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가난뱅이에게 파리는 사막과도 같소


고갱은 열심히 조각을 제작했지만 팔리지 않자 생활에 싫증이 났습니다.
그는 새로운 영감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어떻게 창작을 계속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미적 고갈을 느낀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동시에 프랑스 화단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말년에 쓴 냉소적인 비평의 글은 프랑스 화단에 대한 그의 태도 일면을 말해줍니다.

몇 개의 작은 길이 만나는 곳에서 아무런 사상도 없는 시골뜨기가 무언가를 찾는다.
그건 피사로의 작품일 것이다.
바닷가에서 우물 하나, 화려한 잡색 줄무늬 의상을 걸친, 분명 야망에 굶주린 듯한 파리의 몇몇 사람들이 메마른 우물에서 갈증을 풀어줄 만한 물을 찾는다.
온통 색종이 조각들.
그건 시냑의 작품일 것이다.

여자 분뇨 수거인, 싸구려 포도주, 목 매단 사람의 집.

더이상 쓸 재주가 없으므로 최선의 방법이란 그런 것들을 보러가는 것이다.
과일이 담긴 광주리에 익은 포도가 삐져나와 있으며,
천 위에는 푸른 사과와 분홍빛 붉은 사과가 한데 어울린다.
흰 것이 푸르고 푸른 것이 희다.
세잔이야말로 진정 최고의 화가이다.

고갱에게는 대상과 사람을 파악하는 탁월한 눈이 있었습니다.
그의 방랑벽은 방랑을 위한 방랑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거부 또는 반발이었습니다.
현실 속에 있으면서 현실을 방치하기 어려워 또다른 현실로 가서 차라리 문외한이 되는 편이 그에게는 나았습니다.
1886년 7월 중순 풍타방으로 내려갈 때 그는 돈을 빌려왔는데 제때 먹지 못하는 생활이 지속되자 진력이 났습니다.
그는 아직 원시의 삶이 남아 있는 열대지방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3월 말에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진정 바라는 건 파리를 벗어나는 것이오.
가난뱅이에게 파리는 사막과도 같소.
화가로서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지만 사흘을 굶은 적도 있다오.
그렇게 굶으면 몸도 상하고 의욕도 없어지오.
건강과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거친 자연이 있는 파나마로 가서 미개인처럼 살려고 하오.
태평양에 있는 타보가라는 작은 섬을 알고 있소.
파나마 근처로 인적이 뜸하고 자유로우며 기름진 땅이라오.

고갱은 퐁타방에서 만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1887년 4월 파나마로 향하는 배에 승선했습니다.
파나마에는 프랑스 회사가 운하를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탄 배는 4월 10일 마르티니크의 카리브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1887년 4월 말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나마의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슈페네커,
내가 섬으로 온 게 완전한 오판이었다면 자네가 믿을 수 있겠나?
파나마 지협을 뚫는 공사가 시작된 뒤로 이곳 생활도 사막 한가운데서처럼 어려워졌네.
산 위에서 생활하는 인디언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땅을 한 뼘도 내놓으려 하지 않네.
정말이지 생활비가 싸게 먹히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마르티니크밖에 없는 것 같네.
진작 그곳으로 갔어야 했는데.
거기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매형한테는 이제 더이상 도움을 받을 처지가 못되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너무 어리석었고 게다가 운도 따르지 않았어.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어리석음을 만회해야겠네.
돈 벌기 위해 두 달 동안 운하에서 일할 생각이네.
그러고 나서 마르티니크로 떠나려 하네.

고갱과 라발은 운하개발회사의 노역자로 취직했는데 노역자들에 대한 회사 측의 부당한 처우에 몹시 실망했고 그나마 대량 해고바람이 불자 두 사람은 보름 후 해직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회사는 파나마 운하를 먼저 개발했지만 개발과정에 문제가 생겨 1889년에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후임으로 미국 회사가 선임되어 보다 개량된 다이너마이트와 기술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완공했으며 1914년, 처음으로 배가 운하를 통과했습니다.
6월 중순, 두 사람은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통나무집에 거주하며 그곳을 낙원으로 여겼습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마을에서 2km 떨어진 농장에서 오두막을 발견했으며 화가가 탐낼 만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 곳이라고 했습니다.

고갱은 열대의 빛나는 다양한 색과 공간 등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사용한 적이 없는 아주 밝은색을 사용해 섬 풍경을 그리면서 원주민들을 모델로 삽입했습니다.
이곳에서의 작업에 관해 슈페네커에게 적었습니다.
날 가장 사로잡는 건 원주민들일세.
빛 바랜 원색 의상을 입은 섬의 여인들이 우아하고 다양한 몸짓으로 매일매일 오고 가네.
난 여태컷 그림을 그렇게 투명하고 선명하게 그려본 적이 없었네.
고갱은 열대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인다는 점과 풍성한 몸매를 한 검은 피부의 여인들에게서 천연의 우아함을 발견했습니다.
이국 풍경을 그리면서 피사로의 인상주의 기법을 자연스럽게 버릴 수 있었으며 더이상 인상주의자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열대에서는 구태여 빛이 사물에 닿아 일으키는 작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색을 토막내어 칠하지 않아도 되었고,
원색들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했습니다.
빛과 색, 공간과 부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긴 것으로 이는 화가에게 매우 중요한 깨우침이었습니다.
그는 색을 평편하게 칠하면서 색들이 대조를 이루게 했으며 부드럽고 유연한 아라베스크 선으로 사물을 단순화해서 표현했습니다.
열대로의 여행은 고갱에게 큰 수확이었습니다.
2년 후 그는 시인 친구 샤를 모리스에게 말했습니다.
“마르티니크에서의 경험은 내게 아주 중요했네.
온전히 나 자신과 직면할 수 있었네.”
그러나 고갱과 라발은 말라리아와 이질, 그리고 간질환으로 심하게 앓았습니다.
고갱은 1887년 8월 25일 슈페네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일주일 내내 겨우 일어나 음식물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앓았네.
지금은 뼈만 남은 해골일세.
당장 바닷가로 달려가 고국 땅을 밟아야만 나을 수 있는 병이네.
자네가 무슨 일로 내게 적대감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제발 부탁인데 250~300프랑 보내주게.
내 작품을 40~50프랑에 팔고 다른 작품들도 헐값에 팔아주게.
그렇지 않으면 난 여기서 개처럼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네.
지금 난 이 모든 고난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려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고 몸조차 움직일 수 없다네. 제발 부탁이네.
슈프(슈페네커의 애칭), 날 위해 수고해주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