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에서

페루의 미라와 모티프


고대 북유럽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주요 인물로 꼽히는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독일 표현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화가 중 하나이다.
1885년 파리를 처음 방문한 후 그의 작품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나타났고, 1908년 이후에는 1888년 상징주의 운동 내부에서 주로 폴 고갱의 영향을 받은 젊은 예술가들이 결성한 나비 그룹과 후기 인상주의, 특히 반 고흐와 고갱, 툴루즈-로트레크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뭉크가 다룬 주제에는 억제되지 않고 거의 발작에 가까운 감정이 담겨 있어 이후 등장한 표현주의 운동을 예견했다.

뭉크는 1893년에 <폭풍의 밤>을 그리면서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여인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런 모습은 그해 그린 <절규>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1974년 뉴욕 모마에 소장된 <폭풍의 밤>은 뭉크가 커다란 집의 창문을 밝은 색으로 칠하고 노란색으로 불빛을 강조한 후 왼편에 각기 다른 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을 색을 쓱쓱 문질러 묘사하고 앞서 걸어오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두드러지게 한 작품이다.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앞서 걸어오는 여인도 양손을 귀에 대고 윙윙거리는 폭풍의 거센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한다.

오슬로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절규>에 대한 변형이 무려 50종이나 되어 뭉크가 이 모티프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파리의 홈메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페루인의 미라가 뭉크에게 죽음에 사로잡힌 얼굴을 그리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페루인의 미라가 <절규>에 등장한 남자의 얼굴과 매우 흡사해서 그의 주장이 타당해 보이며,
죽음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이 죽음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절규>는 뭉크의 작품 중 가장 표현적이다.
그는 역동적인 색으로 자연의 꿈틀거리는 속성을 표현했으며 그것이 곧 자신의 내면세계임을 강조했다.
1891년 류머티즘에 의한 열병으로 니스에서 투병할 때의 일기는 <절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느 날 저녁 두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다.
해는 막 서산에 지고 있었으며 약간 우울한 기분이었다.
돌연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난 걸음을 멈췄으며 탈진된 듯 느껴져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검정색에 가까운 진한 파란색 협만과 도시 위에 피의 불길이 넘실거렸고,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뭉크는 1895년작 채색석판화에 “나는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라고 적었는데 그날의 체험을 잊지 못했다.
핏빛으로 넘실대는 황혼의 하늘과 진동하는 대지의 거친 호흡을 매우 표현적으로 묘사했으며, 표현 그 자체가 회화임을 입증하려는 듯이 보인다.
<절규>의 화면 중앙에 몸을 비틀면서 양손을 얼굴에 대고 눈과 입을 크게 뜬 것은 뭉크 자신의 모습이다.
원경을 다이내믹한 곡선으로 리드미컬하게 했는데 직선과 대조를 이룬다.
이 모티프는 유화보다는 석판화에서 더욱 효과가 크다.
현대인이 겪는 불안을 뭉크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했으며 <절규>는 오늘날에도 인형으로 제작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문학에 관심이 많은 뭉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탐독했다.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은 뭉크의 심상을 나타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키에르케고르는 파스칼에 의해 사유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는 까닭에 관해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을 통해 깊이 분석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와는 달리 불안은 무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의식 또는 정서이다.
따라서 불안은 파악하기 어렵고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뭉크 뮤지엄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장서 가운데 ‘니체 전집’과 열네 권의 ‘키에르케고르의 전집’이 있어 두 철학자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키에르케고르 전집 제4권 <불안의 개념>은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어, 그가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감성적 의식에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뭉크의 불안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절규> 외에도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과 <절망>도 키에르케고르의 불안과 관련 있어 보인다.

고갱도 페루인의 미라를 여러 차례 드로잉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이런 불안을 쉽게 발견한다.
그는 미라를 양손을 얼굴에 괴고 고뇌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형시켜 <브르통 이브>를 그렸다.
이 작품은 그가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포도원을 배경으로 상이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 <아를의 포도수확 (인간의 고뇌)>과 유사하다.
이 작품은 1888년 11월 4~11일에 유채로 그린 이것의 원래 제목은 <포도수확 혹은 가난한 여인들>이었는데 나중에 <아를의 포도수확 (인간의 고뇌)>로 바꿨다.
결이 고운 캔버스는 비쌌기 때문에 고갱은 아를에서 표면이 거칠게 짜여진 싸구려 마포 캔버스를 필로 사서 잘라 사용했다.
거친 표면을 물감으로 부드럽게 했지만 부분적으로는 거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나게 해서 그 효과를 구성의 요소로 삼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아를의 여인들이 아니라 브르통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삼각형의 붉은 빛이 감도는 보라색 포도밭에 두 여인이 허리를 굽히고 수확에 여념 없고 왼편에 서 있는 여인은 브르통 나막신을 신고 브르통 의상을 하고 있다.
양손으로 턱을 괸 여인의 모습은 그가 퐁타방에서 그린 그림에서 이미 사용한 것으로 샤를 라발에게 준 <과일이 있는 정물>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고갱은 자신이 본 아를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브르통에서 그린 그림들을 염두에 두고 상상의 합성 이미지를 고안해낸 것이다.
<설교 후의 영상>에서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한 데 비해 여기서는 색을 얼룩처럼 사용했는데 색에 대한 새로운 시도이다.
그는 붓질만 한 게 아니라 문지르고 긁어 거친 색조를 만들었으며 표면이 거친 캔버스를 팔레트 나이프로 색을 바르기도 했다.
슈페네케에게 말했듯이 그의 목적은 특정한 메시지를 서술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려진 소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형상, 색, 상징을 통해 암시의 새로운 양식을 창안해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
“불쌍하고 의기소침한” 여인이라고 표현한 붉은 오렌지색 머리를 한 여인이 오른팔을 무릎에 대고 왼팔은 무릎에서 떨어진 불안정한 자세로 앉아 미래의 일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게 하고 옆에 검정색 겉옷을 입은 여인을 서 있게 해서 애도를 상징했다.

고갱은 아를에서 그린 여인의 모습을 변형시켜 <인간의 고뇌>를 수채화로 그렸고 이를 다시 이브의 모습으로 변형시켰으며 다시금 <삶과 죽음>에서 삶을 상징하는 누드와 병렬해서 사용했다.

<브르통 이브>는 나무 뒤에 있는 뱀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는 이브의 몸 외곽을 검정색으로 칠했다. 이것은 <인간의 고뇌>와 함께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의 독자적 전시장에서 소개되었다.
전시장은 볼피니에 의해 아트 카페에 마련되었고 고갱 외에도 베르나르, 라발, 슈페네케, 그리고 그 밖의 예술가들도 출품했다.
전시회 카탈로그 앞면에 고갱의 <검은 바위에서>가 장식되었다.

<브르통 이브>의 모습은 고갱이 1889년에 참피나무에 부조와 채색으로 제작한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에서 더욱 극적으로 나타났다.
이 작품을 그는 1898년에 화선지를 이중으로 붙인 후 채색목판화로 떴는데 여기에서도 불안한 여인의 모습이 있다.
그는 화선지에 검정색과 황토색으로 프린트한 채색목판화를 1902년에 <모던 정신과 가톨릭주의>의 안쪽 표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고갱은 동일한 이미지를 1889년에 아연 판화와 목판화로 제작한 <인간의 고뇌>에서도 거듭 사용했다.

뭉크와 마찬가지로 고갱도 불안의 개념에 집착했는데 <브르통 이브>의 모습은 그해 그가 그린 <니르바나, 메이어 드 한의 초상>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이 작품에서 드 한의 모습을 수도승처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배경에 브르통 이브를 삽입했다.
이브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드 한의 모습은 단호하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년에 야심을 갖고 그린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에서도 이 이미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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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뒤샹을 가장 잘 이해한 아폴리네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뒤샹은 뉴욕으로 가서 남은 인생을 주로 미국에서 보내게 된다.

뒤샹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15년이었는데 1913년 아모리 쇼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본 미국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그의 향후 거취에 관심이 많았다.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자신의 예술품이라고 주장하는 뻔뻔스러운 그의 행위는 예술가가 예술품의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자임을 고지하는 것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물질에 대한 이러한 발견은 20세기 예술의 중요한 표현을 예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전통예술을 경멸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피카소가 버려진 나무 조각을 주워 색을 칠한 후 소리통을 부착하고 철사 줄로 기타 줄을 상징하여 조립하면서 〈기타〉(그림 51)란 제목을 붙인 적이 있지만, 뒤샹의 행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주 과격했으며 실제 물질의 극에 도달한 것이었다.
뒤샹은 “절대적으로 흥미를 유발시키지 않는 물질을 고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관심을 끌며 아름다움이 시적인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서도 특별히 추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고 자신의 미학에 관해 말한 적이 있다.
뒤샹을 가장 잘 이해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뒤샹은 예술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예술가다”라고 말했다.

세계대전 중이라서 인간의 이성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허무주의가 전 세계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뒤샹의 예술행위는 허무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다다로 분류할 만하다.
이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전쟁을 피하여 중립국에 모인 예술가들이 공식적으로 다다를 선언하기 일 년 전의 일이었다.
뒤샹은 뉴욕에서 우상파괴자의 새로운 품종으로 인식되었으며 입체주의의 모호한 내용과 장식적인 가치를 배척하면서 기계를 통한 인간의 승리를 은유함으로써 미래주의 예술가들과 레제 그리고 다른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 없는 자축과 대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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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
 

  레오나르도가 야코포 살타렐리와 남색을 벌인 것으로 기소되기 전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는 것은 <수태고지 Annuciation>이다.
이 작품은 1470~73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은 1867년 피렌체의 우피치 뮤지엄에 소장되기 전까지 몬테 올리베토수도원에 걸려 있었으며 기를란다요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베로키오의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러스킨만이 이 작품을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레오나르도가 펜과 잉크로 수태를 알리는 천사 가브리엘의 소매를 그린 드로잉은 1907년에야 출간되었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수태고지>가 레오나르도의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을 베로키오가 그린 작품에 삽입한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와 비교하면 레오나르도의 회화방법에 얼마만큼의 진전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음을 보는데, 동정녀의 기다란 손가락과 가슴의 장식적 요소가 그러하다.
서툰 솜씨도 보이며 특히 동정녀의 팔과 연사용 탁자가 원근법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작품이 전체적으로 호감을 느끼게 하고 조화로우며 깊이가 있고 밝으며 공간이 있다.
이런 요소들은 당시 새로운 점들로 레오나르도의 고유한 창조성을 충분히 알게 해준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관망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데, 화면 앞의 꽃밭 외에도 천사의 날개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실재 새의 날개를 부착한 점이다.
레오나르도 이전에 그려진 천사를 보면 날개를 지나치게 꾸미고 어색하게 부착시켰으며 그의 날개는 자연에서 관망한 것이다.
인체와 동물의 몸에 관해 충분한 지식이 있는 그는 날개가 어깨로부터 자란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착했다.
과거 화가들이 도상적으로 날개를 어깨 조금 아랫부분에 형식적으로 단 것과는 다르다.
그의 면밀한 사실주의와 공상적인 날개를 하고 있는 프라 안젤리코 리피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천사를 비교하면 레오나르도의 자연주의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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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고갱의 <누드 습작, 바느질하는 수잔>
 
고갱은 인상주의 그룹전을 관전한 후 회화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 파리의 서북쪽 퐁투아즈에 있는 피사로의 아틀리에로 가서 수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평소 존경한 좋아한 세잔을 만나 자신보다 9살 많은 그와 어울렸습니다.
고갱은 25살 때인 1875년 <퐁레나 다리와 퐁 드 그레넬레 다리 사이 파리의 센 강>을 그렸습니다.
문명이 자연에 어울리지 않다는 점을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며 어머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그려넣어 평화스러운 자연을 의도적으로 찬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법으로 말하면 인상주의 특유의 쓱쓱 문지르는 붓질을 사용했습니다.
인상주의 방법은 한 마디로 빛이 사물에 닿아 부서지거나 굴절하며 반사하는 것을 영롱한 무지개색으로 묘사하는 것인데 이는 화가 자신의 시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갱이 1876년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은 보수주의자들의 심사를 통과하고 입선되었습니다.
살롱전에 입선하자 고무되어 더욱 회화에 전념하면서 화가로 전업할 것을 고려했습니다.
피사로는 고갱에게 인상주의 화가들을 소개했고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고전주의 화법을 완전히 버리고 자신의 고유한 기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갱은 1879년 4월에 열린 제4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외에도 자신이 수집하고 있던 피사로의 작품 세 점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 전시회는 성공적이었으므로 아마추어 화가 고갱에게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해 여름 퐁투아즈에서 피사로와 함께 사과나무를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는 피사로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형적인 구성과 기법으로 그렸으며 야외에서 드로잉한 것을 작업실에서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과 그 외의 작품들을 1880년 제5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출품했지만 평론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룹의 리더 모네와 르누아르가 불참하고 고갱과 같이 덜 알려진 화가들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작품의 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져 평론가들이 전시회에 별로 비중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미유 피사로(1830~1903)
교사로 유명하며 세잔과 고갱을 지도한 카미유 피사로는 1830년 7월 10일 덴마크의 식민지 미국 플로리다 주 남쪽 세인트 토마스(버진 아일랜드의 수도)에서 유대교 신자 가정의 프랑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파리로 유학을 와 여러 학교에서 수학한 뒤 1847년에 세인트 토마스로 돌아갔다가 1855년에 다시 파리로 와서 영주했습니다.
그는 1859년에 모네를 만났으며 이후 두 사람은 인상주의 그룹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피사로만 여덟 차례에 걸친 인상주의 그룹전에 모두 참여했고 나이로 보나 정신적인 면에서 그룹 화가들에게 어버이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피신했는데 파리의 집에 있던 작품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영국으로 피신한 모네를 그곳에서 만났으며, 두 사람은 영국의 풍경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특히 터너와 컨스터블의 작품에 감동했습니다.

피사로는 1866~69년에 체류한 적이 있는 퐁투아즈에 1872년에 안주했고 근처 오베르에 살고 있던 세잔과 가까이 지내면서 수년 동안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1895년경 시력이 나빠져서 야외에서 그리는 것을 중단하고 실내에서 그렸으며 파리에서 그린 많은 작품이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이었습니다.
그가 타계할 무렵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습니다.

고갱은 집을 따로 세 얻어 아틀리에로 사용하면서 도자기를 제작하는 데 열의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공예가이면서 보석가인 장-폴 오베와 조각가 줄 어네스트 부일로에게서 조각을 배우면서 부일로의 아틀리에에서 처음 아내와 아들의 흉상을 석고와 대리석으로 제작했습니다.

고갱이 처음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작품은 <누드 습작, 바느질하는 수잔>(1880)으로 에드가 드가의 기교가 부분적으로 엿보여 그가 드가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는 빛의 강렬함을 영롱한 색조와 명암으로 묘사하며 빛에 의해 흩어지는 밝은 색들을 나타내기 위해 붓질을 짧게 했는데 바로 이런 점이 인상주의 화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흐름이 캔버스 전체로 확대되지 않은 걸로 봐서 이런 화법을 부분적으만 수용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제6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출품했는데, 에밀 졸라의 제자이면서 상징주의 작가인 유이스망의 호평을 받자 매우 기분이 들떴습니다.

누드화를 그린 동시대 화가들 중 현실의 음조를 이보다 더 격렬하게 다룬 화가가 없다고 난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옷을 모두 벗고 바느질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왜 누드로 그렸을까요?
이는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전투를 하거나 운동하는 남자를 누드로 제작했는데,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전통이 르네상스 시대에 받들어져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면 다윗이든 예수 그리스도이든 누드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자크 루이 다비드가 이런 고전주의를 계승했으며 이를 신고전주의라고 해서 르네상스와는 구별하는데,
그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그릴 때도 벗은 모습을 상상하고 스케치한 후 옷을 입히는 방법으로 그렸습니다.
인체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화가와 조각가들이 미술공부를 할 때 누드를 그리거나 제작하는 이유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인체를 통해 그 사람의 정신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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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에드가 드가와 폴 고갱


고갱은 인상주의 화가 중에 특히 드가와 교분이 두터웠습니다.
드가는 고갱보다 14살이 많았습니다.
동료 화가들이 “불평꾼 드가와 잔소리꾼 에드가”라고 할 정도로 독설가로 악명 높았던 그가 성미가 고약하고 불손해서 동료 화가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려한 고갱을 돌보며 평생 호의를 베푼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는 화가로서의 고갱의 재능을 인정했기 때문이며 그는 고갱의 재능을 알리고 후원하는 데 앞장을 서게 됩니다.
그는 1881년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주로 구입하고 전시회를 열던 화랑 주인 뒤랑-뤼엘에게 고갱의 작품을 구입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구입하여 고갱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었습니다.
뒤랑-뤼엘은 고갱의 작품 세 점을 1,500프랑에 샀는데 아마추어 화가의 그림을 한 점에 500프랑을 주고 산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크게 배려한 일이랍니다.
전업작가 모네와 르누아르 작품이 때로는 50프랑 미만에 팔리기도 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비싸게 팔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드가 드가(1834~1917)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가 드가의 성은 de Gas인데 두 단어를 붙여서 Degas로 사용했습니다.
1855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루이 라모스로부터 수학했는데 앵그르는 다비드의 제자로 프랑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대가입니다.
나이 많은 앵그르는 라모스의 아틀리에를 방문하다 젊은 드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젊은이, 선으로 그림을 그리게. 선을 회화의 생명으로 여기게”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드가는 앵그르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친구들에게 자랑했고, 선을 중심으로 그리면서 프랑스 전통을 이었습니다.

드가는 현대인의 삶을 소재로 삼았으며 특히 경마, 발레, 극장, 서커스, 리허설, 카페, 세탁소 장면 등을 주로 그렸습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도시가 비대해지고 경마장, 극장, 카페, 음악연주실, 세탁소 등이 신흥업소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명의 레크레이션을 즐기는 현대인의 삶을 묘사하는 것이 당시에는 현대화였습니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도 마네에게 현대인의 삶을 그리라고 충고했듯이 현대화는 현대인의 삶을 소재로 그린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보통이었습니다.

드가는 인상주의 그룹전에 일곱 차례나 참여하여 주요 멤버가 되었지만 마네와 마찬가지로 인상주의 화가로 불렸더라도 그들과는 상이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인상주의라는 개념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 고갱과 반 고흐도 자신을 지칭할 때 “우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 인상주의가 아니랍니다.
드가가 풍경화를 별로 그리지 않은 것만 봐도 그는 인상주의 화가가 아닙니다.
빛과 대기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연을 직접 그리지 않았습니다.
아카데미 배경을 가진 드가는 숙련된 기교를 사용하면서 돌발적이고 무의식적인 행위, 예정되지 않은 장면 등에 관심을 갖고 잘못 찍은 사진처럼 가장자리에서 인물이 잘리는 등 친숙하지 않은 장면을 재현했습니다.
이런 방법은 사진과 일본 판화에서 받은 영향입니다.

1880년부터 모델을 왁스로 제작하면서 조각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생전에 조각을 한 점 소개했을 뿐이며 그것이 <열네 살의 발레리나>입니다.
그는 조각에 실재 발레리나의 의상 튀튀tutu를 입힌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그가 사망한 후에야 청동으로 완성되었습니다.
1890년대에 시력을 상실할 것을 우려하여 더욱 작업에 박차를 가했는데 말의 다양한 동작, 목욕하는 여인의 다양한 행동, 누드 댄서 등을 재구성했으며 이것들 역시 그가 사망한 후 청동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말년의 20년은 거의 실명한 상태가 되어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쓸쓸하게 지냈습니다.
르누아르는 조각에서의 드가의 위상을 오귀스트 로댕보다 더 높게 평가했으며 피사로는 드가를 당대의 최고 예술가로 꼽았습니다.

고갱은 드가의 과격한 화면 구성에 늘 감탄했습니다.
그가 1881년에 그린 <화가의 집 내부, 카르셀 가>를 보면 모델이 뒤에 있고 테이블과 꽃병이 화면 앞에서 관람자의 시야를 가리는데 드가의 구성을 상기시킵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메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관람자로 하여금 그녀의 얼굴을 절반만 볼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은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채 아내의 연주를 감상하는 포즈를 취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회화적 의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메테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어 팔지 않고 1917년까지 자신의 소장품으로 아꼈습니다.

고갱은 1882년 제7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화가의 집 내부, 카르셀 가>를 포함한, 유채와 파스텔로 그린 작품 12점과 조각 한 점을 소개했습니다.
출품작이 늘어난 데서 미술에 대한 그의 자세가 더욱 진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듬해 초 그는 피사로와 오스니로 가서 휴가를 보내며 함께 작업했습니다.
종이 한 장에 피사로가 고갱의 초상을 그리고 고갱이 파스텔로 피사로의 초상을 그린 드로잉은 이때 그려진 것입니다.

1882년 11월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프랑스 경기가 침체의 늪에 빠졌습니다.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했고 고갱과 슈페네커도 1883년 직장을 잃었습니다.
고갱이 피사로와 친구 화가들에게 전업작가로 나서겠다고 선언하자 회화에 대한 고갱의 열정을 잘 아는 그들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작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간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염려했습니다.
피사로는 친구들에게 고갱이 “분발한다면 화가로서 안정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잘 해나갈 것으로 믿는다”고 했지만
정작 아들 루시앙에게는 전업작가가 되겠다는 고갱을 가리켜 “예상 외로 고지식하구나”라고 본심을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고갱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행로로 진입하는 것으로 화가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는 이번 기회에 전업작가로 나서지 않는다면 평생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자신감과 행운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낙천적인 성격이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용이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주식거래인이 아닌 화가라고 적기 시작한 건 1883년부터였습니다.

막내 폴-롤라를 막 출산한 메테는 남편이 전업작가로 나서겠다고 하자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메테는 남편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자 살아갈 길이 막막했습니다.
벌어놓은 돈은 이내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고갱은 루앙에서 주식거래를 시도해보았지만 경기가 매우 침체된 상태라서 주식 파는 일이 작품을 파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알았습니다.
고갱은 1884년 1월 임신중인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생활비가 적게 드는 루앙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메테는 루앙으로 이사한 여섯 달만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코펜하겐 친정으로 가버렸고 고갱은 다음달 아이들을 데리고 처가로 갔습니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프랑스 회사로부터 방수외투를 수입해서 팔아보았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코펜하겐에 체류하면서 다락방에서 자화상 <이젤 앞의 고갱>을 그렸는데 자신감과 고뇌가 엇갈려 스스로를 달래기 어려운 표정입니다.
우울한 표정의 자화상입니다.
화가가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을 보고 그리게 되는데 그는 거울 속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몹시 착잡했을 것입니다.
이젤 앞에 앉아 붓을 든 모습으로, 자신이 전업작가라는 점을 내세우려고 하지만 자신감이 없고 매우 위축되었으며 얼굴에 닿은 빛으로 생긴 명암이 그를 고뇌하는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비스듬히 내려온 대들보와 의자가 맞닿아 다락방이 협소함을 알 수 있으며 이국의 아파트 다락방에서 그린 것이라서 그런지 편안해보이지 않습니다.

<만돌린이 있는 정물>에서는 자신이 소장한 아르망 기요맹의 풍경화를 배경으로 사용했는데 1881년 여름 그는 기요맹과 함께 작업한 적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풍경화가이자 판화가인 기요맹은 매우 가난했고, 토목건설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1892년 복권에 당첨되어 10만 프랑을 탄 후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회화에 전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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