 불화했습니다.
처가 사람들은 그가 너무 거만하다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코펜하겐에서 지낸 기간은 고갱에게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최악이었습니다.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 “피사로 선생님, 어쩌다 제가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되엇습니까?”라고 적었고, 1885년 5월에 다시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저는 용기도 돈도 모두 떨어졌습니다. …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 밧줄을 매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날마다 엄습해옵니다. 제 발목을 잡는 건 오직 회화뿐입니다.”

‘오직 회화뿐’이란 말에서 그가 회화에 대해 순교자와도 같은 비장한 각오로 임했음을 알 수 있으며 남은 생애가 그런 태도로 일관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미술사에 길이 남을 화가가 되겠다는 각오와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곤경에서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1885년 6월 고갱은 메테와 네 자녀를 남겨두고 여섯 살 난 클로비만 데리고 파리로 돌아오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메테에게 자신이 수집한 작품을 팔아 생활비에 보태더라도 세잔의 작품만큼은 팔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7월에 클로비를 마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디에페에 있는 슈페네커의 집에 의탁했습니다.
마리는 칠레 출신 상인 후안 우리베와 결혼했으며 고갱은 매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슈페네커는 학교에서 회화를 지도하며 생활하고 있었지만 넉넉한 편이 못 되어 고갱이 그의 집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고갱은 그의 집에 석 달 머물면서 그와 함께 작업했는데 노르망디 해안가에 위치한 디에페로 가서 보트와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해변을 그렸습니다.

그해 겨울 클로비가 천연두에 걸렸습니다.
고갱은 메테에게 “클로비가 천연두에 걸렸는데 내 주머니에는 20상팀 밖에 없구려”라고 적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그는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해서 하루에 5프랑을 벌었습니다.
가난한 생활이 지속되자 건강이 나빠졌고 클로비를 양육할 능력이 없어 메테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클로비는 매우 병약해 스물한 살 때 관절수술을 받은 뒤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메테가 클로비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으므로 고갱은 죽을 때까지 아들의 죽음을 몰랐습니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리느라 밤을 새기가 일쑤였습니다.

드가는 다음해 1886년에 열릴 제8회 인상주의 그룹전을 준비하면서 고갱에게 참여하라고 권했습니다.
전시회는 봄에 라피테 가 모퉁이에 있는 메종이라는 유명한 식당에서 열렸습니다.
고갱은 19점을 출품했는데, 조각은 나무를 깎아 만든 한 점뿐이어서 그가 조각보다는 회화에 전념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빈곤한 상태에서 캔버스와 물감을 사서 18점이나 그릴 수 있었던 건 회화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출품한 작품들 중에는 1885년에 그린 <디에페의 일광욕하는 사람들>과 <소가 있는 풍경>이 포함되었습니다.

전시회 카탈로그에는 미국인 메리 카삿과 고갱의 아틀리에 주소만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카삿은 여자이기 때문에 관례상 주소를 명기할 수 없었지만 고갱의 경우는 아틀리에가 없었기 때문에 명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이 고갱의 작품을 호평했으므로 작품이 몇 점 팔려 다행히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페네옹은 “폴 고갱은 유사한 색을 사용했는데 폐쇄음과도 같은 조화를 이루었다”고 적었습니다. 
 
고갱은 메테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다른 예술가들에 비하면 내 작품은 성공적이었소.
판화가 브라크몽이 한 점을 250프랑이나 주고 사면서 나를 도예가에게 소개했소.
도예가가 나더러 용기를 몇 점 만들라고 했소.
내가 만든 조각을 보더니 이번 겨울에 여러 점 제작하라면서 그것들을 자기가 팔 경우 돈을 절반씩 나누자고 하는구려.
그렇게만 된다면 수입이 괜찮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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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가난뱅이에게 파리는 사막과도 같소


고갱은 열심히 조각을 제작했지만 팔리지 않자 생활에 싫증이 났습니다.
그는 새로운 영감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어떻게 창작을 계속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미적 고갈을 느낀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동시에 프랑스 화단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말년에 쓴 냉소적인 비평의 글은 프랑스 화단에 대한 그의 태도 일면을 말해줍니다.

몇 개의 작은 길이 만나는 곳에서 아무런 사상도 없는 시골뜨기가 무언가를 찾는다.
그건 피사로의 작품일 것이다.
바닷가에서 우물 하나, 화려한 잡색 줄무늬 의상을 걸친, 분명 야망에 굶주린 듯한 파리의 몇몇 사람들이 메마른 우물에서 갈증을 풀어줄 만한 물을 찾는다.
온통 색종이 조각들.
그건 시냑의 작품일 것이다.

여자 분뇨 수거인, 싸구려 포도주, 목 매단 사람의 집.

더이상 쓸 재주가 없으므로 최선의 방법이란 그런 것들을 보러가는 것이다.
과일이 담긴 광주리에 익은 포도가 삐져나와 있으며,
천 위에는 푸른 사과와 분홍빛 붉은 사과가 한데 어울린다.
흰 것이 푸르고 푸른 것이 희다.
세잔이야말로 진정 최고의 화가이다.

고갱에게는 대상과 사람을 파악하는 탁월한 눈이 있었습니다.
그의 방랑벽은 방랑을 위한 방랑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거부 또는 반발이었습니다.
현실 속에 있으면서 현실을 방치하기 어려워 또다른 현실로 가서 차라리 문외한이 되는 편이 그에게는 나았습니다.
1886년 7월 중순 풍타방으로 내려갈 때 그는 돈을 빌려왔는데 제때 먹지 못하는 생활이 지속되자 진력이 났습니다.
그는 아직 원시의 삶이 남아 있는 열대지방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3월 말에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진정 바라는 건 파리를 벗어나는 것이오.
가난뱅이에게 파리는 사막과도 같소.
화가로서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지만 사흘을 굶은 적도 있다오.
그렇게 굶으면 몸도 상하고 의욕도 없어지오.
건강과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거친 자연이 있는 파나마로 가서 미개인처럼 살려고 하오.
태평양에 있는 타보가라는 작은 섬을 알고 있소.
파나마 근처로 인적이 뜸하고 자유로우며 기름진 땅이라오.

고갱은 퐁타방에서 만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1887년 4월 파나마로 향하는 배에 승선했습니다.
파나마에는 프랑스 회사가 운하를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탄 배는 4월 10일 마르티니크의 카리브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1887년 4월 말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나마의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슈페네커,
내가 섬으로 온 게 완전한 오판이었다면 자네가 믿을 수 있겠나?
파나마 지협을 뚫는 공사가 시작된 뒤로 이곳 생활도 사막 한가운데서처럼 어려워졌네.
산 위에서 생활하는 인디언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땅을 한 뼘도 내놓으려 하지 않네.
정말이지 생활비가 싸게 먹히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마르티니크밖에 없는 것 같네.
진작 그곳으로 갔어야 했는데.
거기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매형한테는 이제 더이상 도움을 받을 처지가 못되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너무 어리석었고 게다가 운도 따르지 않았어.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어리석음을 만회해야겠네.
돈 벌기 위해 두 달 동안 운하에서 일할 생각이네.
그러고 나서 마르티니크로 떠나려 하네.

고갱과 라발은 운하개발회사의 노역자로 취직했는데 노역자들에 대한 회사 측의 부당한 처우에 몹시 실망했고 그나마 대량 해고바람이 불자 두 사람은 보름 후 해직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회사는 파나마 운하를 먼저 개발했지만 개발과정에 문제가 생겨 1889년에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후임으로 미국 회사가 선임되어 보다 개량된 다이너마이트와 기술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완공했으며 1914년, 처음으로 배가 운하를 통과했습니다.
6월 중순, 두 사람은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통나무집에 거주하며 그곳을 낙원으로 여겼습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마을에서 2km 떨어진 농장에서 오두막을 발견했으며 화가가 탐낼 만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 곳이라고 했습니다.

고갱은 열대의 빛나는 다양한 색과 공간 등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사용한 적이 없는 아주 밝은색을 사용해 섬 풍경을 그리면서 원주민들을 모델로 삽입했습니다.
이곳에서의 작업에 관해 슈페네커에게 적었습니다.
날 가장 사로잡는 건 원주민들일세.
빛 바랜 원색 의상을 입은 섬의 여인들이 우아하고 다양한 몸짓으로 매일매일 오고 가네.
난 여태컷 그림을 그렇게 투명하고 선명하게 그려본 적이 없었네.
고갱은 열대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인다는 점과 풍성한 몸매를 한 검은 피부의 여인들에게서 천연의 우아함을 발견했습니다.
이국 풍경을 그리면서 피사로의 인상주의 기법을 자연스럽게 버릴 수 있었으며 더이상 인상주의자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열대에서는 구태여 빛이 사물에 닿아 일으키는 작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색을 토막내어 칠하지 않아도 되었고,
원색들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했습니다.
빛과 색, 공간과 부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긴 것으로 이는 화가에게 매우 중요한 깨우침이었습니다.
그는 색을 평편하게 칠하면서 색들이 대조를 이루게 했으며 부드럽고 유연한 아라베스크 선으로 사물을 단순화해서 표현했습니다.
열대로의 여행은 고갱에게 큰 수확이었습니다.
2년 후 그는 시인 친구 샤를 모리스에게 말했습니다.
“마르티니크에서의 경험은 내게 아주 중요했네.
온전히 나 자신과 직면할 수 있었네.”
그러나 고갱과 라발은 말라리아와 이질, 그리고 간질환으로 심하게 앓았습니다.
고갱은 1887년 8월 25일 슈페네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일주일 내내 겨우 일어나 음식물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앓았네.
지금은 뼈만 남은 해골일세.
당장 바닷가로 달려가 고국 땅을 밟아야만 나을 수 있는 병이네.
자네가 무슨 일로 내게 적대감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제발 부탁인데 250~300프랑 보내주게.
내 작품을 40~50프랑에 팔고 다른 작품들도 헐값에 팔아주게.
그렇지 않으면 난 여기서 개처럼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네.
지금 난 이 모든 고난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려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고 몸조차 움직일 수 없다네. 제발 부탁이네.
슈프(슈페네커의 애칭), 날 위해 수고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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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수련으로 피어난 모네


물 위의 정원
클로드 모네가 55세이던 해인 1895년은 ‘모네의 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획득한 생애 최고의 해였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우리 속담이 바로 모네에게 해당되는 경우입니다.
회화라는 밭을 약 30년 동안 정성들여 경작하고 가꿔서 풍성한 수확을 거둔 것입니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대성당의 모습을 색을 달리 하여 시리즈로 그린 작품들이 미국의 보스톤과 시카고, 런던에서 소개되었으며, 파리의 오르세이 미술관에서도 5점이 소개되었습니다.
1876년에 2백 프랑이던 그림가격이 1890년대 초에 3천 프랑, 1895년에는 다섯 배로 뛰어 1만 5천 프랑, 1921년에는 무려 20만 프랑으로 껑충 뛰었답니다.
1천 프랑이 오늘날 우리 돈으로 약 백만 원에 해당하므로 20만 프랑이면 2억 원에 해당합니다.
모네의 경제사정은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재벌의 호화스러운 삶으로 달라졌습니다.
그는 지베르니 큰 저택에 딸린 과수원을 5명의 정원사를 고용하여 연못으로 개조한 후 수련을 심고 연못 중앙에는 일본식 둥근 다리를 놓아 연못을 건널 수 있도록 했습니다.
수련은 파리에서 미술품을 사고 파는 사업을 하는 일본인으로부터 구한 것들입니다.

흔히 재능을 타고난다고 말하지만 모네의 생애를 돋보기를 들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없었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을 뿐입니다.
타고난 재능 혹은 우수한 지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하고 역사에 업적을 남긴 훌륭한 인물들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더욱 더 노력하는 자세로 끝내 신념을 실현시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역사에 모범이 되는 인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량의 지능을 갖고 태어난 행운아들 중에는 나태하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신념을 버리고 포기하여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못한 처지로 뒤쳐진 인물도 상당수 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은 오로지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교훈을 알게 됩니다.

모네의 어머니는 모네가 16살 되던 해 돌아가셨습니다.
모네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모습을 노트북에 만화처럼 과장해서 그리기 좋아했고 장차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진하여 모네는 고모의 집에서 살았는데 고모는 아마추어 화가였기 때문에 물감을 사주면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게 해주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돈을 내고 회화를 배울 수 없는 처지라서 모네는 스스로 회화를 익히기 위해 야외로 나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이 스승이었습니다.
자연은 같은 나무 같은 바다도 늘 같은 색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해가 뜰 때,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또는 해가 질 때 나무와 바다는 다른 색이 됩니다.
모네는 이런 자연의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그때 그때 본 대로 캔버스에 재현하는 작업을 지속한 끝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 당대의 사람들은 조각하면 오귀스트 로댕을 꼽았고 회화에서는 모네를 제1인자로 꼽았습니다.

구름다리가 모네의 그림에 나타나기 시작한 건 1899년부터였습니다.
연못을 그는 “물 위의 정원”이라고 불렀습니다.
1901년에는 근처에 있는 가로세로 4km나 되는 땅을 더 구입하여 정원을 확장하면서 연못도 더욱 크게 해서 물 위의 정원은 네 배로 커졌습니다.
연못가에는 대나무와 일본 사과나무 그리고 체리나무도 심었습니다.

회갑을 넘긴 그는 외출할 기력도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 갖가지 꽃으로 가꾼 정원에서 마지막 대작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정원사들에게 온실을 만들게 하고 꽃의 종류를 늘렸으며 잡지와 백과사전을 통해 꽃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스케치한 꽃의 종류와 원예가들에게 주문한 목록을 보면 꽃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예잡지를 열렬히 애독했고 친구들이 요청하면 원예가의 주소를 알려 줄 정도로 이 분야에 박식해졌습니다.
당시 파리에는 외국과의 교역이 자유로웠으므로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각종 희귀한 꽃이 많았답니다.

모네는 일본 회화에 관심이 많아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우타마로와 히로시게의 판화를 수년 동안 구입해왔습니다.
1893년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최한 일본 다색판화전을 보고 그는 감동했습니다.
그는 1899년부터 수련을 중점적으로 그리기 시작해 1900년에 최소 20점 그렸으며 2년 후부터는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캔버스의 사이즈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흡족할 때까지 치밀하게 파고드는 성격이라서 그는 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수련과 꽃을 수없이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1900년 말 그의 최근작 25점이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소개되었는데 절반 가량이 연못에 있는 수련 그림이었답니다.
같은 장소에서 일기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수련을 그렸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유사한 것이 많습니다.
아침에도 그리고 저녁에도 그리고 또 계절따라 그리기 때문에 언듯 보면 같아보이지만 색이 다른데 바로 이 점이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 자연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자연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안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에 아주 가까이 가서 그가 무엇에 열중하고 그렸는지 알 수 있으며 율동적인 색을 통해 그가 어떤 회화적 의도로 화면을 구성했는지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가의 작품 앞에 오래 서서 바라보는 건 예술적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달리 했기에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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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마네의 <총살형>


총살형이 회화의 주제가 된 것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고발하려는 화가의 의도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가공할 만한 불의한 사건에 대한 화가의 분노와 그러한 사건을 자행한 자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다. 총살형을 그린 화가로 고야, 마네, 피카소가 있고, 마네가 고야의 전례를, 피카소가 마네의 전례를 따라 그렸다.
세 사람에 의해서 구도와 형식이 확고해진 것이다.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1746~1828)는 프랑스의 에스파냐 점령기인 1810~14년에 <전쟁의 참화>란 제목으로 에칭 연작을 65점 제작했다.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을 극적이면서 잔인하고 섬뜩하며 다양한 장면으로 묘사했다.
그것들은 잔혹함과 공포에 대해 인간의 상상력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맹렬한 저항의 장면들이다.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은 1814년에 그린 것들로 <1808년 5월 3일>은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마드리드 주민이 프랑스군에 대항해 봉기했고 프랑스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군 150명, 스페인인 400명이 죽었다.
1808년 5월 2일 성난 군중이 성으로 몰려가 프랑스군에 의해 왕과 공주들이 강제로 성을 떠나는 데 항거했다.
프랑스군이 궁정의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군중이 군인 몇몇을 찢어 죽였다고 한다.
프랑스군 사령관은 군대를 풀어 군중을 향해 발포하게 했다.
고야는 1814년 그날을 상기하여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그렸다.
이것들을 제작한 것은 나폴레옹 형 요제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어 통치할 때였고, 고야는 1799년 수석 궁정화가가 된 이래 계속해서 궁정화가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고야는 1792년에 급성 중이염을 앓았고 2년 후 병에서 회복되었을 때는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것이 이후 작품 활동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지만, 정서적 변화의 징후는 뚜렷이 나타났다.
그는 놀라운 공상과 상상력을 한껏 표현한 드로잉, 에칭, 유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해가 갈수록 특정한 풍속적 주제와 공상적인 장면에 몰두했는데, 여기에는 기분 나쁜 환상적인 요소와 공포, 위협 등 어두운 요소가 두드러졌다.
그가 1799년에 80점의 동판화를 묶어 발간한 <로스 카프리초스>는 1793~98년에 제작한 것들로 유머러스한 표현에 악몽과 같은 불길한 요소가 드리워진 작품들이다.
작품의 주제는 사회적 관습과 교회의 병폐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며, 마녀와 악마가 등장하는 죽음의 무도 같은 요소들도 있다.
이런 작품을 제작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전쟁의 참화와 외국의 군사적 지배를 증오하여 프랑스군에 저항하는 마드리드 주민의 봉기를 그리게 했다.
나폴레옹이 형을 시켜 스페인을 통치하게 한 것은 유럽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저지하기 위한 대륙봉쇄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부르봉 왕가의 후손인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가 국정을 제대로 관리도 개발도 하지 못해 그동안 해군력과 경제적 측면의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3세가 1788년에 죽자 60세의 아들 카를로스 4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지성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못했다.
그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정부인 마누엘 드 고도이의 도움을 받아 마드리드를 통치하고 있었다.
왕비는 왕위대에 속한 고도이를 일약 총리로 만들었다.
1804년 이래 스페인이 프랑스와 불편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고도이의 야심 때문이었다.
고도이는 왕자 페르디난드가 왕위를 계승하면 자신이 포르투갈을 차지하려는 야심으로 프랑스와의 동맹관계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스페인에 대륙봉쇄에 동참할 것과 하노버 점령에 필요한 군대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고도이는 왕의 측근들에게 미움을 샀고 페르디난드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페르디난드는 부왕이 죽으면 고도이가 왕위를 탈취할 것이 염려되어 비밀리에 나폴레옹의 지지를 구하고 있었다.
스페인 원정군 사령관 뮈라가 1808년 3월 마드리드로 진격할 때 아란후에즈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고도이가 실각하고 카를로스 4세가 하야했다.
이 폭동으로 페르디난드가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로 등극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족들을 베이욘느로 모이게 했다.
베이욘느 회의에서 왕과 페르디난드 모두 서로 헐뜯기에 여념이 없자 나폴레옹은 두 사람 모두 퇴위시킨 후 탈레랑의 성에 붙잡아두었다.
이 조치는 스페인 국민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스페인 국민이 잠잠했던 건 나폴레옹이 미운 고도이 대신 페르디난드를 지원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1867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의 대공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파리에 알려진 것은 1867년 7월 1일이었고 <르 피가로>가 7월 8일자로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상세하게 보도했다.
희곡 작가 루도빅 알레비는 적었다. “막시밀리안은 후아레즈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유혈이 낭자한 미친 멕시코 전쟁은 이처럼 슬픈 결말로 종료되었다.”
공화주의자인 에두아르 마네(1832~83)는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폭로하겠다는 결심으로 황제의 처형장면을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란 제목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는데 이런 구성방법은 고야의 영향이었다.
그는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마찬가지로 총구를 겨누며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을 오른편에 그리고 사형당하는 사람들은 왼편에 구성했다.
고야의 작품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표현된 데 비해 마네의 작품에는 그런 점이 없어 사실주의에 더 가까운 그림이 되었다.
고야는 집행자들이 총을 겨누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마네는 총에서 불이 뿜는 좀더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했다.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당당하고 총알을 장전하는 군인의 얼굴은 무덤덤하다.
마네 작품의 특이한 점은 무엇보다도 총살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시위했는데 마네는 황제의 처사에 매우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에 처형된 날자 6월 19일을 적어 넣었다. 마네가 이 작품을 완성했을 때 친구들이 나폴레옹 3세의 위신을 손상시키므로 발표하지 말라고 충고했고 그는 충고를 받아들여 이듬해 살롱전에 출품하지 않았는데 정치적 물의를 염려한 때문이다.
이 작품은 1879년 뉴욕의 호텔에서 있었던 전시회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마네는 1867년 9월 늦게 막시밀리안의 처형장면을 다시 그렸는데 그림을 구성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습작한 4점은 현재 런던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두 장군 사이에 선 채 처형을 당하고 있는데 실재 처형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마네의 의도대로 구성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마네는 고야와 마찬가지로 처형당하는 사람들과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평행으로 구성했다.
이 작품에 관해 르누아르는 훗날 화상 볼라르에게 말했다.
“이 작품은 완전히 고야다. 하지만 마네는 마네가 아닌 적이 없었다.”
마네가 대가들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마네는 1년 반 동안이나 유화와 석판화로 이 비극적인 사건을 폭로했다.
요제프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1832~67)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이다.
나폴레옹 3세의 강요로 1864년 4월에 합스부르크(1276~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왕가)의 왕자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독립군에게 맞설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채 멕시코 황제에 즉위했다.
1867년 2월, 막시밀리안이 집권한 지 3년도 채 안 되어 나폴레옹 3세는 10년 이상 멕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멕시코에서 모두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는 믹시밀리안과의 약속을 깨고 그를 구출하지 않았으므로 막시밀리안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베니토 후아레즈가 주도하는 과격한 멕시코 게릴라들이 막시밀리안과 휘하의 장군들 미구엘 미라몽, 토마스 메지아를 체포했다.
후아레즈는 1867년 6월 19일에 멕시코 시티 북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쿠에레타로 근처에서 그들 모두 처형했다.
인디언 고아 출신의 후아레즈는 동란 후 1861년부터 대통령의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1867년 3월 모든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에서 철수했다.
막시밀리안은 아내를 파리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5월 15일 쿠에레타로가 점령당하자 항복했다.
후아레즈는 집권 당시 법을 제정했는데 외국 군대를 멕시코로 끌어들이는 어떤 행위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총살형 집행장에서 여섯 명의 군인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충분한 방어능력을 갖추지 못한 그를 멕시코로 추방한 결과 벌어진 사건이었다.
훗날 피카소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한국에서의 대학살>(1951)을 그렸다.
피카소는 1937년에 조국 스페인의 동란을 <게르니카>란 제목으로 그림으로 기소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렸는데 한국에서 동란이 일어나자 고야와 마네의 전례를 따라 유사한 방법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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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마네의 <걸인>


마네는 1858~59년에 걸인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을 1859년 살롱전에 출품했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들라크루아가 이 작품을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반대로 낙선되었다.
하지만 마네에게는 첫 성공작이었다.
주정뱅이 걸인을 그린 그림은 교육적인 목적을 중요하게 여기는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렸겠지만 대충 문지른 듯한 붓질과 자유로운 소묘는 갈고 닦은 솜씨임이 분명했다.
마네는 고전주의 화가인 쿠튀르의 화실에 들어가 6년 동안 그의 제자로 수학했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역사화가인 스승의 고전적인 훈련보다는 루브르 뮤지엄에서 과거의 대가들 특히 벨라스케스, 무리요, 리베라 등 에스파냐 화파를 연구하고 그 영향을 받았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은 벨라스케스의 <메니프>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린 것으로 마네는 벨라스케스로부터 오브제를 단순화시키는 기교를 받아들여 파리의 걸인을 묘사했다.
그는 바닥에 술병을 그려넣어 관람자에게 모델이 독한 압생트에 중독된 자임을 강조했고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레몬껍질과도 같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강렬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6년 이상 그를 가르쳐온 쿠튀르에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그림이었다.
쿠튀르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은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다”라고 혹평했다.
비애, 유머와 인간적 이해를 담은 벨라스케스의 걸인을 그린 인물화는 후세에 영향을 주어 고야가 고야가 삼십대 초에 그의 작품을 많이 모사했다.
세비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24세까지 산 에스파냐 화가 벨라스케스는 1610~16년까지 프란시스코 파체코에게서 수학했고 그의 딸과 결혼했다.
파체코로부터 견고한 기술적 기반인 이탈리아와 북유럽 르네상스 대가들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지만, 그는 조숙해서 18세에 오히려 스승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
고야가 1778년에 그린 <눈먼 기타 연주자>는 <메니프>에서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다.
그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걸인에게 느낀 매력을 처음 표현한 작품으로 머리를 뒤로 젖힌 눈먼 걸인의 모습은 뒤틀린 이목구비의 융합체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그가 태피스트리 공장을 위해 밑그림으로 그린 것인데, 공장 측은 그림에 인물이 너무 많고 색조가 다양하다는 이유로 이 밑그림을 거부했다.
고야는 작품을 수정해서 공장으로 돌려보냈지만, 기타 연주자의 얼굴은 고치지 않았다.
그는 수정을 요구받은 것이 비위에 거슬렸는지 원래 그림의 일부를 나중에 제작한 동판화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괴상하게 생긴 눈먼 기타 연주자는 풍자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태피스트리를 위한 고야의 밑그림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에스파냐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이루고 있는 날마다 되풀이되는 고되고 단조로운 노동이었다.
고야는 거기에서 고대 아르카디아(목동과 처녀들이 순결하고 근심걱정 없는 삶을 꾸려 나가는 이상향)의 목가적 전원시 같은 풍경을 끌어냈지만, 그후 그는 거기에서 점점 멀어졌다.
사전 계획에 따라 제작된 이런 궁전 장식용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소박함을 좋아하는 당시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고야가 에스파냐 시골생활의 즐거움과 행복한 아이들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어린 자식들이 연달아 죽은 것은 얄궂은 운명이었다.
고야의 자식 가운데 일곱 명이 요절했다.
인생의 즐거움을 그리라는 주문과 함께 자식들의 잇따른 죽음을 견뎌야 했던 정신적 부담이 젊은 고야에게 무엇인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1770년대 말과 1780년대에 그린 작품에는 대부분 비타협적인 양식이 나타나 있다.
<눈먼 기타 연주자>는 그의 밑그림 중 가장 크고 야심적이며 독창적인 작품이다.
관행에서 벗어난 이 작품은 고야의 예술이 동시대인의 예술과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 순간을 나타낸다.
가수, 악사, 유랑 연예인, 그리고 시골 농부와 신사들이 서로 어개를 맞대고 연주에 귀기울이는 광경을 묘사한 회화와 판화 및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17~18세기 유럽의 대중미술에서 가장 폭넓게 사랑받는 주제를 이루었다.
벨라스케스의 영향 외에도 고야는 티에폴로가 젊은 시절에 베네치아에서 그린 거리의 악사들에게 감동을 받았으며,
그 자신도 마드리드 거리에서 구걸하는 눈먼 악사들을 보았을 것이고,
별난 기인과 사회에서 소외당한 부랑자와 불구자에 대한 그의 직관적 통찰력은 풍자적 표현에 대한 취향으로 발전했다.
이리하여 그의 밑그림은 에스파냐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 되었고 왕실도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마네는 1860년 두아이 가에 화실을 얻고 바티뇰 블바드에 아파트를 얻었다.
바티뇰은 생라자르 역 북쪽에 있는 동네로 1861년 파리 시에 포함되었다.
이 시기에 파리에는 건축붐이 일고 있었고 유럽의 모든 철로가 파리로 통하도록 새로운 철로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아파트들이 여기저기에 들어서고 기차역이 생겨 많은 사람이 파리 시내로 몰려들자 파리의 인구는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파리는 현대화되면서 유럽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바티뇰에는 파리의 중심으로 향하는 기차와 차들의 커다란 정거장이 있었다.
바티뇰 불바드에는 걸인과 집시들이 많았고, 마네는 그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늙은 음악가>는 이질적인 인물들을 배열하여 구성한 그림이다.
늙은 음악가는 마네의 화실 부근에 살던 바이올린 연주자 집시 장 라렌느인데 늘 술에 취해 있었던 그는 경찰들로부터 몹시 천대받았다.
마네는 라렌느를 화면 중앙에 고대 철학자의 모습처럼 앉히고 아이들의 호기심과 사랑을 받는 순진한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크리스포스를 묘사한 헬레니즘 조각을 변형한 것이다.
마네는 루브르 뮤지엄에 있는 이 조각을 모사한 적이 있다.
모자를 쓴 흰색 옷을 입은 아이는 바토의 <피에로>를 상기시킨다.
바토의 피에로는 이탈리아 코미디언 배우로서 바토가 파리에 있는 카페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18세기의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의 코미디는 잘 알려져 있었다.
피에로처럼 생긴 아이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고 놀라운 시선으로 늙은 음악가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늙은 걸인을 바라보는데 라렌느는 마치 기념촬영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관람자를 바라본다.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그 옆에 걸터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다.
마네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 이 인물을 그대로 <늙은 음악가>에 삽입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와 두 소년도 따로 그려서 하나의 그림으로 합성시켰는데 이는 당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메니프>와 <애솝>에서 영감을 받아 나중에 <철학자 (망토를 걸친 걸인)>, <넝마주이>, <철학자 (굴과 걸인)> 등을 그렸다.
이런 작품들은 마네의 참신하고 획기적인 표현 기법을 돋보이게 한 결과가 되었다.
이때부터 마네는 젊은 아방가르드 화가들 사이에서 스승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뒤에 출현할 인상주의로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 세잔 등을 포함한 인상주의 그룹 화가들은 마네를 존경했으며, 이들은 게르부아 카페 등지에서 모였다.
그러나 마네 자신은 이들의 열렬한 찬미에도 불구하고 이들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인상주의 그룹전의 참가도 거부했다.
그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계속하여 아카데미의 공인을 받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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