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뒤샹을 가장 잘 이해한 아폴리네르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뒤샹은 뉴욕으로 가서 남은 인생을 주로 미국에서 보내게 된다.
뒤샹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15년이었는데 1913년 아모리 쇼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본 미국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그의 향후 거취에 관심이 많았다.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자신의 예술품이라고 주장하는 뻔뻔스러운 그의 행위는 예술가가 예술품의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자임을 고지하는 것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물질에 대한 이러한 발견은 20세기 예술의 중요한 표현을 예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전통예술을 경멸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피카소가 버려진 나무 조각을 주워 색을 칠한 후 소리통을 부착하고 철사 줄로 기타 줄을 상징하여 조립하면서 〈기타〉(그림 51)란 제목을 붙인 적이 있지만, 뒤샹의 행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주 과격했으며 실제 물질의 극에 도달한 것이었다.
뒤샹은 “절대적으로 흥미를 유발시키지 않는 물질을 고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관심을 끌며 아름다움이 시적인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서도 특별히 추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고 자신의 미학에 관해 말한 적이 있다.
뒤샹을 가장 잘 이해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뒤샹은 예술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예술가다”라고 말했다.
세계대전 중이라서 인간의 이성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허무주의가 전 세계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뒤샹의 예술행위는 허무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다다로 분류할 만하다.
이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전쟁을 피하여 중립국에 모인 예술가들이 공식적으로 다다를 선언하기 일 년 전의 일이었다.
뒤샹은 뉴욕에서 우상파괴자의 새로운 품종으로 인식되었으며 입체주의의 모호한 내용과 장식적인 가치를 배척하면서 기계를 통한 인간의 승리를 은유함으로써 미래주의 예술가들과 레제 그리고 다른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 없는 자축과 대조되었다.