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마네의 <총살형>
총살형이 회화의 주제가 된 것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고발하려는 화가의 의도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가공할 만한 불의한 사건에 대한 화가의 분노와 그러한 사건을 자행한 자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다. 총살형을 그린 화가로 고야, 마네, 피카소가 있고, 마네가 고야의 전례를, 피카소가 마네의 전례를 따라 그렸다.
세 사람에 의해서 구도와 형식이 확고해진 것이다.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1746~1828)는 프랑스의 에스파냐 점령기인 1810~14년에 <전쟁의 참화>란 제목으로 에칭 연작을 65점 제작했다.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을 극적이면서 잔인하고 섬뜩하며 다양한 장면으로 묘사했다.
그것들은 잔혹함과 공포에 대해 인간의 상상력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맹렬한 저항의 장면들이다.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은 1814년에 그린 것들로 <1808년 5월 3일>은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마드리드 주민이 프랑스군에 대항해 봉기했고 프랑스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군 150명, 스페인인 400명이 죽었다.
1808년 5월 2일 성난 군중이 성으로 몰려가 프랑스군에 의해 왕과 공주들이 강제로 성을 떠나는 데 항거했다.
프랑스군이 궁정의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군중이 군인 몇몇을 찢어 죽였다고 한다.
프랑스군 사령관은 군대를 풀어 군중을 향해 발포하게 했다.
고야는 1814년 그날을 상기하여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그렸다.
이것들을 제작한 것은 나폴레옹 형 요제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어 통치할 때였고, 고야는 1799년 수석 궁정화가가 된 이래 계속해서 궁정화가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고야는 1792년에 급성 중이염을 앓았고 2년 후 병에서 회복되었을 때는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것이 이후 작품 활동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지만, 정서적 변화의 징후는 뚜렷이 나타났다.
그는 놀라운 공상과 상상력을 한껏 표현한 드로잉, 에칭, 유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해가 갈수록 특정한 풍속적 주제와 공상적인 장면에 몰두했는데, 여기에는 기분 나쁜 환상적인 요소와 공포, 위협 등 어두운 요소가 두드러졌다.
그가 1799년에 80점의 동판화를 묶어 발간한 <로스 카프리초스>는 1793~98년에 제작한 것들로 유머러스한 표현에 악몽과 같은 불길한 요소가 드리워진 작품들이다.
작품의 주제는 사회적 관습과 교회의 병폐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며, 마녀와 악마가 등장하는 죽음의 무도 같은 요소들도 있다.
이런 작품을 제작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전쟁의 참화와 외국의 군사적 지배를 증오하여 프랑스군에 저항하는 마드리드 주민의 봉기를 그리게 했다.
나폴레옹이 형을 시켜 스페인을 통치하게 한 것은 유럽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저지하기 위한 대륙봉쇄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부르봉 왕가의 후손인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가 국정을 제대로 관리도 개발도 하지 못해 그동안 해군력과 경제적 측면의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3세가 1788년에 죽자 60세의 아들 카를로스 4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지성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못했다.
그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정부인 마누엘 드 고도이의 도움을 받아 마드리드를 통치하고 있었다.
왕비는 왕위대에 속한 고도이를 일약 총리로 만들었다.
1804년 이래 스페인이 프랑스와 불편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고도이의 야심 때문이었다.
고도이는 왕자 페르디난드가 왕위를 계승하면 자신이 포르투갈을 차지하려는 야심으로 프랑스와의 동맹관계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스페인에 대륙봉쇄에 동참할 것과 하노버 점령에 필요한 군대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고도이는 왕의 측근들에게 미움을 샀고 페르디난드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페르디난드는 부왕이 죽으면 고도이가 왕위를 탈취할 것이 염려되어 비밀리에 나폴레옹의 지지를 구하고 있었다.
스페인 원정군 사령관 뮈라가 1808년 3월 마드리드로 진격할 때 아란후에즈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고도이가 실각하고 카를로스 4세가 하야했다.
이 폭동으로 페르디난드가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로 등극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족들을 베이욘느로 모이게 했다.
베이욘느 회의에서 왕과 페르디난드 모두 서로 헐뜯기에 여념이 없자 나폴레옹은 두 사람 모두 퇴위시킨 후 탈레랑의 성에 붙잡아두었다.
이 조치는 스페인 국민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스페인 국민이 잠잠했던 건 나폴레옹이 미운 고도이 대신 페르디난드를 지원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1867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의 대공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파리에 알려진 것은 1867년 7월 1일이었고 <르 피가로>가 7월 8일자로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상세하게 보도했다.
희곡 작가 루도빅 알레비는 적었다. “막시밀리안은 후아레즈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유혈이 낭자한 미친 멕시코 전쟁은 이처럼 슬픈 결말로 종료되었다.”
공화주의자인 에두아르 마네(1832~83)는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폭로하겠다는 결심으로 황제의 처형장면을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란 제목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는데 이런 구성방법은 고야의 영향이었다.
그는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마찬가지로 총구를 겨누며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을 오른편에 그리고 사형당하는 사람들은 왼편에 구성했다.
고야의 작품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표현된 데 비해 마네의 작품에는 그런 점이 없어 사실주의에 더 가까운 그림이 되었다.
고야는 집행자들이 총을 겨누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마네는 총에서 불이 뿜는 좀더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했다.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당당하고 총알을 장전하는 군인의 얼굴은 무덤덤하다.
마네 작품의 특이한 점은 무엇보다도 총살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시위했는데 마네는 황제의 처사에 매우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에 처형된 날자 6월 19일을 적어 넣었다. 마네가 이 작품을 완성했을 때 친구들이 나폴레옹 3세의 위신을 손상시키므로 발표하지 말라고 충고했고 그는 충고를 받아들여 이듬해 살롱전에 출품하지 않았는데 정치적 물의를 염려한 때문이다.
이 작품은 1879년 뉴욕의 호텔에서 있었던 전시회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마네는 1867년 9월 늦게 막시밀리안의 처형장면을 다시 그렸는데 그림을 구성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습작한 4점은 현재 런던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두 장군 사이에 선 채 처형을 당하고 있는데 실재 처형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마네의 의도대로 구성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마네는 고야와 마찬가지로 처형당하는 사람들과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평행으로 구성했다.
이 작품에 관해 르누아르는 훗날 화상 볼라르에게 말했다.
“이 작품은 완전히 고야다. 하지만 마네는 마네가 아닌 적이 없었다.”
마네가 대가들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마네는 1년 반 동안이나 유화와 석판화로 이 비극적인 사건을 폭로했다.
요제프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1832~67)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이다.
나폴레옹 3세의 강요로 1864년 4월에 합스부르크(1276~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왕가)의 왕자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독립군에게 맞설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채 멕시코 황제에 즉위했다.
1867년 2월, 막시밀리안이 집권한 지 3년도 채 안 되어 나폴레옹 3세는 10년 이상 멕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멕시코에서 모두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는 믹시밀리안과의 약속을 깨고 그를 구출하지 않았으므로 막시밀리안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베니토 후아레즈가 주도하는 과격한 멕시코 게릴라들이 막시밀리안과 휘하의 장군들 미구엘 미라몽, 토마스 메지아를 체포했다.
후아레즈는 1867년 6월 19일에 멕시코 시티 북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쿠에레타로 근처에서 그들 모두 처형했다.
인디언 고아 출신의 후아레즈는 동란 후 1861년부터 대통령의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1867년 3월 모든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에서 철수했다.
막시밀리안은 아내를 파리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5월 15일 쿠에레타로가 점령당하자 항복했다.
후아레즈는 집권 당시 법을 제정했는데 외국 군대를 멕시코로 끌어들이는 어떤 행위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총살형 집행장에서 여섯 명의 군인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나폴레옹 3세가 충분한 방어능력을 갖추지 못한 그를 멕시코로 추방한 결과 벌어진 사건이었다.
훗날 피카소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한국에서의 대학살>(1951)을 그렸다.
피카소는 1937년에 조국 스페인의 동란을 <게르니카>란 제목으로 그림으로 기소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렸는데 한국에서 동란이 일어나자 고야와 마네의 전례를 따라 유사한 방법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