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드가에게는 야수 기질이 있네


코펜하겐에서 고갱은 미술잡지를 통해 파리 화단을 지속적으로 관망했으며 앵그르와 그의 위대한 적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당시 프랑스 화단에는 두 사람을 축으로 평행을 달리는 두 화파가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앵그르는 회화에 있어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반해 들라크루아는 색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사람의 선과 대립을 평론가들은 이상주의와 사실주의의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포함한 젊은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의 화풍을 따랐고 드가와 르누아르는 앵그르를 좇아 프랑스 전통주의를 계승하려고 했습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들라크루아의 <돈 주앙의 난파선> 복사본을 보내달라고 청하면서 그를 프랑스 화가 가운데 최고 화가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색채주의를 찬양하면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리는 표현주의 방법에 경의를 표하고 상상력에 탄복했으며, 색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실재 세계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는 기교에 감동했습니다.
슈페네커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서 그는 들라크루아를 가리켜 “그분에게는 야수 기질이 있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잘 그릴 수 있는 것이라네. 그의 필치는 늘 힘 있고 유연한 호랑이의 동작을 연상시키네”라며 감탄의 소리를 높였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기본 교육은 루브르 뮤지엄에 가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가운데 절로 이루어졌는데 그는 루벤스와 베네치아 화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들라크루아가 처음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822년의 살롱전에 <단테의 배>를 출품하고부터였습니다.
이 작품을 정부가 구입했습니다.
2년 후 그린 <키오스의 대학살>이란 역사화로 그의 성공은 분명해졌습니다.
친구 화가 그로는 이 작품을 보고 “회화의 대학살”이라고 했으며 시인 보들레르는 “운명과 구제 불가능한 고통을 영화롭게 하는 지독한 찬송”이라고 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에 모르네이 백작과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이국적 장면들에 감동을 받았고 이때의 감동이 후기 작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1830년대 후반부터 그의 양식과 기교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색을 붓을 쓸듯이 하여 사용했고 또한 색을 쪼개 칠하는 기교를 사용했는데 이런 색의 효과를 와토가 이미 극대화하면서 색을 회화적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와토의 방법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이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색을 중시하는 방법은 다비드의 제자 앵그르의 선을 중시하는 방법과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두 사람을 추종한 화가들에 의해 두 학파간의 불화가 심했습니다.
선이 우선이냐 색이 우선이냐 하는 문제가 프랑스 화단의 쟁점이 되었는데 인상주의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의 방법을 진전시켰으며 반 고흐를 위시한 후기인상주의 화가들도 들라크루아의 채색주의를 회화의 본질로 받아들였습니다.

들라크루아가 타계한 후 그의 아틀리에에는 9천 점에 이르는 유화, 파스텔화, 드로잉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5층 건물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사람을 땅에 떨어지기 전에 스케치할 수 없다면 결코 기념비적인 작품을 제작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그의 말은 젊은 화가들에게 교훈이 되었습니다.

처가에서 캔버스 제조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도록 직장을 구해주었지만 고갱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처가 사람들과 불화했습니다.
처가 사람들은 그가 너무 거만하다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코펜하겐에서 지낸 기간은 고갱에게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최악이었습니다.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 “피사로 선생님, 어쩌다 제가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되엇습니까?”라고 적었고, 1885년 5월에 다시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저는 용기도 돈도 모두 떨어졌습니다. …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 밧줄을 매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날마다 엄습해옵니다. 제 발목을 잡는 건 오직 회화뿐입니다.”

‘오직 회화뿐’이란 말에서 그가 회화에 대해 순교자와도 같은 비장한 각오로 임했음을 알 수 있으며 남은 생애가 그런 태도로 일관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미술사에 길이 남을 화가가 되겠다는 각오와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곤경에서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1885년 6월 고갱은 메테와 네 자녀를 남겨두고 여섯 살 난 클로비만 데리고 파리로 돌아오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메테에게 자신이 수집한 작품을 팔아 생활비에 보태더라도 세잔의 작품만큼은 팔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7월에 클로비를 마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디에페에 있는 슈페네커의 집에 의탁했습니다.
마리는 칠레 출신 상인 후안 우리베와 결혼했으며 고갱은 매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슈페네커는 학교에서 회화를 지도하며 생활하고 있었지만 넉넉한 편이 못 되어 고갱이 그의 집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고갱은 그의 집에 석 달 머물면서 그와 함께 작업했는데 노르망디 해안가에 위치한 디에페로 가서 보트와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해변을 그렸습니다.

그해 겨울 클로비가 천연두에 걸렸습니다.
고갱은 메테에게 “클로비가 천연두에 걸렸는데 내 주머니에는 20상팀 밖에 없구려”라고 적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그는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해서 하루에 5프랑을 벌었습니다.
가난한 생활이 지속되자 건강이 나빠졌고 클로비를 양육할 능력이 없어 메테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클로비는 매우 병약해 스물한 살 때 관절수술을 받은 뒤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메테가 클로비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으므로 고갱은 죽을 때까지 아들의 죽음을 몰랐습니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리느라 밤을 새기가 일쑤였습니다.

드가는 다음해 1886년에 열릴 제8회 인상주의 그룹전을 준비하면서 고갱에게 참여하라고 권했습니다.
전시회는 봄에 라피테 가 모퉁이에 있는 메종이라는 유명한 식당에서 열렸습니다.
고갱은 19점을 출품했는데, 조각은 나무를 깎아 만든 한 점뿐이어서 그가 조각보다는 회화에 전념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빈곤한 상태에서 캔버스와 물감을 사서 18점이나 그릴 수 있었던 건 회화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출품한 작품들 중에는 1885년에 그린 <디에페의 일광욕하는 사람들>과 <소가 있는 풍경>이 포함되었습니다.

전시회 카탈로그에는 미국인 메리 카삿과 고갱의 아틀리에 주소만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카삿은 여자이기 때문에 관례상 주소를 명기할 수 없었지만 고갱의 경우는 아틀리에가 없었기 때문에 명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이 고갱의 작품을 호평했으므로 작품이 몇 점 팔려 다행히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페네옹은 “폴 고갱은 유사한 색을 사용했는데 폐쇄음과도 같은 조화를 이루었다”고 적었습니다. 
 
고갱은 메테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다른 예술가들에 비하면 내 작품은 성공적이었소.
판화가 브라크몽이 한 점을 250프랑이나 주고 사면서 나를 도예가에게 소개했소.
도예가가 나더러 용기를 몇 점 만들라고 했소.
내가 만든 조각을 보더니 이번 겨울에 여러 점 제작하라면서 그것들을 자기가 팔 경우 돈을 절반씩 나누자고 하는구려.
그렇게만 된다면 수입이 괜찮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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